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히 내려오라  (눅 19:1-10절)

 

 

삭개오의 이야기 

삭개오 - 비유가 아닌 실재사건으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더불어 깊은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 

 

1. 배경 - 18장의 다섯가지 비유

1) 1절: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 7절: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간절히 부르짖는 자) 

2) 9절: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바리새인) 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자 - 겸손은 자기 존재를 아는 자)  

바리새인 - 난 저들과 다릅니다. 서서 따로 기도하는 자,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 

세리 -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8:14)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3) 15절: 어린아기 -제자들이 꾸짖거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자) 

4) 18절: 어떤 관리 (다른 복음서에서는 부자 청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0절: 계명을 지키는 자 (그런데 그 계명에서 1-5계명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계명을 들지 않고 6-10계명인 사람들 사이에서의 계명...

내가 다 지켰나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가 큰 부자이므로 심히 근심하더라. 

고린도 전서 13장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없는 의는 외식이요, 교만함이요, 죄이다.

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구걸하는 맹인 거지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2. 삭개오의 이야기

18장의 모든 비유에 해답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이다! 

1절- 여리고라는 장소적 배경 

2절 - 삭개오 (의로운 자, 순결한 자라는 뜻 ), 세리장 (죄인 vs 18장에 나타난 겸손한 자) 부자(사랑이 없는 자, 천국과는 먼자) 

3절 - 키가 작은 자 (보통키가 작지 않고는 이런 표현 쓰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적 성공과 더불어 쌓여있는 내면의 깊은 열등감, 수치심

         우리나라에서도 특별히 키 작은 아이들이 겪는 고충 - 땅꼬마, 난쟁이, 반토막.... 의로운 자라고 이름 붙여준 그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가 되었을 때에 쌓인 내면의 상처 - 키가 작다.  

         또 한편으로는 앞의 장 18장 15절에 나오는 "어린아기와 같은 자"의 양면적 표현         

 

죄인과 의인이 혼합되어 있는 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자,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그의 선택이 흥미 진진해진다. 

 

1) 여리고성 - 여호수아때, 철의 요새 

              - 가나안 입성의 관문, 홍해-광야-가나안의 여정에서 가나안의 관문

              - 구원을 넘어서 성화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장 큰 장벽 - 철저히 숨겨지고 닫혀진 나의 자아의 성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장면 - 여호수아 6장   

              어떻게? 침묵과 순종  마지막 7일째 - 양각나팔불고 소리치며 - 예배하며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하지만 바알과 앗세라를 국교화시키려 했던 아합왕 때 여리고성 다시 지음...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우상숭배하게 되면 짓게 되는 성 - 여리고성, 굳게 닫힌 내 자아의 성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역시 여리고라는 배경을 두고 쓰고 있다. 자아, 자기 의로 가득찬 사람들의 성. 

              

2)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 예전에 뽕나무로 번역되던 나무 - 돌무화과 나무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올라가 본 자 만이 의로움이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죄가 얼마나 무엇인지 깨닫는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한다. 구약이 없으면 신약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 세례요한이 없으면 주의 사역이 시작하지 못한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올라감의 신앙이란 의로움을 향한 몸부림,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죄를 이기려는 싸움이다. 

의로운 자가 되라고 삭개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는 자리에 살면서 이젠 변화하고 싶다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짓는 시간 

혈루증 앓던 여인이 군중들의 무리를 뚫고 예수님 옷가에 손을 대는 행동하는 신앙

호렙산에서 40일 40야를 금식하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간이요, 동시에 광야에서 사탄을 맞닥뜨려 전쟁을 치루는 기간이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내면의 열등감과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삭개오에 대한 많은 설교들이 이 나무에 올라가는 그의 열심, 그의 간절함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있어서 파격적인 변화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3)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주님을 보기 위해, 주님 눈에 띄기 위해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 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 속히 내려오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기뻐하며 소란스러워할 떄 "즉시 재촉하" 물건너편으로 제자들을 가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는 갈급함이고 열심있는 신앙이지만 부르짖는 것 자체가 자기 의가 되어 "남들은 왜 부르짖지 않지? 기도는 부르짖어야 하는 거야.."하고 생각하는 순간 간절함은 남을 판단하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함이 된다. 어떤 의로운 행동이라도 자기 만족과 남들을 향한 판단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열심은 곧 교만함이 된다. 

 

부자 청년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따라 계명을 지키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칭찬받을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 평안이 없다. 자기를 채우는 데는 자신있다. 

올라가는 데는 자신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것 다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에는 근심하여 주님을 떠난다.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고 주님과 함께 하지 할 때는 나서지 못한다. 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채우는 열심, 칭찬받는 열심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자기를 비우는 열심, 주님만 나타내도록 사는 삶에는 익숙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았다.  

 

자기를 높이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은 거절을 당하고 자기를 낮추는 세리에게 주님은 이가 의롭다 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세리는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세리를 보며 주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신다.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여 하겠다는 것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요청과 같은 말씀이다. 

네 교만함에서 내려오면, 너를 채우고 높이고 돋보이게 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에서 내려와서 나와 함께 거하자 

이 요청 안에는 부자청년에게 하신 네가 그동안 쌓아놓은 너의 방법, 너의 소유를 다 나누어주고 나와 함께 하자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삭개오는 이 말씀을 듣고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6절) 주님을 영접한다,

그리고 주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가 빼앗은 자에게 돌려준다. 

