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5장 (빛의 사람들, 어둠의 사람들...)
삼상 5:1-12
지난 시간에 우리는 블레셋에게 대패하여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빼앗기며 죽임을 당하였고 전쟁터에 두 아들이 죽고 법궤는 빼았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 마저도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게되는 불의한 제사장 가문의 최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법궤마저도 빼앗아 왔습니다.
고대의 문헌들을 보면 당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단순히 군사들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그들이 믿는 신들의 전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긴 나라는 그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을 이긴 것이라 여기고 상대국의 신상을 부스거나 빼앗으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블레셋도 그러한 전례대로 이스라엘을 꺽고 그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법궤를 빼앗아 탈취함으로써 그들이 신이 이스라엘의 신을 꺾었음을 나타내려 하는 것입니다. 패배한 나라의 신을 전리품으로 빼앗아 이긴 나라의 신을 섬기게 하여 영적으로 사람들의 신앙을 장악하고 신들의 힘을 흡수하여 더 강한 나라가 되고자 하고 신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신은 다곤이라 불렸는데 그 신은 바알의 아버지라 불렸고, 그 모양은 얼굴은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몸은 사람의 몸의 형태를 한 신상이라고 합니다.
사사기 16장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은 후에 다곤 신에게 큰 제사를 드리며 즐거워 하는 장면이 나오고, 나중에 전사한 사울왕의 머리를 다곤의 묘에 매달았다는 기록이 역대상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블레셋은 법궤를 다곤의 곁에 두어 다곤의 승리를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승리했다고 믿은 다곤의 신상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다시 세워 놓았는데 다음날 얼굴이 엎드러져 땅에 닿았을 뿐만 아니라 머리와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 신상은 몸뚱이만 남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곤 신상이 있던 아스돗에는 큰 독종이 임해 사람들이 법궤를 그 지역에 두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옮긴 가드에도 똑같이 독종이 일어나 고통을 당하게 되자 이번에는 에그론으로 옮기는데 그 소문을 들은 에그론 사람들이 하나로 모여 우리를 죽이려 하느냐 하면서 데모를 하니까 블레셋이 모든 방백을 모아 회의를 열어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기로 하는 장면이 바로 5장의 내용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은 이겼지만 하나님의 궤는 감당하지 못하는 블레셋의 모습.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권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탄에게 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우상에게 그분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죄악의 포로가 되는 것은 순종치 않는 무력한 그리스도인이지 하나님이 무력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에 사탄에게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이나 이스라엘 사람들- 전쟁에 이기려면 신들을 내편으로 만들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패하자 법궤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으려 한 것이고 블레셋은 법궤를 빼앗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마져도 그들이 소유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참신앙은 신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법궤에 써 있는 말씀에는 전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법궤를 가지고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할 때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신앙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내가 범죄하고,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날 도우시리라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은 되돌아보지는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질 수 있지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법궤를 빼앗아 온 블레셋은 기고만장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포로로 잡아온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신, 다곤이 모든 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망은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에 사탄은 기뻐하고 어둠의 세력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십자가 상에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 분의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본 마귀는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권세를 비웃듯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힘입니다.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망을 그들의 본거지에서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3절)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이것이 우상의 본질이다. 사람들이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인간이 세우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리가 잘렸다는 것은 스스로 사고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손목이 잘렸다는 것은 능력을 잃어버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다곤은 신이 아닙니다. 신으로서의 위상을 다 상실했습니다.
6절)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그러나 법궤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손을 떠난 법궤는 법궤 혼자서 다곤을 무너뜨리고 가는 곳마다 블레셋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너희는 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세 번이나 걸쳐서 법궤를 옮깁니다.
그리고 급기야 그것을 이스라엘에 돌려주려 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법궤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그럼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엘리와 두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와 함께 머물렀을 때에 법궤는 긴 시간 침묵했습니다.
원래 지성소 안에서 부정하게 제사를 드리면 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온갖 추악한 죄를 저지르는데도 법궤는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가 블레셋에 옮겨가자 법궤는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양 다곤을 무너뜨리고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로서 이스라엘 군대가 할 수 없었던 항복을 받아냅니다.
왜 법궤는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에서 침묵했을까?
그들의 죄가 성소 안에서도 범해지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직접 홉니와 비느하스를 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자 홉니와 비느하스는 더욱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없는 듯이 죄를 더하고 엘리는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에도 돌이키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침묵하시고 오히려 블레셋에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셨을까?
