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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영성 고전(9) - 이 글은 목회와 신학 2015년 9월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불신의 시대에 영적 우정을 말하다

- 조지 폭스의 일기와 친우회의 <명료화위원회>

 

정승구

프리몬트 로고스교회 담임목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TU(Ph.D. Candidate, 기독교영성학).

 

우리는 지금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를 탄 승객이 선장의 말을 믿을 수 없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은 나라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는 자(信者)들로 이뤄진 교회는 다른가? 최근 이름 있는 대형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존경의 대상이고 신앙의 모델이었던 목사님이 돈 문제,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는데 그 분에 대한 여러 풍문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친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추문들과 사건들을 보면서 성도들은 그들의 목회자도 성직자가 아니라 가운이나 강대상 뒤에 숨은 위선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목회자는 또한 어떠한가? 새벽 예배부터 수요 예배, 금요 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 등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기도하는데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성도들로 인해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출현은 성도들이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2015년 한국 교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불신-(不信-)들이 모여 단지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지 모르겠다.

 

영적 우정?

불신자의 교회가 돼버린 현대 교회에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다. 그렇지만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 혹은 교우들 간의 수평적인 영적 우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친밀함과 더불어 영성 목회에서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가치다. 12세기 영국의 시토회 수도자였던 리보의 에일레드(Aelred of Rievaulx)는 그의 저서 Spiritual Friendship(영적 우정에 관해)#1에서 영적 우정은 영적 완숙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일서 4:21과 요한복음 15:15을 묵상하면서 영적 우정은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런 영적 우정을 통해서 경험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정이다”(God is Friendship)라는 과감한 주장을 했다. 에일레드의 책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죽은 지 500여 년 후에 조지 폭스(George Fox)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친구다라고 주장하며 영적 우정에 기초한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2의 시작을 알렸다.

 

1. 조지 폭스와 친우회

 

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했으며 각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3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의 일기는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위대한 자서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폭스와 같은 세대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 땅에 필라델피아(형제애)라는 도시를 건설했던 윌리엄 펜은 조지 폭스의 일기서문에서 조지 폭스는 신앙인들을 기존의 신조나 교회의 교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증언한다.

왜 폭스는 교리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신앙인을 만들려 했을까?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직자들을 의존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사회는 기존의 왕정이 쇠퇴하고 공화정이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왕정이 약화되자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국 국교회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청교도, 재세례파, 급진파, 분리주의자 등 수많은 교파와 그룹들이 각자의 교리와 신앙을 주장하며 쏟아져 나왔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성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며 이윤을 탐했다. 말로는 정의와 정통을 외쳐대지만 속으로는 탐욕에 젖어가는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조지 폭스는 그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귀머거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랐다. 폭스는 당시의 교회를 뾰족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보다는 성경을 수단으로 설교를 통해 성공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영적인 방황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구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해답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런 영적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친우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됐습니다 !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분만이 네 상태에 대해 말씀해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습니다.”#4

 

이렇게 해서 내면의 빛’(Inward Light), ‘’(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친우회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다. 마치 데카르트가 자기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전통에만 의존하던 중세를 떠나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과 같이 조지 폭스는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형상, 내면의 빛을 붙잡은 것이다. 또한 신앙인들 안에는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그 빛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안의 내면의 빛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이를 위한 침묵의 예배는 영국 방방곡곡을 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이들 친우회의 영성적인 특징들을 명료화 위원회(Clearness Committee)라는 그들의 특별한 분별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명료화 위원회

명료화 위원회는 초기 친우회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영적인 분별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나 나아가서는 전체 공동체의 중요 안건을 위해서도 적용됐다. 이 모임 이면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내면에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교사, 즉 진리의 빛이 있고 동시에 문제에 처한 각 개인이나 그룹은 여러 종류의 내적외적 간섭으로 인해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방해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스스로가 자기 내면의 빛에 집중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질문과 경청, 침묵을 통해 격려하고 분별의 과정에 동참한다.