부자청년에게 요구했던 것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내려놓고 주님을 따른다. 

 

신앙은 올라감과 내려옴의 신앙의 반복이다. 

올라가는 열심이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 무리를 헤쳐 그 분을 만져야 한다. 

나무에라도 올라가 그 분을 보아야 한다. 

항상 앞서서 먼저하던 베드로가 거리를 두고 주님을 멀리서 따를 때에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며 저주하는 떨어진 신자가 된다. 

올라가는 신앙은 신앙의 얕은 물 가에서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이다. 

 

그런데 그 열심이 나를 망가뜨리게 해선 안된다. 

그 열심이 어느덧 자기 만족이 되고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자기를 높이는 수단이 되면 그 신앙은 이미 바라새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올라감이 있으면 내려옴이 있어야 한다. 

아니 내려 올 때에 진정한 은혜를 발견한다. 

올라가는 신앙이 주님을 보기 위한 신앙이라면 내려오는 신앙은 주님과 함께 거하기 위한 신앙이다. 

예전에 맹인목사였던 안요한 목사님이 쓴 간증과도 같은 신앙의 책 - 낮은 데로 임하소서 

제 인생 가장 첫 번째로 읽었던 신앙서적이다. 

 

의를 넘어선 십자가의 은혜, 자기 의가 아닌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구원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오신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도 남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아니 난 남들보다 더 큰 죄인임을 마음 중심으로 고백하고 주님께 가식적인 겸손함이 아닌 자기 존재 중심의 겸손함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3. 결론 - 적용 

1)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2) 그 사역을 위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미국에서 기독교 영성을 공부했던 (GTU)라고 하는 학교 

개신교 네개 교단과 가톨릭 4개의 수도 단체가 각각의 학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연합하여 구성된 학교.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역사를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트레이시제일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의 신학과 영성을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 한 신앙서적을 통해 접하게 된 예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들어오며 자랐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름을 남기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남기는 존재이다. 

 

은혜는 모든 것을 바꿉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설교자로서 제일 힘을 주는 말 - 성도들에게 은혜 받았다. 

또한 설교자로서 가장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 -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은혜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성경은 은혜로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지만 전혀 은혜롭지 못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1)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되 내 것이 다 네것이니..."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 아버지와 함께 거하고 떠난 적도 없고,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았는데.... 그에게 은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2)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사람들, 38년된 병자.... 왜 매일같이 은혜의 집에 모였는데 그들에게 은혜의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까?

(3)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 광야 40년 동안 늘 원망과 불평

 

이와는 달리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다시 한 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현제의 모습.... 

과연 예수 믿은 후에 사도 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았는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 사도바울의 모습 

 

(빌립보서 3장 5-6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고린도교회를 세운 개척자였지만 지금 고린도교인들은 서로 분열되어 사도 바울을 업신여기고 있다. 그의 사도권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가 말이 어눌한 것을 비아냥 거리고, 더 나아가 그가 생긴 것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는다. 

 

예수를 알기 전 자기 잘 난 맛에 살던 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눈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고 지금 자기를 비웃고 조롱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말하며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는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을 아는 것이다. 은혜는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의 결과이다.  

신앙생활에서 은혜는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을 때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깨닫는 마음이고 지금도 받고 있음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받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았고 또 받고 있는 그 은혜의 내용을 15장 1절부터 설명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서 선 것이라"  (1절) 

 

은혜는 곧 복된 소식, 복음이다. 우리가 이미 받았고 또 지금도 그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2절) 

 

반대로 헛되이 믿는다면 - 구원에서 멀어진다. 구원과는 성관이 없다. 이 구원은 장차 올 구원이기도 하지만 오늘 내게 임한 현제의 구원이기도 하다. 

-> 은혜는 내게 전해진 그 복음의 말을 지금 여기 나의 삶에서 굳게 지키고 참되게 믿는 것이다. 

 

그 복음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3~4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 사도될 자격도 없고, 예수의 생전에 예수를 따르지도 믿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를 핍박하던 나같은 자에게까지 나타나신 주... 

 

너무나도 평범하게 들어왔던 그 복음의 내용이 내 삶의 중심에 박히도록 들어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정말로 만삭되어 난 자 같은 나, 아무런 믿음의 자격도 조건도 없는 내가 예수 안에서 천국의 시민권을 받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유대인들이 들으면 신성모독이라 여기고 깜짝 놀랄 그런 친밀한 관계...) 

 

  •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가 달린 십자가, 그냥 예수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잘 안 다가온다. 그 십자가는 누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가? 내가 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 

 

- 군대에서의 경험, 군대에서 사고가 나서 영창은 아니고 군기교육, 총과 모든 개인용품을 넣은 군장을 매고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연병장을 돌고 자녁 먹은 다음 저녁 7시부터 시작해서 하루 A4로 10장씩 번성문을 써야 잘 수 있었는데 ...도저히 쓸 것이 없어서 첫날은 새벽 2시가 되어서 잠자리....

그 다음날 또 아침에 일어나서 연병장을 도는데 벌써부터 반성문 걱정.. 

그 날도 새벽 2시 

그런데 그렇게 반성문을 쓰다보니까 내가 어릴적 부터 저질러왔던 모든 행동들에서부터,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들, 행동으로 저질르진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풀어왔던 수 많은 폭력과 살인과 음행과.... 

