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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8.15 비둘기가 물고 온 새 잎사귀 (창 8장 6-11절)
  2. 2014.01.21 방주교회 (창 6:11-7:3)

비둘기가 물고 온 새 잎사귀 (창 8장 6-11절) 

 

노아의 사건은 인류에게 임한 첫 번째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누군가에게는 심판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는 홍수의 사건에 있어서 교회의 상징적 모델로서의 방주의 역할을 또한 말해 주고 있다. 

 

방주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 홍수의 때, 즉 심판의 때까지 사람들은 그것을 주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 사람들은 방주를 외면했지만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 평생의 작업이었고, 동시에 외로운 작업이었다. 
  • 방주는 산꼭대기에서 만들어져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곳에서 만들어졌다. 
  • 그 문은 늘 열려 있었으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홍수가 났을 때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 그 곳의 내부는 홍수의 기간동안 모든 생명을 안전히 지켜주었지만 그 안의 환경은 결코 좋을 수는 없었다 (동물들의 소리와 냄새, 식량의 한계, 홍수로 인한 눅눅함, 햇빛을 쬐지 못하는 환경. 어쩌면 곰팡이와 악취와 소음으로 가득찼던...그런데 그곳이 바로 가장 안전했던 곳) 

 

홍수의 내용 

  •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7:12) -둘째 달 열 이렛날 시작 
  • 그리고 물이 백오십일 동안 줄지 않고 땅에 넘쳤다 (7:24) 
  • 열째 달 초 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 
  • 그리고 나서 또 40일 후에 노아는 드디어 창문을 열었다. 
  • 언제 밖으로 나오는가? 육백 일년 1월 1일 - 물이 걷혔다. 2월 27일날 땅이 말랐다. 일 년하고 열흘 만에 마른 땅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40일 홍수나고 좀 지나서 곧 방주를 연 것이 아니라 비가 쏟아진 날만 40일이고 150일 동안은 그 물이 하나도 줄지 않고 땅에 가득했으며, 방주 안의 사람들은 거의 일년 내내 방주 속에 갇혀 지낸 것. 

 

동서남북이 모두 물

그 안에서의 삶 -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 

코로나 정국을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어느 때 보다 조금은 그들의 답답한 삶이 더 잘 이해할 만한 상황. 

동물들이 가득 있었지만 있는 식구는 딱 노아의 가족 - 노아와 아내 세 아들과 그 며느리, 아직 손자 손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10명도 채 안되는 가족이 일년 내내 방주 속에서 먹고 이야기하고...

그 때에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아니 라디오나 TV, 신문이나 잡지도 없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코로나가 길어지며 못견디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그런데 방주는 나갈 수가 없다. 나가면 물이다. 

코로나 불화, 코로나 이혼...

 

얼마나 답답했을지....그들이 그 안에서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노아가 처음 배 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낼 때 심정이 어땠을까? 

마치 우리가 언제 가게 문 여나, 식당 문 여나, 교회 문 여나 그러한 기분보다 몇 갑절은 더 기대와 염려가 교차했을 것이다. 

 

첫 번째 까마귀를 내어 보내고 물이 많아 앉을 곳이 없자 좀 날다가 곧 돌아오고..

두 번째 비둘기를 보내자 비둘기 역시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곧 돌아온다. 

 

그 오랜 기간 날기를 원했을 새가 앉을 곳이 없어 다시 배로 돌아오는 광경도 생각하면 참 딱하지 않은가!

 

돌아오면 또 비둘기를 보내는 노아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칠 일을 기다렸다는 것은 비둘기가 돌아오자 실망한 마음을 또 참는 기간 - 하필이면 완전 수 칠일이란 말로서 낙심 뒤에 또 인내하는 지극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동 서 남 북이 물로 가득찬 세상에서 기다리며 인내하며 비둘기를 보내는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가 기다렸던 작은 구름 조각 하나같은 소망을 갈급해하는 표현일 것이다. 

 

  • 이 말씀을 나누는 우리 역시 여러가지 인생의 홍수를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다녔던 직장을 잃고, 건강했던 몸이 상하는 일, 아니면 코로나에 이어 한국에서 전해지는 이어지는 장마로 인한 말 그대로 홍수를 경험하는 인생들은 그 심정을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이 때 방주를 열고 비둘기를 보내는 마음 - 바로 소망을 찾는 마음이다.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새벽같이 보낸 비둘기가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다. 점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 그의 마음은 무슨 사고가 있나...걱정 반 기대 반이었을 것이다. 저녁 때가 되어서 돌아온 비둘기...그런데 11절에 보니 "그 잎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물려 있었다.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 비둘기는 단지 잎사귀가 아니라 소망을 물고 온 것이다. 어딘가에 마른 땅이 있다는 증거를 물고 온 것이다. 

