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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5.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애굽기 20장 12절)
  2. 2012.09.04 9월 5일 출애굽기 20:1-17절 (1)
  3. 2012.09.04 9월 4일 출애굽기 19장 16-25절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애굽기 20장 12절) 


에덴 동산에서 주셨던 한가지 계명-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가지 계명으로 이어집니다. 

계명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 삶에 다시금 하나님의 질서를 부여하시는 것이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 잘 알다시피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께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일부터 사계명 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계명이라면 오계명부터 십계명은 사람들 사이의 계명인데 사람들 사이의 계명 중 가장 첫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가장 첫 계명으로 삼았습니다. 


  • 레위기 19장은 이른바 거룩법이라고 일컬어지는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본문입니다. 


(레 19:2)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그 거룩한 삶의 방법이 나오는 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 공경이 곧 거룩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는 달리 레위기 19장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되어 있다. '공경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킵베드'는 가볍게 여기지 않는 '존경'을 의미한다. 그에 비하여 '경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레'는 '두려워하다'는 뜻으로서 주로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동사이다. 그런데 이 단어'야레'를 거의 유일하게 부모에게도 적용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듯 부모를 두려워하듯 받들라는 것입니다. 


구약 뿐만 아닙니다. 

  • 바울은 에베소서 6장 2-3절에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고 까지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약속있는 첫 계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앞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루면서 피차 복종하며 사랑할 것 (평등의 관계) 을 말하는데 부모와 자식 간에 있어서는 먼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다"하신 다음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다 (수직적 관계)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부모를 경외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연장선(또 다른 표현)이요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인 동시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요

땅의 모든 복의 약속있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는 이른바 목회서신입니다. 디모에게 선배 목회자로서 목회의 원칙과 철학을 전수하는 편지가 디모데서입니다. 

거기에서도 교회 안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 [딤전 5:1-4]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어른들에게는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어머니에게 하듯 하라... 편하게 막대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구약의 말씀에 연결하여 보면 공경하고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3-4절은 참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이 과부들에 대한 처우로 인한 갈등이 많았습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남편이 순교당한 과부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한 과부들은 교회 외에는 맡아줄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과부는 단순히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과부가 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결혼을 하기 보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일생을 교회에 헌신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가부장제적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리더십이나 역할이 훨씬 자유롭게 부과되었던 교회에서는 남편을 둔 아내보다 과부들에게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맡겨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전도사와 같은 기도하고 심방하는 일들이 과부들에게 맡겨지면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 과부들은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혹은 사회적인 배려와 관심의 중심이었던 동시에 교회 사역에 있어서는 활발한 리더들이요, 후원자들이요, 봉사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부들에 대한 환대와 리더십이 굳어 지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과부들이 몰려 들어 더이상 교회가 과부들을 감당하는데에 무리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은 심해져서 큰 교회가 작은 여러교회로 전파되기 시작되면서 그만큼 재정도 약화되었는데 과부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진 것입니다. 


거기다가 새롭게 들어온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구제가 너무 히브리파, 즉 이스라엘 사람들 위주로 가고 있다고 불평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과부에 대한 구제와 그로 인한 불평 불만이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정도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일곱집사를 세워 이 일을 전담하게 합니다. 

이렇게 할 정도로 과부들의 문제는 초대 교회의 교회의 큰 중심문제 중의 하나였던 것이지요. 


디모데에게 전하는 목회서신에 있어서도 바울은 이 과부들에 대한 존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적으로 존대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존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3절에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합니다. 

아니 과부면 다 과부지 참 과부가 있고 거짓 과부가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참 과부는 "who are really in need", 즉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들을 인정하고 존대해 주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있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첫째는 육십이 넘은 자- 왜? 육십이 안된 자들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둘째는 자녀나 손녀가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또 도움을 청하는 자

셋째,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

이들은 참 과부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과부는 의지할 남편을 잃은 자입니다. 이제 기댈 곳이 자녀 밖에 없습니다. 

무엇하나 자녀 외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 다 희생하다가 가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자가 바로 과부입니다. 


그런자들을 존대하라. 효를 행하라. 이제 보답하라. 

그러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무슨 소리입니까? 참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해 희생하다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생각의 차이도, 지식의 차이도, 힘의 차이도 날 때에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분들의 삶, 전통, 역사들을 들으면서 함께 나눌 때에 

그것이 참 예배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막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에게 효를 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효를 행하지는 않고 하나님 앞에서 ‘고르반’을 외치면서 자신의 불효를 합리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잘못된 경건을 외치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 부모공경에 실패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어릴적은 부모가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녀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효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필요있지 못합니다. 

정작 효가 정작 필요한 때가 언제입니까? 

자녀가 나이가 들어서 부모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많이 강해 졌을 때에 정작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행하실 때 열두 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이스라엘 전체가 떠들썩 할 정도로 온 무리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들이 왜 주님을 따랐습니까? 

자기한테 주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을 것 같기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주님이 무기력하게 달리시고 더 이상 그 분이 자기에게 필요없다고 느끼니까 제자들 모두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주님과 함께 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 (맡겨진 책임을 다한 자, 억지로 지워진 무거운 짐을 진자), 아리마대 요셉 (세상적인 욕심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심한 자), 그리고 여인들...(사랑하기에, 다른 이유 없이...) 

진짜 신앙은 어느 때 나타나는가? 

