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26절 - 31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6일째 까지의 창조사역 이후, 가장 마지막 사역 - 인간 창조 

 

1. 창조하다 (bara- create) 

  • bara동사는 오직 하나님만 주어로 받는 동사이고 이 동사는 창세기 1장에서 딱 세번 등장한다. 

1  절: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1절: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27절: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 이 bara동사는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책상을 만든다면 이것은 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만들어진 것이다. 

1) 하늘과 땅 - 아무것도 없는 무(혼돈과 공허)에서 천지, 하늘과 땅이 만들어졌다. 

2) 생물의 창조 - 무생물의 환경에서 살아있는 생물이 되려면 차원이 달라져야 하니까 또 "창조"가 필요하다. 

3) 인간의 창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일반 생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오직 사람을 만드실 때 또 한 번 차원을 달리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는 사람의 존재가 생물의 진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이 후 여러 화산활동과 지각 변동으로 끊임없이 변화와 소멸, 생성을 거듭한다. 

생물들도 진화, 혹은 결합을 통해서 새로운 종들과 변종들이 생겨난다. 

인간도 인간의 범주 안에서 인종과 민족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 그러나 이 세가지 범주, 하늘과 땅의 무생물과 생물, 인간은 각기 서로의 범주 안에서 변화, 생성, 소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창조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 때문이시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창조 

  • 식물과 생물의 창조 -  각기 종류대로 (11-12절) 21절 -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24, 25절 - 종류대로.... : 종 안에서의 진화와 퇴화,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26절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어 다스리게 하자 - 

1) 만물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지만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논하시고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흙을 통하여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2) 하나님의 형상 - (첼렘)- 겉모양(appearance)를 닮았을 때 쓰는 표현이 아니라 본질(being)이 닮았다는 이야기다.  

  • 형상 (첼렘) -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본질이 닮았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 그: 예수 그리스도, 먼저 나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셨다), 얼마나: 영원 전까지

 예수: 성육하신 하나님, 볼 수 있게, 경험할 수 있게 나타나신 하나님

 

 요한복음 15장 8-9절) 

 빌립이 이르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

     - 그는 어느정도 아버지를 닮았는가?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다. 꼭 닮았다.-> 이것이 완전함이다. 

     

  •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일 

골로새서 3장 10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새 사람,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사람. 

 

구원의 진리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하는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여 부르신 자들)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예수 - 독생자, 그러나 그의 형상을 본받는 자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의 형제로 부르셨다.  

 

3. 인간의 가치, 사명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정복하고 다스리라- 왕의 사명 

억압하고 마음껏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선한 왕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듯, 연약한 만물을 돌보고, 관리하고, 이름을 짓듯, 그들의 삶을 번성케 하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주는 왕의 사명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에게 주신 가치이다. 우리로 하여금 만물이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및 창조에 있어서 인간의 위치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모든 생물을 각기 종류대로, 그 종을 섞이지 않게,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직분을 주어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만물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거나 우연에 둔다. 모든 생물을 종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진화를 통해 하나의 기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우고 동물들 중의 하나로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의 세계는 스스로 동물의 세계로, 동물과 별 다를 바 없는 가치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묵상> 

1. 모든 만물 중에서 사람을, 당신을 가장 가치있고 소중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보자. 

 

2.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당신을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그런 존재임을 믿는가? 

 

찬양) 깊어진 삶을 주께 (은혜로 날 보듬으시고) 

 

머리깎인 용사 (사사기 16장 22-31절) 

 

사사기 - 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실패했는가? 

왜 은혜의 땅에서 은혜롭게 살지 못하는가? 

사사기 - 타락한 시대에 사사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시어 민족을 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섭리 

그런데 그 기간이 지나가면서 그 시대의 악함은 더욱 심해져가고 하나님의 손길은 점점 희미해진다. 

사사기서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점점 추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주 - 기드온: 사사기에 소개되는 열 두 명의 사사 중 5번째 인물. 소심하고 연약한 자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숫자를 철저히 줄이고 빈항아리와 횃불 (자기 뜻, 자기 의를 버리고 오직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신) 을 가지고 미디안을 대적하게 함

큰 용사는 무엇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구약에서 큰 용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 여호수아. 기드온, 다윗 -> 공통점은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말씀 안에 거한 자. 

                                                         

 기드온과 다윗과 정 반대의 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용사 - 삼손, 열두 명의 사사 중 가장 마지막 인물  

 오히려 교회 바깥에서 많이 회자 되는 인물, 영화, 신화, 회화나 조각 등 문화적으로 가장 많이 황용되는 인물 중 하나 

 머리 기른 남자를 보면 삼손... 

사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예하여 다룬다. (13장- 16장), 그러나 설교에는 의외로 많이 소개되지 않는 인물 - 왜? 신앙적으로 본받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 그의 출생- 영웅의 서사 (13장) 

사사기 13장에는 그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는데 블레셋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지파 사람 마노아에게 직접 나타나 ‘네가 아이를 가질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터이니 너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가 그의 출생을 알림 - 셰레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가장 큰 능력을 부여 받은 인물 - 솔로몬 (지혜), 삼손 (힘) 

삼손은 혼자서 블레셋을 상대 -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천명의 블레셋 군사를 죽임. 

 

그러나 그의 끝은 시작처럼 훌륭하지 않다. 

비참하고 비장하고 초라하다. 

이스라엘을 20년간 이끌었던 그의 죽음 앞에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동족인 유다인들에 의해서 블레셋에게 넘겨졌다. 

 

사사기의 전형이다.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행복하지 않고 은혜는 경험했는데 기쁨이 사라졌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가 아니라 시작은 좋았는데 끝은 비참하다. 복음과는 정반대의 길로 향한다. 

왜 그랬을까? 