좀 다른 말씀으로 이 질문에 답을 해 볼까 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 목사님이 제가 강의하는 학교에서 설교하시면서 나눈 말씀을 좀 소개할까 합니다.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4-15절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동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말씀하셨습니다.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장차 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이미,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둔다는 것은 그릇 밑에 두어서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둔 다는 것입니다.
말 아래 두면, 그릇 밑에 두면 빛이 아무리 밝아도 밖을 비출 수 없습니다.
그 목사님의 동생이 사진학과를 나왔다고 합니다.
졸업 작품으로 무당이 굿 하는 것을 촬영해서 제출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굿을 촬영하는 것이 영 찜찜했지만 졸업과제라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함께 유명한 무당의 굿 하는 장소를 찾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당이 막 흔들면서 날 뛰다가 계속 사람들을 둘러보기도 하고 흔들다가 또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장이 있어? 왜 오늘 이렇게 신이 안내려?"
여러분도 이런 얘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이런 일을 당하니까 소름이 끼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 신실한 크리스천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굿 하는데 끼어 있으면 굿 자체가 안되는 것입니다.
무당이 먼저 알아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함께 부딛쳐가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서로 서로 누구 신앙이 어땠느니 누구는 아직 멀었느니 하며 좀처럼 서로의 신앙에 만족하지 못하고 판단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오랫 동안 선교를 하신 선교사님은 여러분들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그정도의 크리스천을 만들기 위해서 난 평생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 별 영향력 없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중국에서, 아프리카에서, 혹은 동남아에서 정말 예수를 모르고,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면 얼마나 귀하게 쓰이고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안식년을 얻어 여기 산호세에 있는 쥬빌레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가대도 아니고 가스펠송을 부르는 찬양팀이 한 50명이 나와서 몸을 흔들면서 찬양을 하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찬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엔 그 찬양이 신기하기도 하고 흥겹고 은혜롭기도 하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이 저 중에 열 명만, 아니 다섯명, 아니 단 한 명만이라도 선교지 작은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해 준다면 그 선교지에도 찬양이 풍성해질 텐데...하는 안타까움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50명이 40명 된다고 아니 20명만 되어도 그 찬양은 여전히 뜨거울 텐데 그 50명이 나누어서 각각 흩어져서 사역을 감당하면 곳곳이 밝혀질텐데 왜 이렇게 모여서 낭비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빛을 등경 아래 두어서 넓은 장소를 비출 수 없는 것 처럼 빛은 산위에, 넓은 곳에 놓아 세상을 비추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빛된 존재인줄 모르고 삽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부딛끼며 서로 누가 높니 누가 잘났니 하는 제자들과 똑같이 아웅다웅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빛입니다. 단지 내가 얼마나 빛된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 그 틈에 있어서 언제나 구박받지만 크면서 보니까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고니였음을 깨닫게 되는 안데르센의 자전적 동화
(자신이 학교에서나 커서도 언제나 왕따에다가 적응 못하는 구박덩어리로 자라다가 결국 글을 쓰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나가는 이야기....)
초대교회- 성령으로 모여 부흥되는 교회- 5만-10만명까지 추산...
그런데 모이기는 하는데 흩어지질 않는다. 그러니까 핍박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흩으셔서(디아스포라...) 결국은 세계로 비추이게 하시지 않습니까?
얼마전 프란시스 교황의 말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위선적 신자보다 무신론자가 낫다"
무슨 말인지는 알지요. 그가 꼬집은 위선적 신자...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직원들 월급 잘 주지 않는 업주.
돈세탁 하며 부정하게 축제하는 신자...
그런 신자들은 차라리 안믿는 사람보다 못하다...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토록 침묵하셨는가?
빛이 되어야 할 자들이 어둠의 자녀인양 행세하기 때문에 침묵...
무반응....
그런데 그 무반응은 벌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이미 빛으로 부름받은 자들이기에....
지금까지 빛처럼 살아왔던, 그렇게 훈련받은 자들이기에 부름받은 대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손 신상 앞에서 바로 바로 그 신상을 엎드리게 만들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을 내립니다.
그들은 이미 어둠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빛이 자녀들이 빛의 역할을 계속 외면하고 어둠의 자녀들처럼 살면 그 기다림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탕자처럼 다 잃어버려도 돌아오면, 반기십니다. 맞아주십니다.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이토록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빛이라 하십니다. 이미 빛이 되었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꾸만 빛을 잃어버립니다.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말아래 감추인 빛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꾸만 외면하고 어둠처럼 살면 홉니와 비느하스 처럼 됩니다.
그런데 부르심에 응답하여 빛을 비추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패배하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설 때에 우리 또한 세상에 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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