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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25-32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11.04 누가복음 15장 25-32절 - 아버지와 큰 아들...

 

누가복음 15장 25-32절 - 아버지와 큰 아들...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복음 중의 복음으로까지 불리는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의 시작은 11절의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표현에서 시작합니다.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특별히 그중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을, 큰 아들은 유대인들 중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혹 제사장들을 표현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인물들은 굉장히 입체적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쉽사리 결론 내릴 수가 없다. 한 번 정리했다고 끝나는 내용이 아닙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마치 금의환향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은 오히려 기뻐하지 못하고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반대의 상황에 처합니다. 

처음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은 탕자에 맞추어져 있는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관심이 큰 아들에게로 옮겨집니다.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여러 모습을 큰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형의 모습을 하나 하나 살펴 봅시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1. 그는 성실한 자입니다.   

- 25절에 보면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로 시작합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자였습니다. 둘째가 나가서 허랑 방탕할 때에도 묵묵히 밭에 나가 일을 한 것 입니다.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품꾼도 많고 먹을 걱정도 없습니다. 동생이 유산을 달라하여 아버지의 돈을 챙겨 나갔습니다. 형도 마음이 흔들릴 수 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 

2. 아버지를 섬긴 사람입니다.  

29절 -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동생은 아버지가 명령에 순종하기는 커녕 그 말을 듣기 싫어 집을 나간 사람입니다. 형은 그 말씀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순종하던 자였습니다. 싫은 내색 하나 한적 없어 보입니다.  

3. 검소한 사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큰 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친구들과 파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동생은 허랑 방탕하는데 형은 아마도 뭐 하나 즐긴 것 없이 검소하고 금욕적으로 산 것 같습니다. 일만 열심히 한 자였습니다. 

 

그는 칭찬받을 만한 자입니다.  동생이 떠나도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놀고 먹어도 되지만 밭에 나가 일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아들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줍니다. 성실하며 책임감도 있고 아버지를 잘 보필합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합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뜻하지 않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 그 위기의 시작은 "풍악과 춤 추는 소리"를 듣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즐겁게 놀고 잔치하는 소리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참고 견디고 일하는데는 익숙한데 자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행하신 기적이 어디서, 어떤 기적을 행하신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사건입니다. 그는 자신의 피로서 잔치를 열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네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지니..."(창 2 16-17) 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난 하나님을 믿은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정말 마음 껏 즐기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 나 00 하고 싶어요....00 해도 돼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하게 해 주셨고,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이 결국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대로 나를 망가뜨리는 것임을 하나님께 묻기 전에 알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나에게 구속이 아니라 자유였고 금욕이 아니라 만족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주를 바라보며 생활 한다는 것이 나를 억압하거나 구속하고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참 나이게, 참 자유를 주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자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해서 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 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매사가 그 분 앞에 실수 없이 바로 서 있어야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말씀 중의 하나라도 어기면 그 분이 나에게 실망하셔서 떠나가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남에게도 들이대면서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면서 죄인 취급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풍성이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 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제가 늘 강조하는 신앙 생활의 목표, 영성의 목표는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바로 아버지의 입으로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다”라고 인정합니다. 

형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려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그는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말씀에 종처럼 순종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를 주인처럼 섬겼습니다. 

어찌보면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그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즐거워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주인 삼아 살아가고 있는데 그의 말과 행동, 그의 삶을 보면 고달파 보입니다. 억눌려 보입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잘못 된 거 아닙니까? 아버지와 함께 하면, 그 분을 주인으로 삼으면 천국의 기쁨이 늘 함께 해야 하는데 큰 아들에게 보이는 것은 시기와 분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관심은 언제나 현제가 아니라 아직 받지 못한 보상, 자기가 받아야 할 유산, 신앙적으로 보면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인정받고 상급받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 나라가 오면 오른 자리, 왼자리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그의 삶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노역이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읽다가 새롭게 다가온 단어가 있습니다 

그가 집 앞에 서서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을 적에 종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여기서 눈에 확 띤 단어가 "건강한"입니다. 

앞의 상황을 보면 돌아온 탕자가 과연 건강하게 돌아왔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그는 궁핍했고 여러날 동안 주렸습니다. 그리고 먼길을 왔습니다. 

그런데 종의 보고는 그가 건강히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맞아 들였다고 가르쳐 줍니다. 종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제 당신의 경쟁자가 왔습니다. 이제 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재산을 물려 받으려 경쟁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맏아들에게 있어 탕자의 귀환은 경쟁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 전 서로 으르렁 대면서 늘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듯이 맏아들에게 탕자는 그저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한 경쟁자입니다. 

