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5:1-6 만나고 머무르고, 또 헤어지고

 

(아 5:1)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술람미 여인은 왕의 초대를 따라 다른 어떤 이가 침범할 수 없는 왕의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 되었다. 그곳에서 여인은 아름다운 열매와 향기와 삶을 영위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신부인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사모하고 그 분이 동산 안에 거할 때에 시절을 쫓아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나의 존재는 그 분이 들어와서 거하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 믿는 자 한 사람 한사람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즉 그 분이 임재하실 때에만 그 존재의 목적대로 서 있는 것이다. 

 

그가 내게 와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신다.

내 삶의 모든 상처와 연약함을 치료하셨던 그 분의 십자가의 흔적을 거두신다. 

여인의 삶 속에 있는 주의 말씀과 주의 열매, 주의 흔적을 우리 안에서 찾으신다. 

그리고 내 안에 충만한 주의 말씀과 열매를 통해 이웃을, 양들을 더욱 풍성히 먹이시길 원하신다.  

 

그는 나의 삶을 통해 열리는 말씀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거두고 (꿀송이, 꿀, 포도주와 우유) 그것을 또한 그 분이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계 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는 내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 만을 생각하지 그 분께서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온전히 주님을 향할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의 삶의 열매들을 먹으신다. 그리고 양떼들에게 그 열매를 나누게 하신다.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그의 양을 먹이게 하신다. 

 

(아 5:2)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 5:3)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함으로 나의 삶의 모든 열매를 먹고 나를 통해 주의 잃어버린 양들을 먹일 때에 그 분께서 은밀히 나에게 다가오신다. 거룩한 교제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삶과 사역으로 피곤한 나는 영은 깨었으나 육체적으로 소진한 자가 된다. 

일에 치여 다시금 은밀한 교제를 원하시는 주님께 응답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이미 은혜를 체험하고 내 모든 허물이 씻어지고, 그 분을 경험하기 위해 험한 십자가의 길을 걸었거늘, 또 다시 영혼의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깨었는데 결국 자는 자가 된 것이다." 그 분의 소리가 들려도 응답하지 못하는 영적인  피곤함과 지침이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또다시 찾아오는 은혜 뒤에 찾아오는 무력감에 신부는 더욱 괴롭다. 

 

(아 5:4)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나 자신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신랑은 자기 부인의 틈새 안으로 그 분의 손을 밀어 넣으신다. 내 마음을 계속적으로 만지시며 내 마음을 여시는 것이다. 주님은 한 번 은혜를 경험한 자가 넘어지도록 방치하시지 않으신다. 

 

(시 37:24)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신실한 자가 넘어짐은 어느 때 오는가? 

내가 주님의 일을 잘 감당했다고 하는 순간 올 수 있다. 나 자신이 어느 정도 섰고, 의로우며, 순결함을 인정받았다고 하는 순간 자기 만족으로 빠질 수 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 의가 나 자신의 의가 아님을 또 다른 다가오심으로 보게 하신다. 나의 자기 의, 자기 교만, 자기 만족을 보게하심으로 나의 유일한 의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임을 보게 하신다. 

 

(아 5:5)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나의 허물을 인정하자마자 나는 다시 주님께 마음을 연다. 다시 주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 회개이다. 돌이켜 여는 것이다. 그 분께 마음을 돌이킬 때마다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 분의 고난이고, 그 분의 십자가이고, 그 분의 죽음이다. 오직 그 분의 십자가의 보혈이 나를 살리신 것이다. 

 

(아 5:6)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내가 다시금 회개할 때에 우리는 그 분이 들어 오셔서 나를 만지심으로 모든 슬픔을 치료하고 회복하실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치유가 급속히 임하지는 않는다. 그 분은 내가 다시 회개 할 때 그 분 자신을 감추기도 하시며 돌아서서 사라지기도 하신다. 

내 교만함은 무엇인가? 

나만 그 분을 찾으면 그 분은 언제나 나를 다가오신다는 교만함이다. 나 중심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내가 그 분을 찾아도 만나주시질 않을 때가 있다.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내 혼이 나갈 만큼 고통스러운 그 분의 침묵의 순간이 있다. 

이 고통을 통하여 내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성품들이 허물어 지는 것이다. 

나 중심적인 교만함이 그 분에 대한 갈망함과 겸손함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 여인의 두 가지 고통

술람미 여인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 여인들과의 계속되는 내적/외적 비교이다.  