먼저 개인의 분별을 위한 명료화 위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 모임의 기본적인 구성은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가진 중심인물’(focus person)과 모임을 진행할 인도자’(clerk) 그리고 질문을 통해 중심인물을 돕는 ‘4-6명의 분별을 돕는 사람들’(discerners)로 이뤄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을 돕는 사람들의 질문이다.#5 이들은 충고나 설득을 통해서 중심인물에게 영향을 주려 하기보다 중심인물 스스로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와줘야 한다. 인도자는 분별자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길면 적절히 조절하거나 끊어줘야 한다. 침묵은 이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가장 역동적인 대화의 공간이다. 침묵을 통해서 중심인물이나 분별자들은 그들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친우회는 이런 개인적 명료화 위원회를 공동체적 분별을 위한 의사 결정 위원회로 확장했다. 각 교회나 교단의 총회 같은 모임에는 여러 가지 첨예한 안건들이 상정될 수 있지만 인도자는 개인적 명료화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 욕구 때문에 내면의 하나 되게 하는 빛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회의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각 개인들의 발언 사이에서 침묵을 통해 방해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한다. 이들의 의사 결정은 다수결이 아닌 완전 합의다. 아무리 적더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다수라는 힘의 논리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는 개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다리며 침묵한다. 이런 분별의 과정은 힘들고 더디지만 우리가 내면의 혹은 외부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빛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초기 미국의 퀘이커교도였던 존 울먼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후 노예해방 문제를 퀘이커 공동체에 내놓아 자그마치 20년간의 긴 시간을 거쳐 결국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했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노예해방 선언보다 8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나서는 말

책으로만 접했던 친우회의 모습을 글로 쓰기가 부끄러워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봤다. 아무런 찬송이나 의식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침묵 가운데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쉬운 반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기다리는 데 익숙해 보였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설교에 따라 오늘 은혜 받았어요, 설교가 그저 그랬어요하며 예배를 평가하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친우회의 예배와 그들의 영성은 대다수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낯설고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안팎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 조지 폭스의 믿음,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함께 모여 가만히 앉아 참고 기다리며 경청하는 친우회의 침묵의 영성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적 우정은 결국 나와 너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위한 따듯하고 조용한 기다림의 여정이 아닐까.

 

미주-----------------------------------------

1. 이 작품은 에일레드가 20여 년간 집필해 1167년경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elred of Rievaulx, Spiritual Friendship: Classics with Commentary Series,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2008).

2.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몸이 떨렸다고 해서 흔히들 퀘이커(Quaker)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공식 명칭은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한국 기독교계의 어른인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로 알려져 있듯이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갖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3.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문효미 옮김(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1994), 47.

4. 앞의 책, 71-73.

5. 구체적인 질문이나 대화법을 알기 원하면 <목회와신학>(2015.2)에 게재된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을 참고하라.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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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사도행전 14:11-12)

 

바울과 바나바가 디모데의 고향이었던 루스드라에 갔다. 거기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보고 바울은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서라"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걷게 했다. 헬레니즘 문화가 다스리던 그 고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한 일을 보고 그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 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부르며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 몇몇 주석에 보면 '일어나 걸으라' 말한 것은 바울인데 왜 사람들이 바나바에게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했을까 질문하며 아마도 바울의 생김새가 신이라 하기에는 너무 못생겨 그랬을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헤르메스 (Hermes).

성경을 읽다가 쉽게 넘겨버렸던 이름에 갑자기 눈이 멈추었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언어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전령 역할을 했던 올림푸스 12신들중의 하나이다. 고대에는 문자 뒤에는 신의 의미가 숨겨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헤르메스와 같은 신적 도움 없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는 해석학 (Hermeneutics)의 어원이 되었다.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던 루스드라 사람들. 아마도 사람의 말에는 기대 할 수 없는 신적인 능력이 바울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령, 설교자는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이기도 하지만 말씀의 능력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헤르메스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매주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고, 또 설교하는 내 눈 앞에 이 헤르메스라는 의미가 마치 사명처럼 다가온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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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U 산책길 연구회에서 출간한 단행본이 예수전도단 출판사의 도움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몇번 잡지에 연재한 글들은 있지만 공동저자로서 출간된 책은 처음이라 기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예수전도단 서점 몰에 올라있는 책 소개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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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고전의 렌즈를 통해 오늘을 읽다

우리 영혼이 하는 일이란

그저 찾고(seek), 아파하고(suffer), 신뢰(trust)하는 그 일 뿐.

