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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4:26-34절 자라는 씨의 비유

by 소리벼리 2021. 3. 21.

마가복음 4:26-34절 자라는 씨의 비유 

 

씨뿌리는 비유가 밭, 즉 말씀을 받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씨앗, 즉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로 인해 몇 십배의 열매를 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등불은 씨 뿌리는 자의 정체, 즉 그가 곧 예수 자신이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등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즉 빛을 받아들이는 자들 역시 빛의 자녀, 곧 빛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비유는 자라는 씨의 비유로 옮겨집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것은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앞에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뿌리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이고 사람들은 주로 밭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사람, 혹은 이전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림과 같으니 하고 그 사람, 인자,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지 않고, 불특정한 사람인 a man, 즉 어떤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뿌려진 씨앗은 어떻게 됩니까?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오직 옥토밭에서만 온전히 열매를 맺는데 이 구절에서 뿌려진 씨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라는 말은 사람이 자건 깨어 있건...씨앗은 자란다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이 한결 같이 같은 속도로 꾸준히 자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앙은 기복이 있다. 좀처럼 자라는 것이 보이질 않는다. 

설 것 같으면 넘어지고, 위태할 것 같은데 하면 오히려 요동치 않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다고 해서 씨앗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꿈쩍 않다가 자고 깨고 일어나 보니 싹이 나고 자라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의 발전, 성숙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성령은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열매맺게 하는 것을 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 자유로운 역사는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유롭다. 

우리가 알지 못하게 말씀의 역사는 사람을 자라게 하지만 또한 신앙의 역사에는 지름길이 없다. 싹을 내는 신앙, 이삭을 내는 신앙, 그리고 충실한 곡식을 내는 신앙의 여정 안에서 자란다. 

어린아이의 믿음, 청년의 믿음, 아비의 믿음의 여정 안에서 자란다. 이 여정을 건너띌 수 없다.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신앙의 여정을 따라 씨앗은 자라고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비행기 항로- 하늘에도 비행기들마다 다니는 항로가 있다. 우리 눈에는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하늘이지만 비행사들끼리만 공유하는 길- 하늘의 길,. 

신앙의 길도, 그 길을 걷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신앙의 여정- 언제 지났는지 알 수 없고, 언제 지날는지 알 수 없지만 되돌아 보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길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 4:29) 

 

이것이 그냥 우리가 들으면,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뒤에는 요엘이란 사람의 예언의 흔적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욜 3:13)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요엘서의 주제는 '주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은 거기서 곡식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던 사람들은 이제 그 고난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임하면." 이 가사가 요엘서에서 가져온 가사입니다. 이 '주의 날'은 예수님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러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어 고난을 견뎌왔던 자들에게는 성령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추수의 날인 것입니다.

 

정말 예수로 말미암아 주의 날이 임했는가? 

 

(요 3:18-21)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 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빛을 영접치 않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결국 악한 자이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빛에 있다가 어둠에 들어서면...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다가 서서히 보기 시작함. 자기 자신은 안 보이고 남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충 본다. 대충 보기 때문에 감각을 의지한다. 자기의 경험을 의지한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은 감각적인 삶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둠에 있다가 빛이 나오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나만 보인다. 그러다가 서서히 세상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말씀 안에 나오면 나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 나를 보고 이젠 더 나아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세계는 처음엔 잘 모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심는 자도 심기운 자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심겨지면, 말씀은 자라고, 모든 쓸때 없는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어서 공중의 새들까지도 그 그늘에 와서 깃들일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씨앗을 자꾸 비유의 소재로 사용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씨앗은 땅 속에 묻힙니다. 그러나 곧 땅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땅 속에 묻히지만, 곧 땅 속에서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 부활입니다. 즉, 예수는 우리에게 말씀을 심으십니다. 말씀이 심겨진 사람은, 영원하여, 죽음조차 그 사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기에," 말씀이 심겨진 그 사람은 영원하여, 반드시 부활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죽음을 뚫고 일어섭니다. 예수와 똑같은 사건을 겪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말씀이 아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여러분을 부활하게 합니다. 그 부활은 너무도 위대한 일이라, 생명의 풍성함 그 자체, 죽음이 설 자리가 없는 완전한 몸 그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의 파종으로 시작된 일이, 사람들의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묵상 질문) 

  1. 하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에 심고 가꾸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다. 우리가 매일 같이 읽는 말씀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봅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나라를 살고 계십니까? 

  

  2. 열매가 익을 때, 낫을 데는 추수 때는 믿는 자들에게는 열매를 거두는 추수의 때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심판의 때라는 것을 깊이 새겨 봅시다. 

  

  (지금은 엘리야 때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