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8장 1-3 절 온전한 사랑 

 

(아 8:1)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이제 신부는 차라리 신랑이 오라비 같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오라비'는 신랑이 자기를 향하여 '나의 누이, 나의 사랑'(6:2)이라고 부른 데 대한 응답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며 사귈 때 - 은밀한 공간에서 둘만있고 싶은 관계,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꼭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아니더라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만나고 싶을 때, 처음의 관계, 특별한 사이로 나아가는 관계-> 그 다음의 관계는 특별한 관계에서 자신의 일상의 삶으로 들어오는 관계, 어느 곳이든 늘 동행하는 관계 

  • 처음의 깊은 교제: 은밀한 교제, 순간적인 교제
  • 성숙한 깊은 교제: 일상의 임재, 동행... 

 

플라톤의 사랑정의 : 에로스 (남녀간, 부부간 사랑) 필로스 (형제간 사랑), 아가페 (신적사랑) 으로 구분짓는다. 

그리고 필로스는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넘어가는 더 깊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필로스는 에로스가 아가페로 가는 다리이며, 에로스는 필로스와 하나가 될 때 가장 아름답다

아가페 안에 에로스가 내재할 때 아가페는 가장 숭고해진다. 

아가페 사랑을 신적 사랑, 에로스 사랑을 육체적 사랑이라고만 이해할 때, 우리는 에로스를 욕망적인 사랑으로, 아가페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다. 

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아가페 사랑을 연인과의 에로스적 해석에 빗대어 표현된 문학이다. 

누구도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그러한 남녀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영성가들은 아가서를 통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마치 연애하듯, 연인과의 관계처럼 친밀하고, 은밀한 동시에 구체적인 사랑의 관계로서 바라보게 되었고 많은 영감을 나누어 주었다. 

오늘 읽은 8장을 통해 왕과 여인의 관계가 둘만의 에로스적 관계에서 형제애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며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에로스와 필로스와 아가페가 마치 삼위일체를 연상시키듯 하나의 사랑으로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은 사랑을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등으로 나누지만 신학적, 신앙적으로 사랑은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가 치우침없이 고루 펴지는 사랑이다. 

에로스처럼 뜨거운 갈망함과 필로스처럼 한결같고 일상적인 친밀함,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가페 안에서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아 8: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내 어머니 집은 어디인가? 그녀가 속한 모든 삶의 현장, 그녀의 터전, 그녀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환경 속에 주님을 모셔 그에게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제 여인의 갈망은 단지 주를 향한 개인적 갈망을 넘어 그녀가 속한 모든 이웃, 모든 열방에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갈망함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는 주님의 사랑과 희생과 십자가의 보혈을 홀로 맛보았지만 이제 그녀의 갈망은 자신의 삶의 열매, 주님을 따라 달려가는 자신의 십자가의 열매를 주님께 드리고자 한다. 

비로서 은혜를 받기만 하는 자에서, 삶으로 예배하고, 삶의 열매를 드리는 주를 닮은, 주의 길을 함께 가는 주의 제자, 주의 자녀가 된다. 

 

(아 8:3)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여인이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남자의 팔이 여인의 어깨를 감싸안는 표현은 너무도 아름답고도 또한 자연스러운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머리를 그의 팔에 기대는 것은 주님의 팔에 안겨 주님을 머리 삼는 성도의 순종함과 의지함이고, 주님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하면서 오직 그분이 나의 머리가 되고 나의 피난처가 되게 하리라는 성도의 표현입니다.  

 

묵상) 

1.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친밀하고 은밀한 개인적 교제를 넘어 내 모든 일상을 함께 하며 내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갈망함이 있는가? 

 

2. 신앙생활을 주님과 연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아주 오래된 여인처럼"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아무런 설래임이나 열정이 없는 의무감과 형식적인 관계만 남아있지 않은가? 

 

아가서 7:10-13절 우리가 함께 유숙하자 

 

(아 7:10)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만 일방적인 사랑, 짝사랑 만큼 가슴 아픈 사랑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한쪽이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다른 사람, 다른 곳에만 관심이 가 있다면 사랑은 그 만큼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반기고 맞이하고 영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외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여인은 지금 왕이 자신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찬미하는 소나타를 듣습니다. 그 사랑을 들으며 행복해합니다. 자신의 모든 사랑을 그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 나는 이미 그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말합니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 그도 나를 사모한다."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 그 분의 사랑을 느끼는 것, 그 사랑안에서 나도 사랑을 고백하는 것. 신앙생활은 곧 사랑의 삶입니다.  

