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안에 서 있는가? (요한복음 14장 -5-6절)
도입 - 포스트 - 트루스 (Post-Truth)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특징을 한 용어로 특징짓는 용어는 포스트트루스 (post-truth)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의 시대는 객관적 사실 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이 더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말로서 이 말이 근근히 쓰여지다가 본격적인 사회현상으로 대두된 것은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부터 였다.
당시 미국의 대선에서 폴리 팩트라는 대선주자들의 유세나 TV연설에서의 발언이나 공약을 팩트 점검하는 싸이트에서 트럼프의 말 중 70%가 거짓이라고 싣고 이를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보도하자 트럼프진영에서 이에 대한 역공으로 "신문이나 방송 모두가 거짓이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지지자들에게 유세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여론의 형성을 만들었고, 결국 모든 언론의 예측을 깨고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2016년 가장 공신력이 있다는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에서 뽑은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가 뽑히게 되고 2018년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였던 리 메킨타이어가 "포스트 트루스"란 책을 내며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사회현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의 여파로 사람들은 그동안 여론 형성의 중심이었던 신문이나 뉴스를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sns나 팟케스트, 그리고 현재에는 유튜브와 같은 대안 매체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 개인의 말을 집단의 말보다 더 신뢰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팟케스트나 유튜브는 오히려 가짜 뉴스들의 진원지가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공적인 매체나 대안 매체 모두 신뢰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제는 객관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미국이나 한국의 현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함께 이루어져 가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러한 세태의 한 특징적인 사건 - 판 지구론 : 원래 지구는 둥글지 않고 판판하다. 그런데 나사나 유엔같은 기구들이 과학자들을 이용해서 지구를 둥글다고 속인 것이다. 얼토당토 않은 말 같지만 헐리우드의 유명배우나, 샤킬오닐이나 어빙같은 NBA스타들의 개인방송을 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믿고 있다.
코로나 -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일부러 퍼뜨렸다. 원래는 아무 것도 아닌데 백신을 팔기 위해 심각하게 포장했다. 백신 안에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장치를 투여하는 것이다 등등...숱한 개인적인 음모론이 개인 방송이나 SNS를 타고 번져 나간다.
진리의 수호처인 교회는 이러한 현상에서 자유로운가?
교회의 목사로서, 또한 성경을 연구하고 나누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포스트-트루스"의 현상은 교회나 성도들에게도 이미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포스트-트루스"라는 말은 "탈- 진실", 즉 객관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또 다르게 해석하면 "진리 이후의 시대"를 말하기도 한다.
"포스트-트루스"시대의 사람들은 객관적 진리 자체를 거부한다. 어차피 그것은 이상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니,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각자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듣고, 바라보며, 사는 삶이 현대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 자체를 거부하고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진리에 대한 회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에겐 성경도, 신앙도, 교회도, 각자의 신념을 위해 선택하게 되는 도구일 뿐이다.
각자가 자기의 뜻을 합리화하고, 주장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지만 그 해석은 각자에 따라 달라진다.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보수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가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 싸우지만 똑같이 성경에서 근거를 제시하고 주장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 진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선호하는 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그 반대편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기독교인을 미혹하는 사탄의 마지막 방법이 진리 자체에 대한 의심을 가져다 주는 바로 이러한 포스트-트루스 전략이 아닐까 싶다.
말씀이 진리라고 믿기 보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말이 곧 진리가 되게 함으로 결국 자기 뜻이 가장 중요하게 되게 하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 인들의 불안함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교회마다, 목사마다 말하는 진리가 다르기에, 자기에게 맞는 사람 말만 듣게 되지만 그것이 참 진리일까라는 근본적인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에게 있어서 진리는 어떤 것인가?
2. 믿음의 출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예수께 질문한다.
[요 14:5]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 그 길은 무엇입니까? 주의 도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참된 길입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 선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그 분이 곧 진리이다. 그 분을 통해 우리는 영생을 얻고, 그 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간다. 예수가 곧 진리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질문은 유일한 길이요 진리인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와 동행하고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의 길로 걸어갈 수 있을까?
지금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만 해도 크게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큰 세개의 종파가 있다.