그녀들은 왕이 계신 처소에 함께 거한다. 그 분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그녀들은 왕에게 선택받기 위해서 그 분을 시중들기도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가꾼다 . 

세상의 화려한 것으로 자신을 꾸미고 값비싼 향로로서 자신을 바른다  

그 앞에 있는 자신은 한없이 초라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흔든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인들은 주를 위해 자신을 가꾸는 듯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가꾸는 일에만 신경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고 가꾸고 하는 사치와 허영일 뿐이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점점 황폐해져 갈 뿐이다. 

 

그에 반해 술람미 여인은 자신에게 맡기워진 일을 하느라 얼굴도 검게 그을리고 머리결도 상했다. 들판을 뛰어다니며 포도원을 가꾸고 양들의 길을 거닌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양을 치는 왕을 만난다. 마치 한 밤중에 양을 치는 목자들이 주의 나신 소식을 듣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왕이 자신을 선택하고 가장 아름답다 칭찬한다.  

세상 누구도 발견못할 가치를 왕은 보아주었고 칭찬해 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오직 그 분 앞에서 여인은 가장 아름다운 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 순간에라도 그 분의 시선에서 멀어지면 또 다시 예루살렘 여인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나보다 더 화려한, 나 보다 더 예쁜...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흔들어 놓는다.  

 

두 번째 고통은 주님의 임재가 지속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이다.  

그 분의 임재를 맛보는 순간 그녀는 "나를 깨우지 말라" 라며 그 거룩한 임재, 그 깊은 은혜 가운데서 깨이지 않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그 분은 또 다시 사라져 버린다.  

그 분의 임재가 사라질 때 느끼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러한 침묵과 부재 속에서 여인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왕께 맞추게 된다. 왕을 움직이고, 소유하고, 이용하려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끊임없이 기다리고, 찾아오면 반기고, 그 안에서 누리며, 또다시 사라지만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소유함이 아닌 왕의 신부로서 존재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여정을 통해 감정적이거나 소유함이 아닌 존재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그 안에 주님의 동산을 간직하는 주님을 닮은 신부가 되어간다. 

 

<묵상>

1. 내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주님의 흔적들에 대해 묵상해보자. 그 분의 십자가, 그 분의 말씀, 그분의 성품... 

2. 마음이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지침의 순간에 내 삶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주님의 손길을 묵상해보자. 그 분은 지금도 내 삶의 문틈 사이에 그 분의 손을, 말씀을, 사랑을 내미시고 있지 않은가? 

3. 내가 찾고 부르짖고 찾음에도 떄로 침묵하고 부재하도록 느끼게 하는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 부재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찬양) 나의 삶에 예수의 흔적있으니 

 

아가서 4장 9-16절  (잠근 동산에서의 열매) 

 

몰약과 유향이 있는 가장 높은 산, 레바논으로 신부를 초대하시는 왕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길을 함께 나서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아 4:9)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 신부라고 불렀던 신랑은 이제 여인에게 내 누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아버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로 맺어진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또한 한 아버지 안에서 형제가 됩니다. 
  •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내가 모든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선이 그 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았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이 어디계신지 알지 못하는 때에라도 여인은 그 분을 찾기에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을 향하는 자에게 주님 또한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 4:8) 

 

  • 한 번 본 다는 것은 일시적인 한 번이 아닙니다. 내 모든 존재와 정결함이 담겨 있는 한번입니다. 한강의 한이 큰, 깨끗한의 의미이듯 여인의 한 번 바라봄은 그녀의 바라봄이 얼마나 간절하고 순결한 바라봄이었는지를 알려줍니다. 
  •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는 전적으로 그 분께 메인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인은 그 분 없이는 살 수 없는 스스로 매인 자 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진실한 고백을 한 자 입니다. 그러한 갈급함과 간절함이 있는 자에게 주님은 또한 마음을 빼앗기십니다. 

 

(아 4:10)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사실 가장 큰 사랑은 독생자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들 주님의 사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음에도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그 사랑을 부족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분을 정말 사랑하는 자를 주님은 진심으로 감격해하시면서 그 사랑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것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가 늘 실패하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자를 주님은 정말로 기뻐하십니다.  

