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막 16:1-14)
부활, 새로운 해의 소망 (2018년 새해에 지은 시)
단지 똑같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오늘을 가리켜 새해라 부른다.
새해가 밝았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새해엔 소원 성취하라고
새해엔 건강하고 다 잘 될 것이라 다들 덕담이다.
왜 어젠 그런 소리 못하고 오늘엔 이렇게들 소란들인가!
그래 새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가, 새로운 시간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일게다.
그 때도 그랬을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음에도
하늘엔 잔치가 열렸다.
사탄이 패배하고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그 날,
제자들은 숨기에 바쁘고
거짓 종교인들과 로마의 관리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안도했던 날,
하늘엔 새해가 시작되었다.
부활의 날, 그리스도가 사망에서 살아나신 날,
십자가를 저주에서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킨 날,
그 날 후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이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해가 돋았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래, 우리의 새해는 바로 부활이다!
1.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2장 - 은사장, 13장 - 사랑장, 15장 -부활장)
(고전 15: 12, 1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기독교 -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종교이다.
수많은 위인들과 성인들 -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긴 하지만 부활을 기념하는 종교 - 기독교가 유일하다.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첫 번째인가?
No!
구약에서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
예수님 때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무엇보다 나사로 - 죽어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죽은 냄새가 나는 자가 살아남)
그런데 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나?
주를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첫 모델이기 떄문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선언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2. 부활을 믿느냐?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는 우리도 주의 재림의 날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이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뿔뿡히 흩어졌을 지라도 그들이 제자들로서 주님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그래도 열 두 명 중 몇명이라도 부활을 기다리고 믿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열 두 제자 중 어느 제자도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힘을 잃고 하늘에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낸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가 열렸는지 모르지만 부활의 바로 그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를 따르는 자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3. 부활의 증인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부활을 가장 기다리며 걱정했던 것은 뜻밖에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 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는데 그 결과 또한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 그들은 메시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지위, 체면, 사회적인 안전만을 위해서 예수를 죽였고, 부활하신 예수마저도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습니다.
2.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돌이 막혀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도 무작정 무덤으로 향하는 여인들 - 빈 무덤을 본다.
그리고 무덤에 흰 옷 입은 청년 - 천사
6-7절)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9절)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3. 제자들의 반응
11절)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절)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누가복음 24장에 자세히 소개)
->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더라
또 요한복음을 보면 20장에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나타나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보왔다고 하는데도 난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는 것 -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 주님의 말도, 믿음의 형제들의 말도 믿지 못하는 것
그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누군가의 증언도 아닌 자기가 믿고 싶은 것, 자기가 되고 싶은 것만을 믿은 것-> 마음이 완악하다.
-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4. 막달라 마리아
이에 비해 예수님의 부활의 장면에서 유독 눈에 띠는 한 사람- 바로 막달라 마리아
막 16장 1절에서도 여러 여인들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맨 처음으로 언급하고, 9절에도 그녀의 이름을 따로 언급하며 예수님께서 친히 그녀에게 보이심.
기독교 역사상 항상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여인
1) 예수를 부정하는 안티 기독교 입장 - 그녀의 증언을 신빙성 없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거짓증거를 내세우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누구인가? 그 장면을 같이 본 막달라 마리아...어떻게든 로마병사와 종교지도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믿지 못할 여인으로 만들어 버려야 했습니다.
카잔차스키라는 작가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많은 안티 기독교인들의 호응을 얻어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당시 유명한 귀족 부인이었으며 "예수의 부인"이었고 예수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곧 성배였다는 결론까지 이르릅니다.
기독교계와 학계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반박했지만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과 호응을 일으키기에 딱 알맞은 주장이었습니다.