 

13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 또 짓는 죄, 다시 짓는 죄.... 회개 후에 또, 토한 것을 먹음...

왜? 자존감이 무너지고, 정체성이 사라지고 사탄의 참소의 빌미를 제공.. 한 번 습관들이면 벗어나기 힘들다. 

성경에서 소개된 질병 - 영적 상태의 결과 -> 소경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 절뚝발이 -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 (진리의 길을 가지 않는 자) 

중풍병자 (몸이 머리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자 - 불순종) , 혈기 마른 자 (피가 부정한 자 -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진 자, 관계가 막힌 자) 

그 중 가장 큰 병 - 문등병자 - 통증을 모르는 자 - 죄에 대한 둔감성. 죄를 지어도 죄의식도 없고, 죄의식이 없기에 회개도 없다. 

 

그 결과 -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다. (2절) -> 일을 해도 열매가 없다. 결과가 없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다. 

창세기의 구속사 - 아브라맘, 이삭, 야곱 - 잉태치 못하는 자들이 잉태하는 역사 - 구원의 역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을 이야기한다. 

12절) 마노아가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4절)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17절) 

달리 말하면 그 말이 안 이루어지면 하찮게 여긴다는 소리? 그들의 복을 기원하는 우상에게 하는 소리 

이름을 왜 묻는가? 넌 어떤 존재이구나. 그 정체와 한계를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이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 내 본질,

그리고 피조물에게 지어주라 하시는 것 - 이름을 통해서 지배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 기묘자 (Beyond Understanding)-> 네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름,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이 물으면 누가 보냈다 하리이까? 

스스로 있는 자가 보냈다 하라. 

아니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마라. 난 나다. 난 이름으로 제어받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태어난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 

 

그런데 삼손이 커서 제일 먼저 한 일 - 블레셋의 여인을 보고 결혼시켜 달라. 

삼손 - 여인들 이야기 

세명의 여인 - 첫 번째 아내, 블레셋 여인, 그리고 들릴라 만나기 전에 가사의 기생(16절), 들릴라  . 

 

딤나 -  에돔의 후손이며 아멜렉의 본거지가 딤나이고 야곱의 아들 유다가 창녀로 둔갑한 다말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곳. 여러가지 죄악의 본산지가 이 곳 딤나인데 하필이면 삼손은 그곳으로 내려가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

딤나에서 한 일 - 젊은 사자를 찢어 죽인 일 - 8절) 그 사자의 주검을 본 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끌이 있는지라. 

9절)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않았다. 

-> 사자의 주검에서 나온 꿀- 부정한 것. 죽은 것은 부정한 것 그런데 그것을 먹고 부모에게도.... 

 

자, 삼손은 그 출중한 능력에도 실패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삼손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힘, 훌륭한 외모 등 여러가지 장점을 지닌 유력한 사사였습니다. 능력 면에서는 최고. 그의 활동 기간 중 감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침범치 못할 정도, 이스라엘 누구도 감히 그에게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의 가장 흉악한 대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허비했고, 방탕하여 스스로 온갖 고난을 자처했습니다. 우리는 삼손이 저지른 실수를 통해 우리 신앙인이 저지르기 쉬운 전형적인 방식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신앙적인 실패들을 진단할 수 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잘못된 신앙습관으로 인해 다가올 문제들도 피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 - 하라와 하지 말라.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

 

1. 그는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라 감정의 사람. 

 그는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했고 빈번히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는 분노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를 꾀어 자신이 낸 수수께끼를 푼 블레셋 사람 30여명을 불같이 화를 내며 죽여 그들의 옷을 취하기도 했고 그렇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들판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15장 7절을 보면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11절에 보면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그러면서 또 다시 1000명을 죽여 버립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한 번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나 명령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감정대로 움직였고, 자기 맘에 안들면 다 쓸어버리는 자였습니다. 

 

2. 다른 그의 약점은 그는 정욕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당할 자가 없을 만큼 강한 자였지만 도덕적으로는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아니 주위의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는 육체의 정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이면서도 늘 여인들과의 추문이 뒤따르는 자. 여자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망을 쫓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능력을 다 잃어버리고 결국은 눈이 빠져서 맷돌이나 돌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을 끊질기게 묻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강, 지혜, 능력, 사랑을 끊질기게 물어 못쓰게 만들어버립니다. 

 

어느 누구도 실패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는 우리의 삶의 습관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실수를 통해 회개하지 않고 고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을 때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점점 죄에 무딘 자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영적 문등병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가 신앙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완전히 소진시키고서야 비로서 자신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후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이건 내 삶 속에서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야. 난 그 부분엔 항상 넘어질 수 밖에 없어. 이건 내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부분이야.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하고 포기하거나 합리화시킬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한 부분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삼손이 잘못한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도 않고 단지 습관적으로 죄를 반복했던 그의 무감각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의 악순환을 끊을 능력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 지금도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솔직하게 그 분에게 내어 놓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실수, 허물을 내어놓고 정면으로 부딪치고자 할 때에 우리에게 그것을 이길 능력을 주십니다. 

 

3. 세 번째 그의 실수는 그가 주위에 좋은 친구들을 두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특별한 임무를 위해 그를 선택하셨지만 그는 건전하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잘못된 길로만 인도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누구와 어울리는가? 그것은 우리의 전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양하게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인간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인간관계의 중심, 내가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고, 만족을 얻으며, 즐거음과 행복을 느끼는가? 그 사람들이 내 신앙의 유익한 사람인가? 아니면 내 신앙을 소진시키는 사람인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잘못된 교제는 우리의 사고를 방해하고 삶을 망가뜨립니다. 