그리고 겉은 바른 척 하지만 속으로 풀어왔던 그릇된 말들, 욕들.... 

2주동안 난 정말로 내가 큰 죄인이었구나. 내가 이런 벌을 받아도 쓰구나... 

 

- 언젠가 TV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30년 가까이 억울하게 감옥할이 하고 나온 사람들의 인터뷰

억울해서 언떻게 사셨습니까? 

처음엔 억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내 죄값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젠 별로 억울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와지고 정말 내 자신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억울할 일이 없다. 

내가 받는 모든 고난 앞에서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된다. 

 

장애우를 둔 부모, 갑자기 암에 걸린 성인, 사업에 갑자기 실패한 가장....처음엔 왜 나한테 이런 일이....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

 

예수의 십자가 - 로마 시대의 사형 방법, 지금은 금지된,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참혹한 

벌거벗겨져서 숨이 멎을 때까지 고통을 받으며 또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사람들로부터, 군병들로부터 방아야 하는 조롱과 멸시... 

 

십자가 상의 강도 - 

(누가복음 23장 41-42)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은혜는 내가 받을 상보다 조금 더 받는 그런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데 오히려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 은혜는 어느날 사두었던 복권이 당첨되는 정도의 행운이 아니다. 나는 산 적도 없는 천국의 시민권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어진 것이다. 
  • 기대치도 않았는데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그런 상이 아니다. 나는 죽을 병에 걸려서 죽음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히려 너에겐 영생이 주어졌다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삶이 되돌아 오는 것이다. 

-> 은혜는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헤아릴 수로 셀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 그런데 그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에 역사하는 부활이다. 

-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장이라 일컫는다. 

고전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 겉은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은 자. 영이 죽은 자, 범죄한 아담 

              그리스도안에서 육신적으로 죽은 자의 이중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이다. 살아있으나 정작 죽은 자 같은 자들의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난다. 은혜가 오는 순간 죽음은 사라진다. 

 가장 절망적일 때 그의 은혜가 생각난다. 

 

 (신 8:2-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면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은혜는 주가 베푸신 역사가 내 일상의 삶 중에서 고백되어 지는 것이다. 내 입술로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비로서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힘들 줄만 알았던 내 인생의 한 복판에서 내 모든 삶을 붙잡고 인도하시며 지금도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이 보이는 것이다. 경험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은혜를 입지 못하는 자 
  1. 자기가 십자가에 달릴 만한 죄인임을 부정하는 자 

죄인, 새리, 창기- 자기가 죄인임을 누구보다 아는 자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 자기는 상 받을 자라고 생각하는 자. 

 

2. 남의 은혜를 바라보고 자신의 은혜를 비교하는 자ㅡ, 은혜의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들은 은혜를 누릴 수 없다.  

탕자의 형

포도원에서 일찍 나와서 일한 자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남의 은혜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부당하게 느껴진다. 자기가 받은 은혜가 받을 자격 없는 자가 받은 은혜임에도 그 은혜가 남에게 임하면 시기와 질투가 임한다.  

남의 은혜는 큰데 자기가 받은 은혜는 작아보인다. 그런데 은혜는 비교 할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3. 내 삶이 상황이 주님을 가릴 때에 은혜는 보이질 않는다. 

마 14: 24: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7절: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절: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지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렇게 상황에 눌려 수렁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다윗을, 수많은 주님의 백성들을 주님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을 붙잡아 일으키신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른 뼈에 생기가 돋게 하신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다. 

은혜가 보이질 않는가? 느껴지지 않는가? 너무 바빠 은혜를 바라볼 시간이 없는가? 

너무 무기력하여, 떄로는 우울하여 은혜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가? 사는 이유도, 열정도, 그저 하루 하루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가만히 십자가 위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있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내 모습을 가져다 보아라. 

어울리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을 만하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도 싸지 않은가? 

그런데 그 자리에는 내가 없고 언제나 주님이 있다. 

비교와 상황과 현실이라는 삶에 눌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나, 매일 같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내가 그 죽음의 장소 십자가를 바라볼 떄면 거기엔 언제나 내가 없고, 주님만 계시다. 

그 분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내가 죽었다고, 넌 죽지 않을 것이라고, 널 살릴 것이라고, 반드시 내가 널 살릴 것이라고 그렇게 또 날 위해 죽고 계신다. 

 

그 뿐만 아니라 저주의 상징인 그 십자가가 이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물이 되게 하신다. 목거리마다 귀거리마다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품이 되게 한다. 버림받은 것 같은 나의 존재를 그렇게 보석같은 존개가 되게 한다. 

 

당연히 거기에 달려 있어야 할 내 모습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보고도 내가 널 위해 죽었으니, 너의 모든 것을 담당했으니 이제 그만 죽고 일어나라 하신다. 

내가 널 위해 죽었거늘 너 지금 무엇하고 있냐 말씀하신다. 

은헤는 내 모든 우울함을 사라지게 한다. 내 억울한 모든 삶을 무용지물이 되게 한다. 

은혜는 내가 값을 매겼던 모든 부조리와 불평등과 부폐를 전혀 나와 상관이 없게 만든다. 

난 은혜받는 자다. 은혜는 나를 숨쉬게 한다. 