 

(아 4:11)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주님께 시선이

  •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리고 그 말씀의 권능을 사람에게도 주셔서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만물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명한즉 그대로 되리라"는 하나님의 창조작업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의 말은 어지러워졌습니다. 그 말에 생명력이 사라지고 말을 해도 성취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다시금 그 말의 열매를 주십니다. 
  • 네 입술에서는 꽃방울이 떨어진다. - 말한즉 열매맺는 말의 권능이 회복되는 것이요 
  •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열매 맺는 말의 비결은 바로 그 입술에 꿀과 젖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다- 여인의 말은 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복(삶)으로 이어지는 삶의 열매입니다, 향기나는 삶입니다  

 

(아 4:12)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 주님을 온전히 사모하는 신부의 영혼은 주님이 거하시는 동산입니다. 사탄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천사가 호위하는 닫혀진 동산, 잠근 동산입니다. 안에서부터 영원히 샘솟는 우물임과 동시에 밖의 환경이 침범치 못하는 덮은 우물입니다. 썩지 않도록 흐르는 샘이되 다른 생물들이 침범치 못하는 봉한 샘입니다. 다른 영혼, 다른 양떼에게 주의 동산을 열기 전에 주님은 오직 신부의 영혼 안에서 은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아 4:13)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아 4:14)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아 4:15)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주님과 은밀히 교제함으로 우리 영혼에는 각종 열매들이 열립니다. 석류는 한알 한알의 씨앗이 한 열매 안에서 열리는 씨앗의 과실입니다. 한알 한알이 과즙을 내는 과실입니다. 그러한 열매는 고난의 과정(유향과 몰약)을 통해서 계속해서 열립니다. 이러한 열매는 하늘로부터의 (레바논에서부터) 공급되어지는 하늘의 열매입니다. 삶의 열매입니다. 

 

(아 4:16)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신랑의 칭찬을 들은 신부는 자기 안에 주어진 모든 은혜의 가능성들은 오직 그 분이 오실 때에만 열릴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 분이 오시도록 성령의 은혜가 더욱 더 주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찬양의 가사로서도 유명한 이 구절은 내 마음 속에 성령의 임재, 성령의 역사가 더욱 임해서 나를 통해서 주님의 향기가 발하도록 간구하는 신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신앙의 장벽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가치관인가? 주님의 부재, 혹은 침묵인가? 그 밖의 다른 것인가? 

 

2. 주님 안에서 내 입술에 어떠한 권능이 있는지를 묵상해보자. 내 입술은 열매맺는 입술인가? 말씀이 가득한 혀를 가지고 있는가? 

 

3. 나의 삶, 나의 영혼은 주님이 거하시는 동산인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가?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가? 

 

(찬양) 물덴 동산 

 

아가서 4장 6-8절  래바논에서 함께 하자 

 

(아 4:6)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신부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후에 왕은 또 다시 홀연히 떠날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임재와 연합 가운데 충만했던 은혜는 또 다시 부재와 침묵 속으로 돌아가 더 깊은 사랑을 위한 시간을 준비합니다. 

 

말씀과 은혜 - 함께 할 때는 한 없이 행복한 것이지만 그 말씀은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 음식을 소화시키듯 끝없는 묵상과 또 순종함을 통하여 온전하고 깊은 삶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육신이 되어 삶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신비이자 여정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떠나는 신랑의 여정은 단순히 신부를 홀로 내어버려두고 사라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가 갈 곳을 알려 준 후 그 곳으로 같이 가자 하십니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반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꼐 가자." (8절)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 천국의 복음, 산상수훈을 들려주시듯 자신의 사랑하는 신부를 십자가의 산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레바논에 있는 산은 어떤 산입니까? 

  • 첫 째, 그 산은 몰약과 유향이 있는 산입니다.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몰약과 유향의 이미지는 여인을 치료하고 회복하며, 또한 주님의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시는 그런 삶의 길입니다 .

십자가의 삶, 고난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향을 발하는 것이고 주님은 그 안에서 참 쉼을 주십니다.

우리 삶은 축복으로 향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축복을 달라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마치 자신이 높아져야 하나님의 이름이 빛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풍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으로 부르시어 제자들을 향한 특별한 말씀을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나니..." 

 

그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오직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복입니다. 

왕은 술람미 여인을 산으로 불러 예루살렘 여인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신비하고 거룩한 영적인 길로 초대합니다.   

 

  • 그 산은 우리를 흠이없게 하는 산입니다. 