섬김의 삶 속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왜? 영적으로 힘들 때에, 영혼의 밤을 걸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내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자, 은혜를 공급할 수 있는 자.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서 그토록 오네시보로에게 감사를 표하고 기도했던 동역자... 그런 영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를 가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4.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삼손의 실수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는가? 영적인 일에 진지하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성실하게 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이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 일에 매달렸습니다. 자기 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이끌리며 행동했습니다. “해서 기분 좋으면 했고, 기분 나쁘면 죽이거나 불을 지르는 것”이 삼손의 행동양식이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서 태어났지만 삼손은 늘 하나님의 계획엔 무관심했고, 자기 육신의 욕구대로만 살았으며 그 결과 그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은 무가치한 사람으로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린 20년 동안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지 못하다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었던 것은 단 두 번 나오는데 한 번 죽기 전 자신이 묶여있던 집을 무너뜨릴 때를 제외하면 그가 목이 말라 부르짖었을 때입니다. 육신적인 목마름이라 할지라도 그가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물을 내리셨고 그래서 그는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이름붙이기도 했지요. 인생의 대부분을 그는 충동적으로 성급하게 자기 능력대로 행동했지 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 분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도움을 주십니다. 삼손은 자신이 목마를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목마름이 지나자 또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을 진지하게 예배한다는 것은 날마다, 매 순간 마다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분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것이 팔복 중에 첫 째 복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손의 생이 마감했으면 그는 정말 비참한 삶으로 끝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였지만 그는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그렇게 마음먹자 하나님은 잃어버린 그의 힘을 회복케 하셨고 그가 영웅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수많은 적들이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 세운 다곤 신전에서 삼손은 가운데의 두 기둥 사이에서 그 기둥을 밀어내어 모든 이방신전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 3000명을 죽게 합니다. 애초에 삼손을 보내신 목적,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을 완성하고 죽게 합니다. 

 

 

결론 

 

대개의 경우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파했던 다른 일반적인 사사와는 달리 삼손은 영웅으로 태어납니다. 날 때부터 천사가 그의 탄생을 예비했고 그는 블레셋 사람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삼손과 같은 능력을 모두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세상에서 눈멀고 머리 잘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실인 -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 내 머리를 손상시키지 말라 -> 우리의 머리는 무엇입니까? 교회된 성도의 머리는 오직 말씀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삼손의 힘이 머리에서 나오고, 삼손이 머리가 깎임으로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머리이신 주님을 잃은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떠나고 말씀을 떠나면 머리깎인 삼손이 됩니다. 두 눈 역시 뽑혀 진리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맷돌 돌리듯 똑같은 일상 속에서 열매 없는 일들만 반복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 합니다. 내 뜻, 내 정욕, 내 욕심, 내 성질대로만 살아가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엉망이 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이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날 사용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무릎꿇고 부르짖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택하신 어떤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누구에게나 창조의 목적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뜻의 중심을 발견할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고 발휘활 수 있습니다. 

큰 격려가 되는 부분은 실패의 연속을 살다 간 삼손이지만 하나님의 명예의 전당,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히 11장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할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무엇을 이야기 해 줍니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시고 그를 사용하여 선하고 위대한 일, 그가 맡기신 사명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힘을 얻기 위해 인생의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 가장 큰 힘을 가졌던 삼손, 모두 신앙 안에서 헤메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힘을 향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주를 향해 갈아가는 성도,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입니다. 

기드온처럼 내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주가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됩니다. 힘이 아닌 주를 잡으십시오. 힘이 아닌 주를 의지하십시오. 

그 손을 꼭 붙잡고 인생이라는 큰 항해의 길에서 길을 잃지 않고 주와 함께 승리의 길, 소명의 길, 사명의 길을 감당하시는 주의 큰 용사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창세기 1장 3-25절 보시기 좋았더라 

 

1. 첫 번째 명령이 있기 전,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있기 전. 

그 상태를 규정짓는 세가지 단어, 혼돈, 공허, 흑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주님 밖에 거할 때, 다시 나타나는 무질서의 상태 - 혼돈 공허 흑암 

 

예레미야 4장 22-23절)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 흑암 

 

우리가 말씀 밖에 하나님의 은혜 밖에 살아갈 때에 우리 삶의 모습-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2. 창조사역의 주체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시작된다. 

1절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2절 -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다 

3절 -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빛이 임하니 흑암이 사라지고 밤이 낮이 되었다. 

 

요한복음 1장 1-5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느리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분 - 예수 그리스도,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오신 분 -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 - 핵심, core - 빛 

 

창세기 1장 1-3절은 창조의 하나님을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그린다. 1절에는 창조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 

2절은 그것을 운행하시는 (품다, 작동하다) - 성령님 

3절은 하나님의 영이 실현된 말씀과 그 말씀의 첫 열매- 빛이신 예수그리스도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의 세계를 빛으로 채워 흑암을 몰아내신다. 

 

이사야 9장 1-2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갈릴리- 예수님이 자라고 제자를 삼고 사역을 시작하신 곳 - 흑암에서 빛으로 

 

3. 창조사역의 내용

6일간의 창조 - 마지막에 인간창조,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 

 

첫째 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빛과 어둠을 나누신 것 (엄밀히 말하면 흑암으로 가득차 있던 세상을 빛을 보내어 어둠을 몰아낸 사건이다)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여전히 어둠이다.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둘째 날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물과 물을 수직으로 나누어서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십니다. 그리고 궁창 위의 물을 하늘이라 부르십니다. (수면으로 가득차 있던 세상을 바다와 하늘(빈 공간)으로 나누신다. 

셋째 날 하신 일은 땅의 물을 나누어서 바다와 육지로 나누십니다.  둘째 날이 물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것이라면, 셋째날은 물을 수평으로 펴서 땅과 육지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율법은 다름아닌 정결예식이라 합니다. 이 목적은 거룩하라는 것인데 거룩하라는 것은 속된 것으로 부터 나뉘어서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즉 거룩은 곧 구별되고 분리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신 후 이 나누어진 세계를 다시 십자가의 공로로 잇게 하신다. 합하게 하신다. 믿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 세상으로 가라 하시고 죄인과 병자들을 만나라 하신다. 그러나 이런 연합의 선결 조건은 구별됨이 먼저 되어야 한다. 