나의 지금의 내가 되게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그냥 나를 보시고 구해주기로 작정해서 아들을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목회자로 산 다는 것) 모든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자리. 중보기도를 하고, 가물에 매마른 땅에 단비를 주기 위해서 매일, 매주 하나님과 얍복강 가에서 씨름해야 하는...

그러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삶의 무게도, 자녀들과 가정....견뎌야 하는....그래서 실재로 교제를 하다 보면 설교 단상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하는 목사님들

혼자 우울증에 빠져 있는 목사님들,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무언가에게 중독되어 있는 목사님들...어렵게 자신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도 그 분들 가운데 살아가면서 같이 울고, 같이 나의 작음을, 초라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때.... 그 무게를 가지고 다시 예배당에 나와 그냥 아는 찬양 한 곡씩....부르다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또 그 분이 날 보고 계신다. 

괜찮다고...너의 기도를 듣고 있다고, 한 걸음만 더 함께 나아가자고....

내 지난 인생, 성도들과 함께 걸어왔던 그 순간 순간들을 보여주신다. 

은혜는 언제나 내 삶의 무게를 이긴다. 은혜만 회복되면 삶은 무겁지 않다.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이 무게가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내게 경험된 그 은혜가 우리 성도 여러분께도 경험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창세기 8장 1-14절 기억하사 바람으로 물을 말리시다. 

 

홍수의 진행 

  •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7:12) -둘째 달 열 이렛날 시작 
  • 그리고 물이 백오십일 동안 줄지 않고 땅에 넘쳤다 (7:24) 
  • 열째 달 초 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 (8:5) 
  • 그리고 나서 또 40일 후에 노아는 드디어 창문을 열었다. (8:6)  
  • 언제 밖으로 나오는가? 육백 일년 1월 1일 - 물이 걷혔다. 2월 27일날 땅이 말랐다. 일 년하고 열흘 만에 마른 땅을 본 것이다 (8:13-14) 

그러니까 40일 홍수나고 좀 지나서 곧 방주를 연 것이 아니라 비가 쏟아진 날만 40일이고 150일 동안은 그 물이 하나도 줄지 않고 땅에 가득했으며, 일년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방주 안의 사람들은 거의 일년 내내 방주 속에 갇혀 지낸 것. 

 

바깥의 세상이 궁금한가? 바깥은 멸망, 심판 - 생명체가 없다. 

 

오직 하늘로만 나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비가 언제 그칠는지...

모든 세상에 생명체가 없고 물로만 가득한 세상에서 방주 하나만 덩그라니 그 물결 사이에 떠 있는 광경. 

 

배 안의 삶도 지긋지긋 하지만 배 밖의 세상은 더욱 참혹하다.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기억하사: "쟈카르"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기억했다고 말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셨는가? 한동안 비만 내리게 하고 잊고 있다가 어느날 노아와 그 방주를 기억해 내신 것일까? 

 

이 동사의 쓰임새를 창세기에서 찾아보면 기억하사의 의미르 유추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9장 29절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앞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생각하사 ; 쟈카르 

 

창세기 30장 22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는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소돔과 고모라를 택함으로 그 땅과 함께 멸망당하는 롯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룻을 구원하신다. 

야곱과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을 하나님께서 생각했다. 기억하셨다. 

 

이 쟈카르 단어는 잊고 있다 어느 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심판의 상황에서 그들을 구원코자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단어이다. 항상 마음에 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실행하시는 구원의 사건이다. 

 

 

 1절 후반부: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해가 쪄서 물이 마른 것이 아니라 왜 바람을 불어 물이 줄게 하셨을까? 

 

 이때 바람으로 번역된 단어는 (바람 - 루아흐)이다. 

 하나님의 영-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 

 

 다시 혼돈과 공허가 되어버린 세상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수면 위로 운행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 하시니 흑암이던 세상에 물이 마르고 육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 땅이다. 저주 받은 죄의 땅이 아니라 새로운 땅, 새 창조의 땅이다. 

 

 하나님의 바람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 하는 순간에도 똑같이 불었다. 

  

 출애굽기 14장 21절)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밝은 태양은 낮에만 쬐는 빛이지만 바람은 흑암 중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밤새도록 움직이며 바닷물을, 사망의 물, 심판의 고난을 물러가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이다. 

 

 심판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인해 끝마치게 된다. 

 하나님의 영을 맛본 자들에게는 심판이 끝난다. 물이, 고난이, 사망이 마르고 이제 새로운 땅, 새 인생이 시작된다. 

 오늘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은혜가 이 말씀을 나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기를 축원하다. 

 

 

 

 

창세기 7장 1-12절 방주, 교회, 그리고 구원 

 

방주 - "테바" 

 

출애굽기 2장 3절) 더 숨김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 갈대 상자: 테바 

 

10절) 모세: 물에서 건져낸 자

 

그리고 자신이 물에서부터 건짐을 받듯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로부터 건짐을 받고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는 주역이 된다. 

 

마태복음 3장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은 바로 그 구원의 사역을 위해 세례를 통해 그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 갈대상자 역할 - 구원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을 통해 하나님의 새 역사를 만드시는 것 

 

교회의 역할이다. - 구원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것, 역청을 발라 거짓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

산 위에 방주를 건설하듯 세상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 - 숨김이 없고 거짓이 없이 사역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구원의 사역과 보존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위에는 창을 두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옆으로는 문을 내어 세상을 구원하는 곳

 

 

2. 해석상의 난제 

 

7장 2-3절)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6장 19-20절) 형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7장 9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5절)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 6장 19-20절에도 암수 둘씩 
  • 7장 9, 15절도 암수 둘씩....