 

(아 7:11)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신부는 이제 신랑과 함께 들로, 동네로 함께 갈 것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여인은 신랑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찾았으며, 거리를 헤메였으며, 사람들을 찾아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신랑과 함께 연합을 통해서 신앙의 신비, 연합의 신비를 경험한 여인은 그분과 함께 어디든 다니고자 한다. 

들과 동네는 신부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터전이다. 이제 신랑과 함께 그녀의 일상의 모든 것을 함께 하고자 한다.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앉기를 원하는 자는 이제 모든 삶의 영역이 그 분과 함께 됨을 경험한다. 

숨김이 없고, 제한이 없고, 내 마음을 열어보이면 열어 보일 수록 그 분의 임재와 통치와 사랑은 더해진다. 

 

(아 7:12)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포도원은 그가 내게 맡긴 동산이다. 동시에 그분과 함께 펼쳐나가는 삶의 동산이다. 내가 그 분께 붙어있으므로 열매를 얻고 양들을 먹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제 그가 맡긴 동산에 가서 그 분이 내게 맡기신 모든 나무의 열매가 어떻게 열려 있는지, 새싹이 돋았는지, 꽃이 피었는지, 열매가 맺혔는지를 결산한다. 

 

이제 신랑이 신부의 마음과 삶 어느 곳이든 함께 하듯 신부 역시 신랑의 관심과 일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은 그저 둘만이 함께 거하면서 "우리끼리만" 행복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양떼를 먹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목자로서의 삶, 동산지기로서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청지기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신부는 이제 주님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 그들이 함께 가꾸는 포도원에 가서 양들을, 새싹들을, 식물들을 가꾸며 그들의 삶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돌보는 모든 생명체를 돌보고자 한다. 

이제 신부는 주님의 동역자요 참된 청지기가 된 것이다. 

 

(아 7:13)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합환채:         Loveapple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맺은 열매를 상징하는 식물이다. 그 식물은 사람을 끓어당기는 향을 내고, 또한 잉태하게 하는 특별한 효능이 있는 식물이다.

레아와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쟁탈하기 썼던사용했던 식물이 바로 합합채이다. 임신을 돕는다고 여겨졌던 식물의 이름이다. 

삶의 향기. 삶의 열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향기이고 열매이다. (아 7:13)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이제 주님과의 연합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들은 열매를 돌보고 가꾸고 추수하는 삶이다. 풍성한 내적 성숙의 열매와 더불와 영향력있고 살리는 외적 열매를 맺는 삶. 그것이 연합의 결과요 열매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주님을 향해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의 부분, 그분의 부분이 아닌 내 전존재, 그 분의 전부를 향해 연합하고자 하는 갈망함이 있는가? 

 

2. 주님을 향한 내 삶의 향기(합환체)를 지니는가? 성도의 거룩한 행실, 삶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가? 사랑받는 자의 향이 나는가? 

 

 

아가서 7장 1-9절 네가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본문은 발끝으로부터 머리끝에 이르기까지 신부의 용모에 대한 신랑의 찬사를 기록한다. 솔로몬이 기록한 여인의 찬사는 단순한 여인의 외모를 노래하는 것이 아닌 구약성서와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교회된 성도에 대한 아름다움과 역할을 드러내는 풍성한 상징의 언어로 해석되어 집니다. 

 

귀한 자의 딸 

아 6:9)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독생자 예수와 더불어 그 낳은 자 하나님의 외딸로서 귀히 여기는 성도의 자리를 나타내는 언어 

 

1. 발 (새로운 삶)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1절). 

  • 신부의 발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찬입니다. '신을 신은 발이란 죄에서 구속받은 자의 발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발이며 생명이 약동하는 발이며 복음의 발입니다. 
  • 모세에게 하신 말씀 (출애굽기 3장) : 네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을 거룩한 곳이니... 자기 마음대로 살던 자의 신을 벗는 것- 주 앞에 주권을 맡긴 것
  • 누가복음 15장 : 돌아온 탕자에게 새 옷과 새 가락지와 새 신을 신긴 것- 주 안에 새로운 삶
  • 이젠 왕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귀한 자 (여왕 같은 처녀)가 되었고 왕이 신겨준 신을 신은 아름다운 발의 소유자가 되었다. 
  • 왕과 함께 춤추는 다리는 이제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축복된 걸음이다. 주님이 인도하는 발걸음은 참된 안식이다. 