- 노리치의 줄리안, 하나님 사랑의 계시(Showings), LT, ch. 5

 

나는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길에서 불러내어 새롭고 산 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모이는 교회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교회로,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로 인도하라는  세상의 예배들로부터 떠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기독교 영성 고전(Christian spiritual classics)은 역사적으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랫동안 널리 읽혀온 책들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신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텍스트를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는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정원에서 죄의 문제로 고뇌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 들고 읽으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집어 들고 읽음으로써 자유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이 과정에서 이전에 읽었던 안토니우스의 생애(Life of Antony)의 한 장면을 기억했다고 말한다.

 

영성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현재적인 영적 경험을 위한 공간을 창조하기도 하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영적 경험을 해석하거나 더욱 깊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성 고전이 오래된 텍스트라는 이유로 오늘날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old)는 오해로 인해 동시대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져 외면당하곤 한다. 아니면 막연히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기피당하기도 한다.

 

백 투 더 클래식 Back to the Classics은 이러한 영성 고전에 대한 오해와 기피를 넘어 지금 여기의 삶과 현실을 조망하여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참된 영성의 길로 이끌어주는 오늘에 비추어본 영성 고전 읽기라 할 수 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외면해 왔거나 잊혀져가는 영성 고전 읽기를 통해, ‘과거와 미래의 영적 경험을 해석하고 심화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당대의 삶과 현실을 비추어보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백 투 더 클래식 Back to the Classics은 영성 고전 읽기 그룹인 산책길 2013 01월호부터 2014 12월호까지 복음주의 기독교잡지인 복음과 상황 지면에 연재한 동명의 시리즈 원고를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산책길’(via the living books)은 기독교 영성 고전 읽기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 및 사회의 변화와 성숙을 일구어 나가려는 뜻을 품은 젊은 영성학 전공자들의 연구 모임이다.

 

영성 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 자본주의와 교회, 소비주의 영성, 여성 리더십, 일상의 영성, 사회정의와 평화 같은 한국교회와 현대 사회의 이슈들을 조명하고 그에 대한 해법과 대안을 모색하는 저자들의 인문학적 통찰력이 빛나는 책이다.

 

 

| 본문 중에서 |

성주님이 매우 좋아하시는 것은 곧 겸손입니다. 감히 제3궁방에도 들 수 없는 몸이라고 여러분이 자처할 때, 당장 그분의 마음을 사게 되어, 5궁방에 들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주 궁방을 드나들며 섬기기를 잘하면 성주께서 계시는 바로 그 궁방에까지 들여 주실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 영혼의 성 에필로그, 2.

성을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의 지혜와 힘으로 억지를 부려 성문을 열고자 하는 영혼은 이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성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 이르기도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적 임재 때문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고, 그분을 향한 영적 여정이 가능하다고 겸손히 고백하는 영혼에게 목자이신 하나님은 문을 열어 주신다. 자기중심적 도식에서 벗어나 외적 세계로부터 자신을 거두어들이고 자신의 영혼 중심에 계신 주님께 겸손히 자신을 드리는 이에게 하나님은 중심에서 빛을 비춰 주신다. _69

로렌스 형제는 파리에서 갈멜 수도원의 평신도 수사로 서원하는데, 그곳에서 니꼴라 에르망이라는 본명 대신에 로렌스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그가 담당했던 일은 요리와 설거지 외에도 다양한 허드렛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소소한 일들을 통해 도리어 더 깊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갔다. 일거리들은 하나님 임재 경험의 장애물이 아니라, 천상의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누리는 비밀을 알려 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상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로렌스 형제는 특별한 기도 훈련에 참여할 때보다도 하루하루의 일상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져 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세 번째 대화”)._115

웨슬리는 영적 독서를 위한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의도”the purity of intention라고 말한다. 이는 어떤 일을 실천할 때 그 동기와 의도와 열망이, 자기 이익이나 자기 사랑에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향한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의도의 순수성은 영적 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기독교의 기도와 모든 신앙 실천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열망 하나님의 소원에 일치시키셨던 예수님의 실천을 본받는 것이다(25:40).