 

오직 7장 2-3절에만 정결한 것은 암수 7쌍씩 부정한 것은 2쌍씩 

당시 정결함과 부정한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주석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어떤 것은 레위기나 신명기 계명에 나와 있는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기준으로....

그런데 노아에게 그런 기준을 가지고 지금 홍수를 대비하라 했을까? 

 

아니 당시 정결한 짐승이 있었을까? 

 

창 6장 7-8)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인간이 범죄하매 생명있는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되었다. 그 곳에 정결함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왜 7장 2-3절은 정결한 짐승을 언급하셨을까? 그리고 왜 7장 15절에는 2-3절에 나와있는대로 7쌍이 아닌 오직 두 쌍만 방주로 들어오게 하였을까? 

 

21-23절)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 까지라 이들은 따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정결함과 부정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생명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방주 안에 있는 생명체는 정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남기신 것이요 

방주 밖의 생명체는 모두 부정하여 심판을 당한다. 

 

그들이 방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 그들은 모두 부정한 존재였다. 정결한 존재는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나 방주안에 들어온 이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결한 생명체가 되었다. 

7이란 수는 창조의 수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리고 홍수가 끝난 후 

 

8장 20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그 안의 모든 짐승들은 정결한 짐승이 되었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노아의 방주 후에 어처구니 없는 노아의 실수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무용지물이 된 것 아니냐고. 

그래서 다시는 믈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 아니냐고? 

 

노아의 방주는 모세를 물 가운데서 갈린 갈대상자요, 그 가운데 살아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구원을 받고 

그와 같이 물에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부터 올라오신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승리의 구주가 되셨다. 

 

구원은, 정결함은 내 정체성이 아니다 소속의 문제이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가? 난 방주 안의 사람인가? 그리스도 안의 사람인가? 

 

창세기 6장 9-22절 의인이요 완전한 자 

 

창세기 6장 7-8절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붜 가축과 기는 것과 곧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지은 인간을 통해 만물에게 하나님의 선함이 흘러가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계획 

-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과 땅 전체가 저주를 받는다.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있는 은혜 (호의)를 발견했다. 

가인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그 앞을 피함으로 모든 인류가 결국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갔을 때에 

노아는 하나님과 눈이 맞았다. 

뿐만 아니다.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며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눈에서 후회와 분노를 본 것이 아니라 은혜를 보았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았다! 

 

노아의 방주에 대한 기사는 하나님과 눈이 맞은 한 사람 - 노아를 소개함으로 시작한다.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몇 대 후에 이스라엘 땅 아닌 동방에 또 하나의 온전한 자를 소개한다.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신약에 또 그러한 방식으로 소개한 인물이 나온다. 

눅 1:5-6)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 있을 수 있을까?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성경에 의인이라고 표현된 인간 

노아 - 홍수가 끝나자 술에 취해 아들앞에 하체를 내보인다. 학자들은 이 표현을 성적인 표현으로 해석한다. 

욥은 세 친구들의 논쟁을 통해 결국 하나님 앞에 따지고 묻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잠잠해진다. 

사가랴는 아들을 주신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웃다가 입이 닫혀지게 된다. 

 

그들은 완전한 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불완전하고 여전히 연약한 자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왜 그들을 의로운 자라고, 흠없는 자라고 표현하는가! 

 

히브리서 11장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그가 죽으면 세상에 심판이 임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뒤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노아는 사람들이 악한 중에서도 번성할 때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외면하지 않고 그 심판을 준비한다.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일에 대한 말씀을 그대로 믿고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방주를 준비한다. 

그럼으로 그는 의의 상속자, 오직 의로운 단 한 존재, 하나님의 의를 상속받는 의의 상속자가 된다. 

 

의는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있는 사람. 

하나님과 눈 맞추는 사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

 

의로운 자는 곧 하나님과의 통로가 열려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너 의를 상속받는 자이다. 

 

노아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창 6:22,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명령과 준행 입니다. 준행의 의미는 명령에 그대로 따르다 는 의미다.

 

120년간의 오랜 세월 동안 방주가 지어졌다. 초심과 말심이 변함이 없다.

 

그리고 휘둘리지 않는 정신이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일하기가 껴려진다.

 

지치지 않는 방주 만드는 삶

노아는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건조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립니다.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라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그 생각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 

 

홍수 속에 방주로 격리케 하신다

무시무시한 홍수 속에서 quarantine 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세상의 위협앞에서 보호 하신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이 지겨운 코로나의 상황 속에서 우리 믿음이, 교회가, 세상이라는 큰 홍수로부터 우리를 격리시켜 보호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 눈을 맞추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길 축원드립니다. 

 

(찬양) 오직 믿음으로 

 

창세기 6장 1-8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지라 

 

3장- 아담과 하와의 타락, 선악과 사건 -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된 사건 

4장 - 가인과 아벨 (살인) 

5장 - 셋의 족보- 노아까지...