 

넷째날 하나님이 하신 일은 첫째날 구별하신 어둠과 빛에 해와 달과 별을 보내신 일입니다. 그래서 빛이 주관하는 낮엔 해를 두어 낮이라 하시고 밤에는 달과 별을 두어 질서를 만드십니다. 

다섯째날 하신 일은 하늘과 땅의 물에 새와 물고기를 보내사 하늘의 물에는 새를, 땅의 물에는 물고기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여섯째 하신 일은 이제 땅의 물에는 이미 물고기가 살므로 육지에서 살아가도록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 첫째 날 부터 셋째 날까지 어둠과 빛을 나뉘게 하시고,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뉘게 하시고, 땅과 육지를 나뉘게 하신 뒤에,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각각 나뉘어진 공간에 살아가도록, 각각의 창조물들을 파송하신 것이지요. 이것이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부터 셋째 날까지 나눔과 분리를 통해서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은 각각의 자리마다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셔서 그것을 보시기 좋았다, 곧 복이라 명하십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나뉘고 분리하게 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는 각각 나뉘어진 공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의 열매인 창조물들고 채워나가는 것,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 이것이 창조라는 것입니다. 

 

창조란 무엇인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행하시는 작용 

 처음엔 나뉘고 분리하게 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는 각각 나뉘어진 공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의 열매인 창조물들고 채워나가는 것,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 이것이 창조라는 것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하나님 주신 질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 그 결과 안식이 없고 다시금 흑암과 같은 불안함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 빠지게 하는 것이 죄이고 사탄의 일입니다. 

아담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을 없앰. (마땅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게 함)  

가인 - 선악의 구분을 없앰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함) 

바벨탑 - 하늘과 땅의 경계를 없앰. (언어가 혼잡) -> 혼돈과 공허...

 

이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계의 모습이요, 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입니다. 

영적이지 못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무질서합니다. 

삶이 막 뒤죽박죽이고 따라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언가 일은 하는데 열매가 업습니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생각은 하는데 정리가 되질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의 삶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다른 결과, 다른 열매만 나옵니다. 

 

이것이 열매가 없는 삶이요, 잉태치 못하는 삶이요,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는 삶이요, 무덤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변화가 나타납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가 무엇이냐, 무질서 하던 것이 질서 있게 만들어 지고, 아무런 열매 없는, 의미 없는 삶이 의미를 발견하고 목적을 찾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1. 6일간의 창조를 마음 속에 새겨넣자 

흑암이던 세상에 빛이 있으므로 빛과 어둠이 나뉘고 수면으로 가득찬 세계를 하늘위의 물과 하늘 밑의 물로 나뉘신 후, 물을 다시 바다와 육지로 나뉘게 하시고 바다에 생물을 살게 하시고 

빛의 공간엔 해를 두고, 밤의 공간에도 달과 별을 두어 소망을 주시고 

하늘의 공간에 새들을 

땅의 공간에 동물과 사람을 두어 살게하신 일 

나뉘고 거하게 하시는 일 - 창조 - 내 삶에 나뉘어져야 할, 분리되어야 할 공간이 있는가? 

 

2. 선, 안식이라는 것은 내가 마땅이 있어야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어고, 떠나야 할 것을 떠나는 것이 보시기 좋은 것, 즉 선이고 선의 열매가 안식이다. 

 

찬양) 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

 

창세기 1장 1-2절 태초에 하나님이 

 

아마도 설교중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성경 중 하나. 

성경 66권 중에 첫 시작을 알리는 성경 

누구든지 성경 한 번 읽어보겠다고 작정하면서 가장 먼저 읽게 되는 성경 

제 자신도 설교 본문 중 가장 많이 다룬 책 중 하나 - 창세기 

 

그런데 창세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하며 나눈 적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발견되고 연구되며, 또 성경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학설과 발견들이 나오는 성경 - 창세기이다. 

 

1. 배경 

  • 역사적 배경: 성경전체의 서문. 오경이 다 쓰여지고 나서 가장 늦게 쓰여진 부분. 

 

2.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태초에 (In the Beginning) - 시간과 공간의 처음 시작,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처음 시작->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 
  • 하나님은 자신을 만든 존재가 없다. -> 온갖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이 시기에 이 고백은 폭발적인 선언이었다.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압제자들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 
  • 당시 기록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용기와 비장함을 가지고 이 부분을 기록하였을까? 
  •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두 개의 세계관: 하나님이 세상에 창조하셨다. vs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다른 대안이 없다) - 빅뱅이라는 폭발에 의한 자연스런 생명의 탄생, 저절로 생긴 생명체가 진화하여 인간으로....

           

 3.   (창 1:2A)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조 이전의 세계: 혼돈, 공허

 

  • 혼돈이라는 것은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kaos로, 어떤 성경에서는 formless로 번역. 그리고 공허는 emptiness (nothing)으로 번역 - 상호 모순, 함께 할 수 없는 상태 
  •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무질서 하고 뒤섞여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혼돈은 곧 공허함,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질서가 잡혀 있지 않는 가정은 없는 가정의 역할을 못하고 질서가 잡혀있지 않는 삶은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 결과는 흑암의 깊음이다. 흑암이 깊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는 것이다. 불안함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이 손을 대시기 전, 말씀 하시기 전 세상의 모습은 이같이 무질서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만이 가득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창조가 무엇이냐, 무질서 하던 것이 질서 있게 만들어 지고, 아무런 열매 없는, 의미 없는 삶이 의미를 발견하고 목적을 찾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의 삶의 재료가 많아도, 물질이 많고, 학식이 많고, 건강이 있어도 무질서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한 것이고, 하나님의 손길 아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은 삶이 정리가 되고, 질서가 잡히며, 의미있고 열매 있는 삶을 살고, 평안 중에 거하는 것. 

