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뒤의 위기를 극복하라 (행 3:1-10절)
. 배경
- 나면서부터 못걷게 된 사람,,, 홀로 설 수 없는 사람, 홀로 선 기억조차 없는 사람.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
- 4장 22절에 보니까 그는 40세쯤 된 사람-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인생의 성취를 누리는 때, 사회의 지도층, 능력, 권세, 힘이 중시되는 나이, 이 떄는 홀로 설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자녀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할 나이.
- 그런데 그의 현실은 앉은뱅이- 무기력과 무능력의 상징: 가장 왕성해야 할 나이에 가장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존재이다. 남들은 걸어다니는데 자신을 걸을 수 없는, 걸어본 기억조차 없는 사람.
- 성전 미문 (the temple gate called Beautiful) - 8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 (cf: 양문 - 제사 전에 양들(제물)을 가지고 와서 교환하는 문)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으로 성전 문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현재는 Golden Gate -항금문으로 불리며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야만이 열수 있다고 하여 굳게 닫혀져 있는 문
이 미문을 직접 눈으로 본 교회 역사가 요세푸스- 높이가 23미터로 웅장하며 금과 은을 입힌 황동으로 된 화려하고 웅장하며 장엄한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매일 이 곳에 와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성전 문이 주는 화려함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잊어버리고 자신도 그 화려함의 일부분이라고 혼자 스스로 위로하는,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도 그들의 일부분으로의 삶을 꿈꾸지만 자신의 처지는 구걸하는 자, 앉은뱅이, 날마다 집에 오면 변하지 않는 자신의 처지?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이 사람은 미래의 계획도, 현재의 즐거움도, 과거에 이룩해 놓은 업적도 없다. 그냥 하루 하루 그저 밥먹고 살기 위해 오늘도 성전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 먹을 양식을 구걸하는 삶이다.
성전에는 와서 앉아 있는데, 남들의 은혜 받은 이야기, 구원의 소식들도 듣고 있는데, 정작 자기랑은 상관이 없는, 집에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으면 한 없이 초라해지고 외로워지는? 성전 문 앞의 앉은뱅이는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신앙 안에서 비전도, 꿈도, 소망도 없이 남들이 받는 은혜의 소리를 들으며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2. 성전과 이 앉은뱅이 . 날마다 성전 문에는 앉아 있지만 사실 성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 무언가 도움을 바라고 성전 문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성전에 들어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은혜 받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찌꺼기 은혜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자
- 날마다 성전 앞에 있지만 성전 안의 세계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저 성전에서 나오는 자들을 보며 저 곳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그들이 주는 도움만을 살아가는 사람들? 불신자도 아니고 기독자도 아니어서 세상에서도 시달리고 교회 안에서도 그 은혜를 도무지 못누리는 자?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church Goer들의 모습
-> 교회 문 앞을 기웃거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안, 신앙 안,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성전과 세상의 경계선 상에서 서있는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신앙 비슷한 것이어서도 안된다, 이왕 신앙생활 한다면 성전 깊이 들어와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예수를 만나야 한다.
3. 베드로와 요한
- 이렇게 성전 문 앞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은혜 없이, 소망없이 살아가는 자와 달리 성전을 향해 어김없이 올라가는 자, 성전 안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자 -베드로와 요한
- 앞서 2장에서 성령을 받고 말씀을 전파하여 3000명의 사람들이 세례 받도록 역사를 발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간다.
- 제 9시 기도시간: 오후 3시 (하루 세번의 정해져 있는 기도시간) 에 성전에 올라갈 새 - 어느 날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다.
-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8)
- 영성은 곧 규칙이다.
목사로서 가장 감사한 것 -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를 범하지 않는 것
예수 믿으면서 처음으로 군대에서의 훈련으로 인한 주일예배 불참 - 하나님께 간구 -> 일반대학을 다니는 사병으로 신학대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종병이 된 것
4. 두 개의 시선
3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본다. - 그리고 구걸한다.