 

   2. 넓적다리(주님과의 연합)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1절). 

  • 넓적다리는 둔부와 무릎의 사이를 연결하는 부위를 일컬음인데 넓적다리가 아름답고 튼튼한 것은 몸의 기동성과 능력의 강건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단합과 봉사 정신에 의하여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 창세기 32장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천사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 넓적다리 - 하나님의 택하심의 상징, 야곱이 이스라엘 됨의 상징 
  • 그 넓적다리가 이제 아름다움의 상징 구슬꿰미처럼 엮어진 주님과의 연합의 상징이 된다. 

 

   3. 배꼽(진리의 공급)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22절). 

  • '배꼽'은 태중에 있을 때에 영양을 공급받은 곳입니다. 배꼽은 몸의 중심이며 이곳을 통하여 생명의 영양을 공급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성도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은 진리의 공급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샘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은혜로 계속해서 채워집니다.  
  • 그 곳에 포도주를 가득히 부었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복음의 말씀이 가득 차고 넘친다는 것입니다. 

 

   4. 허리(힘의 원천)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2절). 

  • 허리는 힘의 원천입니다. 허리가 약하면 아무 힘도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끔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한 진리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양떼들)이 그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어지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 안의 가장 깊은 부분들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기 귀하여 싹을 틔우는 밀밭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의 정결한 백합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습니다. 

 

   5. 유방(생명의 양육)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3절). 

  • 유방은 생명의 양육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여인의 유방을 통해서 양육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자녀들을 낳을 수 있지만 그들을 양육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돕는 허리의 능력은 결국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목자, 사람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공급받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양식의 통로가 됩니다.  

 

   6. 목(영적 교통)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4절). 

  • 목은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이것은 몸이 성도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뜻하고 있습니다. 머리와 단절된 몸이 살아 있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교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목을 통하여 몸이 머리의 지시를 받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 또한 목은 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아와 같이 깨끗하고 강하게 만드십니다. 

 

   7. 눈(교회의 가치관)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4절).

  • 눈은 마음의 창이며 사물에 대한 가장 중추적인 정보원입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이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나 눈은 많은 표정을 깊은 연못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 또한 눈은 비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볼 때에 우리의 눈은 어장과 같이 됩니다. 

 

   8. 코(영적 총명)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4절). 

  • 코가 냄새를 식별하는 것처럼 교회는 영적 현상에 대하여 탁월한 식별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의 안전이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 레바논의 망대는 매우 튼튼하며 무너끄릴 수 없고 또한 멀리 있는 것도 분별할 수 있는 총명함을 주십니다. 

   9. 머리(영적 지도력)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5절). 

  •  머리는 자기 통치의 중추부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머리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영적인 선물입니다. 

 

   10. 키(교회의 영향력, 성장)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7절),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8절). 

  • 키는 그의 인품과 권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대외적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성도의 영향력은 그 외형적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영적) 능력과 외적 봉사 능력에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건물의 크기나 인원의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느냐에 있습니다.
  • 종려나무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떄에 흔들고 깔아드렸던 성도의 열매요, 주님의 승리에 함꼐하는 성도의 승리입니다.   

 

   11. 콧김(교회의 성결)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8절). 

  •  '콧김'은 호흡인 동시에 입안에서 나는 냄새입니다. 콧김은 생명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또 몸 안의 상태를 표출해 내는 고백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 생명력을 과시해야 하며 동시에 내적 성결로서 언제나 외부에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거룩하지 아니한 성도는 이미 성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내적 거룩을 행위의 빛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12. 입(생명의 언어)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9절)

  • '포도주'는 맛이 좋아 그 마시는 자에게 즐거움을 주며, 또 탁월한 활력제로서 심신을 새롭게 하고 경쾌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포도주와 같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영혼에 기쁨에 얻게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활력에 넘치도록 소생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랑은 지금 신부의 아름다움을 조목조목 노래하면서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하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그렇게 영적 화창함으로 아름다운 존재로서 빛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로서 얼마나 감격스러우지요. 

 

묵상을 위한 질문) 

1. 교회의 지체로서의 내 역할은 생각해 보았지만 내 귀중한 신체가 각각 영적인 의미를 지닌 지체임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내 몸의 각 부분들을 향해 목적을 두고 비전을 두고 있음을 생각하며 내 신체의 각 부분을 위한 기도를 드려보자. 