(아 4:7)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십자가의 산 아래에서 우리는 아무런 흠이 없는 자가 됩니다. 그 분께서 우리의 모든 흠을 가리우고 창조하실 때 모습처럼 보시기에 심히 좋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때 삶의 아름다움은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만 그 분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의 삶은 우리를 세상 그 무엇보다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자신의 외모를 가꿉으로 아름다와 지려고 했습니다. 겉은 아름다왔지만 그들은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한낮 평범한 하층 여인에 불과합니다. 노동으로 인해 검게 그을린 피부며 들판을 뛰다니는 모습은 예루살렘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에게 선택을 받음으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됩니다. 그 분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가꾸어도 자기 만족에만 머무는 삶은 아름답지 못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같고 어리석고 미련한 길이지만 주님을 따라 좁은 길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것이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천하에 있는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하를 창조한 그 분 안에 있으므로 천하보다 귀한 자가 됩니다.  

 

(아 4:8)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해석상의 가장 어려운 구절입니다. 

이 전까지 왕은 술람미 여인을 "나의 어어쁜 자,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비둘기"라고는 불렀어도 한 번도 나의 신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녀를 나의 신부라고 부릅니다.  

레바논은 사시 사철 꼭대기에 눈이 쌓여있기 때문에 '흰산'이라는 의미로 솔로몬의 성전을 지은 백향목의 원산지입니다. 3장에서 이 곳의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 신부를 불렀습니다. 

광야에서의 장막 성전은 조각목으로서 지었지만 솔로몬은 가장 좋은 나무인 백향목으로 지었습니다. 

조각목같은 술람미 여인이 왕으로 말미암아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백향목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분의 죽음으로 그 분의 자녀, 그분의 신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가장 고귀하고 좁은 길, 높은 길을 향하는 그 분의 제자, 그 분의 신부로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서에서는 신부로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 부르는 삶입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는 레바논 산의 봉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아마나는 ‘진리’이고 스닐이란 ‘부드러운 갑옷’을 의미하며, 헤르몬은 ‘파괴’라는 뜻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각각의 특성을 가리키듯 참 진리, 승리자(구원자), 그리고 심판자의 의미를 지닌 세 봉우리입니다. 

 

여인을 이 레바논 산으로 불러 세 봉우리를 보여주시는 것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상에 오르셔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이 경험한 삼층천을 기억나게 합니다. 

참제자, 참 사도, 참 신부인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맛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맛을 본 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오늘 죽어 천국에 가자하면 망설입니다. 

장가도 가야하고, 성공도 좀 해 보아야 하고,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 땅의 것에 미련을 두고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나 탈출하게 하시는데 뒤를 바다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아내와 같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술람미 여인은 비둘기 처럼 순전히 오직 왕을 바라보다가 레바논 산에 오르게 됩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 이 땅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영적인 깊은 체험은 우리의 순전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두 마음을 두면 안됩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미련을 두면 그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사자 굴과 표범 산에 내려다보아라”. 사자나 표범은 땅을 지배하는 짐승들입니다. 땅의 정복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자가 되기 위해, 표범이 되기 위해 그들을 우러러 보지만 

왕과 함께 레바논에 오른 술람미 여인은 이제 그런 것들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봄니다. 그녀의 우러름의 대상은 오직 왕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레바논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땅의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 하면서 여전히 땅에 것에 집착하고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가? 

하늘의 것을 맛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직 순전히 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자를 주님은 지금도 산으로 부르십니다. 

참 진리, 참 승리, 참 심판을 맛보게 하시고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흔들리지 않고 파도 위를 걷게 하십니다. 

순전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늘의 은혜를 소망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가치있는 삶을 사십시오. 

 

묵상을 위한 질문) 

1. 난 오늘도 주님과 함께 몰약과 유향의 산을 통해 치유받고 거룩함의 은혜를 경험하는가? 

 

2. 오늘 나의 삶에서 레바논의 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상의 사자와 표범같은 방해물은 무엇인가? 

 

찬양) 주님은 신실하고  

 

아가서 4:1-5 아름다운 주의 신부, 성도 

 

본문은 가마를 타고 혼례식에 오는 신부를 가만히 바라보며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남자, 왕의 고백이다. 

