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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11.27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5-16절)
  2. 2014.02.22 사랑하사 (요 3:16-17)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5-16절) 

 

전세계 성도들이 성경 66권 안의 모든 구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꼽으라면 1, 2 위를 다투는 구절 - 시편 23편과 더불어 요한복음 3장 16절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의 신앙고백을 다루고 있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는 성구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이 구절이 나타내게 된 배경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그가 누구이기에 그에게 기독교 역사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말씀을 주신 것일까? 

 

본문 3장 1절에서는 니고데모가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바리세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리고 여러분 성경책에 지도자라는 말 뒤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 분들은 그 번호를 따라서 설명을 읽어보면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더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는 것은 당시 로마의 승인하에 이스라엘 국가 전체에서 종교적 일뿐 아니라 정치적 결정까지도 함께 결정했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초기 문헌을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기 위한 조건들이 나오는데 산헤드린회원이 되려면 

1)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2)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며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하며 

3) 또한 경제력을 갖춘 재력가이어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부러울 것 없는 권력과 재력과 남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학자들은 "밤에" 라는 시간에 관심을 가집니다. 

지금처럼 전기나 불빛을 내기가 어려웠던 때에, 밤은 곧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이요, 더군다나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손님을 초대하는 일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예수님을, 그것도 밤에 찾아왔을까요? 

밤에 찾아왔던 것은 남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와서 주님을 가리켜 선생이라 부릅니다. 

 

1장 38절부터 보면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둬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묻지요. 

"무엇을 구하느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며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고 친절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유력한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님이지요?" 라고 묻습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고 동시에 그가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는 것이 알려지면 그가 누려왔던 선생의 자리, 사람들의 존경스런 눈빛이 사라질까 두려워 남들이 보지 않는 밤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기까지 얼마나 망설이고, 고민하고, 밤잠을 설쳤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남들의 칭송을 받고, 그 자신이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치는 자였더라 할지라도 그가 풀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 영적인 갈증, 갈망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어도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던, 남들을 가르치고 존경을 받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누군가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그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 술을 먹고, 오락을 하고, 춤을 추고, 바람을 피고, 도박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어서 혹시 이 분이라면 자신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자신의 신분을 무릅쓰고 예수님께로 찾아온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세상 사람들은 가난한 것을 두려워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더군다나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인생을 잘못살았다는 말로 여긴다. 그래서 그 가난함을 숨긴다. 부자인채 한다. 난 부족함이 없다 한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한 자를 복되다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 말한다. 자신의 가난함을 숨기지 말라 한다. 

마음의 가난함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다. 아니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을 가장하고 꾸미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주님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님을 도와줄 지언정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믿음의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무릅쓰고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자기 위치 때문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눈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미루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우상 때문에, 너무 부자여서, 혹은 너무 가난해서, 질병 때문에, 인생의 실패 때문에, 어떤 이는 믿는 사람들의 추태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지만 실로 자신의 심령의 가난한 자들은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왔지만 은밀히라도 주님께 찾아온 니고데모를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께로 온 선생님이지요?" 묻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겉으로 보면 선문답같은 대화이다. 

선생님 맞지요? 하고 묻는데 거듭나야지 하나님 나라를 본다 하신다. 

논리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 니고데모의 가난한 심령, 그 영적 가난함때문에 밤에 찾아온 그 연약함을 바라보시며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넌 심령이 가난한 자이구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키를 주시는 것이다. 

그 키는 무엇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영적인 가난함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소리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요, 그러기에 영적인 대화를 따라가지못한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난 늙었는데 어떻게 또 태어납니까? " 그의 학식에 비추어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답변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10절) 

 

니고데모 - 바리새인이요 선생이었다. 달리 말하면 율법학자요 율법의 실천자였다. 

그가 그 자신의 영적 갈급함, 마음의 가난함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대충 신앙생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대도 만족이 없다. 평안이 없다. 계속 부족한 것 같고,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수가 없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 17절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하나님 주신 계명을 알지 아니하냐?"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절 (함께)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이것을 가진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구제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소리인가? 이것은 일차적 해석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 애쓴 것 - 주님의 계명을 힘써 지킨 것 

그것을 보시고 주님이 "사랑하사" - 그것을 귀히 보신 것이다. 그의 노력의 흔적들을 칭찬하신 것이다. 

그리고 너와 같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네가 살아왔던 그 신앙, 계명을 지키는 그 열심을 또 다른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런데 자신이 해왔던 그 마음이 네 마음에 가득차서 네 가난함이 사라져 버렸다. 

