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2019  이전 다음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빌립보서 4장 1-3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7.31 영광이요 면류관인 성도 (빌립보서 4장 1-3절)

빌립보서 4장 1-3절 (영광이요 면류관인 성도)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이후 자기의 사명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이스라엘의 주변국가들을 돌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가 당시의 유대인으로서는 굉장히 많이 배우고, 엘리트 계층에 속한 자였지만 그가 아는 수준에서의 이방은 이스라엘의 주변의 나라밖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이차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그의 선교의 대상지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주변국, 1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거쳤던 나라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아는 "경험의 한계 안"에서의 '이방'나라 였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나라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차 사역을 앞두고 이제 드로아라는 지역에서 모든 것을 시작할 준비를 해 놓았는데 환상으로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며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마게도냐로 가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준비는 지금 해 놓고 기다리는데 갑작스런 환상에 의해서 그의 진로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소리를 더 크고 확실하게 들려준 것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다고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핑계입니다. 변명입니다. 모세라고 바울이라고 성령의 음성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크고 분명하게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불확실하게, 불분명하게, 자신의 생각과 혼동스럽게 불편한 마음으로, 공상처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음성의 확실함이 아니라 순종의 확실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가 속해 있는 지역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금도 선교를 한다고 하면 자기들 보다 못하는 나라를 대게 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믿으면 이렇게 된다"하면서 축복을 이야기 하면서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 모습을 천하게 보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6.25를 겪고 있는 나라의 청년이 자기들을 도와주는 미국을 향해 "내가 저 나라를 구해야지" 하는 생각과 같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역에서도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바울을 지금의 유럽지방,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최종 목적지는 바로 로마입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면 복음이 로마를 향하는 것은 훨씬 지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지역에 가서 바울은 남성들 보다는 상대적인 약자였던 여성들이었던 루디아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소개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었다가 그 소녀의 주인으로부터 오히려 고소를 당해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좋은 일 하고도 욕먹고 매 맞고 감옥 갇혔던 바울,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기가 막힙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춥고 캄캄한 한 밤중에도 기도의 불을 밝히고 찬미의 온기를 지폈을 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이 우울해 하지 않고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고 기도와 찬미의 기적을 만들어 갈 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잠깐 졸던 간수장이 감옥의 문이 지진으로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것으로 착각해서 책임감에 자살하려다가 바울을 통해 구원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 빌립보였고, 그 간수장 가족들이 변하여 열심히 봉사하게 되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이방인들과 여성들, 그리고 간수장이었던 가족들이 주축이 된 교회....그 낯선 땅에서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지금 그 낯설고 힘들었던 이방땅의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지 시작하면서 사랑하고 사모한다 말하고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듭부릅니다.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모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내 영광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존경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상입니다. 그 나라 갈 때에 주시는 아버지의 칭찬이요, 그동안 수고에 대한 아버지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그 보상이 무엇인가? 바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라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 백성도 아닌 이방 땅의 낯선 교인들이 바울의 영광이요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그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자세를 보여 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에 모세는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과 실망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애굽의 왕자였을 때에 그가 자기 동족인 히브리인들을 돕고자 했을 때에 그들은 오히려 모세를 비아냥 거리고 고자질 했습니다. 그를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그들이 모세를 원망했을 때에 모세는 "왜 나에게 이러한 짐을 맡기십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명을 받아 영혼을 구원코자 할 때에 영혼들은 우리에게 짐으로, 숙제로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가족 중에서 먼저 믿게 되었을 때에 나머지 가족들을 십자가라 부릅니다. 믿음의 짐처럼 여깁니다. 부담스런 숙제로서 생각합니다. 

기도 해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실망이 쌓이게 되면 도망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들의 현재를 보면 좀처럼 안심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대놓고 "성도들 믿지 말고 목회해라. 하나님 바라보아야지 사람 바라보면 상처 받는다."말을 하기도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목사님도 사람이니까 목사한테 기대하면 실망한다. 주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왜 그런 말하는지 압니다. 틀린 말이 아닌 듯 합니다. 사람한테 기대하면 할수록 실망합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갑니다. 