그리고 각 종파 안에는 또한 수많은 교단과 연합회와 크고 작은 모임들이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들은 연합하지 못하고, 서로를 적대시하며 어떨 때는 서로를 대적하기도 한다. 서로 자기가 진리이고 상대방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마치 누구는 코끼리를 바라보고, 누구는 다리를 보고, 누구는 꼬리를 보면서 그것이 코끼리의 전부를 보는 양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면서도 각기 주장하는 것이 다르고 믿고 강조하는 것이 다릅니까?
또 다른 요한복음의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진리 안에 거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신다.
[요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 바로 전에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면
[요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를 믿어도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 - 내 말에 거하면
단지 그 말씀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거하는 삶. 거한다는 것은 어쩌다 한번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더불어 사는 것, 늘 함께 하는 삶
말씀 속을 살피고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 그 말씀을 살아가는 것. 늘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삶.
2) 그러한 자들에게 이루어지는 결과 - 제자가 된다.
제자가 된다. - 예수를 따르는 삶, 예수와 함께 거하는 삶
누가 제자인가?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을 사는 삶, 그가 곧 제자이다.
예수가 제자를 삼으신 목적 -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 (막 3:3절) - 예수와 함께 거하는 자가 바로 제자이다.
예수와 함께 하는 자가 제자이듯, 지금의 시대에는 "말씀 안에 거하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제자"이다.
3) 제자에게 주신 것 - 진리를 안다. 진리는 곧 그리스도. 예수가 곧 진리. (앎의 대상-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나, 세상)
예수를 알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선 나를 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세상의 모습을 안다. 세상 돌아가는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안다.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수를 우상숭배하듯이 믿는다.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려 한다.
[요 8: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제자, 진리를 알고 자유케 되는 삶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 너희는 나를 죽인다. 말씀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죽인다.
믿는 자가 되어도, 그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하면 결국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다.
실천적 무신론자 -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믿지 않는 자.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 믿는 다고 하지만 말씀도 모르고, 그렇기에 말씀에 순종함도 모르는 자.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는 이방인이 아니라 잘못 믿는 자요, 그 말씀에 거하지 못하는 자이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예수를 알지 못했던 제사장들이, 바리새인들이,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였다.
왕으로 알았다가 십자가 지시는 것을 보고 뒤돌아선 유대인들이 죽였다.
4. 그렇게 진리를 아는 자, 그리스도를 아는 자- 경험하는 자. 함께 하는 자에게 주신 것
바로 자유함이다. 세상이나 환경이나 감정에 요동하지 않고 내적 자유가 충만해진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자유케 하는 삶이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 세상에서 종노릇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에게서 나오게 할 때에 하나님이 하신 것은 그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유케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광야에서 주신 말씀과 성막이다.
무엇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서 자유한 자가 된다.
기독교의 가장 큰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역설이다.
세상에 중독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이다.
세상의 자유는 우리를 방종으로 빠뜨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우리를 더욱 깊은 삶으로, 더욱 충만한 삶으로 인도한다.
5. 더 깊은 자유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한 자가 누리는 더 큰 자유 - 남을 얻기 위해, 남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자유. -> 복된 자유
참 신앙인들 -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부자유한다. 자유를 박탈당한 자
-> 그들은 우리를 자유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우리의 부자유는 주를 위해, 남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짊어지는 삶이다.
예수- 가장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삶을 사신 것
가장 아픈 삶이지만 가장 자유한 삶이기에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사 홀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세상 어떤 것에서도 눌리지 않는 자유를 주신다.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해 더 깊은 사랑으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결론
사탄은 우리를 진리에서부터 멀어지게 한다. 진리와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것이 곧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
그 진리는 예수를 믿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 우리를 거하게 한다.
그 분의 말씀 안에 거하면서 그 말씀 안에서 우리를 보고 세상을 보고, 다시 그 분을 만나게 하신다.
진리를 아는가? 진리 안에 사는가? 진리를 충만히 누리는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을 갈망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교회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시길 원한다.
그리고 더 큰 자유, 더 큰 사랑을 위해 예수의 길, 십자가의 도를 살아가시는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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