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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11장 1-10절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by 소리벼리 2021. 4. 17.

마가복음 11장 1-10절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감람산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드린 곳

             예루살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감람산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대 중보의 기도를 드린 장소

             가룟유다의 배반과 그로인한 로마 군병들에 의해 끌려가시는 장소 

             

그 곳에서 제자들을 보내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볼 테인데 그것을 풀고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은 따로 주인이 있다는 것이고 제자들이 그 주인을 모르는 것으로 봐선 예수님과도 일면식이 없는 주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당황해서 머뭇거립니다. 아니 예수님이 도둑질을 시키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나귀를 끌고 오려고 하는데,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복잡한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또 어디서 왔고 예수님은 어떤 기적을 행했고 무엇 때문에 나귀가 필요한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 말만 하면 즉시 나귀를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묻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큰일났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시키신 대로 그대로 말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희한하게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그냥 그대로 허락을 합니다. 

백주 대낮에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자기 나귀를 풀어 데리고 가면서 주가 쓰시겠다하라 하니까 그냥 내어 주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한 마디에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나귀를 내어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이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사실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나귀 주인은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 없이 자신의 나귀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1. 주님의 주권...

주님이 원하시는 일- 어느 때에는 설명하지 않는다. 

갑자기 가라고도 하고 멈추라고도 한다.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내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있어도 이렇게 하지 못한다. 상황을 설명하고 왜 필요한지 이유를 대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일은 때로 그런 설명이 생략이 된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이다. 

그 분은 그럴 만한 분이다. 우리의 창조주여 만유의 주시기 때문이다. 

 

2. 제자들의 순종

제자들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속으로는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명령하는 것은 주님이시지만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는 제자들이다. 

물을 아귀까지 채워라 하신 것은 주님이시지만 그 물항아리를 들고 손님들에게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은 종들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주인이 시킬 때...항변하지 않고 순종한다. 

왜? 종이기 때문이다. 제자이기 때문이다. 

종은 따질 자격이 없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본분이다. 

때로 우리는 주님, 하면서도 종된 위치를 잃어버린다. 제자의 위치를 잃어버린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항변하고, 잡아채고, 외면하고, 무시해 버린다. 

납득되는 것만을 순종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납득되는 것만을 순종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아닌 나를 더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주님...하면서 기도한다. 

 

기적은...믿음을 통해 역사된다. 

믿음은 보이는 상황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역사된다. 

순종은 상황과 감정을 넘어서는 주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  

 

3. 주인의 허락 

종의 순종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나귀의 주인의 허락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미 주님과 약속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인정한다. 

왜 그는 종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데 순순히, 한 마디 항변없이 아무도 쓰지 아니한 나귀를 내어 드릴 수 있었을까? 

 

"한 번도 쓰지 아니한"

한 번도 쓰지 아니한 나귀는 밖에 매여 두지 않는다. 우리에 둔다. 

메여 놀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주인은 한 번도 쓰지 아니한 나귀를 날마다 매여 놓았다. 

왜?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마치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처럼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좋은 것에 쓰고자 날마다 매여놓고 이 날을 기다린 것이다. 

 

그는 주님께 쓰임받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고 가장 귀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던 주인이었다. 

세상에 가장 귀한 축복이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어떤 분이 휴일도 없이 죽도록 일을 해서 그래도 한 30-40억을 모은 부자가 되었다. 

이제 조금만 더 모아서 나머지 인생을 좀 쓰면서 즐기면서 살자...그렇다가 암에 걸렸다.  

처음엔 이런 방법, 저런 방법 살 방법을 간구하다가 살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하도 억울해서 내가 번 돈 계획적으로 다 쓰고 죽자하면서 의사가 말한 시간으로 나누니까 하루에 3천 200만원 정도를 쓸 수 있겠더랍니다. 

그래서 이 돈을 쓰고 죽자해서 하루에 3천 200백만원을 쓰려고 했는데....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고, 비싼 호텔에서 자고, 최고급으로 생활해도 5백 몇십만원 정도밖에 못썼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더 써 보리라 해도 하루 아무리 최고급으로 바쁘게 다녀도 500만원 쓰는 것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며칠 하다가 체력도 안되고, 그렇다고 입맛도 없고 결국은 나머지 기간 동안 1억원도 채 못쓰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 공부하고 왜 모으고 왜 아낍니까? 잘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값지게 쓰려고 애써 모으고 아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인가? 어떻게 써야 가장 가치 있게 쓰는 것인가? 주님이 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가 배운 지식, 나에게 있는 재능, 내가 벌어놓은 재물, 내가 살면서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를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드리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주님은 남김없이 쓰십니다. 아낌없이 쓰십니다. 

 

천하장사 삼손이 가장 삼손 다울 때는, 하나님에게 그 힘을 쓰임받을 때였고, 솔로몬이 가장 솔로몬 다운 때는 그의 지혜가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을 때였고, 마리아가 가장 마리아 다울 때에는 그녀의 값비싼 향유 옥합이 깨트려져 쓰임 받을 때였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때로는 그 사람의 소유인 지혜나 재능을 쓰시기도 하고, 을 쓰시기도 하고, 물질을 쓰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님에게 쓰임받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재능이 있어도, 학위가 있어도, 물질이 있어도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해서, 내가 아직 준비가 안돼서, 내가 게을러서, 내가 아직 드릴 마음이 없어서,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재물, 그 재능, 그 지식은 주님 보시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린 나귀를 보면서 주님은 어떤 자를 쓰시는가? 

1) 어린 나귀 새끼- 

나귀 새끼를 쓰시고자 한 예언은 스가랴서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태어 나기 500여년 전 이미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리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 

얼마나 우수꽝스러운 장면일까? 

어리기 때문에 연약하고 힘도 세지 못하고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이 쓰시는 것은 우리의 소유의 크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눈에는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재능과 물질과 지식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쓰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 주님이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는 준비가 안됐는데요, 아직 부족한데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이런 변명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데 핑계대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2) 한 번도 타지 아니한 

순결을 뜻합니다. 순결한 사람, 순결한 마음. 주님은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 마음이 순전하여 거짓이 없고 정결한 영혼을 지닌 자를 즐겨 쓰십니다.

(요 19: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값나가진 않지만, 비싸지는 않지만,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꺠끗한, 순결한 자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자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3)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놓으매

우리가 아무리 순결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

여전히 흠이 있습니다. 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겉옷으로 그 위를 덮습니다. 

흠을 가립니다. 우리가 의로와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들의 사랑으로 우리가 쓰임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쓰임받음의 결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9절)

쓰임받는 결과는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름없는 나귀 새끼는 그대로 이름없는 나귀의 모습으로 남습니다. 

 

쓰임받는 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주님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을 드러내는 데서 유혹이 옵니다. 

나귀는 자기의 이름을 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님만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쓰임받는 자의 승리입니다. 

왜 많은 쓰임받는 자들이 넘어집니까? 결국 자기 이름을 지키려다가 주님의 이름에 해를 입힙니다. 

쓰임받고 버려지는 자들은 불행한 자들입니다.           

             

묵상 질문) 

1. 가장 귀한 삶은 주님께 쓰임받는 삶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자. 동의하는가? 내 인생은 지금 주님앞에 쓰임받고 있는가? 

 

2. 나의 신앙은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 만이 드러나길 원하는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으면 시험에 들진 않는가? 

 

찬양) 축복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