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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장 35-39절) 

 

많은 신학자들이 로마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학을 가장 잘 설명해 놓은 기독 신학의 핵심이라고 평가합니다. 위치를 보아도 신약성서의 중간 부분을 대충 피면 로마서가 나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서의 중심이고 그 제 8장은 로마서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제 8장은 신약성서의 중심이다. 저 독일의 경건파의 창시자 '슈페~너'~(Spener, Phillipp Jakob 1635~1705)의 말로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만약 성서를 반지에 비교한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8장은 그 보석의 빛나는 가장 중심부의 다이아몬드의 정점이다.(sparking point)'이라는 말했습니다. 또 다른 신학자는 로마서 8장에 대해 이같이 격찬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이 만일 다 불타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로마서 8장만 남아있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읽은 본문이 포함된 31-39절은 이 로마서 8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이요 가장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에 헨델의 메시야의 가장 피날레이면서도 하일라이트인 "환희의 찬가"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31절부터 보면 바울은 4가지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승리를 선포합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1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33절)

주가 정죄하리요(34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5절)

 

이 말은 반어적 표현으로 다시 말하면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고, 누구도 우리를 고발하거나 참소할 수 없고,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의 삶에 있어서 정말로 우리를 대적하는 자가 없는가? 우리를 고발하거나 참소하는 것은 누구인가?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하고 고발하고, 참소한다. 교인들이 나를 정죄하고 성경이 나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는 분이시고, 성령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영이시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고 참소하는가?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우리로 하여금 용서받지 못할 자가 되게 하고,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 의심하고, 무가치하게 만들며, 성령님이 다스리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 고난이 사라지고 편안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으로부터의 면제가 아니라 고난으로부터의 승리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난에서도 우리가 그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35절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처해 있는 삶의 실존적 현실을 7가지 용어를 써서 기록하고 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바울 -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실존적 7가지 문제를 설명 - 당시 로마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이요, 사도바울 본인이 자기 삶을 통해 처한 삶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존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환란 - 외부적인 역경

곤고 - 내적인, 심적인 역경, "매우 협소한 장소에 갇혀진 영혼"

[고후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핍박 - 종교적 억압, 신앙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

기근 - 경제적 궁핍

적신 - 옷이 벗겨지는 수치

위험 - 예기치 못한 삶의 사고

칼 - 갑작스럽게 닥쳐온 죽음 - 짧은 비수, 장검이 아니다.

죽을 사 - 한 일 - 저녁 석- 비수 비 ->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칼이 바로 죽음의 의미"이다.

 

화요일날 오전에 교회 사무실에 있는데 이유순 집사님께서 cd를 녹음하러 오셔서 월요일날 장로님 모시고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속이 많이 힘들어 하십니다. 하시기에 바로 통화해서 많이 힘드시냐고 물으시니까 검사를 오래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시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수요일 새벽예배 마치고 아이들 학교 RIDE해주고 오는데 우후남 집사님이 전화를 거셔서 911을 불렀다고 숨을 잘 못쉬신 다고 말씀하셔서 바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몸이 불편하니 병원을 가실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집에 도착했는데.....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 - 이미 시신이 되어 천이 얼굴 위로 덮혀 있는 상태....

다리가 확 풀어지면서 말 문이 막히고....- 정말 비수처럼 갑작스럽게 닥쳐온 죽음.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눈물이 그치면서 정말로 속으로 여러감정이 올라오는데 첫 번째 해야 할 일이 성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성도들은 또 얼마나 이 소식을 받고 충격을 받을까.....

추수 감사절을 한 주 앞두고 큰 슬픔 속에서 예배드려야 할 생각을 하니 정말 말 그대로 마음이 곤고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해 동안 지내오면서 마음 속으로 참 많이 들었던 생각이 "너 이런대도 계속 설교할꺼냐? 너 이런대도 계속 목회 할꺼냐?"

정말 마귀가 주는 정죄와 참소와 고발들이 내 마음 속에서 끊이질 않고 일어났는데..... 누워있는 시신 앞에서 또 다시 곤고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 그래도 임종예배를 드려야 하기에....전혀 준비도 없이 갔기 때문에 핸드폰 성경 어플을 켜 놓고 성경 구절을 찾는데

제일 먼저 들어온 구절이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을 읽는데 "그래 이젠 장로님, 집 걱정 없이 영원히 거할 안전하고 좋은 거처로 가시는구나...."라는 생각. 거처를 옮기게 될 때마다 염려하시면서 기도했던 모습이 있기에...