그러므로 영적 실천으로서의 책읽기도 반드시 나의 일부만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순수한 의도로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 그분의 뜻과 소원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더해져야 한다._133

밤하늘이 쏟아놓은 뭇 별들보다 많은 분심들과 유혹들이 자신들의 호흡 속에 깃들어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고, 또 이것들을 부추기는 사탄의 위협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자신이 얼마나 목이 뻣뻣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현존과 천상의 은혜를 향한 갈망과 회개의 삶은 더 깊어 갈 수밖에 없었다.

원로가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를 어디든 달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

이 어디든지 눈물과 애통이 뒤따라야 한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61. _188

그는 신은 평소에는 삶의 끝자리로 밀어냈다가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안 될 때만 부르는 존재가 아니며, 교회는삶의 중심에 세워져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현장, 곧 시장, 실험실, 국회의사당 등에서 주도성과 책임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을 그릇된 경건으로 도피하는 것이라 말한다.

여러분은 오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확신을 품고 져야 하며, 확신을 품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릇된 경건으로 도피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옥중서간,48._280

 
 

| 목차 소개 |

 

서문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 · 5

 

1 신비와 경이

01 이종태 큐리오시티 · 21

02 남기정 퍼펙트 센스와 영적 감각 · 33

03 권혁일 신 나는 맞바꿈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믿음을 말하다 · 45

04 박세훈 렛잇고? 렛잇샤인! 아빌라의 테레사와 영혼의 성 · 59

05 임택동 신앙, 끝없는 목마름의 여정 그레고리우스의 에펙타시스 · 73

06 정승구 하나님과 연애하기 잔느 귀용의 아가서 주석 · 85

07 이종태 어머니 하나님 노리치의 줄리안과 계시 · 99

08 박세훈 로그인 클라우드 로렌스 수사와 하나님의 임재 · 111

 

2 훈련과 영성

 

09 남기정 존 웨슬리의 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 127

10 권철우 회심은 강철우리를 깨뜨린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조나단 에드워즈 · 141

11 권혁일 굿 딜(Good Deal)? 에크하르트의 눈으로 본 소비주의 영성 · 153

12 이강학 가난한 부인과 가난 부인 프란치스코와 가난의 영성 · 165

13 임택동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 179

14 이경희 고상한 욕망 지라르의 렌즈로 본회퍼를 읽다 · 191

15 정승구 타락한 교회 밖에서 길을 찾다

조지 폭스의 침묵과 존 버니언의 이야기 · 203

16 이강학 영성 생활은 리듬이다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규칙의 재발견 · 217

 

3 이웃과 정의

 

17 임택동 공감을 넘어서 긍휼로 안토니우스와 긍휼의 영성 · 235

18 박세훈 넘치는 부, 메마른 사랑 바실리우스와 부의 공공성 · 247

19 권혁일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게 하라 길선주·이기풍의 예언자적 영성 · 259

20 이경희 순수 기독교로의 귀환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 · 273

21 남기정 교회여, 사교클럽에서 벗어나라 마틴 루터 킹의 옥중서신 · 285

22 이경희 김교신과 민본의 기독교 · 299

23 정승구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와 여성 리더십 · 311

 

주제별 색인 · 324

 
 

| 저자 소개 |

산책길은 미국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공부 중인 영성학 박사과정생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교회 내 영성고전독서 활성화를 통해 한국교회를 섬기려는 비전을 갖고 스터디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아울러 <영성고전 가이드북> 시리즈 등을 기획하여 출판할 계획과 함께 블로그(spirituality.co.kr)를 개설하여 활발히 활동 중이다. 현재, GTU에서 기독교영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횃불트리니티에서 기독교영성을 가르치는 이강학 교수가 제2대 대표연구원을 맡고 있다.산책길이라는 이름은 산 책’(living books)인 영성 고전 텍스트를 길(via) 삼아 걷는 영적 여정을 의미하며, 소속 연구자들은 영성 고전 읽기를 통해 하나님께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인 우리에게로, 그리고 참된 나에게로 길 떠나는 여행자들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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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이야기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 :