네 열심이 네 의가 되어서 너는 네가 행한 그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취해 있구나.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을 다시 다 비우고 나와 새 길을 가자꾸나....

 

마치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았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어려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우고 마음대로 행했다면 이젠 내 마음대로 살아보렴...: 하는 것으로 새로운 부르심으로 그를 초대하신다. 

 

우리가 행했던 아무리 선하고 좋았던 열심도 그것이 스스로 만족이 되면 그것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무슨 소리인가? 우리 스스로 하늘로 올라갈 자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계명을 지켜도 그것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은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므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내려서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된다. 

회개하고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장대 높이 놋불뱀을 달아놓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도록 하셨다. 그것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자들은 바라보지 못함으로 죽게 되었다. 

 

우리가 내는 열심. 

교회 내에선 그것 때문에 누군 열심히 믿고 누군 게으르게 믿고 그것으로 신앙의 높낮이를 판단하지만, 결국 우리가 내는 모든 열심이란 눈을 들어 장대를 바라보는 그런 노력과 의지이다. 물론 이것조차 못하는 분들이 분명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끝까지 바라보지도 맛보지도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어떤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상, 그 인간...그렇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 떠난...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모든 신앙의 열심은 결국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화) 오징어 게임 오일남 할아버지 - 첫번째 방송 인터뷰 - 유튜브 

 

젊었을 땐 산에 가서 예쁜 꽃이 있으면 꺾어서 집에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산에 가서 예쁜 꽃이 있으면 바라보고 있다가 그냥 옵니다. 

그 꽃이 보고 싶으면 다시 그 산에 갑니다. 나이가 드니 그렇게 되네요. 

그냥 조용하게, 조금은 투박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말은 듣는 젊은 여자 아나운서가 갑자기 눈물을 떠트리며 흐느낍니다. 그것을 보며 저도 감동을 받았어요. 

 

소유하는 신앙이 있고,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요. 

젊을 때는 신앙도 내것, 구원의 은혜, 방법, 공부하듯, 참고서 외우듯 그렇게 소유하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분이 아니예요. 내가 그 분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분도 날 완전히 소유하지 않으세요. 

 

그 분도 날 바라보시며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듯 조심이 다듬어 가시고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분 눈에 비친 그 분이 가다듬어 가시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신앙은 때로는 잡히지 않고, 더딘것 같고, 변하지 않는 것 같고, 진보가 없는 것 같지만 내 존재의 모든 것 까지도 주님 손안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늦을 것 같은 그런 순간들이 지나고 보면 항상 내가 힘써 했던 것보다 훨씬 빠를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없습니다. 교만함이 없이 감사만 남습니다. 

 

니고데모가 처음 이해했던 하나님

법을 잘 지켜서 순종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잘 지켜도 좀처럼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런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그런데 육적인, 혹은 율법적인 마음에 젖어 있던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그런 소리도 율법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내가 회개해야지... 

제일 답답할 때가 어떨 때인가? 본심을 몰라 줄때... 진정성을 몰라 줄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자격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이 날 사랑해서 날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냥 믿어라.... 

그러면 내가 그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 분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마음 속에 가득차면, 그 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느껴지기만 하면.... 난 저절로 그 분의 마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 

내 인생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날 이끌어 오셨고 또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 

 

여러분! 마음이 가난할 때가 있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 때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던가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주님, 날 사랑하세요? 내가 마음이 아파요. 내가 마음이 가난해요. 허전하고 외롭고 무너져요. 

내 생명이 잃어져버린 것만 같아요.

그러면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여러분에게도 꼭 다가가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자마다 아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풍성한 삶,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내가 영생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절망과 허전함으로부터 일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주심으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플 때에도 허전할 때에도 니고데모 처럼 그 분께 나아가 하늘나라의 맛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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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예배 설교 

요한복음 3장 16-17절 사랑하사 


성경은 신구약이 합쳐서 66권입니다. 거기에는 인류의 역사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때로부터 계시록의 예수의 재림의 때까지 우리 인류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 중, 그리고 인류의 역사의 모든 일등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가장 중요하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 바리새인 관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중에 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하나님의 본심이 그대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 손수 지으신, 창조하신 보시기 좋았던 완전한 세상. 

평화와 풍요와 사랑과 열매가 풍성했던 세상. 

그런데 지금은 어떤 세상? 