 

창 6: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1) 천상의 존재들, 신적 존재들 -  

네피림 (고대 영웅들) -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고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괘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천사와 사람 사이에 태어난 존재, 그 의미는 넘어뜨리는 자, 쓰러뜨리는 자. 위경으로 여겨지는 고대문서인 에녹서에는 천사들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을 비롯해 인간과 동물 사이에 태어난 존재 등 다양한 타락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반론) 성경은 일관적으로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 사탄, 마귀, 타락한 천사로 호칭한다 .그러한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성경의 일관성에서 벗어난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 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가,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사람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 셋의 후예들 

 

 

 “육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사르’입니다. ‘바사르’는 헬라어 ‘사르크스’하고 같은 의미예요. 즉 살덩어리입니다. 부패해서 사라져버릴 살 덩어리, 자기 욕망에 살찌워진 살 덩어리, 결국 허무하게 죽게되는 살 덩어리가 육신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자 사람은 살덩어리에 불과한 “육신”이 되었습니다. 

이와 반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하나님과 교제하던 하늘에 속한 자들이 육신이 되니 그 결과가 무엇인가? 

[창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육신이 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실태 - 로마서 1장에 자세히 소개 

 

21-3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  영적 관계가 깨어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남녀간의 관계가 깨어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세 번에 걸친 내 버려 두사 

근본 원인 - 하나님 대신 우상을, 조물주 대신 피조물을 섬긴 것 

              -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EXCHANGRE) 

              

결과 - 남과 여 EXCHANGE (natural relation) -> unnatural relation)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 개인의 삶과 모든 관계의 삶에 부작용, 죄, 허물이 들어오게 된다. 

 

그 근본 원인 -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욕대로, 자기 마음대로 취하여 살아간 결과  

 

본질을 지키는 교회 (에베소서 4장 11-16절) 

I. 들어가는 말 

호주의 높은 파도 덕분에 젊은이들 사이에 파도타기 좋은 장소로 알려진 한 해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너무 거세 종종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고를 보다 못해 한 사람이 낡은 모터보트를 수리하여 해변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파도타기를 하다 위험을 당한 젊은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사람에게 구조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해변가에 작은 움막을 짓고 항상 그 안에서 바다를 응시했습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이 사람의 선행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을 돕겠다는 사람과 돈이 몰려들어 오기 시작했고 초라한 움막은 현대식 건물로, 구조 장비는 최신식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정치인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구조한 젊은이들의 부모와 형제들, 친구들이 감사 인사차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간단한 수영복만 입고 있었던 사람은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복장을 갖추어야 했고, 오는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식당을 만들었고, 먼 곳에서 오는 이들을 위해 숙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초라했던 움막은 현대식 건물의 해변종합클럽이 되었습니다.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했으며, 자신이 죽어가는 생명을 어떻게 구조했는가를 설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이 사람은 온종일 사람들과 만나 식사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시설을 관리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사람은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사람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바다를 쳐다보았던 사람이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바람에 그 순간에도 해변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홍성욱 목사님이 쓴 “교회민이 희망이다”라는 책에 나와 있는 예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혼구원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겉치장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교회를 비꼬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교회를 걱정합니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고 더 이상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여전히 교회를 걱정하며 때론 비판하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고쳐나가야 하고 무엇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의 내용들은 잘 볼 수 있지 않습니다. 

 

II. 에베소서 - 교회: 그리스도의 모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는 신약성서에서 교회에 대해서 가장 깊이, 잘 설명된 성경 (교회론) 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읽은  4장의 본문말씀은 아무리 묵상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교회에 관한 정의, 사명,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역할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dp니다. 

1. 첫째는 몸은 철저히 머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즉 주인은, 명령권자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의 말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8절의 말씀은 특히나 그 해석의 차이로 말미암아 교회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회에 대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가톨릭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의 "이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합니다. 

베드로라는 말의 뜻이 반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베드로를 교황의 시초로 교황에 대한 권위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로 이 마태복음 16장 16절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교황의 말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으며, 교황이 어떤 말을 해도 교황의 말은 오류가 없다는 이른바 교황 무오설을 2000년 가까이 강조하다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그동안 역사 가운데 저질렀던 교황의 잘못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이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고백으로 해석하며 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교회의 기초로 해석합니다. 

만약 베드로를 교회의 기초로 해석한다면 주님이 세우신 열두제자 중의 나머지 열 한 제자는 모두 베드로의 밑에 거하는 베드로 밑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주님의 말씀을 보아도 주님은 베드로를 나머지 제자들의 우두머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동등한 관계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게 있어서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에게 맡겨진 권위, 즉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열쇠가 교황에게 있다고 여기는 반면, 개신교에 있어서 교회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요, 음부를 이기는 권세는 교황이 아니라, 목사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2. 두번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의 활동을 해야할 교회의 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구원하고, 치유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과 삶으로 그들에게 예수의 사명을 나누어주고 예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교회는 구원의 사역과 제자, 혹은 성장, 혹은 성화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사역입니다. 

엡 1: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가 하신 일을 믿고 얻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주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건이요, 교리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중생이요, 양자된 사건입니다. 

구약의 모세가 400년간 노예로서 살던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사건이 바로 구원의 사건입니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는 "(출 14:13)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은 믿는 것이고,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구원은 예수를 바라보고 믿고 영접하는 사건입니다.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중심으로 고백할 때 일어나는 사건, 선물로서 주어지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역의 시작이지 목적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구원받기 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물론 아직 구원의 확신, 중심으로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니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 안에서 거듭나는 사건은 믿는 자와의 교제와 예배를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이요, 교제 가운데 일어나는 사역이지 예배의 목적이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신자가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니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가 왜 그렇게 악취가 나냐? 구원받은 사람들이 저지경이라면 난 구원 안 받는다. 