 

1-5절까지 7가지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1. 너울 속에 있는 비둘기 같은 눈 (1절) 

  • 너울 : 면사포 (가려진 면사포 사이로 보이는 사랑하는 이의 눈) - 그 면사포는 신랑과 신부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안경, 우리- 각자의 편견으로 사람의 아름다움을 왜곡시키지만 너울은 나의 신부로, 나의 사랑으로 바라보는 눈. 바로 사랑의 눈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신다. 
  • 비둘기 같은 눈: 가려진 면사포 사이로 그 눈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얼마나 설레일까? 1장에도 표현된 신부의 눈 - 비둘기 같은 눈(곁눈질이 없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평화의 눈, 온유함의 눈, 순결함의 눈) 
  • 나를 바라보는 주님의 눈 - 너울 덮인 신부로서 바라보는 그 분의 사랑의 눈과 그 분만을 바라보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우리의 눈이 마주쳤을 때- 바로 온전한 열매가 열린다. 

 

2. 길르앗 산 기슭의 누운 염소 떼와 같은 머리털 

여인의 머리털이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다는 표현은 풍요와 평화를 느끼게 합니다. 정결하며 아름다운 교회는 풍요와 평화의 부드러움이 넘칩니다. 

 

길르앗- 도피성, 피난처. 모든 죄인이 피하여 편안히 쉬는 곳.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피하여 쉬어 회복하는 곳.  또 이 길르앗 산지는 물이 풍부하여 삼림이나 계곡이나 시내 사이에 점재해 있는 얼마 안되는 농경지에 올리브나 포도가 재배되고있다. 길르앗의 향료- 모든 상처를 낫게하는 치료제. 주의 날개 아래에 쉬며 평화롭게  풍요로움을 누리는 성도의 모습- 바로 길르앗에 누운 염소떼와 같은 머리털이다. 

 

3. 쌍태를 낳은 이 같은 아름다움 (2절) 

   신부의 이는 희고 깨끗하며 쌍태의 양처럼 가지런하여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는 그 자체로서도 아름답지만 이의 가치는 음식을 소화시키는 역할을 다 할 때 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는 양식(말씀)을 소화(이해)하여 저장(기억)시키는 지체. 이해와 기억이 정결케 되어 혼동스럽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말씀 안에서 혼동하지 않고 단순하고 진실되이 말씀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쌍태를 낳은 이같은 아름다움을 가지는 것이다. 

   

4. 홍색 실 같은 입술의 아름다움

입술은 의지입니다. 의지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애정을 담아 키스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될 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따르는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지를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를 신랑은 어여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의 삶은 십자가를 향합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큰 passion(열정)은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5. 석류한쪽 같은 뺨

석류는 많은 씨를 가지고 있는데 모두 한 쪽, 한 외피 속에 들어 있다. 모든 씨(말씀, 생각)들이 정결하고 온전한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서 재정비 되어 있는 것이다. 

 

6. 다윗의 성채같은 목 

목은 생명, 우리의 힘. 다윗의 성채와 비교하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힘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구원.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집. 장막. 이 주님의 요새는 우리를 보호해주기 위한 일천 방패와 용사의 모든 무기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여린것 같은 여인이지만 그 목을 성채에 비유한 것은 그 믿음의 견고함, 그 믿음의 터의 굳건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7.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새끼 같은 두 유방 

유방- 젖을 먹이는 공간. 백합화 가운데서... 정결함 가운데서 주님으로부터 양식을 얻고 또한 내게 임한 양식으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제자로서의 삶.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나누어 주는 생명 양식의 공급처 

성도의 아름다움은 오직 신랑을 사모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부터 나온 순결함이고 그 분의 말씀으로 인해 나의 생각이 정리되고 오직 주님안에 거하는 자의 안전함과 평안함과 강력함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성도의 아름다움은 오직 주님 안에 거할 때이다. 

그 분이 날 아름답게 하시는 것이고, 그 분이 날 아름답게 보실 때 내가 온전히 사랑받는 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여인들,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나 왕이 택하지 않는 아름다움. 

술람미 여인- 자신이 보아도 남이 보아도 별 아름답지 않지만 왕이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아름다움. 

 

묵상을 위한 질문) 

1. 주님이 날 아름답다 여기신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 분이 날 찬찬히 흩으시면서 머리끝에서부터 하나하나 바라보시면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보자. 어떤 기분이 드는가? 난 그러한 칭찬을 듣기에 합당한 자인가? 

 

2. 난 그 분의 사랑을 받기에 내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술람미 여인과 같이 순결하게 정리되어 있는가? 책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두 마음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가? 

 

3. 난 오직 그 분 안에 있을 때에 아름답다는 말을 묵상해 보자. 세상사람들이 아름답게 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들을 생각해보자. 난 어느 곳에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