 

2. 내 몸의 각 신체들이 각각의 은혜 가운데 역할을 감당하듯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나의 역할은 몸된 교회의 어떠한 신체를, 지체를 감당하고 있을까 묵상해 보자. 

 

 

큰 용사 (사시기 6장 11-16절) 

 

1.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의 사사기의 배경 - 여호수아, 사사기 -> 가나안을 배경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여정 및 가나안 이후의 삶

여호수아- "모세가 죽은 후" 에 시작 

사사기 - "여호수아가 죽은 후"로 시작 

 

홍해를 건너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정복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까지 왔다. 

우리의 신앙 여정으로 표현을 하면 구원받아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면서 참 예배의 맛도 보고 순종하면서 평생의 기도의 응답도 받고, 신앙의 깊은 은혜도 체험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신앙생활하여 구원 받고 난 이후의 삶

도대체 나에게 가나안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기도의 신비도 알고, 나름 신앙 생활 하면서 복도 받고 은혜도 받고,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리더도 되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행복한다. 참 안식이 있는가?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뭐가 잘못된 것인가? 

 

사사기서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나안은 가졌는데 정작 하나님은 잃어버린, 축복은 얻었는데, 정작 영적인 평안은 잃어버린, 기도 응답 받았다고 나름 뿌듯하고 만족했던 내가 

어느날 보니 교만해지고, 삶은 게을러지고, 온갖 세상의 향락에 빠져 도대체 안믿는 자와 다른 것이 없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수 더 뜨는 그런 영적 타락의 극치에 빠진 그리스도인의 철저한 실패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이른바 하나님을 통해 복을 얻고자 했던 자들이 복을 얻자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기복신앙의 결말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 당시의 가장 신앙적인 존경을 받거나 높은 직분에 있었지만 예수께 책망듣는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의 신앙을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사사기이다. 

지금의 한국과 미국의 교회가 가장 심각하게 잃어야 할 성경 중 하나가 바로 사사기 

 

사사기서의 결론은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대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신앙의 흉내는 내는데 자기 생각대로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혜는 그런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교회를,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각 시대마다, 지파에 맞게 사람을 보내어,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완전하진 않지만 어제 새벽예배 룻의 이야기처럼, 이삭줍기를 통해 하루 하루의 만나를 얻게 하시고, 그 날의 구원을 이루어주신다. 

악한 그들이라도 구원의 손길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시대에 부름받은 자가 바로 사사이다. 

 

이 주간이 될 지 좀 더 긴 시간이 될 지 몇 주간에 걸쳐서 사사기서를 대표하는 두 명의 사사, 그렇지만 너무나도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드온과 삼손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1. 기드온 (다섯번째 소개되는 사사) 

  • 사사 (JUDGE- 판관) : 하나님의 사람 선택 - 최고의 사람을 뽑지 않는다. 그 시대 불구자로 여겨졌던 왼손잡이 에훗, 여성이었던 드보라, 그리고 오늘 다룰 기드온, 약점이 있고 스스로 리더가 되기에 부족한 자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모두 약점이 있고 연약함이 있는 자들이다. 

 

2. "또 짓는 죄" 

6장 1절이 어떻게 시작하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신앙생활 중에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죄. 우리의 자존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만들어 관계를 깨뜨리고, 점점 마음이 완악해지게 하는 무서운 죄. 

이 구절을 묵상하는 중에, 나의 신앙생활을 통해 가장 날 무너뜨리는 죄가 무엇인가? - 또 짓는 죄

 

하나님 역시 또 짓는 죄를 싫어하신다.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또 다시 반복적으로 온전히 돌이키지 못하고 조금만 여유가 생기고, 살만해지고, 틈만 나면 짓게 되는 반복적인 죄. 다시 짓는 죄. 회개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했으면서 또 다시 짓는 죄는 성도들을 병들게 하고, 끊임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또한 고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마태복음 12장 -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나갔는데 여기 저기 떠돌다가 다시 그 사람을 보니 그 안이 청소되었는데 아직 비어있다. 주님이 그 안에 안계신다. -> 떠도는 더 악한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 이전보다 더 악하게 된다. 

 

거짓말이 습관이 될 때에, 도박이 습관이 될 때에, 인터넷이 습관이 되어 내 삶을 황폐화시킬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내가 저를 구원했건만, 내가 저를 용서했건만... 

이스라엘 민족이 반복적으로 또 지은 죄는 무엇이었인가? 바알과 앗세라를 섬긴 것이다. 