그런데 여러분,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오기 전, 방주 안이 살기 좋았을까요, 방주 밖이 살기 좋았을까요? 

방주가 아무리 커도 그 안에 있는 이상 좁은 공간입니다. 각종 동물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물이 새지 않게 약청을 발라 공기도 탁합니다. 악취도 납니다. 

세상은 희희 낙락한데 방주는 짓는 과정도 고통이거니와 그 안에 사는 것도 곤역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니....사람들은 죽는데 방주 안의 사람들은,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지 않습니다. 죽음이 그 안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첫쨰 모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바라보았고 경험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고난도 곧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고난이 있기에 그들은 부르짖었고, 고난을 통해서 그들은 출애굽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그들은 애굽의 땅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툭 하면 얘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는 먹을 것도 풍족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날 여기서 죽이시나보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도저히 구원받는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모델은 이 광야이고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교회 안의 성도입니다. 

 

여기에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중생, 구원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목적은 (Follow Christ, Imitate Christ)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의 최고 목적이고 방향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Union with God) 이 그들 신앙의 최고 목표입니다. ,

그래서 죽기까지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애씁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목적이고 우리 개신교도 힘써야 할 신앙의 푯대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완성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도저히 완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살아도 주님 앞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옥이라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땅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얘쓰다가 그 부족한 공간을  매우는 장소가 연옥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십니다. 

중생하는 순간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연합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내 마음대로,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어제 토요 새벽예배 - 에스겔 47장 - 성전으로 흘러나오는 물 - 발목, 무릎, 허리, 그리고 온 몸이 잠기게 됩니다. 

그 물에 온 몸이 잠기지 않으면 그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그 강을 건너야만 열매가 열리고, 강이 살고, 생명이 삽니다. 

신약에서는 온 몸에 잠기는 그 은혜를 깊은 물로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초대로, 성령의 충만함,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이러집니다. 

 

III. 성화 

그래서 중생한 자에게 필요한 것이 성화입니다.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실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과정이 성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목적지인 가나안까지 들어가기 위해서 거쳐야 했던 광야가 바로 성화의 장소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성막을 짓도록 하십니다. 예배하게 하십니다. 성화는 말씀에 순종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이자 열매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인 사역은 예수를 주로 고백한 중생한 성도들에게 이 성화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부터 15절 까지는 이 성화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엡 4:13-엡 4:15]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믿는 것은 예수가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 (기노스코, 야다-> 히브리인의 알다 (Understanding-> Experience) 은 그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내가 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모델과는 다른 예수의 사역의 새 지평을 보게 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모세나 여호수아, 다윗과 엘리야 같은 지도자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 인도하면 순종하면 복, 불순종하면 저주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하나님을 더 알려고도, 심지어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닮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겐 항상 제사장이나 선지자,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보려고도, 또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치료하고 파도를 잠잠케 하고, 귀신을 쫓고, 오천명을 먹이시는 현장에 항상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손수 귀신을 쫓고, 말씀을 선포하며, 심지어 오천명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너희가 주어가"하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 -> 순종하는 것, 하나님이나 지도자를 닮으라, 깊이 알라 하지 않는다. 오직 말하면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신약- 예수는 제자들에게 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시고 보여주신데도 따라하게 하신다. 닮으라 하시고 본받으라 하신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의 삶과 사역을 보여주시고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함께 사시고 또 훈련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80년대, 90년대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의 바람이 불면서 예배의 목적, 교회의 사명이 이 성화에 맞추어지지 않고 구원 사역에 맞추어졌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예배나 교회가 앞장섰습니다. 

그게 무슨 잘못인가 생각하겠지만 구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접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구원사역은 그냥 선포하는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닌 믿지 않는 사람들의 호감을 주기 위한 예배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전도하고 교제하여 예수를 영접한 자가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정회원은 세례받는 자가 되어 성찬식과 애찬식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구원은 주가 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이요, 교회의 더 크고 중요한 사역은 구원받은 자들을 훈련시키고,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끼자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를 진단하며 학자들이 판단하는 잘못된 두 가지 형태의 교회가 있는데 하나는, 피라미드형 교회이고, 또 하나는 버스형 교회입니다.

1.피라미드형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목사가 앉아 있고 직분자들이 그 밑에 서열대로 자리 잡고 있는 교회형태를 말합니다. 맨 꼭대기에 30년 넘게 교회 다닌 사람이, 그 아래에 20년, 10년 … 

맨 아래에 교회 등록한 지 얼마 안된 사람이 있어서 새로 온 사람이 뭐 좀 하려고 하면 ‘교회 온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가 피라미드형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교회의 직분이나 경력을 사회의 직위처럼 생각하고 으스대고 목에 힘주고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를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직이 잘 정리되어있고 일사분란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톨릭의 모델이 이와 같을 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 곳,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도 하며 섬기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사회조직과는 다릅니다. 

 

2. 두 번째는 버스형교회입니다. 