아무 힘 없는 과부를 공경하는 것처럼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볼 때에 참 믿음, 참 경건, 참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신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에게 효를 행하게 하라는 말씀을 계명으로 주신 것은 이것이 저절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육해야 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효라는 것이 우러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식을 끝없이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가장 큰 책임이고 마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팽귄, 비둘기, 수많은 동물들.....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생의 모든 것을 바치는...)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특성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궂이 말하지 않아도 내 자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아니 내 몸이 깨어져도 자식에겐 더 좋은 것 주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정말 짐승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동물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받고, 훈련받고, 의지적으로 노력하는 인간들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윗 세대, 우리 세대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에게 베풀 줄은 알았지만 공경하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부모보다 잘 나도록, 밖에 나가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부모가 희생할 줄은 알았어도 부모를 공경하게끔 가르치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남들보다 못해주면 비난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녀가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가 교육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효를 행하게 하라고 구태여 강조해서 말한 것은 그렇지 않으면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 입니다. 작은 가정 하나 하나가 세워지면서 교회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정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제도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성경은 가정을 교회의 연장선으로 봅니다. 

그 가정의 질서가 곧 부모공경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사랑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내하면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위기가 오면 교회에도 반드시 위기가 옵니다. 

그런데 교회의 위기는 다들 인식하는데 교회가, 성도가 가정의 위기가 곧 신앙의 위기, 교회의 위기라는 것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 교회에서 아이들이 비어 갑니까? 왜 노인들은 많은데 자녀들은 사라집니까? 

자녀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해 주었는데 정작 부모가 힘이 없어지니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가는 제자들처럼 평생 자녀들을 위해 희생했던 부모들을 교회에, 요양원에 맡기고 자녀들은 세상으로,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입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국가 없이 그 정체성을 유지했던 민족입니다. 다윗 이후로 거의 3000년 넘는 역사동안 이스라엘이 국가의 체계를 유지했던 기간은 500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들이 신앙을 유지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애써 자녀들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미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자녀들을 훈계하라. 가르쳐라. 책망하라. 효를 행하게 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것이 이 땅에서 잘되고 오래사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것-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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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십계명

  • 계명을 주시기 하나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먼저 정하신다.

"나는 너를 애굽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하나님 여호와니라." -> 그리고 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십계명의 정신은 모든 법의 기초 정신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에게 지금까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하게 요구되는 계명이었다. 하나의 법령이 이토록 오랜 시간을 걸쳐 중요하게 변치 않고 지켜질 있을까? 하는 문제의 답은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라는 답변 외엔 없다.

  • 십계명은 사람들이 들을 있도록 소리로 울려 퍼졌으며, 구약의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말씀으로 주신 유일한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돌판 위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친히 새겨 주신 것이다. -> 십계명을 직접 음성으로, 그리고 또한 돌판에 새겨서 가지 통로로서 백성에게 주어야만 했는가? 그것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 1-4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리들의 의무를 규정했고 5-10계명은 인간들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이 다 금하는 내용이나 넷째와 다섯째 계명은 좀 다른 경우다. 또 일반적으로 행동에 관한 것들이나, 셋째 계명은 주로 말에 관한 것이고, 다섯째와 열째 계명이 생각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 십계명은 "의무"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무" 대한 강한 의식이 있을까?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책임의식.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에게 의무감이 있을까? 단지 습관이나 목적에 의한 욕심으로 채워진 것은 아닐까?

 

-> 신학교 졸업하고 한국에서 목사 고시를 보는데 엉뚱하게 마지막 문제가 십계명을 차례대로 쓰라는 문제였다. 한창 성경이며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들만 공부해 놓았다가 막상 십계명을 쓰려니 순서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었던 십계명…. 은혜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십계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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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05 22:11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 불만을 참 많이도 가지고 있었네요.
    하나님의 존재,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음면 되지....교회를 왜 이리 힘들게 다니며,
    교회생활을 자유롭게.....내 편한대로 하려고 했던 착오들....그저 내 편리에 의해
    하려 했던 생각들....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의무...십계명에 대해 깊히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하나님.

19 16~25

  • 25: 셋째 아침- 사흘 간의 내적 외적 성결의 준비- 마치 십자가 3 후의 부활절 아침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아침

-> 나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위해 준비해야 성결한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 19: 음성으로 임한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 음성으로 임한 하나님-> 1:1: 말씀이 육신이 되사-> 육신으로 임하신 하나님

        말씀(음성) 으로 임한 하나님-> 존귀하고 엄위한, 웅장함과 거룩함의 하나님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말구유에 오신 초라한 하나님, 조롱 당하시고 멸시당하신 하나님.

-> 하나님의 성격은 정말로 다른가? 공통적인 모습은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변함이 없으심.

음성으로 오신 하나님: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 사탄의 유혹(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린 인간의 죄악 앞에서 다시 질서(구별, 구분) 세우시는 하나님 _. 일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피조물과 창조주) 다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휘장이 찢어지게 해서 영원한 가족의 관계,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 21-24: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신가? -> 거룩하기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하실 없는 . 끊임없는 경고->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 그들이 다칠까 염려하시는 하나님은 아닌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한 그들이 두려움 없이, 거룩함에 대한 준비 없이 다가와서 다칠까, 상할까 염려하시는 사랑의 모습은 아닌가?

 

질문) 접근할 없도록 구별되시고, 웅대하신 하나님의 모습과 친밀하시고 함께 하시지만 때로는 그것 때문에 무시 당하시고 조롱당하시는 하나님->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 오셔야 우리가 분을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인정할 있을까?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시는가?

질문)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그리스도가 정말 다른 모습인가? 구약의 하나님도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우상숭배로 인해 조롱당하시고 하시지 않는가? 신약의 그리스도도 여전히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전능자의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는가?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그리스도를 다르게 느끼는가?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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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수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04 09:56

    아.... 벅찬말씀...
    두려운 너무 기쁜 하나님에 임재..
    나에게 우리교회에 일어나길....

  2.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04 12:37

    집사님!! 새벽예배에 함께 할 순 없지만 이렇게 말씀 나누어도 통하는게 있어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