농사의 신, 물질의 신, 경제의 신 바알과 쾌락의 신, 탐욕의 신, 정욕의 신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우리를 반복적으로 넘어지게 하는 것, 결국은 세상 살아가면서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우선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보다 나 자신의 쾌락과 정욕을 탐하는 것

그것이 우리 성도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회개해도 또 넘어지게 하고, 이긴 것 같으면 또 넘어뜨리는, 우리의 죄의 근원이다. 

사사기에는 ‘또,’ ‘다시’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사사기의 시대- 또 짓는 죄의 결과로 맞이하게 되는 것 - 미디안의 통치 

 

3. 미디안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고나서 맞은 후처,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식이다. 그리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과는 친척의 관계이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갈 때에 미디안족속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모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광야에 남는다. 

 

정반대의 사상이 신앙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비슷한 것 같은, 유사 신앙,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그런 말들 - 디모데전서에서 나오는 다른 교훈, 허탄한 신화와 생각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 민족에 비해서도 작은 민족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 보다 훨씬 강한 민족인 가나안을 정복하고도 지금 하나님 앞에 반복적으로 “또” 범죄하니까 미디안에게도 꼼짝 못하는 약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왜 미디안같은 작은 문제에도 꼼짝 못하게 되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더 이상 하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소같으면 쉽게 이길 전쟁에 이스라엘이 흩어지고 자기만 살겠다고 하니까 미디안 작은 민족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곡물을 바치고 땅굴이나 파서 피하는 궁핍한 민족이 된다. 

아가서에서 포도원을 헤치는 것 - 작은 여우. 그 작은 여우가 바로 미디안 족속  

 

  • 이기심과 분열된 이스라엘 백성 

2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전쟁이 나도 자기 살 궁리만 한다. 미디안이 쳐들어오자 이스라엘 민족이 행한 것은 힘을 모아 그들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 웅덩이와 굴과 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 숨어서, 자기 것이 어떻게 될까 전전 긍긍하여 몰래, 숨어서,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 자기만을 위하여, 숨고 피하고...

 

초대교회 - 성전에서 모이고 흩어져서 가장에서 교제하고...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그런데 점점 교회에서 모임이 폐하여지고, 교회 밖에서의 교제는 점점 사라지고...유튜브 시청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I am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이 시대의 신앙을 나타내는 학문적 정의) - 난 신앙은 있지만 교회는 싫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로 지금 2년넘게 교회모임이 사라지고 있는 실태 - 안모이니 좋으냐?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하니 유익하냐? 

 

자기만 괜찮으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함. 전쟁이 나도 자기만 도망치면 된다고 생각... 그러다가 정말 민족적인 위기가 찾아오면 그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4. 부르짖음에 또 응답하시는 하나님 

결국 미디안의 손길이 이스라엘 전 민족에게 미쳤을 때에 이스라엘 전체 민족이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삿 6:6-7]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성경은 두 절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백성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었음을 이야기한다. 하나님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진 자신 때문에 부르짖지 않고 그저 미디안 때문에 부르짖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건, 반복해서 죄를 지어도 부르짖어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또 용서하신다. 부르짖는 자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또 짓는 죄는 우리의 자존감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무너뜨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부르짖는 자를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언제까지 용서하시나? 일흔 번씩 일곱번 - 하나님의 완전수 만큼, 최후의 심판 전까지 용서하신다. 

 

우리는 사사기를 보면서 어찌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게 또 죄 짓고, 또 죄짓고 그런가만 보지 그럴 때마다 그들이 부르짖는 것은 쉽게 넘겨 버린다.  

고난을 당할 때에 부르짖을 수 있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표시이고, 특권이고, 능력이다. 

문제는 고난이 왔는데도 부르짖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고, 고난이 왔는데도, 삶이 황폐해지고, 우울해지고, 영혼이 죽어가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목사로서 성도를 대하다 보면   저 분은 정말 기도해야 하는데 할 정도로 안타까운 처지의 성도들이 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열심히 믿는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엔 위급한데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한다. 사시기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꼭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사업이 망하고 시험이 떨어지고 해야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 영혼에 만족이 없고, 평안이 없고, 자꾸만 어두운 생각이 들어오고,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과, 좌절감이 몰려올 적에 그러한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자녀답게 살게 해 달라고, 사명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 다시 정욕과, 탐욕과, 습관적인 죄가 나를 엄습할 적에 내 영혼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5. 한 선지자 