‘버스형’이라고 하는 것은 목사 한 사람이 운전하고 성도들은 버스에 탄 승객으로서 밖을 내다보며 세상을 즐기거나, 세상 모르고 졸고 있는 것과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물론 그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버스에 탄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버스 운전사 같은 목사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되면 그 버스에 탄 성도들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는 목사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모델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에게만 의존하고 여호수아에게만 의존합니다. 그들이 죽으면 방황하고 헤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이런 모델을 따르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모든 권한을 주다가 목회자가 넘어지면 일어서질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흔히들 목사를 제사장에 비유합니니다. 특별한 임무와 직임을 강조합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만인 제사장과 직업소명설입니다. 

성도들 모두가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이고, 목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직업이 주 안에서 거룩한 성직인 것입니다. 

 

전통에 사로잡혀 질식할 것 같은 교회를 운동경기에 비유하면 선수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만 교회라는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고 성도들은 관중이 되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보는 중에 목회자만 북 치고 장구치고 재주를 넘는 경기를 한다. 관중들은 다만 선수가 잘하면 박수치고 못하면 얼굴을 찌푸린다.

 

그런데 성경적인,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에서의 선수는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집사, 권사, 장로들이 선수들이며 목회자는 코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훈련소에서 선수들을 발굴해 뛰게 하고, 세상이라는 경기장에 나가 경주하게 합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혹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이 관객이 되어 바라보다가 도전을 받습니다. 

 

 IV. 결론 

 

어떤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까? 같은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와 성도가 같은 비전 안에서 하나 될 때 그 회중, 민족, 공동체는 부흥하게 됩니다. 아무리 리더가 탁월해도 바르게 따르는 이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리더가 못났어도 선수들이 탁월하면 그 공동체는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의 건강한 성도는 서로 간의 직분이나 직임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성경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은사에 따라’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서로 도움을 받는 존재요, 각 지체의 분량대로 교회라는 온 몸이 자라가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엡4:11~16)에서 바울은 교회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성도들이 목회하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성도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건강한 성도는 교회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까? 

교황의 말이 성경보다 우선하고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했기 때문에 저항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의 세가지 모토 아래 직업소명설과 만인 제사장을 회복시켰습니다. 

성직자들만 읽었던 성경이 모두에게 열렸으며 성직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었던 예배의 언어도 일반인이 함께 하는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모두가 예배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어느 때 부턴가 가톨릭 못지 않은 성직자의 권위,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목사는 영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영권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대언하는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여 받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사람이 세워줄 수도 없고 억지로 세워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 구원받은 자들이 와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교회, 구성원들 서로가 다르지만 서로 돕는 존재임을 인식하여 비교하지 않되 서로 격려하고, 각자의 분량대로 자라가며 든든히 서가는, 온전해가는 그런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창세기 5장 21-30절 - 에녹에서 노아까지  

 

셋의 족보 

- 는 --를 낳고 몇세까지 살다가 죽었더라. -> 마태복음의 족보 "- 죽었더라"가 없다. 하늘나라의 족보 

창세기 족보 - 죽음의 족보

그 족보 중 유일하게 죽음을 비껴간 인물 - 에녹 

4장에서 나온 에녹 - 가인의 아들로서 자기 만을 위한 성을 쌓다가 라멕을 낳고 사망의 길로 나아가는 자. 

5장의 에녹 -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늘로 올라간 자. 

 

히 11: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하면 떠오르는 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 . 엘리야와 에녹 단 두 사람. 

 

5절에서 반복되는 구절- 옮겨졌다.

옮겨지다. (메타티데미)- 빠뀌다. 변화하다. 옮기다. (deliverance)- 구원받다. 

 

그리고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받았을까? 

하나님을 얼마나, 어떻게 기쁘시게 했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옮기셨을까? 

 

[창 5:21-창 5:24]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5: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365세를 살았는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했했다

그럼 65년은 마음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 그시대의 풍조를 따라.

창세기 6장에 소개된 대로 육신이 되어 살았다면 65세 이후에는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 

65세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1절에 보니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어떻게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 

므두셀라의 뜻 - 창을 던지는 자, 그 부족의 수호자. 보호자 그런데 그 의미는 곧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고대 이스라엘 지방에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곧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였다는 것이 고대 문헌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름 자체도 무트 (죽음) 살라트 (보내다)- 죽음을 보내다.   

므두셀라가 187세때 라맥을 낳았고 (25절) 라맥이 182세때 노아를 낳았다. (28-29절) -> 369세

홍수가 시작될때가 노아 나이 600세때 입니다

(창7:11)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이라~".

 

  • 정확히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노아의 홍수가 임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 심판 전까지 가장 오랜 기간을 기다리신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고 했는데 그는 인류 중 가장 오랜 세월을 산다.
  • 므두셀라가 죽을 때에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고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노아와 그 가족만이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어떻게 그 이름을 지었을까? 

하나님이 계시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알까? 

그런데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 듣지 않고 명심하고 두려워하며 동행했다. 

 

그래서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을 당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드셀라라는 이름 - 그가 죽으매 심판이 임한다. 

                            - 인류에서 가장 오래 산 자 -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기다리심.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하려고...

노아가 그토록 방주를 만들어 사람들을 실으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도 듣지도 않았다. 오직 노아와 그 식구들만이 그 배를 탔다. 

 

그런데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흘려 듣지 않았다. 

그를 키우며 바라보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였다. 경외는 두려움에서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죄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한 영혼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참고 계시지만 그 기다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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