가인이 경쟁을 통해 아벨을 죽이고, 

야곱이 경쟁을 통해 장자권을 빼앗아 먼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고, 

사울이 경쟁을 통해 다윗을 시기했듯이 

비교하고 경쟁함을 통해서 맏아들의 삶은 전혀 사랑없고, 은혜 없고, 오직 상급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식이면서도 철저히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둘째 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와 집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의 밭에서 일하고 나온 큰 아들은 집안으로조차 들어오지 못하고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노한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권합니다. 그를 설득합니다. 잔치에 들어가자. 잃은 영혼 찾은 것을 기뻐하자. 


한번도 아버지의 명을 거한적이 없다는 그가 아버지의 설득에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맞섭니다. 

29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돌아온 동생을 위해 연 잔치라는 말을 듣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에 분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문지방을 넘어서 설득하는 아버지마저 거절합니다. 도리어 아버지를 자신에게 고된 일만 시키는 인색하고 고약한 고용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는 동생보다 재산을,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자기만족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여 참 아들로 회복되었지만, 큰아들은 자기 욕심을 숨기지 못해 아버지의 사랑을 조롱하는 죄인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집 안에 있던 탕자였습니다. 혹시 나도 몸만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탕자는 아닙니까?


구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으로서... 

절대로 선행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니닙니다.  ->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구원관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람들의 생각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가 다가가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은 무엇입니까? 그가 일을 하던 안 하던 아버지 안에 있으면 아들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스스로를 일한 것으로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품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일한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구원받을 영혼이 하나라도 있을 것입니까? 

 

들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작정하면서 먹었던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1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19절)” 하고 아버지께로 오지요. 그런 마음으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지체치 않고 그를 아들로서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큰 아들은 아들의 위치를 벗어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품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일한만큼 대우받으려고, 매일 아버지의 대우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기 의만 앞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마음과 큰 아들의 마음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그냥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은혜를 베풉니다. 내 것이 다 네것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또한 아낌없이 주었고 줄 것입니다. 큰 아들이 달라고 하면 또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모든 재산을 다 주고라도 지키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이 그의 것을 언제 받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어떤 것, 하나님의 부유,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권세... 

큰 아들은 다 써버리고 온 둘째 아들을 위해 염소새끼를 잡은 아버지의 마음에 분노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것으로 되어 있는 한 한 번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누리지 못한다. 자기 것으로, 자기만 사용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채워주신다고, 구하면 주신다고, 다 먹이고 입힐 것이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통장을 가지고, 집을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누질 못하고 베풀지 못하고 항상 채우려고만, 가질려고만 하는 것이다. 은혜 없이 욕심만 남은 것이다. 


이 사건의 결말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큰 아들이 계속 큰 아들로서 남아 있을 지, 아니면 거꾸로 탕자가 되어 집을 나갔을 지...

그런데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큰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로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장자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장자로 삼은 것은 그들을 통해 탕자의 나라들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그들은 선민의식, 장자의식은 있었지만 그 소명, 장자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살피고 아는 일에는 여전히 무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장자권을 중시하는 나라였지만 구원의 통로는 끊임없이 장자권에서 멀어집니다. 

참 예배의 모델이 가인이 아닌 아벨에게서, 이스라엘의 시작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서부터, 참 왕의 모습은 심지어 막내동이 다윗에게로 이어집니다. 

장자가 장자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에 하나님은 그 장자권, 큰아들의 자리를 내어놓게 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 교회의 중심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 인해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면서 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도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 이른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멸시했고 무시했고 차등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가 되어서는 유대인들은 교회에서 완전히 소외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2천년간 세계 역사 속에서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큰아들이 역할을 못하면 그저 빼앗기느냐? 

하나님의 마음은 아무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 헤메여도 한결같이 애타게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자가 회복되어 그가 예비하신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도 그들을 보호하시면 흩어진 유대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도록 그들이 회복하기를, 돌아오기를,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를, 은혜 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2016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깊은 물의 은혜, 소낙비의 은혜,  기쁨의 잔치...


교회 안에서도 목사의 심정은 믿음의 첫세대, 힘들 때에 교회를 지키고 애쓰고 땀흘렸던 장자와도 같은 성도들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자와도 같은 자들이 자기 의, 자기 공로 앞세우다 교회 안의 탕자처럼 되어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얼마나 가슴 칠 노릇이고 속이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스스로 품꾼이 되어버린 큰아들이 아닌, 품꾼이 아닌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리며 잔치의 주관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