 

묵상) 

1.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가? 당신을 창조한 하나님은 또한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고치시는, 재창조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가? 

 

2. 혼돈과 공허의 두 단어를 묵상해보자. 이 둘이 혼합된 삶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삶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운행하실까를 기대해보자. 

 

찬양) 창조의 하나님 

 

[삿 7:9-삿 7:18]

(삿 7: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삿 7: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삿 7: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삿 7: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삿 7: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삿 7: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삿 7: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삿 7: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삿 7: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삿 7: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 우리가 읽은 본문은 기드온과 300용사가 미디안 군사 13만 5천명의 군사와 싸워 승리를 이루는 전쟁 역사상 가장 기가 막힌 승리를 나타낸 장면입니다.  

 

  • 미디안 족속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 미디안 족속이 두려워서 포도원 틀에서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므낫세에서 가장 작은 가문, 그 집안에서도 가장 약한 자였던 기드온을 택해서 "큰 용사"다라고 부르시며 그에게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내었다"(6장 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1. 우리가 읽은 본문 9절은 "그 밤에"란 구절로 시작됩니다. 그 밤은 어떤 밤입니까? 

기드온이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과 몇가지 사연을 거쳐서 미디안 족속과 아말렉 족속과 전쟁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모으니 3만 이천명 정도가 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보시고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들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여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삿 7:2) 하면서 (1) 두려워하는 자를 돌려 보내니 2만 이천명이 돌아가고 만명이 남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미디안 병사의 숫자가 얼마인줄 아십니까? 자그만치 13만 5천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병사를 다 모아보았자 3만 이천명인데 그것같다 이겨도 기적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기면 또 스스로 자랑하여 내 손이, 내 노력이, 내가 잘해서 이겼다 할까봐 그 숫자를 줄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물가의 시험 (4절) 

더 기가 막힌 것은 나머지 만명이 남았는데 하나님께서 "백성이 아직도 많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서 개처럼 핥아서 마시는 자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또 다 돌아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시험코자 하시는 말씀입니까? 

당장의 문제 앞에서 허둥대다가 허겁지겁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 무릎꿇는 자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가 삼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고난 앞에서도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거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자그만치 9천 700여명이 돌아갔습니다. 3만 2천명 중에서 3만 천 700명이 다 사라지고 300명만 남은 것입니다. 

미디안 족속은 얼마라구요? 13만 5천명입니다. 

미디안이라는 지금 그들의 앞에 닥친 

자꾸 줄이기만 하시는데 여러분 기드온의 심정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그리고 미디안을 치라고 연약한 자 기드온을 불러놓고 자꾸 힘을 실어도 모자란데 하나님께서 너무 많다.. 줄여라. 더 줄여라... 하면서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자꾸만 없애고 줄이고 하실 때 그런 상황을 내가 겪는다고 생각하면 속이 막 타들어갈 것입니다. 조마조마 하면서 "하나님, 나 못해요..." 그러겠지요. 

 

저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일기처럼 묵상한 내용을 남기곤 하는데 이 본문을 2013년에 묵상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때 건물 렌트비가 제 사례비보다 많을 때이고,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전도사님도 계셨습니다.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것만 지출해도 교회 한달 지출비가 최소 7000불이 필요할 때였습니다 .

그 때 교회 은행잔고는 1000불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안수집사로 계시던 집사님께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시면서 교회를 옮기셨습니다. 또 한 성도가 성도들사이에서 시험이 들어 출석을 않고 있었습니다. 

남은 성도 20여명, 한달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 7000불,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제가 감당해야 할 제 학비, 생활비....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숨이 막혔을 때였습니다. 그 때 기록한 묵상일기의 내용입니다. 

 

"자꾸 숫자에만 눈이 간다. 내가 이겨야 할 숫자. 내가 감당해야 할 숫자. 내가 살아야 할 숫자. 내가 써야만 하는 숫자. 내가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숫자...." 

자꾸만 숫자에만 눈이 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 숫자를 없애신다. 계속 줄여나가신다. 숫자를 보면서 절망하고 숫자만을 위해 기도한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내겐 믿음이 없는 것일까? 헛된 믿음만 있는 것일까? 믿음이라 여겼던 고집만 있었던 것일까? 사라지는 숫자를 보면서 입술이 타고 믿음이 타고 마음이 탄다. 하나님, 내 눈에서 숫자를 지워주세요. 숫자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네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숫자를 지워 주세요. 숫자가 아니라 성도의 얼굴이, 그들의 영혼이 보이게 해 주세요..." 

정말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그 밤에...는 기드온에게도, 이 본문을 읽는 저에게도 고난을 통해 거품을 제거하는 기간이었다. 
    고난은 32,000 에서 내가 의지하는 세상의 거품, 자존심의 거품, 정욕의 거품을 빼서 300 으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문제나 환경과 싸울 나의 32,000 의 안전장치를 모두 내어버리고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 300 용사와 하나님만을 안전장치로 삼는 '거품제거기간'이다. 그 거품이 제거되는 그 때에... 그 밤에... 하나님은 작전은 개시되고 일하시기 시작한다. 

 

  • " 그 밤에"는 줄어가는 숫자를 보면서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고 토로하는 시간이고, 왜 32000 을 300 으로 줄여가시는지 답이 안가는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이다.  
    정말 힘들고 이해가 가지도 않지만 그래도 절대로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하나님과의 대화시간이고, 가나안 정탐을 하고 부정적인 열명의 시각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시각으로 바꿔지는 시간이다. 