(삿 6: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이름도 나와있지 않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데 무어라고 말씀하냐면 "난 너희를 구원하여 이 땅을 준 하나님이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과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 (10절) 

이것이 그들의 부르짖음의 응답이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자꾸만 세상으로, 세상적인 방법을 따르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세상 속에 살면서 그들과,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기준,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처럼 살지 못하면 뒤쳐질 것 같고, 실패할 것 같고, 홀로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바알과 앗세라, 또 짓는 죄, 반복되는 죄에 빠진다. 이방의 신, 경제의 신, 정욕의 신, 탐욕의 신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놓치 못하고 따른다. 자꾸만 세상을 바라보면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이름없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응답.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는가? 내가 이미 그들을 쫓아내어서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냐? 왜 두려워하는가? 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가? 하는 한가지. 모든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않은 것. 그리스도 인의 모든 실패의 원인. 

 

6. 다시 기드온 

그리고 나서 선택한 사사 - 기드온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자 (11절) . 왜? 미디안 족속이 두려워서…. 

원래 밀은 타작마당과 같은 큰 장소에서 황소를 끌고 다니며 타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미디안 몰래 포도주틀과 같은 작은 기계로 조금씩만 타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어떤 자였는가? 므낫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약한 자. 

믿음도 별로, 집안도 별로, 그 집안 중에서도 더욱 연약한 자. 

그를 가리켜 무엇이라 부르셨는가? 너는 큰 용사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2절) 

모세가 죽고 방향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운 리더자 - 여호수아 

여호수아에게 끊임없이 하시는 말씀 - 힘써 대장부가 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누가 큰 용사요, 누가 대장부인가? 남자만? 아니다. 힘쎈 자만? 아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자. 대장부요 큰 용사다. 

 

물고기 낚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 "내가 너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75세 된 자식 없는 노인 아브라함에게 "네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나이 80된 목동 모세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라!" 

불구자 에훗을 통해,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어떻게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갈렙이, 여호수아가 그렇게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린 큰 용사다. 큰 용사는 다름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이다. 

 

성경에 나온 큰 사람 -

모세 - 한 사람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쳐 40년을 도망자로 산다. 

이 미디안이 두려워서 몰래 숨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 하던 자, 

가장 연약한 므낫세 지파에서, 또 그 집안 에서 가장 약한 자 - 기드온을 부르셔서 "큰 용사여!"라고 지명하신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이름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보장된 말씀이다. 

 

7. 결론 

 

큰 용사가 되고 싶은가? 

무엇으로 이 땅에서 큰 용사가 될 수 있는가? 

물질로, 학력으로? 가문으로? 체력으로? 

몇 사람은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큼으로는 이 세상의 큼을 이길 수 없다. 

진짜 큼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연약함이 있을 것이다. 

미디안을 피해 산에 올라가 굴을 파고, 웅덩이를 파고 자신을 숨기듯 숨기고 싶은 내 안의 연약함 때문에 두려울지 모른다. 

또 짓는 죄로 인해 무너진 자존감을 숨기고 사는 지도 모른다. 

군대에서 몰래 초코파이 숨겨두었다가 취침시간에 몰래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먹는데...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불의한 아이들을 보면서도 외면하는 어른들...비겁해진 모습들... 

 

무엇이 여러분의 힘입니까? 무시당하지 않으려 학력을 쌓고 사회적 지위를 쌓고 돈을 쌓아도 그 힘이 유지될까?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할 터이니 넌 이제 큰 용사다!"하고 부르신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 다윗 

시편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약한 자로 선다. 작은 일에도 자기가 스스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뢴다. 

하나님께서 둘 사이를 재판해달라고 한다. 유치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아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니 세상이 그를 높인다. 

이스라엘에 수십명의 왕들이 있었지만 스스로 강하고자 했던 모든 왕들은 사라지고 오직 다윗의 이름만 빛난다. 

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 역시 실수하고 범죄했을 때에 가장 두려워했던 것 - 주의 성령을 내게 거두지 마옵시고

 

다음 시간에 어떻게 비겁하고 소심했던 기드온이 정말 하나님 약속하신 큰 용사로서 살아가는가를 한 시간 더 묵상할 것이다. 

한 주 동안 여러분 안에 여러분을 무너뜨리는 "또 짓는 죄"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내 영혼의 두려움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고 부르짖을 수 있는 한 주가 되시길 바란다. 

큰 용사로 부르시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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