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장 1-11절 (절대적감사!)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 혹은 한나의 찬양은 출애굽 때의 미리암의 찬양,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와 비견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 여인의 대표적인 찬양의 기도입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음으로 행복을 잃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 남편의 사랑도 기쁨으로 얻지 못하였고 브닌나의 조롱은 그녀의 감정을 휘몰아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위대한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는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녀가 없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없는 시대, 말씀이 없는 시대에 제사장을 감동시킬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도록 기도했습니다.
한나의 불행은 한나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브닌나도 문제가 있었고 엘가나도 문제가 있었지만 문제 가운데 하나님을 붙잡은 사람은 오직 한나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문제는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고 헤어나올 수 없는 불편함을 주지만 신앙의 사람은 불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인 유익을 취합니다.
문제는 고난이 있고 문제가 있는대도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실 수도 있지만 바울도 이 응답이 있기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가운데 갇혀 괴로워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통해 한나의 소원을 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한나를 통해 왕이 없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에 왕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통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타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죽은 삶입니다.
자, 드디어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사무엘이라고 짓습니다.
아들이 없어 고통받고 조롱받았던 그녀에게 그 아들은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저희 장모님이 딸을 넷 낳고 마지막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을 못나서 그렇게 구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사내아이가 기을 걸으면 그 아이를 한참을 바라보면서 데리고 가고 싶었다고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마침내 아들을 낳았을 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것 같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도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들을 낳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 한나에게도 그 아들 사무엘은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을까요?
그런데 한나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만 그를 양육한 후에 그를 데리고 성전에 가서 그를 엘리 제사장에게 맡깁니다.
물론 한나는 자녀를 위해 기도 할 때에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것은 나실인의 규례로서 삼손처럼 머리를 자르지 않고 세상사람들과 구별되이 양육한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삼손도 그의 부모를 통해 양육받았듯이 한나도 얼마든지 자신이 키우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남편 엘가나도 에브라임에 살지만 레위인으로서 그 지역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집안이 아닙니까?
그런대도 불구하고 한나는 젖을 갓 땐 어린아이를 매몰차리만큼 냉정하게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깁니다.
어떻게 보면 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차갑게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 21세기 들어 심리학이라든지 정신분석학이 발달되면서 사람의 내면에 대한 연구가 깊이 진행되면서 사람의 욕망(DESIRE), 혹은 행복감, 성취감을 연구하면서 등장하는 이론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내 안의 독립적인 공간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타인이 가진 어떤 것을 소망한다는 이른바 "mimetic desire" 라는 이론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혼자 놀때는 그냥 아무 일 없다가 다른 아이가 나타나 무엇을 가지고 놀면 이전에는 거들떠도 안보는 것을 자기도 가지고 싶어하고 급기야 그것을 빼앗으려 싸운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원래 소망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진 어떤 것을 나도 가질 때에, 혹은 남이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내가 가졌을 때에 만족감을 느끼고 반대로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지 못했을 때에 불행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 대상이 더 굳어지게 되면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냐 안가지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뉘게 된 다는 것이지요.
ex) 나이키 운동화, North face 잠바.... 그것 자체가 행복을 주는 직접적인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냐 안가지냐에 따라서 사회적인 행복감을 얻게 되는 것들.... 유행...
그런데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행복하고 불행하게 느끼는 거의 대부분이 그 대상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남이, 혹은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행복하고 불행하고...
아무 일 없다가도 남이 행복해하는 것을 바라보며 상대적으로 불행함을 느끼고 남이 불행한 것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느끼고....
아이를 안 낳은 다고 처음부터 불행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는 일부러 아이를 안낳는 가정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애 안낳는 것을 가장 저주받은 것이요, 애 낳는 것을 가장 축복받은 것으로 여기는 문화였습니다.
처음 한나는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자기의 불행을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애가 없으니 남편의 사랑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고, 애가 없는 것 때문에 브닌나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애가 없다는 것이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특정한 그 아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떤 아이든 자기의 뱃속에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줄 아이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자신을 떳떳하게 만들어줄 the boy가 아닌 a boy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남편에게는 떳떳한 아내가 되었고 브닌나를 납짝하게 만들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3절)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을 둔 자는 쇠약하도다" (5절)
한나의 기쁨은 물론 브닌나의 조롱을 납짝하게 만든 통쾌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그 행복은 얼마나 지속되겠습니까? 아마 며칠 후면 도로 시들해 지고 또 다른 것을 욕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아마 그러한 욕망은 브닌나보다 더 많은 자녀를 낳은 다음에야 조금 해결될 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받는 아내였지만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아이에 집착합니다.
첫째 아이 르우벤을 낳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창 29:32)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르우벤을 낳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므온을 낳고 레위를 낳았을 때도 "내 남편이 이제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창 29:34) 라고 말합니다. 아니 연합하지 않고 어찌 애를 낳습니까?
연합했는데도 공허한 것입니다. 따스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이를 계속 낳아도 허전한 그녀의 마음은 차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넷째 유다를 낳고서 그녀의 고백이 달라집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창 29:35) 하고 그녀의 출산이 멈추었다고 증거합니다.
무슨의미입니까?
이제 아이를 통해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유다를 통해 다윗이 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부를 다 누리면서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추구하며 인생을 탐닉합니다.
지식, 쾌락, 문화, 재물,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을 다 취하면서 만족을 하려 하지만 그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였습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네 인생의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이 중에 많은 분들이 이것만 얻으면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할 줄 알고 오랫동안 매달리며 기도했는데 막상 해결되고 성취되니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해진 것 같은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은 잡힐 듯이 잡혀지지 않는 무지개를 잡는 것 같은 끝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것만 가지면 행복할 것 같은데 잡아도 잡아도 내 영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인생을 다 허비한 후에야 깨달았고, 레아는 세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야 깨달았지만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그에게 젖을 주며 양육하면서 참 행복의 근원이 어디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로다."
사무엘이 한나를 즐거워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참 즐거움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나이다"
그가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삶의 기쁨이 사무엘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부하면 행복하고 가난하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부해도 행복하지 못하고 가난해도 꼭 불행한 것 만이 아님을 인생은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난해도 부해도 주 안에서 언제나 기뻐합니다.
세상의 행복은 상대적이고 잡히지 않고 순간 뿐이지만
주 안에서 얻는 즐거움은 절대적이고 항상 있으며 영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합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행복을 찾아 방황하십니까?
이것만 있으면, 아니면 이것만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 여기십니까?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뱀의 유혹에 빠졌더니 부족함이 없는 중에도 선악과를 먹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저것만 먹으면 더 행복할 텐데 말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부유한 중에도 궁핍하게 합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다윗을 시기하여 저놈만 없으면 내가 행복할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왕의 권세도 잃어버리고 오직 다윗 만을 시기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남의 것을 탐하고 시기하는 자는 항상 배고픈 자가 됩니다. 왕의 보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것만 가지면, 이것만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 말하지만 그것을 가지거나. 그것을 없애도 행복은 또 저만치 도망가 버립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반석으로 삼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주의 백성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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