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2-16절 (주가 붙잡은 내 삶의 목적)
사도바울의 인생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그 이전의 삶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가장 좋은 가문, 가장 좋은 학벌, 로마의 시민권, 그 당시 사회가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메섹 도성으로 다음 삶의 성취를 이루려 가고 있습니다.
그 삶의 중간에 갑자기 예수가 그의 길을 막아 섭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너는 이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어느날 예수께서 바울의 인생 여정에 오셔서 그의 길을 막아섭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는 사울의 물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며 그의 인생을 돌이키게 합니다.
예수를 만난 바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전의 삶이 자기의 성공, 남들의 인정, 최고 중의 최고가 되기 위한 삶이었다면
예수를 만난 이후의 그의 삶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영광, 그 분께서 맡기신 사명, 이방인의 사도로 그를 부르신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2. 사명
주님은 우리의 삶에 방향을 주십니다. 목적을 주십니다.
바울은 그것을 "내가 예수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구절이 유명한 구절인데 정말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이 도대체 무언가?
예수님께서 나를 잡으셨는데 나도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그것을 나도 붙잡고 싶은데 그것은 예수님께 잡힌 바 된 나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공동번역 성경]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현대어 성경] 그리스도께서 내게 바라는 사람이 될 그날을 향해서 계속 노력할 뿐!
[한글 흠정역-킹제임스 버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그것은 곧 나의 가능성! 나의 창조의 목적, 내 삶의 비전
예수가 붙잡은 것은 현재의 나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실 바로 그 모습을 붙잡은 것이고 바울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다.
첫 번째 은혜는 나를 붙잡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정했다. 내가 그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붙잡은 주님은 각자에게 부름의 목적, 인생의 사명을 주십니다.
각자마다 다른 내 인생의 숙제를 주십니다.
바울에게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가나안땅까지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에게는 부정한 여인 고멜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삽에게는 성가대를 지휘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에게는 그 분의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삶의 목적, 푯대,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삶의 동기가 분명합니다. 삶이 어렵고 환경이 흔들려도 목적이 소명의식이 있고, 목적이 분명한 인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3.푯대를 잃은 인생 (꿈과 비전)
저희 어렸을 때는 꿈에 어른들이 늘 물어보는 질문이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질문들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학에 들어갈 때도, 자기 진로를 정하지 못해서 방황합니다.
공부를 다 하고 졸업을 한 후에조차도 아직도 지기 앞길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갑니다. 사회적인 큰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적이 무엇이 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돈버는 데에만 가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달란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려면 무엇을 해야지에 맞춥니다.
그러니까 평생 남들 기대만 맞추다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 행복, 정의, 믿음, 평화 등 인생의 목적이 되고, 삶을 정의할 수 있는 그러한 가치를 1차적 가치.
그리고 그러한 1차적 가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는 가치, 돈, 재능, 힘-> 2차적 가치
이러한 2차적 가치는 1차적 가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적 가치.
그런데 이러한 가치체계가 뒤바뀌어서 돈, 재능, 힘을 얻기 위해 사랑, 믿음, 정의등을 이용하거나 포기하면 이러한 현상을 철학이나 윤리학에선 "가치관의 전복" 가치관이 뒤바뀌었다.
그 어떤 가치보다도 존엄한 사람의 가치가 돈과 힘과 같은 물질적인 2차적 가치에 희생되는 것- 인간소외현상이라고 한다.
현대의 모든 정신적 문제의 근본- 가치관이 전복되고 소외된 데서부터 출발. 사람의 가치가 한 없이 떨어진 시대.
그것을 회복하러 오신 분- 예수-> 한 영혼의 가치를 모든 우주 만물보다 위에 두셨다. 오직 그 분만이 잃어버린 나의 가치, 잃어버린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키신다.
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푯대를 잃어버립니까?
모든 목적을 자기가 다 정해놓고 주님께는 도와달라고만 하는 인생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가 위급하면, 자기 뜻대로 안되면, 한계가 오면 그때서야 주님께 나와 도와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영적인 결혼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와 결혼 한다면서
"난 당신의 몸만 필요해...난 당신의 돈만 필요해..."
이렇다면 과연 그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연합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땅의 결혼은 불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한다해도 늘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결혼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과의 연합, 완전한 사랑을 고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도 온전히 연합하고자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 인생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참 안식과 참 사랑이 없습니다.
4. 아직 잡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이미 얻었다고, 온전히 이루었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에 있는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의 나이는 60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나이 60은 지금의 시대로 보면 80, 90대의 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배가 파산을 당하고, 수없이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나이는 이미 황혼의 때이고, 그동안 사역의 열매로 보면 누가 보아도 훌륭한 사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노년은 좀 여유 있게 즐기면서 사역을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말하면 ‘나는 아직 불러주신 주님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뒤에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달려간다’는 헬라어로 ‘dioko’인데 의미는 사냥개가 먹잇감을 보고 전심전력하여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바울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부르심의 소명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혹시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주저 앉아 있지는 않으십니까?
저처럼, 바울처럼, 목적지와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께 붙잡힌 인생은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한 삶입니다.
주께 붙잡히지 않은 인생이 바로 노예의 삶입니다.
주께서 주신 푯대가 있는 인생은 행복한 인생입니다.
죽기까지 내가 할 일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살 이유를 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갈길을 아시고 알려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외모에는 사람의 생긴 것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이전에 가졌던 가문, 학력, 능력, 그의 모든 커리어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 안의 중심,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심기워진 하나님의 꿈. 나에 대해 놓지 않고 꼭 붙잡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 주님이 바라보시는 나
주님이 붙잡고 계시는 내 미래의 모습,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내 중심.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주님이 바라보시고 붙잡고 계시는 나의 그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붙잡을 것을 쫓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의 재미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신비요, 나의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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