조지 폭스와 존 버니언, 타락한 교회 밖에서 길을 찾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곧,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는 이 문구는 영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제도와 형식의 틀 속에 갇힌 종교를 거부하는 현대 미국인들의 신앙 풍조를 일컫는 말이다. 요즘엔 이 문구의 약자인 ‘SBNR’이 하나의 관용어가 될 정도로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데, 한국도 이러한 추세에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종교의 세속화와 타락과 변질이 SBNR의 성장에 핵심적인 양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SBNR과 비슷하게 제도 교회에 대한 회의 속에서 영적 삶을 갈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위대한 영성가들은 제도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던져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안적 영성을 제시하며 제도 교회에 실망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깊은 하나님 신앙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조직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절망을 넘어 하나님을 추구하였나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의 SBNR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혜와 희망을 제공해 줄 것이다.


 

조지 폭스와 침묵 속의 음성

목사들의 세상적인 생각은 내 삶에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뾰족집[교회]으로 불러들이는 종소리를 듣기가 괴로웠다. 그것은 마치 목사들이 자신의 상품을 팔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시장의 종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최고의 주교에서 가장 낮은 사제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팔아 설교를 통해 벌어들인 그 엄청난 돈이란! 세상에 어떤 장사와 비할 수 있겠는가?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91.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살던 영국은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영국의 기독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여전히 가톨릭의 제도와 형식을 많이 유지하고 있는 ‘국교도’와 가톨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청교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공화정이 출현하면서 국교회를 지탱하던 왕권이 약화되자 장로교, 침례교(재세례파), 랜터파(Ranters, 열광주의자들) 등의 크고 작은 집단들이 각기 개혁을 외치며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다양한 분파의 출현은 오히려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조지 폭스 역시 심각한 영적 혼란과 영혼의 방황을 경험했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교파의 여러 목사들과 구도자들을 찾아 다녔다. 그렇지만 그가 만난 목회자들이나 구도자들은 폭스의 영적인 갈급을 채워주기는커녕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으로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폭스에게 해결책으로 술과 흡연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폭스의 눈에 비친 성직자들의 모습이란 성직을 도구로 장사를 하는 장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성직자들이나 설교가들 중 아무도 그를 영적 혼란과 방황에서 건져주지 못했기에 폭스는 커다란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이 때 그에게 한 음성이 들렸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외부적으로 나를 도와주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바로 그 때, “너의 상태를 말해 줄 단 하나의 존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은 기쁨으로 요동쳤다. ……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71-73.


 

줄곧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찾던 폭스는 1946년 어느 날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우리 인간은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내면의 빛(Inner Light)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영은 그 내면의 빛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그들을 생명과 진리로 이끄신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 체험은 곧 폭스의 소명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길에서 불러내어 새롭고 산 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모이는 교회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교회로,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로 인도하라는 …… 세상의 예배들로부터 떠나게 하라는 …… 명령을 받았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88-89.


 

이것이 ‘친우회’ 혹은 ‘형제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면 ‘몸이 떨렸다’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퀘이커(Quaker)라고 불렀다. 그들은 기존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수단들, 이를 테면 예배 음악, 성직자들의 설교, 성례의식을 일체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말씀하시는 빛의 소리만을 듣기 위해 침묵하는 그들의 예배를 발전시켰다. 이렇게 교회의 제도나 다른 은혜의 수단들을 거부하고 직접적인 계시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조지 폭스는 당시 영국 국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개혁주의 목사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았으며,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리고 퀘이커는 한국에서도 몇 차례 이단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퀘이커를 이해할 때에 영적인 갈급함을 호소하는 구도자들에게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 분열되고 타락한 제도적 교회를 배경으로 발생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의 퀘이커 교회들은 부분적으로 목회자나 리더들을 인정하고 음악과 같은 예배 형식 등을 수용하기도 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한국이나 미국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계통의 집회들이 요란한 음악이나 통성기도와 같은 ‘열광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지만, 퀘이커는 외적인 방법을 차단하고 철저히 침묵을 통한 자기 내면의 성찰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존 버니언과 이야기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의 저자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은 조지 폭스와 동일한 혼란기를 살았다.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버니언은 종교를 끔찍이 혐오하며 방탕하게 살다가 독실한 신자인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아내는 결혼을 하며 두 권의 책, 《보통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길》(The Plain Man’s Path to Heaven), 《경건의 실천》(Practice of Piety)을 가지고 와서 버니언에게 읽어 주었는데, 그는 이 책들을 통해 경건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주위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외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고 있을 때, 버니언은 길을 지나다가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그들 안에 일어나는 영적 시험, 사탄의 방해,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거듭남과 같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사람들의 칭찬으로 은근히 자기 신앙에 자부심을 느끼던 버니언은 아낙네들로부터 자기가 경험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영적 무지를 깨닫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결국 버니언은 이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성경 속에 깊이 파묻혔고, 점점 더 깊은 진리에 눈이 뜨이게 되었다. 버니언은 급기야 그가 속한 작은 공동체의 설교자가 되지만, 이 공동체 역시 국교회를 반대하는 무리였기 때문에 12년간이나 옥살이를 하여만 했다. 《천로역정》은 이 수감생활 중에 남긴 역작이다.


