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자녀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확장과 분열을 계속해 오면서 지금은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만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루터교 등의 주요 교단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단 들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침례교가 중심을 잡고 있고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장로교 하나만 예를 들어 그 차이를 보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 (온누리교회,명성교회), 총신대 중심의 예장 합동 (사랑의교회, 충현교회) 가 1, 2위를 다투고 총신대가 좀더 보수주의 노선을 지향한다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은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 노선 지향
그런데 그 이전에 고려신학교 중심의 이른바 고신파는 총신대의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워 안식일날 예배와 가정 이외에 다른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교회 내에서 드럼이나 악기 사용도 금할 경우도 많고....
이와는 달리 한신대 중심의 기장측은 가장 진보적이라서 교회 내 경건생활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정치에도 적극적...
이런 큰 네 가지 노선을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장로교만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에 의해 전해진 장로교가 지금은 백개 이상의 신앙노선으로 갈리워져 있다.
더 웃긴 것은 종교개혁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루터로부터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 루터교는 가장 소수파 중 하나...
그리고 예배 형태라든지 예식은 가장 예전적이고 가톨릭과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루터교 예배를 드리면 루터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거나 가톨릭의 아류 정도로 생각.... 아마도 개신교 교파 중에서 성공회 만큼이나 루터교도 어색하게 생각한다.
- 물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큰 분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도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때 정치적으로 주장되던 역사 교과서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열왕기와 역대서를 통해 거의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역사를 하나로 합치지 않고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 오늘 본문 -삭개오
그는 철저히 주류로부터 소외된 인물.
예수님의 그의 집으로 가시니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기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형처럼 대다수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장면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더 하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준을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졌다.
이 말은 지금식대로 말하면 이 사람도 "예수님의 자녀다" 하는 소리다. 그리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사역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자들을 함께 하게 하는 사역- 화목케 하는 사역
- 열심당원 시몬 및 대다수 제자와 세리 마태, 삭개오.
- 열 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리
- 좀 더 나아가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이, 더 나아가 이방인이 함께 하도록...
- 고린도후서
바울을 비난하고 갈갈히 분열되고 갈등하는 교회
-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임을 신뢰했다.
[엡 2:14-2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하나님 -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게....- 부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 죄가 들어가니....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탓, 변명.
그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돕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 - 교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 삭개오 -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외면당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
-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심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자기를 보러 모인 무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 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무리를 제자로 삼으신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반전이 나타난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제자들을 제촉하사 속히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주님....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 목회여정 중에 가장 힘든 한 해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에 메달리고... 내가 목사로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교육 (GTU)하는 학교
개신교와 가톨릭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논문을 쓰는 중 - 한 명의 교수 (Naomi Saidman) - 유대인, 유대교 전공. - 내가 다룬 페이퍼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불같이 화를 냄?-> 사마리아인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로고스 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를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우연히 듣게 된 한 설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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