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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사무엘서 강해)

엘리와 한나 (사무엘상 1장 9-18절)

by 소리벼리 2021. 5. 27.

엘리와 한나 (사무엘상 1장 9-18절) 

 

사무엘상이 시작되는 배경은 사사시대 입니다. 사사시대는 가나안 이라는 축복된 땅에 들어갔지만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엘가나라는 레위인의 한 가정을 통해서 당시의 영적 사회상을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엘가나는 레위인이었지만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서 예배를 집례하지 못하고 저 먼 에브라임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씩 꼬박 꼬박 실로에 와서 영적인 회복을 얻고자 했지만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악하고 패역한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에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하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지만 두 아내의 갈등은 그 가정의 가장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한쪽의 편을 들어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가 한 쪽 편을 들어줄 때마다 문제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브닌나는 엘가나의 둘째 처였고 그녀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자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첫째 부인에게만 가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가진 것으로 인해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언제나 불만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녀가 취한 것은 상대방을 격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처신은 가족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나는 은총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에서 멀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의 근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되었음을 말합니다. 자신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브닌나와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 할 수 있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브닌나가 자신을 격노하게 해도 한나는 브닌나와 상대하지 않습니다 .엘가나에게 브닌나의 행적을 이르지도 않습니다. 문제의 근본과 그 문제의 해결자인 하나님께 아룁니다. 

한나의 상처의 깊이 - 격분, 격노하였다. 1장에만 6, 7, 16절 세번이나 걸쳐서 그녀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사람이 감정이 격분하면 아무리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도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가 힘듭니다. 기도가 나오질 않고 성질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나는 몹시 격분한 바로 그 순간에 브닌나를 상대하거나 엘가나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 기도가 새 역사를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각자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 여인을 통해서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녀를 통해 사사시대의 막을 내리고 왕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통해서 시대를 여십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은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엘리 제사장과 한나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실로의 성전의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엘리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 안이 아니라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입구의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제사장이 성전 입구에 앉아 무엇을 합니까? 예배자가 아니라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온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언약궤가 있는 실로와 와서 제사를 드리니까 누가 오는지 어떤 예물을 가지고 오는지, 아얘 성전 입구에 자기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낙이요 임무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 안에서 어떤 죄악을 저지르건,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건 말건, 엘리의 관심은 성전을 들락달락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목회자가 참된 예배자가 되지 못하고 예배의 관리자나 교회의 관리자로 전락하게 되면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무너진 것입니다. 

오늘 부를 찬양을 검색하다가 요즘 가장 뜨거운 찬양 사역을 하고 있는 마커스찬양집회 예배를 인도하는 김남국 목사님이 언젠가 찬양집회를 잠정적으로 중단한다는 동영상이 올라와 있기에 보니 

"마커스 팀이 유명해지다 보니까 어느덧 예배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예배 인도자"의 모습만 남았다고 하면서 찬양팀이 예배자의 모습을 회복할 때까지 찬양사역을 중단한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공감을 했습니다. 

 

성전 문설주에 자기 의자를 두고 교회의 관리자로 살아가는 엘리의 최후는 사무엘상 4장 18절에 나옵니다. 

(삼상 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 그에 반해 한나는 오직 하나님의 앞에서 기도합니다. 

"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 (12절) 

그가 성전에 들어와 나가지 않고 한참을 있으니까 엘리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 갔을 터인데 도대체 나가질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한참을 지나고 나가지 않고 앉아 있으니까 가까이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나 궁금했는지 엘리가 그녀의 입을 주목했다고 말합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 Hannah was praying in her heart" ) 

소리가 크다고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한나는 중심으로 기도했고, 마음으로 기도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리고 오래 기도했습니다. 

 

물론 기도는 일상적으로 해야 합니다. 몸에 배여 있어야 합니다. 

기도안하는 사람이 급한 일 당한다고 갑자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날마다 숨쉬듯 일상적으로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땐 우리가 우리를 온전히 내려놓고 목숨을 내어 놓듯이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기도하듯, 여호수아가 장로들이 다 돌아간 뒤에서 성막을 뜨지 않고 기도하듯, 엘리야가 하늘을 쳐다보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서 비가 오기를 기도하듯 우리의 전부를 바쳐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한나는 그냥 기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하였다"(15절)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니까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될때까지 부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기도의 성도가 있는 교회는 건강합니다. 

이런 기도의 성도가 있는 목사는 행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가 말합니다. 

엘리는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무지한 제사장입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조차 술취한 것으로 오해하는 어리석은 제사장 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성전의 관리자같은 제사장입니다. 

그 어리석은 제사장 엘리가 하나님께서 네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길 내가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소릴 들으면 얼마나 신뢰하고 감사하겠습니까? 

아니 너나 잘하세요.....그렇면서 무시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하고 은사가 막 나타나니까 지도자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바울도 무시하고, 아볼로는 쫓아 냅니다.

기도좀 한다고 모든 질서를 다 무너뜨립니다. 잘못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한나는 어리석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질서를 지킵니다. 

제사장의 소리를 사람의 소리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한나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신앙인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의 신앙이 무엇이 다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붓듯이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영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좀 한답시고 남을 판단하고 목회자를 무시해선 교만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로 질서를 흩뜨리지 않으십니다. 

 

(삼상 1: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와도 기도하지 않고 그저 낙망가운데 빠져 살다가 왜 하나님이 날 돕지 않느냐며 불평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자입니다. 
  • 어떤 사람은 일단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확신도 없고 그저 기도해서 들어주시면 감사한 것이고 안 들어 주시면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뭐 이런거 까지 들어주시겠어 하며 자포자기 합니다. 그 신자의 삶엔 어떤 능력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나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단지 형식적인 신앙만 있지 그 안에 어떤 기쁨도 믿음의 확신도 없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만 하면 뭔가 희망이 생긴 것 같고 문제가 해결된 것 같고 기쁜데 다시 기도 끝나고 현실로 오면 다시 낙망하고 넘어지고 슬퍼합니다. 기도 가운데 얻은 확신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고 현실과 기도 세계가 이어지질 못합니다. 이런 신자는 교회에서는 은혜 받는 것 같은데 집에 가면 혼자 또 힘들어 하고 이분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이 부족한 자입니다. 
  •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민감합니다. 마음에 근심이 생기면 낙담하여 넘어지기 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낙담하여 넘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하나님 앞에 와서 자복하고 통곡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평강이 올 때 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받으실 때까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이 찾아오면 그 평강을 붙잡고 현실에 응답이 임할 때 까지 넘어지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묵묵히 기다립니다. 이게 믿음의 사람이고 기도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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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0dFII98Dj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