 

그게 "그 밤에... "로 표현되는 내 개인의 정화의 시간이다. 
어제 새벽에 나누었던 토기가 완성하기 직전에 겪어야 하는 '불가마'라는 고난의 시간이 지난..사르밧이라는 정련의 시간, 정금이 되기까지 겪어야 하는 시간, 바로 ."그 밤에" 이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지금 그 "그 밤에"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하시며 기드온에게 주어졌던 큰 용사로서 살아가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그 밤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 "그 밤은" 내가 의지하는 것을 모두 내려 놓는 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시간입니다. 나의 입장에서는 어려움과 고난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제 의지할 것이 없냐? 이제 내가 너의 써포터, 돕는자, 심부름꾼이 아니라 너의 주인, 너를 다스리고, 너를 인도하는 구원자로 등장하는 시간입니다.  

 

  •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변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점입니다. 인간적인, 세상적인 관점이 바뀌어서 영적인 관점, 믿음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 속에서 세상적인 관점, 세상적인 기준에 대해서 세뇌당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실력만큼 사는 것이 최상입니다. 가장 잘 되었을 때가 그렇습니다, 자기 그릇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나에게 맡겨진 것만을 하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 믿음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꿈꾸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믿음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은 자기 인생의 크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기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던 인생이 열정을 품게 되고, 안된다고만 여겼던 것들을 믿음 안에서는 내게 맡겨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3. 두려워하고 있는 기드온을 하나님께서는 부하와 함께 진영으로 내려가 그들의 말을 듣게 합니다. 

(삿 7: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 내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수가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해변의 모래 같은지라. 눈에 보이는 상황은 암울합니다. 변한 것이 없고 그들의 수는 자신을 압도합니다. 그런데 내려가서 염탐하니 그 병사들 중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꿈을 말하는데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앞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하면서 기드온의 칼이 자기의 진영을 무너뜨릴 것을 이야기하며 두려워합니다.
  •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순종했더니 무엇이 바뀝니까?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현실에서 희망이 보입니다. 자기는 미디안을 두려워하는데 그들은 이미 기드온의 칼이 자기를 무너뜨릴 것이라 염려하며 두려워합니다. 300명으로 13만 5천을 상대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갔더니 오히려 미디안이 기드온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보리떡 한 덩어리가 들어와 미디안 진영을 무너뜨렸다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실 때에 사탄이 나타나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유혹합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마 4:4) 광야에서 내리는 떡덩이는 무엇입니까? 만나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드렸던 소년의 보리떡 다섯개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말씀 앞에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떡덩이가 들어와 그것이 기드온의 칼이 되어 미디안의 진영을 무너뜨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말씀하시면서 17절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의 검입니다. 
  • 관점이 바뀌니까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없어지니까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선포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삿 7:15) 

 

4.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클라이막스) 

  • 지금 300명의 용사는 어떤 용사입니까?  3만 2천명 중에서 가리고 가려서 뽑은 정예 군사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자들입니다. 그럼 그런 정예 부대를 통해서 전쟁을 한다면 전략적으로는 게릴라 전이라든가 그들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도저히 상식밖의 일을 명하십니다. 
  •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라. (16절) 
  •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1) 나팔 :

  • 이스라엘의 전쟁은 항상 나팔을 분 자들이 가장 앞에 섭니다. 나팔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사망권세를 멸하시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며 외치며 진격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기드온의 명령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기준과 잣대로 부정하게 적용했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듯 이들은 기드온의 말을 듣고 순종하며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그것이 곧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논쟁으로 시간 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에게 순종하며 나아갈 때 전쟁은 승리합니다. 

 

2) 빈항아리

  • 항아리는 담는 것입니다. 
  •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항아리는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영혼입니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우리 마음 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빈항아리를 가져오라 명하십니다. 내 욕심, 내 판단, 내 기준 다 버리고 오직 순종하는 빈 마음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와서 그 빈항아리를 깨뜨리라 하십니다. 부스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숫자를 의지하고, 약을 의지하고, 환경만을 의지하는 가득찬 항아리를 비우고 가져와서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며 남긴 글 

  • "항아리가 뭘 뜻하죠?" 하고 묻는데, "넌 거기에 뭘 담고 싶니?" 라고 되물으신다. 항아리에 무엇을 마실까...의 물을 담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무엇을 먹을까...의 양식을 담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횃불을 담으라신다. 횃불은 성령입니다. 내 두려움과 내 욕심과 내 기준을 버리고 그 속에 성령의 기름, 성령의 충만, 활활 불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기도로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대로 너희도 그리하여....(사 7:17절) 

 

*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대서 나옵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그냥 믿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단지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 할테니 내 부족한 것 도와주세요. 가만히 계시다가 내가 못하면 도와주세요...그런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오직 그 분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방법, 내 기준, 내 관점을 버리고 철저히 그가 하는대로 내가 행하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결론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며 그 시기를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승리의 시간으로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비겁하고 소심했던 자에서 하나님의 큰 용사되기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숫자만 바라보다가 비로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영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개척 2년째, 새해를 맞이하면서 정말로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잘 갖추어진 교회가 아닌 아무 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개척교회를 다닌다고 결정하는 것,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정말로 감격스런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할 순간에 또한 가장 힘들 때에 힘이 되었던 말씀을 주십니다, 

어려울 때에 숫자만을 두고 기도했듯이, 잘되고 부흥 할 때도 숫자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내 그릇 안에 만족함이나 교만함이 아니라 빈그릇 안에 성령을 담아 삶이라는 이름의 전쟁터에서 끝까지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잘될 때도 안될 때도 있습니다. 잘되면 목이 굳어지고 안되면 움츠려드는 것이 세상 인생살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교만해질 이유도, 소심해질 이유도 없습니다. 주 안에 생명이 있고 만족이 있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가서 8장 5-13절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6절)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도장 -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는 사랑. 또한 도장은 누가 그의 주인인가 "소유주"를 나타낸다. 계약서, 그림, 인감...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가 드러나 있다. 

