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빠졌는가? (삼상 4장 1-11절)
사무엘상의 첫 부분은 엘리 제사장과 그 자녀에게서 사무엘에게로 하나님의 사명이 옮겨가는 과정을 생생히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는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을 40년간이나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제사장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아론의 계열 이다말의 후손으로 40년동안이나 실로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맡았던 자였습니다.
목회자도 40년을 목회하면 원로목사로서 교회에서나 교단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해주고 영예로운 이름을 선사해 줍니다.
하물며 사사시대 그 영적으로 어둔 시대에 이스라엘을 40년간이나 이끌었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고 평가해 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의 최후는 비정하다못해 참혹하기까지 합니다.
40년간이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만 가나안 입구에서 그 땅을 바라보며 죽어야 했던 모세만큼이나 엘리의 최후는 통한의 최후요,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먼저는 사람들의 소문을 통해, 다음은 직접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그리고 엘리의 면전에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통해 그에게 거듭 기회를 주시고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는 자녀들의 범죄를 삼가지 않았습니다.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자녀를 보면서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자녀에게 분노하신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위기의식 없이 태평했습니다.
급기야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와 그 가족을, 그의 모든 후손까지도 벌하신다는 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의 선하신대로 할지라" 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하나요? 마치 딴 사람 이야기 하듯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네 아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긴다"고 말씀하시고,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시하리라" 하면서 결국 " 나를 위하는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 내 뜻을 행하는 자를 일으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엘리한테 적용하면 엘리는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40년을 하나님을 위한 제사장으로 살아왔는데 그가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고 충실하지도 못하다는 하나님의 지적은 가슴아픈 일이고 우리가 새겨야 할 소리입니다.
4장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면서 법궤를 빼았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며 한탄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엘리의 가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영적 상태의 심각함을 살펴 볼 수 있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삼상 4:2)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쳤더니
블레셋은 잘 알다시피 사사시대동안 그리고 앞으로 다윗의 시대에까지 끊임없이 이스라엘를 괴롭혔던 나라입니다.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의 장수였고 지금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지역에서 끊임없이 전쟁하는 바로 그 팔레스틴이라는 이름이 블레셋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출13:17)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에 블레셋은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3: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블레셋 길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길을 통해 길고 긴 여정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블레셋길로 가는 것을 막으셨을까?
17절 후반부는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5-16)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광야길의 의미는 "낮아지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얻는 땅"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광야의 길은 신약의 용어로 표현하면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고난과 낮아짐을 통해 몸으로 걸어가는 경험의 길이요, 블레셋길은 지름길이요, 십자가 없는 편한 길이요, 머리로 이해되는 짜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탄이 시험을 통해 고난 없는 영광의 길로 유혹하지 않습니까?
그런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느냐, 넓고 편한 실크로드를 가느냐?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길고 끊질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움 아벡은 이스라엘 침입의 교두보...
지금 이스라엘은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보며 블레셋에 맞서고 있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려고 맞서고 있습니다.
첫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여 4천명이 전사합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3절)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게 하셨는고?
- 그전까지 블레셋이 쳐들어오면 두려워하며 떨었는데 지금은 왜 우리가 질 수가 있냐? 왜 하나님의 백성이 지느냐?하는 탄식, 원망
-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지 않다가 실패하면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
-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당연하게 생각. 교만함이 묻어나는 표현
그것에 대한 대책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 실패했으면 당연히 해야 할 것-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뜻을 물어야 함. 회개 할 것 있으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함.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모든 방법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 그런데 하나님께 묻기 보다는 자기들의 취한 방법- 외적으로는 신앙적인 것 같다. 믿음의 표현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빠져 있다. 일대 일의 관계, 하나님과의 대화가 빠져있다. 죽은 신앙이다. 나만 열심히 하면 당연히 도와주시겠지..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자신이 원인을 파악하고 자신이 처방하는 것.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잃어버린 사람들... 마치 공식처럼 십자가를 목에 걸면 복이 오겠지, 성경책 품에 넣고 다니면 성경책이 나를 지켜주겠지... 부적처럼 신앙생활을 행하는 사람들....
- 무엇이 빠졌는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이 관계가 없다. 사랑은 없고 형식만 남았다.
이것이 엘리의 신앙, 홉니와 비느하스의 신앙.
날마다 예배는 드리는데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면서, 돌이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그 뜻을 살피지도 않고...그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자기 유익만 남은 자들....
성전 입구에 앉아서 헌금만을 챙기는 엘리
성전 안에 들어가 사람들의 제물만 탐하는 홉니와 비느하스....
예배자의 어떤 모습도 없다.
그들에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단지 부적이다.
끼고 있으면 승리를 가져다 주는 상징물에 불과하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반응을 보면 기가 막히다.
5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7절)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외적인 언약궤를 바라보며 이스라엘은 흥분하고 블레셋은 낙심한다.
외적인 신앙이 우리의 감정을 고취시키고 마귀를 두렵게 할 순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외적인 경건에 진실함이 없고, 하나님과 쌓여진 깊은 사랑의 관계가 얽혀있지 않다면 우리의 어떤 경건에도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능력은 법궤 안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호흡이지 돌덩이가 능력이 아니다.
엘리의 실패는 무엇인가?
그는 40년간 예배를 이끌었던 자였다.
그런데 그는 예배의 몸짓은 있었지만 정작 그 예배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누구에게 찬양하는 것인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그저 예배를 통해 얻어지는 양식을 통해 점점 살이 쪄서 몸은 비대해지고 영은 혼미해졌다.
어떤 영적인 능력도, 권능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깎인 삼손마냥 그는 영적인 눈을 잃어버린 패잔병이었다.
18절)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다.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년이었더라.
성경에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생생하게 묘사한 장면이 또 있을까?
가룟유다...창자가 배 밖으로 튀어나와 죽은 자...
왜 거룩한 성경에 이들의 죽음을 이토록 비참하게 묘사하는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이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당하는 경고...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구절.
사람은 전성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이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이 이와 같지 않은가?
블레셋은 지금도 우리를 위협한다.
십자가의 길 갈 필요 없이 신앙의 지름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넓은 길, 편한 길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겉만 신앙인 흉내내면서 속으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런 나날들이 많을 수록 우리의 영은 비대해 지고 우리의 영은 늙어가는 것이다.
빌 3:18-19)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제가 아내와 연애할 때에 써 주었던 편지
(부자로 살진 못해도 바른 길을 가는 친구가 되겠다...)
제가 목사로 살아가면서 성도들에게도 그런 목사의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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