 

나는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시대 신자들의 생활양식과 신앙생활에 관해서 글을 쓰려고 하다가, 어느덧 그들의 인생 여로와 구원의 영광에 이르는 길에 관한 비유를 구상하고 20가지가 넘는 비유를 정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까 20가지의 비유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 비유들은 불타는 석탄에서 튄 불똥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듯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 존 버니언, 《천로역정》(해누리 출판사, 2008), 14. 저자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버니언은 책과 성경,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이야기를 통해 자기가 경험한 진리를 전하고자 했다. 갖가지 비유들과 이야기들로 구성된 《천로역정》이 세상에 나왔을 때에 어떤 이들은 원고를 없애라고 비난하였다. 이 책이 애매모호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익사시키고, 비유를 통해서 눈을 멀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버니언은 그들의 비난에 이렇게 맞선다.

내가 은유나 비유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진실성이 없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계명들 역시 상징, 은유로 주어지지 않았는가? ……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간직한 빛과 은총을 발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비유 속에는 채굴할 가치가 있는, 그것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서 채굴해야만 하는 황금과 진주와 보석들이 묻혀있는 것이다.

- 존 버니언, <천로역정>, p. 17-18.


 

버니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은유, 비유, 이야기가 진리를 전달하고 경험하는 탁월한 매개 수단이라고 확신하였다. 조지 폭스가 타락한 제도 교회와 성직자들로부터 눈을 돌려 오직 ‘내면의 성찰과 침묵을 통한 직접적인 계시’에 집중했다면, 존 버니언은 ‘책과 성경’에 집중함으로써 그만의 ‘이야기’를 발전시켰다. 같은 시대, 똑같이 국교회에 반대해서 거리에서 설교를 하다가 감옥에서 생의 한 부분을 보내야 했던 거리의 설교가, 폭스와 버니언은 같지만 다른 방법으로, 다르지만 순전한 영적 갈망으로, 혼란을 넘어 제도 교회 밖에서 길을 찾아 나갔다.


 

새로운 길을 찾아

잘 알려진 것처럼 개신교의 영어 표기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이다. ‘저항(protest)’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이전 것을 허물고 다시(re) 형성(formation)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을 다시 형성한다는 말인가? 이미 제도화, 형식화, 세속화 되어버린 ‘죽은 종교’에 저항하여, 영적 순수성과 생동감을 가진 신앙을 다시 형성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러한 ‘재형성(reformation)’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어져야 할 신앙 운동이다. 기독교가 ‘비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3)도 이러한 개혁 정신을 계승, 실천하고 있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이 말에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오지 않는다며 비관하고 푸념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풍조를 ‘재형성’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라는 초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과거의 명성을 빛바랜 훈장처럼 달고 사람 없는 큰 건물만을 관리하는 ‘종교적인(Religious)’ 교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여 SBNR도 품을 수 있는 영적인(spiritual) 교회로 생명력을 이어갈 것인가는 현재 한국과 미국의 개신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시급한 과제이다. 조지 폭스와 존 버니언이 제도화, 형식화된 교회를 넘어 ‘침묵과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간 역사는 오늘 SBNR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정승구 /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프리몬트의 로고스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또한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에 기초한 해석학적 영성을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이기도 하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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