너는 나의 것이다. 내가 너의 주임을, 사랑임을 새겨라.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음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사랑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왜 질투를 하나. 세상의 성인군자처럼 질투하는 모습이 연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다.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건, 무엇을 하건 질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질투는 사랑하기에 그 사랑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7절)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죽음, 곧 사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꼼짝 못합니다. 어떤 권력도 죽음 앞에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을 넘어섰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의 죽음과 바꾸었습니다. 죽음을 뚫고 부활했습니다. 무엇이 사망을 이기고 일어나게 합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예전의 동화. 죽은 공주를 살리는 것 - 왕자의 입맞춤 -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은 죽음을 이긴다는 믿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고난을 상징합니다. 홍수도 마찬가지 압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은 어떤 고난도 심판도 능히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한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긴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미는 여러구절에 있습니다.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고 해도 멸시를 받을 정도로 사랑은 귀합니다. 

 

8-9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그가 성벽이라면 우리는 은 망대를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이라면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여인과 왕의 사랑을 바라보며 주위의 사람들은 부러움을 드러내며 자신들 대신 이젠 자신들의 어린 누이를 잘 양육하여 왕의 청혼을 받으리라 소망합니다. 

유방이 없다는 것은 아직 미성숙했다는 표현이지만 동시에 아직 말씀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없는 영적 미성숙을 나타냅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외모에만 치중하느라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또다시 그들의 관심은 그들의 작은 누이에게조차 은망대로, 백향목으로 치장하고자 하는 기대를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왜 왕이 여인을 사랑했는지, 왕의 관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꺠닫지를 못합니다. 

 

10절) 다시 술람미 여인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이야 말로 그들이 꿈꾸는 망대와 성벽임을 나타내며 외모가 아닌 사랑에 의해 선택된, 사랑받는 자야말로 평화임을, 그것이 곧 솔로몬과 술람미가 의미하는 평화임을 이야기합니다. 

 

11-12) 솔로몬이 비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 너는 천을 얻겠고 열매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술람미 여인의 원래의 직업은 포도원을 지키는 자였습니다. 그는 포도원 주인의 일꾼으로 주인인 솔로몬에게 열매를 드리고 그 중의 작은 부분을 취하여 먹고 사는 일꾼이었습니다. 

           성도의 자세 - 청지기 - 맡은 자로서의 사명, 물질도, 사명도, 더 나아가 자신의 몸도 주가 맡기신 것- 그것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 

           

           그런데 그러한 일꾼이었던 여인이 솔로몬을 진정 사랑하매 솔로몬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에게 무엇을 바쳐야 하는 일꾼이 아니라 그의 것을 함께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립니다. 

           

왕의 마지막 말 

13절)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아가서 -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 그런데 또 다른 이 글의 대상. 여인의 친구들, 예루살렘 여인

             주 안에 있지만 아직 주의 사랑을 누리지도, 그의 말씀을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 그 사랑을 꺠닫지 못하는 사람들 

             온전하고 성숙한 사랑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을 동산으로 초대하는 것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여인의 소리를 통해 주의 사랑을 알게 하라 - 주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의 사명 

 

여인의 마지막 말 

14절)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이제 여인은 주가 어디를 가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어디를 가든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은 그의 것임을 안다. 

신앙은 감정을 넘어 주가 날 사랑하심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지 지식으로가 아니라, 단지 감정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삶의 진리로서 그 사랑을 영접한다 .

그리고 이제 그가 어디를 가든 함께 그 사역에 동참한다. 그가 어디를 가든 그는 양들을 먹이고, 포도원을 돌보는 목자이기 떄문이다. 

 

아가서 - 주와 성도 (아가페) 사랑을 남녀의 사랑 (에로스)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랑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둘 만의 사랑이 아니라 항상 무리를 향한, 이웃을 향한 초대의 사랑이다. 

CS 루이스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하여 그 사랑을 인간을 통해 더 많이 함께 누리고자.... 

 

주의 사랑은  퍼져가는 사랑.  번져가는 사랑이다. 

 

       찬양) 주님은 신실하고     

 

아가서 8장 1-3 절 온전한 사랑 

 

(아 8:1)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이제 신부는 차라리 신랑이 오라비 같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오라비'는 신랑이 자기를 향하여 '나의 누이, 나의 사랑'(6:2)이라고 부른 데 대한 응답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며 사귈 때 - 은밀한 공간에서 둘만있고 싶은 관계,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꼭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아니더라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만나고 싶을 때, 처음의 관계, 특별한 사이로 나아가는 관계-> 그 다음의 관계는 특별한 관계에서 자신의 일상의 삶으로 들어오는 관계, 어느 곳이든 늘 동행하는 관계 

  • 처음의 깊은 교제: 은밀한 교제, 순간적인 교제
  • 성숙한 깊은 교제: 일상의 임재, 동행... 

 

플라톤의 사랑정의 : 에로스 (남녀간, 부부간 사랑) 필로스 (형제간 사랑), 아가페 (신적사랑) 으로 구분짓는다. 

그리고 필로스는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넘어가는 더 깊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필로스는 에로스가 아가페로 가는 다리이며, 에로스는 필로스와 하나가 될 때 가장 아름답다

아가페 안에 에로스가 내재할 때 아가페는 가장 숭고해진다. 

아가페 사랑을 신적 사랑, 에로스 사랑을 육체적 사랑이라고만 이해할 때, 우리는 에로스를 욕망적인 사랑으로, 아가페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다. 

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아가페 사랑을 연인과의 에로스적 해석에 빗대어 표현된 문학이다. 