2) 기독교 공동체
열 두 사도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달갑지 않은 시선
그녀의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 우리는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간음한 현장에서 붙들려와 돌에 맞아 죽을 위협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지혜로운 한마디로 살아난 여인으로 착각합니다(요한 8,1-11). 그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 또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며 그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요 12:1-8)과 동일인으로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1절은 그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요 11장)로 혼동하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과 같은 이름을 가지기는 했지만 동일인은 아닙니다. 단지 일곱 마귀에 들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한 고통스러웠던 여인일 뿐이었습니다(눅 8:2). \
- 또 하나의 역사적인 오류가 이 여인을 그릇된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1년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언급되는 “죄 많은 여인”을 지칭하며, ‘죄인’을 이르는 헬라어 ‘harmartolos’를 ‘창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porin’으로 잘못 해석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9년에야 이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은 약 1500년 동안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창녀로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에 표현되고 교회역사가들의 평가 - 초대교회의 중요한 여성리더
"가장 먼저"라는 말은 특별한 표현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 사실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여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소식이 초기 기독교 교회가 꾸며낸 일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를 첫 번째 증인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언젠가 책에서 읽고, 너무 감동이 되어 기록해 두었던 시
"마리아의 고백"
까닭을 묻는 이에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답한다.
의아심으로, 의구심으로, 약간은 질투심으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편애하시고 또한 그녀에게 나타나서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을까요?
왜 그러셨을까?"하고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답한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답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조차 없이'고생하며 돌아다니실 때 나는 그곳에 함께 있었지요(눅8: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어요(막15:40).
요셉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고요(막15:47).
요셉이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할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답니다(마태 27:61외).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도 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빈 무덤', 그곳에 가 있었지요(막16:1-2).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황망 속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무덤 밖, 그곳에 여전히 울면서 서 있었답니다(요한20:11)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이 최초로 나타나신 그곳, 그곳에 나는 또 약속처럼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요한20:13-18)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분이 전부였기 때문이에요.
내 사랑이 향할 데도 그분이었고,
내 관심이 쏠릴 데도 그분이었고,
내 시간이 바쳐질 데도 그분이었지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그분이 체포되었던 그순간,
이어 철저한 실패자로 종을 친 그 비통의 순간,
끝내는 모든 꿈이 날아간 듯이 보였던 그 절망의 순간에도,
여전히 그분은 나의 하늘이었답니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그분은 내 일생의 유일한 의미였기 때문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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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은, 제자들은 3년동안이나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은 항상 "나"였다.
주님이 왕이 되면 내가 받을 상급, 내가 얻게 될 지위.
예수가 죽자 그들은 생각은 이제 예수 없이 내가 어떻게 살지, 뭘하고 살지...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항상 "나"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관심사는 항상 "그 분" "주님"
사도바울..마리아... 살아있을 때에.. 어쩌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서럽게 억울하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주님을 생각했던 자들....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주님이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항상 그 자리에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는 매 주일, 아침 묵상을 하면서도 항상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새긴다.
매일 같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여러분이 없으면 찾게 되고 앞으로도 찾을 것이다.
무슨 일일까? 아픈가? 속상한 일이 있는가? 시험에 들진 않았을까?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여러분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고 항상 바란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파격적인 임무를 주신 이유;
오직 그녀 만이 언제나 주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그녀에게 보이셨다.
여러 부활의 증인들이 있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예수의 부활을 깨닫고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로마 총독이 아닌 제사장들을 찾아간다.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의 부활을 알고도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병사를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증언하게 만든다. 그들은 예수가 살았을 때도, 부활한 예수 앞에서도 그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메시야를 언제나 거부했다.
예수의 제자들 - 마리아에 의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도,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증언해도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왔는데도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세상으로 향한다.
모두의 관심이 예수가 아닌 "나 자신"에게 가 있었기에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예수를 따라다닌 자들도 예수를 통해 자기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부활의 증인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을 때도, 십자가를 질 때도, 죽었을 때도, 돌문이 막혀있는 무덤가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킨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부인하는 공동체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마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예수 부황의 첫 증인이 된다.
예수를 통해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폭풍우가 몰아쳐도, 때론 침묵하고, 내 인생이 힘든 상황이라도 그 분 안에 있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린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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