죄로 부패하고, 서로 죽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인간 서로 서로가, 인간과 자연이, 인간과 만물이 서로 원수된 세상.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패하고 어둔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유일무이한 자신을 내어 주신 것, 그 분이 성육신 하여 이 땅에 함께 거한 것.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저를 믿는 자마다"는 제한과 무한이 함께 있는 구절- 그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가... 이방인이나 유대인 구별없이, 어느 누구나... 

   그러나 동시에 오직 그를 믿을 때에만... 그를 영접할 때에만... 그를 통해서 구원하시겠다는 유일한 조건. 


3장 1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대인의 관원이라.”

즉 다시말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다는 말은 공의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산헤드린회원이 되려면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하고 또한 재력가이어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조건을 통해 니고데모는 학자였으며, 귀족이었으며 권세가 대단한 사람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인 동시에 부자였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을,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은밀히 주님을 찾아와서 조심히 주님꼐 말합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 표현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다. 그런데 율법학자요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었지만 결국 영적인 흑암 속에서 살아온 니고데모가 그 빛을 보고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왜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왔던 것일까요? 왜 그 많은 명성과 존경과 권위와 부를 획득한 니고데모는 만약 찾아온 것이 밝혀진다면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을까요.. 밤에 그를 잠 못 들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치는 자라 하더라도 그가 도달할 수 없고 그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가진 학식으로도, 돈으로도, 명예로도 할 수 없는 한계에 빠져있는 단지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어도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던, 그리고 그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 술을 먹고, 오락을 하고, 춤을 추고 바람을 피고, 도박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어서 혹시 이 분이라면 자신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자신의 신분을 무릅쓰고 예수님께로 찾아온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믿음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무릅쓰고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자기 위치 때문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눈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미루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우상 때문에, 너무 부자여서, 혹은 너무 가난해서, 질병 때문에, 인생의 실패 때문에, 어떤 이는 믿는 사람들의 추태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지만 실로 자신의 심령의 가난한 자들은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평안이 없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천국을 주십니다. 니고데모는 하늘나라를 소망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혹시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선지자나 예언자나 혹은 메시야가 아닐까,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탈출 시켜 줄 분이 아닐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다가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건, 여러분의 마음이 가난해서, 주님이 필요해서 여러 위험을 무릎쓰고 이 자리에서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아뢴다면 주님께서는 다름아닌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2)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입니까?” 하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거듭나야 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동문서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문답하는 것 같기도 하는 것 같지만 니고데모를 꾀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니고데모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숨김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네게 심령이 가난해서 그렇게 허전하고 괴롭고 한데 그것은 네가 하늘나라의 신분을 얻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네 마음의 가난함을 위해서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금의 네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네가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듭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거듭나는 것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단지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그만한 지위에 있고, 남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위치에 있고 성경의 교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 한 말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안타까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책망까지 하십니다. 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왜 그는 아직까지도 육적인 믿음, 땅의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영적으로 그는 아직도 목마르고, 배고픈 심령이 가난한 자이지만 그것의 원인을 영적인 데에서 찾지를 못합니다. 그는 지식적으로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깨달음을 원했고, 또한 육적인 구원을, 평안을 원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유대인들 역시 그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분이라면 내 병든 몸을 치유하시겠지, 내 허전한 마음의 위로가 되시겠지, 내 가난을 몰아내어 주시겠지. 우리 민족을 구출해 주시겠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까지 이러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을 가까이서 따랐던 열 두 제자들 역시 그러한 믿음 가운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 역시 그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예수님께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라도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 가는 길이 되어 주십니다. 