그런데 영혼을 맡은 자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교만한 믿음, 오만한 믿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상처 안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면 결국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게 하기 까지 그들을 만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똑같은 주님과 같은 주님의 자녀요, 나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구원하신 주님의 생명이 담긴, 피가 담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크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완성을 넘어선 새 계명임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을 넘어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 때문에 교회가 갈등하고, 분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눈으로 볼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실패하고, 때로 상처입고, 때로 실망해도, 여러분 신앙의 온전함은 나에게 맡긴 영혼,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우리 인생의 면류관은 바로 영혼입니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니까 면류관 하면 물직적인 축복을, 상급을, 성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 것이 면류관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한 영혼 한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면류관입니다. 


ex) 결혼: 내가 골라서 서약을 하고 사랑하는 것. -> 그 사랑이 얼마나 가나...

             현대 혼전 동거에 대한 찬성이 50%를 훨씬 윗돕니다. 그래야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그 관계가 더 좋을까?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선택한 사랑도 지탱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신앙안에서는 맡겨진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내 연약함을 발견하고, 그 연약함을 온전키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주 안에 서라 (1절) 

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주 안에 서라고 다시금 권면합니다.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가장 깊은 사랑이 담긴 간절한 메시지 입니다. 그럼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주 밖에 선 자들이 있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실재로는 예수 밖에 선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마십시오.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꾸준하십시오.”(빌4:1, 메시지 성경)

적의 어떠한 공격을 받고 있더라도 결코 ‘신앙의 트랙’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가 트랙을 벗어나기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상선수들이 자기 트랙에서 벗어나면 실격을 당하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트랙에서 벗어나면 실격을 당합니다. 사탄은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트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어디에 서 있는가’입니다. 어디에 서있으라고 합니까? ‘주 안에서’ 굳게 서있으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항상 주와 동행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 안에서 있지 않기 때문에 조그만 시험과 시련에도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 몇 마디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은 ‘주 안’에 서있지 않고 ‘내 자존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형편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열정이 쉽게 식어버리는 것도 ‘주 안’에 서있지 않고 ‘상황’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그렇고, 우리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 설 때에만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주 안에서"라고 쓰는 이유.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주 안에 서기보다 세상의 가치관, 내 소견에 옳은대로, 내 감정이 요동치는대로 움직이는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 같은 마음을 품으라 (2절)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유도디아와 순두게 

  • 유오디아와 순두게- 그 당시의 가장 흔한 이름, 한국식으로 말하면 영이와 순이와 같은 이름..

-> 그들이 누구냐? 어떤 학자들은 빌립보 교인들 중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인물들, 어떤 학자는 그 중의 하나는 루디아(창립멤버)와 그 외의 멤버...


  •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일에 정말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열심이나 헌신에 있어서 어느 한쪽이 기울면 차라리 다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그렇게 똑같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두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갈등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도 양보하거나 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서로 고집하면 작은 문제가 결국 큰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나중에는 감정싸움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여기에서는 교회가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양보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 이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 어떻게 한 마음을 품는가? 인간이 하나될 수 있는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내가 순두게를 권하노니....각각 주안에서 동의하라. ->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한마음의 비밀입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 두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빌2: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함께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입니까? 그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만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이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 했다면 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겠습니까? 


  • 여러분, 언제나 이게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합니다. 교회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합니다. 그런데 낮아지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져야 하고, 언제나 자기주장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자기는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틀립니다. 아무리 그런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만 그러면 교회에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겨나면 그 때부터 교회가 삐거덕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신앙의 열심보다도, 헌신적인 봉사보다도,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품는 신앙의 열심이 자기고집을 끝까지 세우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낮아지며 하는 봉사가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일이 무엇인가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가 좀 손해를 본다고 체면이 손상된다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시끄럽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없어서 불협화음이 생겨나고 갈등과 다툼과 분쟁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유오디아 순두게 두 분에게 나는 간청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 마음이 되십시오.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여자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올라있습니다.” (빌 4:2-)

  • 빌립보 교회 안에서 갈등하고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를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에 유도디아와 순두게 같은 사람이 있으면 두 파로 갈라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계속되면 이들을 아얘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도와주라는 것이 그들을 편들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서로 갈등하는 데에는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홀로 있지 않도록 섬기라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마땅한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