4절 -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 두 시선이 마주치는 사건
그는 받기를 원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기를 원한다.
그런데 받기를 원하는 자의 대상은 돈이다.
주기를 원하는 자의 대상은 그리스도다. 은혜다.
받기를 원하는 자와 주기를 원하는 자가 만나면 곧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받는 대상이 다르고 주는 대상이 다르면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받아야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이 다를 때 거기엔 진정한 만남이 있을 수 없다.
베드로가 그 불일치를 깨뜨리는 선언을 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네가 얻고자 하는 것 내게는 없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내게 무엇을 찾는가?
우리는 무엇을 주고자 하는가?
우리에게 없는 것은 은과 금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
가장 귀한 것. 누구에게? 그 은혜를 아는 자에게....
이것이 합쳐질 때에 성령이 임한다. 아무리 받고 싶은 사람과 주고 싶은 사람이 만나도 그 대상이 바르지 못하면 항상 부딪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상이 그리스도로 합쳐질 때에 은혜가 임한다. 역사가 임한다.
그 예수는 바로 그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가장 근원적인 것- 멈추어진 인생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주었던 것 - 은과 금
물론 고맙고 선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시간이 지나면 계속 사라지는 것.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는 것.
따뜻한 마음도 중요하지만 예수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딱 거기까지다.
돈도 주고 예수도 주면 안되는가? 아니다. 돈을 주면 예수를 찾지 않는다. 예수를 바라지 않고 돈을 찾는다.
선교학 강의 - 한국 선교에 대한 세계의 비판 -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돈을 전한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붙인 교회만을 짓는다. 그들은 십자가의 선교가 아니라 십자군의 선교만을 할 뿐이다.
내게 있는 것 - 여러분에게 예수가 있는가?
여러분 안에 예수가 있는가?
그것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 대신에 돈을 남겨주고자 하지 않는가?
교회가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집 대신에, 카페, 체육과, 콘서트홀.... 이런 것들에 신경쓰지 않는가?
5.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2절)
-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사람들? 매일 같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를 메고 성전미문까지 데리고 오는 사람들? 궁극적인 구원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없으면 구원도 없었다. 그들의 헌신과 매일 매일의 수고가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만남을 가져다 주었고 성령의 역사를 이끌었다.
- 요한
복음서에서 수제자를 놓고 베드로와 경쟁하던 자. 그런데 앞선 2장의 설교 장면에서도 이 곳 앉은뱅이와의, 장면에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동행한다. 그가 성전에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고 그가 설교 할 때 함께 중보하고 그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그를 보좌한다.
두 사람이 같이 소리 지르고 같이 일으키면 오히려 잡음이 생긴다. 성령의 역사는 질서 가운데 나타난다. 누군가 일을 하면 누군가는 뒤에서 도와 줘야 한다. 누군가 앞에서 설교하면 누군가는 그 설교에 역사가 임하도록 뒤에서 기도해야 한다. 두 사람이 같이 설교하면 사람들이 듣지 못한다. 베드로가 일할 때 요한은 침묵가운데 그가 더 일하도록 그와 함께 하고, 함께 기도해준다. 동역자 없이 하나님의 역사 없다. 바울이 일하도록 바나바가 그를 이끌어주고 인도해주고 함께 했다. 어찌 보면 요한의 역할이 베드로의 역할보다 더 힘이 들다. 그래서 요한은 가장 끝까지 살아남아 초대교회의 위대한 동역자가 되어 주었고 요한계시록과 요한서신을 남겨 가장 영적이고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장 서서 일하는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열성을 가지고 일하지만 뒤에서 섬기는 자는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하는 자가 동역자이다.
6.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8절)
- 서는 종교- 십자가에서 조차 서 계신 예수님. 다른 종교의 신, 가정에서 조상을 제사할 때, 앉아있는 사진, 얼굴만을 바라보며..- 앉아서 섬김을 받는 신. 그리스도 자신도 서서 섬기고 남들도 서게 하는 예수.