 

그리고 또 주신 말씀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러면서 장로님의 죽음이 그 분께는 정말 복된 죽음이구나. 우리는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송구하고 당황스럽고 슬프지만, 병원에서 아프다 가시는 것보다, 사고로 가시는 것보다,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주일까지 다 예배 드리고 그 전날 저녁도 속이 좀 편해 지셔서 미역국을 한 그릇 다 잡숫시고 주무셨다고 하니 그리 심하게 고통스러우셨던 같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니 마음 속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생전에 말씀을 사랑하셔서 말씀 암송도 많이 하셨지만 인생에서 돌아가시기 전 3년동안 가장 많이 말씀을 읽으시면서 2017년부터 일년에 적어도 14-15독을 매일 같이 읽으시면서 가셨기에 그 분의 죽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죽음인가 납득할 수가 있었습니다.

 

롬 8:31-34]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 조건이 아니라 너무도 분명한 If가 아니라 Since, Because- 확실한 사실

- 어떠한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주는 말씀인가? - 자기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는, 7가지 삶의 실존에 닥쳐 있는 그러한 자들.

- 간구하느시는 자- 현재 진행형 - 그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자.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긴다 - 가까스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광야에서 아말렉을 상대하실 때에 "여호와 닛시"하면서 내가 대대로 그들과 싸우겠다 하신 것처럼 계속해서, 완전하게, 승리하게 한다.

어떻게? 그분의 사랑으로...

단지 긍정적 사고로 말미암아 그런 척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믿음은 곧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이다.
  • 어떤 시간이나, 어떤 장소나, 어떤 대상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나 육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적 죽음을 두려워하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인생의 완성이다.

 

고난 - 하나님이 일하는 방법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왜 고난이 필요한가?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신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벧전 4:6-8]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장로님의 죽음을 앞두고 다같은 생각이겠지만 이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한 마디라도 더 잘 해드리고, 밥 한끼라도 더 자주 나누었을텐데.....

하는 남은 자들의 후회.... 떠난 후에 하면 정말 허무한 후회.

 

그렇기에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간절히 느낄 수 있다.

죽음은 칼 같이 온다. 이렇게 날벼락처럼 떨어진다. 순서도 없이 온다.

 

그렇기에 남은 성도들, 후회를 남기지 말고 사랑하자. 후회를 남기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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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2 (열왕기상 3장 16-28)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른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나누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비유를 기억하면서 둘째 아들을 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아버지의 모습에 관하여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이 비유가 두 부류의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결국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살펴 볼 신학적인, 혹은 실재 신앙적인 문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요구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내 몫"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지금도 무엇인가를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기도- 대화

간구- 들어달라고 구하는 것

중보- 남을 위해 구하는 것

 

하다못해 예배드리러 와서 "은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잘못 된 것 아닙니다. 제 자녀가 학교에서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부모에게 요구하듯이 자녀에게는 아버지께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함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서 있을 때 이지요.

그 분깃 만을 요구하며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려 한다면 아버지는 그것을 더 이상 들어줄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 나 복주어서 내 맘대로 살게 해 주세요."하는 기도를 어찌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여서 들어주었더니 더 이상 하나님 필요없어서 떠나버리는 것 -

사사기서의 교훈이요, 유럽, 미국,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까지 펼쳐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역사

 

더군다나 이 아버지는 분명 복을 주어 내보내보았자 아버지 품을 떠난 그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결국 세상에 기생하는, 짐승같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내보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 품 떠나서 어디 한 번 혼 좀 놔봐라!" 하는 모습이지 사랑의 모습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가만 내 버려 두시는 하나님.

