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에셀의 회복 (사무엘상 7장 1-12절)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결국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말씀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곧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패,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 법궤를 빼았기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가 죽은 이야기, 그 충격으로 갑자기 애를 낳다가 죽은 엘리의 며느리, 그가 외친 말 ‘이가봇’, 말 그대로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난 상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자 그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입니까? 곧 허랑방탕하고, 재산을 탕진하다가 결국 돼지 쥐엄열매를 먹고, 그 조차 먹지 못해 구걸하는 신세...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자 물고기 뱃속에 갇혀 살려달라고 외치는 상태...
가끔씩 신앙을 불평하면서 내가 교회를 안다녔으면 그 시간에 공부해가지고, 더 좋은 학교에 가고, 헌금 낼 돈 모아서 사고 싶은 것 사고... 신앙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처소를 떠난 인생은 그야말로 이가봇의 삶을 삽니다. 제게 주신 은혜가 있다면 한번도 하나님을 떠난 삶을 상상하지 않은 것...
금요예배 때에 말씀을 전해주신 목사님...
좋은 직장도 그만 두고 목사가 되어, 더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유학까지 왔는데... 아이의 병으로 말미암아 목회도 그만 두고, 학업도 그만 두고... 이젠 택시 운전하면서 아이의 치료를 계속해야 하는데....곁에서 바라볼 때 조차도 그 신앙이 어찌 유지 될 수 있을까? 아니 신앙은 고사하고 그 삶을 어찌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와서 전해주신 첫 마디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에 목매어 하던 그 모습...
그 모습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참 고민이 많았지만...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내 신앙이 부끄러워지는...
파도 위를 걸어서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에 도망하면서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000명의 사람들이 있다."
엘리야도 모르고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숨어있는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교회 찾기 힘들고, 믿을 수 있는 목사를 찾아보기 힘들 때에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순수한 신앙을 위해 몸부림치는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7개월 동안 떠나 있던 법궤가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스스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찾아왔습니다.
제사장들로 모여진 벧세메스 사람들마저 법궤를 들여다 보고 죽임을 당하자 법궤는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통해 20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산에 사는"이라는 말이 눈이 멈추어 집니다.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랐지만 산에 올라 주님의 말씀을 들은 자는 소수였습니다.
산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장소입니다. 자신을 비워 주님을 따라가는 장소입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구별된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법궤.
홉니와 비느하스-
다곤 신전-
벧세메스-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당하고 거절 당하고 외면당하는, 도저히 함께 거할 수 없는 그런 곳을 떠나 거처를 찾아 헤메는 법궤.
요한복음 1장 -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라....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체험하고 싶다"라는 소망. - 말씀 묵상, 말씀을 통하여...
시편 1편의 복있는 사람,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 예수 그리스도.
이 2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사모했다"고 전합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법궤가 사라지면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체험하고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후회에 가까운 것이고 자기 연민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사라지면 재앙이고, 곁에 두자니 불편하고 두렵고....
이러한 때에 사무엘이 등장하여 이른바 미스바 부흥회를 개최합니다.
이때의 미스바라는 장소를 따서 많은 집회의 이름이 미스바 집회, 미스바 회개 운동 등으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미스바는 "망대" 즉 파수꾼이 망보는 곳이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깨어라, 깨어있으라는 말입니다.
슬퍼하지만 말고, 두려워하지만 말고 하나님 앞에 깨어서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은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전햇던 세겜 언약에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 우상 섬기고 이방신 섬기고, 세상에 기대어 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삶이 지속되면 알게 모르게 하나님 아닌 가까운 것, 빠른 것, 쉬운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밖에 나가면 때가 쌓이듯 세상에 살면서 깨어있고 회개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우상을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상은 끊임없이 믿는 자를 넘어뜨리고 유혹하고, 하나님이 아닌 돈을, 물질을, 권력을, 힘을, 세상을 의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물을 여호와께 붓는 것은 '자신들의 죄과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실제적 회개'를 의미합니다. 마치 물을 부어 쏟듯이 자신의 마음 전부를 다 내어놓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방법으로 금식을 했다는 것은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죄의 성격은 욕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죄의 통로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먹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가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식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드릴 것도 빼앗아 먹었습니다. 엘리는 너무 먹어 몸이 비대하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들은 먹은 것에 지배당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먹지 않고 욕구를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진정과 겸손으로 회개한다는 구체적인 표시로 '금식'(fast)란 방법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심으로 회개하며 금식하며 하나님을 찾을 때에 블레셋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도 함께 일어납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먼저 방해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그들은 교활해서 우리가 결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 하면 일을 만들고, 몸을 치고 마음을 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깨어있는 자는 그러한 일이 나타났을 때에 사단의 정체를 발견합니다. 사단에게 무릎꿇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니까 결심해도 일생기면 포기하고 낙담하고 맨날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블레셋이 쳐들어 왔다는 것을 듣고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무엘에게 "우리를 위하여 쉬지 말고 부르짖어달라" 요구합니다.
그들은 군사를 모으지 않았습니다. 두려웠지만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니까 기도를 통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온전한 번제"란 말에 주의하십시오.
블레셋 사람들도 볍궤 앞에서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는 드렸지만 자기 마음대로 독종과 금쥐를 만들어 예물로 드렸습니다.
신앙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 거듭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먼저되야 하지만 형식도 있어야 하고 방법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번제입니다.
기도하며 번제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군사 하나 모으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우레를 내려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흩어지고 스스로 무너지게 하삽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기게 합니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장소를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의미의 에벤에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에벤에셀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삼상 4:1b)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들은 이미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블레셋과 싸우려 했습니다.
거기서 패하자 "아니 어찌하여 우리가 패하였는가?"하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그러고 실로에 있던 법궤를 가져다가 또다시 전쟁하여 대 재앙을 맞습니다.
그 장소도 역시 에벤에셀 입니다.
똑같은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4장과 7장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의는 해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 패하자 우리가 왜 졌을까? 하면서 궁리하여 법궤를 가져오게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처럼 사용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여전히 범죄하며 단지 형식만 남은 경건, 부적과도 같은 신앙생활만을 합니다.
그런데 7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곁에 없을 때에 자기들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법궤는 산위에 엘리아살이 지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회개와 기도,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신앙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이자 능력입니다.
우리는 엇그제 헌신 예배를 통해 한끼 금식을 작정했습니다.
굶는 것으로 작정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 삶의 우상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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