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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9.09.08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장 11-24절)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장 11-24절)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온전한 삶을 누린 모델을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가장 먼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시기 좋아하셨습니다." 보시기 좋아하셨다는 말은 언제 봐도 또 보고 싶은,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한다는 것은 서로가 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일이 있어도 '서로가 보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동행, 성령과 동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나만을 보고 마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알람을 울리고, 찾아다니시는 감시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가 행동하고 결정하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낙원의 장소였지만 타락하기 이 전에도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공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다시 말하면 보고 싶어할 적에, 반대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보고 싶을 때에는 언제나 다가와 말걸고 인사하고 교제하는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교제란 부르심이 있고 응답이 있는 교제 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부르심(콜링- 소명)" 이 있고 "응답- 순종, 헌신"이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마치 집 안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함께 살지만 동시에 서로의 공간이 있고 활동이 있고, 그렇지만 언제든지 보고 싶거나 할 이야기가 있으면 부르고 찾고, 응답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의 공간들을 허락하시고 때로는 그것을 통해 동산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만물의 이름을 지어주며 동산의 모든 실과들을 맛보며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 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매사가 그 분 앞에 바로되야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말씀 중의 하나라도 어기면 그 분이 나에게 실망하셔서 떠나가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남에게도 들이대면서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면서 죄인 취급 하는 것입니다.

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기준에 모자라기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난 하나님을 믿은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정말 마음 껏 즐기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 나 00 하고 싶어요....00 해도 돼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하게 해 주셨고,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이 결국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대로 나를 망가뜨리는 것임을 하나님께 묻기 전에 알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나에게 구속이 아니라 자유였고 금욕이 아니라 만족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주를 바라보며 생활 한다는 것이 나를 억압하거나 구속하고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참 나이게, 참 자유를 주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뱀이 인간을 유혹해서 우리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되돌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커다란 억압이고 불행인양 우리의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게 합니다.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니까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냐면 나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내가 벗었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부족하다. 내가 부끄럽다는 의식입니다.

 

  • 내가 벗었다 - 나의 열등감 Vs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음으로 나는 그 분 안에서 충만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입히고, 꾸미고, 가리고, 먹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바벨탑을 만들고, 나 자신을 위해 여리고성을 쌓고 나 자신을 위해 성전을 쌓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 자신을 정말 위한 것인가? 결국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기준이 없고 절제가 없고 질서가 없기 때문이죠.

 

사사기-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가질 것 다 있어도 왕이 없는 삶, 기준이 없는 삶, 집안에 어른이 없고, 내 안에 주님이 없는 삶은 혼돈과 공허로 표현된 무질서의 세계입니다.

 

마치 붕어에게 먹이를 주면 붕어는 주는 대로 먹습니다. 어린아이가 붕어 밥 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계속 주다 보면 붕어는 죽을 때까지 먹다 죽습니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인간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채우다 보면 시간의 차만 다를 뿐이지 계속 자기를 채우다고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채우다 채우다 죽는 것입니다.

 

  • 또한 죄의 결과로서 온 것은 하나님이 부를 때에 숨는 것입니다. 그가 찾아도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부르심은 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콜링은 있는데 순종이 없습니다. 이런 역사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질 않습니다. 그 분의 콜링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것, 그 분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아담아 어디있는냐?"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응답이 없는 인간을 행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멈추질 않습니다.

 

[창 3:8-11]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아담이 범죄함을 알고서도, 아담을 찾아 부르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합니다. 대답하지 않습니다. 몇번을 부르시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하고 말합니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는 것....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지요.

이 대답을 듣고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이 소리는 분명 꾸짖는 소리, 자기의 죄를 지적하시는 노하신 아버지의 분노로 들렸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탄식으로 풀이합니다.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답던 사람의 마음 속에 죄라는 커다란 상처가, 부패가 생겨서 더 이상 이들이 하나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제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숨을 수 밖에 없게되는 인간의 타락을 슬퍼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죄의 결과로서 여겨졌던 것은 질병, 특히 문등병. 그리고 부정한 자, 창기와 신약시대의 세리와 같은... 부정한 민족, 사마리아인들과 같은...(섞인 민족)

그런 자들은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여겼기 때문에 아얘 쳐다보지도 않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로 이런 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죄 지은 자를 정죄하시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창조한 그들이 그토록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통한히 여기시고 슬퍼하시고 어떻게든 그들을 구하여 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의 많은 설교가들은 이 제목을 고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복음 중의 복음으로까지 불리는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서기관들과 같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작은 아들을 이들과 다른 평범한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담처럼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것인양 자기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내 분깃 - 내 부분, 내 몫

아버지가 주신 것 - 그 "살림"을 각각 주었더니...

살림 - 헬라어 "비오스" 생명, 인생

 

창 2-3장 : 에덴동산에 거할 때에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므로 그 곳을 벗어난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 피의 제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희생을 통해 그들을 만나시는 것.

 

이미 아버지를 떠나기로 마음 먹은 아들, 하나님께로부터 시선을 돌린 탕자에게 아버지는 그의 생명을 주어 그를 보낸다.

 

"구약의 시각"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벌하신다. 죽는다. 저주 받는다.

신약의 시각 - 하나님이 벌을 주셔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떠나면 저주가 임한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도래한다.

 

아들은 먼나라로 떠납니다.

'먼나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버지로 부터 거리가 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입니다. 무신론의 나라, 유물론의 나라, 우상숭배의 나라,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멀고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아들은 '허랑 방탕'한 삶을 삽니다. 허랑 방탕하다는 것은 기준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제 할 수 없고 정욕대로, 쾌락대로 살다가 자기를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나갔지만 성경을 아들의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재산, 아버지의 살림이라고 표현하지요.

15: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결국 허랑방탕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궁핍해지게 됩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홀로 살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 누군가에게 붙어서 사는 기생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의 종노릇 하고 붙어사는 인생이 되지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도 아닌 짐승에게 붙어사는 인간....얼마나 불쌍하고 미련합니까?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 가서야 비로서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끝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을 보니까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참자기를 보는 것, 자기의 상태,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이고 바로 회개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보니까 비로서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1절에는 또 다시 '아버지'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2절에도 '아버지'란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니까 이제 보이는 것은 아버지 뿐입니다.

 

아버지 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분깃만 보이고 세상만 보이고 나만 보았던 탕자가 자기를 보고 회개하니까 비로소 아버지의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습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복잡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니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회개는 했지만 아버지의 기준에 한 없이 모자라는 것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것이 회개한 자의 위치이지요.

 

그런데 그런 거리가 먼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 염치가 없는 죄인을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지요.

기독교는 아버지가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해서 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거리가 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너를 왕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했는데, 죄의 유혹에 넘어가 거지가 되어 나타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요,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요, 다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오십니다.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자 달려와서 우리를 안고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견딜수 없는 사랑으로 더럽고 악취가 나고, 그의 온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온 나같은 죄인을 달려와서 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신분 회복- 아버지의 아들로

가락지를 끼우고 - 새 언약

신을 신기라- 참 자유

를 주시는 분.

 

너무 잘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돌렸던 시선을 그 분께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 분이 부르시면 부족하지만 "네 제가 여기있습니다. 아버지 말씀하세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예배요, 기도요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할 때 마다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부족한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제가 모자라다고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날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날 안아주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부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여전히 거리가 먼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그 분께로 시선을 향하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달려오셔서 안아주십니다.

아들의 옷을 입히시고 언약의 가락지를 끼우고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십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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