그래서 17, 18세기의 하나님에 대한 상

창조하시고 심판 때까지 내버려 두시고 간섭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말라기 선지자 이후 - 400여년간 어떤 말씀도 들려지지 않는 이야기.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지을 때 간섭하지 않으시는가? 손대시지 않으시는가?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 손 대실 수 없는가? 손대시지 않으시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솔로몬의 판결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서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열왕기상 3장에 나온 솔로몬의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를 유명하게 한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촛점이 솔로몬의 판결에 맞추어져 있지요. 그리고 성경은 이 판결의 일화를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의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제 구약의 말씀을 필요없고 예수님의 말씀, 사도들의 말씀만을 들을 것인가하고 고민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리더들은 그리스도를 해석의 틀로 삼고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성가들과 심지어 후대의 종교개혁자들까지도 무엇이라고까지 주장하였냐면 "성경의 모든 사건과 설교들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고 까지 했으며, 성경의 각각의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의 재판에 등장하는 이 사건 역시, 성경이 자세히 다루고 있는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의 재판을 다시 들여다 봅시다. 또한 솔로몬의 지혜가 세상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지혜가 결국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경륜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과연 무엇입니까?

 

  • 솔로몬의 재판 (왕상 3:16-28)
  1. 이 재판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왕, 산 자의 어머니, 죽은 자의 어머니, 그리고 살아있는 한 아이.
  2. 간략한 내용: 한 집에 두 창기가 함께 살고 있고 사흘 차이로 아이를 낳는다. 그 중 한 아이가 죽자 죽은 아이의 엄마가 죽은 아이를 산 아이와 바꿔치기해서 지금 서로 자기가 산 자의 어머니라고 재판을 걸어온 것.
  3. 왕: 왕되신 하나님 산 자의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 죽은 자의 어머니 : 사탄 산 자: 모든 인간, 혹은 그리스도인.

 

    • 왜 두 창기라고 표현했을까?

창기: 몸을 판 자, 자기 위치를 잃어버린 자,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자

사탄: 천사에서 타락하여 땅으로 떨어진 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자

 

    • 아이의 부모가 바뀌다.

원래 우리 인간은 그 소속이 사탄이 아닌 그리스도께 속해 있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로 말미암아 사탄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었다. 우리의 소속이 산 자에서 죽은 자가 된 것이다.

 

    • 칼을 가져오라: 하나님의 공의, 심판

아이를 둘로 쪼개라는 엄위한 명령 앞에 산 자의 어머니는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죽은 자의 어머니는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사탄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분열과 파괴와 함께 공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권리, 아니 그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포기한다.

당시의 재판 - 칼을 가져오라는 왕의 심판 (최후의 판결)- 타협의 여지가 없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거짓이 탄로나는 자가 죽든, 그 둘이 아니면 아이가 죽어야 했다.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그저 아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한 것이다.

 

그 때 그 어미의 심정을 설명하는 말이 무엇인가?

 

26절: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왜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예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포기하셨다.

자기의 옳음도, 하늘보좌도, 사람들의 기대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우리를 살리셨다.

 

  •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 하나님의 공의

모든 것을 지켜본 왕이 아이를 살리려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 어미의 모습을 보며 공의로운 판결을 한다. 왜? 참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기 때문이다. 참 신과 거짓 신이 어디서 나뉘는가?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어디서 분별되는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가? 아니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만 결국 자신의 잇속만을 채릴 것인가?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확인을 통해 사탄의 거짓이 판명되었다. 이제 누가 죽게 되었는가? 사탄의 정체가 탄로나고 그는 심판받아 죽게 된 것이다.

 

28절: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솔로몬의 지혜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머문 것이다.

 

이 본문을 설명한 한 주석에서 이 때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한 산 자의 어머니의 모습과 분깃을 얻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결국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연결시킨다.

 

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아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자기 권위의 치명적인 손상이요, 자기 재산의 손해요, 무엇보다도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아들이 죽게 되는 것 보다 자기가 손해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빼앗기는 것을 감수하는 어머니의 불붙는 마음과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한 것을 알면서도 보낼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바알과 앗세라로,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결코 어디 한 번 나를 떠나면 어떻게 되나"하면서 우리의 실패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집 나간 자식을 잊어버리고 다시 평온하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무감각한 아버지도 아니다.

 

아들이 나가자만자 한 날도 마음을 놓치 않으면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또 기다리며 잃어버린 아들을 향한 불붙는 마음.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십자가의 마음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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