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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다락방에 임한 바람 (행 2:1-4절)

by 소리벼리 2022. 11. 6.

다락방에 임한 바람 (행 2:1-4절) 

 

유월절로부터 오십일째 되는 날, 다시 말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로부터 50일,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하늘로 승천하신 날로부터 열흘이 되는 날,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곳에 제자들이 모여 앉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니까 그 곳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과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하늘로부터 올라가는 것을 본 자들 중 남은 자 몇 사람이 그렇게 힘을 다해 무언가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리고 힘써 기도하던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의 혀처럼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자들의 공동체, 교회는 이렇게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한 자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시대로부터 교회를 가리키는 여러가지 사건 및 모형들이 있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로부터 시작되어 광야에서의 성막, 실로에 세워진 산당, 그리고 솔로몬 때 지어진 성전 및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돌아와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으로도 불리우는 제 2 성전, 그러나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마가 다락방의 성령 강림사건으로 열매맺어 교회의 시작을 알리게 된 것입니다. 

 

그 날로부터 오십 일 전, 그날에도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흔히 말하는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가정들에게는 심판을 "넘어가 주셨던" 것을 기념하는 사건입니다. 이 날을 기념하였다는 것은 그 날을 기억하며 다시금 그 때의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념하라는 것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날의 멤버가 되어 다시 그 체험에 참여 하는 의식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의 오랜 노예로부터 출애굽의 시작을 알렸던 처음 유월절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완성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유월절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니까 그들이 "어디서 준비하시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터인데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니있느냐고 물어라.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여기서 그저 쉽게 넘길 수 있는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객실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카탈리마"라고 하는 이 단어는 유월절을 준비하는 이 장면 말고 누가복음 2장 7절에 한 번 더 등장을 합니다. 

성경의 연구와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방법 중 하나 - 그 똑같은 단어가 다른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것 - 해석의 큰 틀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 -> 노아를 실은 갈대상자 -> 같은 단어: 물에서부터 건져올린 자 - 노아 : 구약에서의 구원의 모델

 

(눅 2: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 여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카탈리마, 바로 객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에 주님은 바로 이 객실이 없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구유는 무엇입니까? 말이나 양의 먹이를 주는 통입니다. 

마치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듯이, 주님은 나실 때부터 양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 구유에 뉘시고 대신 사람들을 객식에 가득 채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을 기념하는 날, 주님은 사랑하는 두 명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객실을 마련토록 합니다.  

그리고 그 객식, 자신과 제자들의 식사 자리에서 내 살과 내 피를 받아 먹으라고 말씀하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장 44절) 하며 그 객실, 그 다락방을 주님과 제자들의 교제와 섬김과 기념의 장소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신약성서의 첫 교회의 모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50여일이 지난 오순절 날,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장에서 드디어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예수의 살과 피로 연합한 곳에서 이제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실질적이고 본격적인 교회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전의 신구약의 모든 교회의 모형들의 의미가 완성되는 교회 공동체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 사람들을 구원하는 장소 

성막과 성전의 시대처럼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장소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자리처럼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섬김을 따라 섬김을 실천하는 장소의 모든 의미가 완성 된 것입니다.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하흐"입니다. 이 루하흐는 영이라는 말 외에도 바람, 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생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루하흐, 숨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생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있는 영, 생령이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우리 말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했지만 좀 더 정확한 의미로는 DUST, 즉 티끌이나 먼지였던 사람에게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한 줌의 티끌, 먼지가 되듯이 하나님의 숨이 없는 인생은 한 줌의 흙먼지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이고, 먼지일 뿐이고 그 죽음 앞에서는 어떤 부귀도 영화도, 권력도, 명예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헛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돈을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세상의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자의 끝은 항상 이 먼지, 허무,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고 살지만, 하나님의 호흡, 생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보다 더 중요한, 더 귀한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요 20: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시금 허무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다시금 뿔뿔히 흩어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바다고 달려간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이 바로 다락방, 그들이 힘써 기도할 때에 하늘로부터 급한 바람, 하나님의 숨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이 임한 자들은 어떻게 변합니까? 

1) 그들의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위해 예수를 배반했던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 이후로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일에 그들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마귀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사망 권세,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숨을 가진 자들은 자기의 목숨에 위협이 와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목숨 이상의 숨, 영원한 생명, 하나님이 숨으로 충만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숨을 가진 사람들은 더이상 허무한 것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권능을 받아 귀신을 쫓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며, 병든자, 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숨을 나누어 줍니다. 

숨이 없어 허무함 만을 맛보는 자들에게 이것이 살 맛이라고 이것이 사람답게 사랑하는 삶이라고 불사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스스로 자기들의 성, 바벨탑을 짓고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며, 옆을 돌아보지 않고, 하늘도 보지 않으며 땅을 마구 파헤치며, 자기 만을 위해 살아가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때, 하나님의 숨이 있는 자들은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며 말씀으로 하늘의 양식을 먹으며 위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며, 아래로는 땅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락방에 임한 하나님의 숨을 가진 자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숨이 없이 그렇게 헤치며, 죽이며, 허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느끼며 부둥켜 안고 울며 이스라엘의 죄악에 후회하셨던 하나님의 탄식, 그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며 우셨던 그리스도의 울음, 성령의 탄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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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똑같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이 하신 것을 듣고 보며 경험했던 수만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대다수의 무리들은 오히려 주님을 조롱하며 저주하며 떠나가는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풍파, 남들의 시선,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대다수가 예수님을 떠날 때 

그 무리들 사이에서 나와 끝까지 다락방에 남아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힘써 기도했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부어 주셨던 그 숨, 그 생기, 그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숨이 임한 자들마다 세상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비전, 그들이 가지지 못한 영원한 호흡을 누리면서 불과 같이 삶을 불태우며 발을 씻기고 치료하며, 사랑하며 살아갔습니다. 

 

트레이시 제일교회를 성도 여러분과 함께 시작하며 

어떤 그림을 그릴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소원을 물으신 것처럼 나에게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의 앞날에 어떤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냐고 하나님께서 물으신 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준비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름다운 새 건물을 위해 기도할까? 

기드온의 용사처럼 300백명의 군사같은 성도들을 달라고 기도할까? 

 

그런데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해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이 시대, 지금 이 곳 트레이시 지역의 이 제일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락방에 임한 하나님의 호흡이었습니다. 

먼지같은 인생에 임한 하나님의 생기였습니다. 

 

지금 대한 민국을 강타하는 코로나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호흡기 증후군 입니다. 

호흡을 통해 악한 것들이 들어와 폐가 상하고 열이 나서 고통스럼게 사람을 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이 막히면 우리 영이 죽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숨이 임하면 마른뼈가 살아나고 허무한 인생에 바람이 붑니다. 

열정없이 하루 하루 의욕없이 살아가는 자가 불타는 사람이 됩니다. 

 

(행 2: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은혜는 다양합니다. 

한 언어를 가지고 탑을 쌓다가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게 하면서 각자에게 맡겨진 각각의 사명을 주십니다. 

 

앞으로의 교회는 유니폼 맞추어 놓고 한가지 색깔로서 이끄는 목회가 아니라 성령이 각각 역사하시는 다양성의 목회, 포용의 목회입니다. 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이 넓어져야 하고 타인의 삶과 문화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니까 나와 다르면 다 틀리고 웬수고 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언어를 할지라도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숨으로 우리 영혼을 채우면서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에 하나님의 어떤 바람이 임할까, 오떤 호흡이 임할까 기도하며 기대하며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