니고데모는 신실하고 겸손한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나지 못한 신자였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해도 땅의 믿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세상의 복과 연결 시켜서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구약 시대때의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였습니다. 인간이 그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이 임하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이 구약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부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래 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당대의 부자였습니다. 욥도 당대의 부자였고 다윗도 솔로몬도 부자였습니다. 말씀을 잘 지킨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900살 이상 산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일찍 죽는 사람 신앙 좋은 사람에게는 잘 안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부자가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부자되었더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더니 오래 살았더라라는 내용도 없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잘 지켜서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받고 성령이 임하더니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더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역할은 줄어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비로서 흡족한 열매들을 맺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가장 큰 축복은 순교로서 임합니다. 땅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 자신의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혹은 신자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 못배우고, 가난하고, 처량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고 성령받아서 자신의 인생을 불살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위대한 역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복은 성령의 복은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주제로 삼습니다. 구약의 복은 이땅에서 충성하고 고난받아 이땅에서 복받는 것이었다면 신약의 복은 이땅에서충성하고 고난받아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복과 구약의 복이 확 떨어져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일 낮 예배 때 배우고 있는 팔복에서 보듯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구약시대때와 똑같이 땅의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결과로, 궁극적인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고 팔복을 끝맺고 있습니다. 복의 복, 복의 결과는 이땅에서 복음 때문에 핍박받더라도 하늘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도 땅의 복을 사모하는 신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목사들도 땅의 복을 얘기해야만 신자들이 오기 때문에 땅의 복을 말하는 목자들로 넘쳐납니다. 아니 그들 자신이 땅의 복을 사모하면서 교회를 통해서도 큰 성전, 화려한 성전으로서 자신의 업적을 이루려 합니다. 니고데모도 땅의 복을 사모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더니 그는 하늘의 복을 사모하는 신자로서 바뀌어 갑니다. 바람이 불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그의 인생도 예측하지 못하고 제한 없는 성령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을 땅의 한계, 육의 한계를 벗어난 인생을 삽니다. 바람과 같이 자유하고 시원한 삶을 살아갑니다.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는 남의 눈을 피해서 올 정도로 연약했던 믿음이 자라서 후에는 예수님을 잡아 가두려고 하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며 “어떻게 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의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판단할 수 있는가 라고 예수님을 변호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요 7 : 50)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33kg 정도 가지고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바르고 모시천으로 시체를 바르고 무덤에 모시는 장면이 (요 19 : 39)에 나옵니다. 


ex) 어렸을 적. 피부병으로 인해 학교도 잘 가지 못하고... 그저 책 읽고 거울 보면서...혼자 놀던 아이 

초등학교 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란 책을 통해서 나도 친구를 만들자... 해서 대화하기 시작한 것이 예수님. 교회는 다녔지만...깊은 신앙이 없던 때... 그냥 혼자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 분과  대화하게 됨. 

내가 처음 만난 예수그리스도- 내가 가장 외로울 떄 내 친구가 되어 주셨던 분. 


빵과 포도주의 마르셀리노 

어느 스페인 산촌의 수도원에 신생아가 버려진다. 할 수 없이 육아 경험이 없는 12명의 수사들이 애를 기른다. 개구쟁이 마르셀리노...다섯 살이 되자 이 귀여운 악동도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락방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상을 보게 된다. 순수한 영혼의 마리셀리노는 컴컴한 방에서 못 박혀 계신 예수님께서 배고파하는 줄 알고 안쓰러워, 수도원 주방에서 몰래 훔친 빵과 포도주를 매번 예수님께 갖다 드린다. 

이에 감동하셨는지, 예수님께선 십자가에서 내려와 마르셀리노와 얘기하며, 빵과 포도주를 맛있게 드시곤 했다. 한편 수도원의 주방수사께서 빵과 포도주가 없어지는 걸 눈치 채고 다락방으로 미행해 가보니, 

예수님께서 “아가야, 네 소원을 말해 보렴, 뭐든 들어줄게...”, 한 참을 있다가 마르셀리노는 “엄마가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니, 예수님께서 아기를 품에 안고 재운다. 이런 기적을 지켜 본, 

수사님들이 감격하여 무릎을 꿇는다. 잠시 후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르셀리노는 하늘에 계신 엄마를 보기 위해 영원한 잠에 빠져들고... 


니고데모가 처음 이해했던 하나님

법을 잘 지켜서 순종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잘 지켜도 좀처럼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런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그런데 육적인, 혹은 율법적인 마음에 젖어 있던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그런 소리도 율법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내가 회개해야지... 

제일 답답할 때가 어떨 때인가? 본심을 몰라 줄때... 진정성을 몰라 줄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자격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이 날 사랑해서 날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냥 믿어라.... 

그러면 내가 그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 분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마음 속에 가득차면, 그 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느껴지기만 하면.... 난 저절로 그 분의 마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 

내 인생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날 이끌어 오셨고 또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 


여러분! 마음이 가난할 때가 있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 때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던가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주님, 날 사랑하세요? 내가 마음이 아파요. 내가 마음이 가난해요. 허전하고 외롭고 무너져요. 

내 생명이 잃어져버린 것만 같아요.

그러면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여러분에게도 꼭 다가가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자마다 아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풍성한 삶,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내가 영생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절망과 허전함으로부터 일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주심으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플 때에도 허전할 때에도 니고데모 처럼 그 분께 나아가 하늘나라의 맛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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