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1-9절 (Passion)
고난 주간 묵상집을 통해 나누었지마 1-2절의 배경이 되는 유월절 이틀 전은 목요일 최후의 만찬을 하루 앞 둔 수요일날이다.
수요일날의 예수의 행적은 사복음서 어디에도 나타나있지 않다. 그 다음날 아침식사의 배경이 되는 베다니에서 하루를 머물며 홀로 시간을 가지셨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예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입장에서 예수는 흔히 말하는 이단의 수장으로 여길 수도 있기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한다는 의도의 순수성 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순수하다면 흉계 따윈 쓰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시체가 사라지고 부활했음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빌라도를 두려워하여 대제사장을 찾아왔을 때에, 대제사장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간구한다. 그 대책은 병사에게 뇌물을 주어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고 거짓증거하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앞뒤에 행해지는 종교지도자들의 부정한 방법은 그들의 의도가 순수한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증거한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부정한 방법을 통해 이루리라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결과가 과정을 합법화시키기도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과정이 결과를 증언하는 것이다.
유월절은 잘 알다시피 애굽에게 임하는 재앙을 면하기 위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이루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때로부터 일주일동안 사람들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며 이를 무교절로 지킨다.
이스라엘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유월절날 무교절을 먹는 것은 축제의 모습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광경과 너무 조화가 된다.
제자들이 유월절을 맞이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축제이다. 이제 며칠 뒤면 참된 이스라엘왕의 대관식을 기대하며 예수의 대관식 때에 자신들이 차지할 자리를 시시탐탐 노리며 기대하며 한껏 눈치와 기대와 설램이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축제의 정점이 자신의 죽음으로 끝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죽음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처럼, 피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순수한 고난의 죽음이다. 예수는 목숨을 잃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얻고자 예수를 잃고 반대의 길로 간다. 축제와 죽음이 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목요일날 아침에 일어나는 마리아의 향유옥합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왕의 대관식을 하루 앞둔 날, 유대인들의 예식은 대제사장이나 선지자에 의해서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인정을 공표했다. 그리고 왕의 기름부음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수의 기름부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베다니 문등이 시몬의 집에서, 대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닌 한 여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수는 이 대관식을 명하여 "장례식"이라 명한다.
제자들은 이 여인의 기름부음에 노하여 예수의 머리에 부은 기름의 값을 논한다.
메시야의 머리에 온 천하를 다 합한 기름을 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낭비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의 머리 앞에서도 한낫 값비싼 향유가 낭비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삼백데나리온은 엄청나게 큰 액수이다.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빌립은 이 무리를 다 먹이려면 이백데나리온의 돈을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만여명 되는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백다나리온이 남든다. 아마도 예수의 머리에 붓기 위해 이 여인은 평생에 모을 수 있는 모든 가치를 다 부었을 것이다.
같은 날 마지막 만찬을 위해 어린 나귀를 메어놓고 주를 위해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한 이름없는 무명의 나귀 주인 역시 주를 위해 사용하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준비시켜 놓았다.
예수와 더불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죽음과 헌신으로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한 무리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예수를 팔고, 불의한 방법과 부정한 생각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 앞에 동일한 예수의 반대편을 차지한다.
제사는 자신을 불태우는 번제가 되어야 한다.
욕망이 큰 자는 모든 행동을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있어서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욕망과 열정을 넘어 가장 큰 열정으로 표현된 용어가 바로 "Passion of Christ"이다.
우리는 이 글자를 정열로 쓴 뒤에 고난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겪는 고난이야 말로 우리 삶의 가장 큰 열정이다.
묵상질문)
1. 살기 위해 예수를 부인하고 불의한 삶을 살아가는 대관식의 구경꾼들과 자신의 전부를 드림으로 대관식의 주인공이 되는 예수 및 한 여인과 이름 없는 나귀새끼의 주인. 나는 주님의 나라에 어떠한 참여자인가?
찬양) 내 영혼에 예수의 흔적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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