- 한번도 선 적 없이 앉아만 있던 자가 예수의 이름을 듣고 선다. 설 뿐만 아니라 찬양한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니라 참 예배자가 된다.
-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기적 - 뛰어 서서 걸으며....
그것 보다 더 큰 기적 - 성전으로 들어갔다. 한번도 들어간 적 없는 성전 안의 세계, 은혜 안의 세계, 깊은 물의 세계, 지성소의 세계를 경험했다. 이것을 경험 한 적 없는 자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경험한 자, 그리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하고 싶지 않은가? 뛰어 서서 걷는 것 보다 가장 큰 기적
-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인생의 무게가 떠나갔다. 노래 할 수 없는 자가 노래한다. 하나님을 향해 찬양한다.
노래는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나를 향해서 부르는 것
찬양은 그가 좋아서, 그를 위해서, 그를 향해서 부르는 것.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않는 그를 위한 노래... 찬양.
남에게 돈을 구걸하던 그, 관심과 도움만을 구하던 그가 비로소 진정으로 예배하며 찬양했다.
앉은뱅이 - 홀로 설 수 없는 자. 홀로 걸을 수 없는 자.
그가 예수를 통해 걷고 뛰고, 그리고 찬양한다. 성전 안에 들어가 예배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7. 결론
수련회 가기 전 - 서론격이자 준비하는 말씀으로 로뎀나무에 관한 말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를 물리쳤던 엘리야, 큰 비의 은혜를 경험했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모든 은혜를 까먹고 다시 극심한 영적 침체로 빠져 간다.
어쩌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던 옐리야가 영적 불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수련회를 갖다 와서 함께 갔던 사람들과 또 같이 가지 못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할 때.
몇몇 성도들의 곤고한 상태를 느끼게 하신다. 중보기도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죽은 시체의 몸을 포개듯 그와 몸과 마음을 합하여 체휼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의 환경과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네, 누구 누구 성도님들이 지금 너무 힘들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세요"
"네가 지금 그들의 문제에 압도되었구나!"
그런데 그 "압도되었구나!"하는 말에 제 마음이 멈추어 섰습니다.
그들의 곤고함이 나를 압도했구나! 내가 왜 곤고함에 압도가 되었나! 내가 압도되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그 분의 선하심이 나를 압도해야지, 내가 왜 곤고함에 압도가 되었을까?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전 하나님께 압도당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로 압도당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세요. 나를 압도해 주세요. 곤고함을 압도하는 은혜를 부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곤고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무엇에 압도당하고 계십니까?
경제문제, 가정문제, 관계의 문제, 감정의 문제, 건강문제, 질병과 죽음의 문제...
여러분을 지금 압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룰 빼앗아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문제가 여러분의 은혜를 압도할 때에 걸음을 멈추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날 압도하게 해주세요. 문제에 압도되지 말고, 은혜가 날 압도하게 해 주세요."
세상에서는 어부요, 배우지 못한 그저 그랬던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멈추어 서셔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 처럼 그들은 성전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멈추어서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몇 십 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날마다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하나님께서 "그 날" 보게 하신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하며 은혜 안에 깊이 들어가려고 성전에 들어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멈추어 "하나님이 택한 어떤 사람"을 맡기십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며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올라 묵상하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맡기듯,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양들을 치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백성을 맡기시듯 날마다 기도에 힘쓰며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희망없이 날마다 구걸하며 살아가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게 하시고 그에게 예수님의 손을 내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씀합니다.
토머스 아퀴나스 -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우리는 돈도 가졌고, 권력도 가졌고, 화려한 성전도, 금과 은도 가졌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예수의 이름으로 설 수 있는 믿음, 설 수 없는 자를 서게 하는 믿음. 은혜 뒤에 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다시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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