누구도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그러한 남녀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영성가들은 아가서를 통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마치 연애하듯, 연인과의 관계처럼 친밀하고, 은밀한 동시에 구체적인 사랑의 관계로서 바라보게 되었고 많은 영감을 나누어 주었다. 

오늘 읽은 8장을 통해 왕과 여인의 관계가 둘만의 에로스적 관계에서 형제애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며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에로스와 필로스와 아가페가 마치 삼위일체를 연상시키듯 하나의 사랑으로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은 사랑을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등으로 나누지만 신학적, 신앙적으로 사랑은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가 치우침없이 고루 펴지는 사랑이다. 

에로스처럼 뜨거운 갈망함과 필로스처럼 한결같고 일상적인 친밀함,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가페 안에서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아 8: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내 어머니 집은 어디인가? 그녀가 속한 모든 삶의 현장, 그녀의 터전, 그녀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환경 속에 주님을 모셔 그에게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제 여인의 갈망은 단지 주를 향한 개인적 갈망을 넘어 그녀가 속한 모든 이웃, 모든 열방에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갈망함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는 주님의 사랑과 희생과 십자가의 보혈을 홀로 맛보았지만 이제 그녀의 갈망은 자신의 삶의 열매, 주님을 따라 달려가는 자신의 십자가의 열매를 주님께 드리고자 한다. 

비로서 은혜를 받기만 하는 자에서, 삶으로 예배하고, 삶의 열매를 드리는 주를 닮은, 주의 길을 함께 가는 주의 제자, 주의 자녀가 된다. 

 

(아 8:3)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여인이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남자의 팔이 여인의 어깨를 감싸안는 표현은 너무도 아름답고도 또한 자연스러운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머리를 그의 팔에 기대는 것은 주님의 팔에 안겨 주님을 머리 삼는 성도의 순종함과 의지함이고, 주님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하면서 오직 그분이 나의 머리가 되고 나의 피난처가 되게 하리라는 성도의 표현입니다.  

 

묵상) 

1.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친밀하고 은밀한 개인적 교제를 넘어 내 모든 일상을 함께 하며 내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갈망함이 있는가? 

 

2. 신앙생활을 주님과 연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아주 오래된 여인처럼"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아무런 설래임이나 열정이 없는 의무감과 형식적인 관계만 남아있지 않은가? 

 

아가서 7:10-13절 우리가 함께 유숙하자 

 

(아 7:10)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만 일방적인 사랑, 짝사랑 만큼 가슴 아픈 사랑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한쪽이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다른 사람, 다른 곳에만 관심이 가 있다면 사랑은 그 만큼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반기고 맞이하고 영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외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여인은 지금 왕이 자신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찬미하는 소나타를 듣습니다. 그 사랑을 들으며 행복해합니다. 자신의 모든 사랑을 그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 나는 이미 그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말합니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 그도 나를 사모한다."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 그 분의 사랑을 느끼는 것, 그 사랑안에서 나도 사랑을 고백하는 것. 신앙생활은 곧 사랑의 삶입니다.  

 

(아 7:11)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신부는 이제 신랑과 함께 들로, 동네로 함께 갈 것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여인은 신랑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찾았으며, 거리를 헤메였으며, 사람들을 찾아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신랑과 함께 연합을 통해서 신앙의 신비, 연합의 신비를 경험한 여인은 그분과 함께 어디든 다니고자 한다. 

들과 동네는 신부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터전이다. 이제 신랑과 함께 그녀의 일상의 모든 것을 함께 하고자 한다.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앉기를 원하는 자는 이제 모든 삶의 영역이 그 분과 함께 됨을 경험한다. 

숨김이 없고, 제한이 없고, 내 마음을 열어보이면 열어 보일 수록 그 분의 임재와 통치와 사랑은 더해진다. 

 

(아 7:12)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포도원은 그가 내게 맡긴 동산이다. 동시에 그분과 함께 펼쳐나가는 삶의 동산이다. 내가 그 분께 붙어있으므로 열매를 얻고 양들을 먹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제 그가 맡긴 동산에 가서 그 분이 내게 맡기신 모든 나무의 열매가 어떻게 열려 있는지, 새싹이 돋았는지, 꽃이 피었는지, 열매가 맺혔는지를 결산한다. 

 

이제 신랑이 신부의 마음과 삶 어느 곳이든 함께 하듯 신부 역시 신랑의 관심과 일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은 그저 둘만이 함께 거하면서 "우리끼리만" 행복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양떼를 먹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목자로서의 삶, 동산지기로서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청지기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신부는 이제 주님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 그들이 함께 가꾸는 포도원에 가서 양들을, 새싹들을, 식물들을 가꾸며 그들의 삶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돌보는 모든 생명체를 돌보고자 한다. 

이제 신부는 주님의 동역자요 참된 청지기가 된 것이다. 

 

(아 7:13)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합환채:         Loveapple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맺은 열매를 상징하는 식물이다. 그 식물은 사람을 끓어당기는 향을 내고, 또한 잉태하게 하는 특별한 효능이 있는 식물이다.

레아와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쟁탈하기 썼던사용했던 식물이 바로 합합채이다. 임신을 돕는다고 여겨졌던 식물의 이름이다. 

삶의 향기. 삶의 열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향기이고 열매이다. (아 7:13)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이제 주님과의 연합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들은 열매를 돌보고 가꾸고 추수하는 삶이다. 풍성한 내적 성숙의 열매와 더불와 영향력있고 살리는 외적 열매를 맺는 삶. 그것이 연합의 결과요 열매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주님을 향해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의 부분, 그분의 부분이 아닌 내 전존재, 그 분의 전부를 향해 연합하고자 하는 갈망함이 있는가? 

 

2. 주님을 향한 내 삶의 향기(합환체)를 지니는가? 성도의 거룩한 행실, 삶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가? 사랑받는 자의 향이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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