 

극심한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오는 소망의 메시지. 

검사를 해 보았더니 아무 이상 없답니다. 

내가 빌려줄 테니 빨리 해결 해. 

내가 도와줄테니 같이 해보자. 

 

삶의 홍수와도 같은 그러한 절망의 현장에서 작은 소망으로 다가오는 그런 소식. 

비둘기가 물고 온 잎사귀는 그래서 고난당한 자에게는 복음인 것이다. 

 

  • 우리가 왜 예수의 이야기를 복음이라 하나 - 감람나무 잎사귀 - 복음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을 보자. 

그녀가 남자를 유혹했을지, 남자가 그녀를 겁탈했을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요즘처럼 미투운동으로 자기의 침해된 인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대면 모를까! '

불행히도 당시 여인들에게는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렸다는 것은 간음하고 있는 현장에 사람들이 들어닥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악의 현장에 더한 책임이 있는 남자는 그 현장을 슬며시 빠져 나가고 여인 홀로 사람들의 온갖 수모와 시선을 맞으며 지금 돌에 맞아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 어디에선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뜻 밖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예수와 여인 둘만 남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천국의 비둘기처럼 나타나 감람나무 잎사귀를 내미시는 것이다. 

 

오라비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제자들에게, 38년된 병자에게, 바디메오에게, 문등병자에게, 이방 사람 백부장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심지어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죄수에게조차 주님은 비둘기처럼 나타나서 그들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신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인생의 홍수를 만난 우리들에게도 그 분은 여전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 성도- 소망을 갈급해하는 노아, 비둘기를 날리는 성도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홍수를 만난 이 세상에서 교회 라는 방주에 거하며 비둘기를 날리는 노아같은 인생들이다.

비둘기를 날리는 것은 무엇인가? 소망을 찾아 말씀을 갈급해하는 것이고, 주의 음성 듣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자이다. 우리가 날려 보내는 비둘기는 다름아닌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향기나는 기도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고백이다. 

그렇게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 보장된 소망의 약속을 주신다. 

성경은 잎사귀가 가득한 바구니다. 그 곳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망의 메시지가 넘쳐난다. 

 

  • 성도 - 잎사귀를 전하는 비둘기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온 잎사귀를 어떻게 했을까? 그 소식을 기뻐하면서 그냥 방주 밖으로 던져 버렸을까? 아니면 호주머니에 귀하게 넣고 자기 홀로 간직했을까? 

아니면 가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잎사귀를 보여주며 땅이 말랐다고, 드디어 나갈 수 있다고 외쳤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증인된 삶은 결코 숙제가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전도를 훈련하고, 전도 구절을 암기하고....

그런 부담을 가지고 주님의 증인 되기를 원하시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그 복음. 나에게 날라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는 그 좋은 소식을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너두 나두 크고 작은 홍수에서 남은 생존자들이다. 

그리고 그 남은 생존자들에게는 각각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그런 새 잎사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왔던 그런 풍파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도우시면 두려울 것 없다고 고난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가 가진 잎사귀,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잎사귀가 지금 당장 필요한 자도 있을 것이다. 

혼자 절망하며 잠 못 이루는 남편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는 한 마디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에게 찾아가 "내가 기도하고 있어요.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도 되심을 난 믿어요"라는 그 따스한 한 마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는 자에게 조그마한 정성을 담아 격려하는 일, 모두 우리 자신이 비둘기가 되어 잎사귀를 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비둘기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신다.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그가 먼저 우리를 위로하셨고, 그 위로를 가지고 또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인내할 수 있도록,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게 한다. 

 

[히 13:5]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의 구주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 

내가 주로 말미암아 누군가의 의미있는 존재가 된 다는 것! 행복한 일 아닌가? 

 

아침마다 전하는 로고스 아침묵상

누군가 그 전하는 말씀을 듣고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 

 

목사에게만 한정된 일일까? 

이 어려운 때에 믿음 있는 자들이 함께 자신의 의미를 찾는 일 아닌가? 

 

  • 잎사귀의 역할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으며" 

의문을 품고 사다리를 올랐던 노아는 확신을 얻었다. 이제 고난이 지나고 소망의 때가 되었음을....

복음을 경험한 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산다. 

성령의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은혜를 주시며 확신시키시는 영이시다. 

 

소망이 필요하신가? 비둘기를 날리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올리고, 그 분의 잎사귀를 얻기 위해 성경을 펴자. 

잎사귀를 얻었는가? 

그러면 주위의 사람과 함께 그 잎사귀를 나누자. 전해주자. 

우리의 그 한 마디가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릴 수도 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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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교회 (창 6:11-7:3) 


요즘 뉴스를 보면 정말 인간성, 혹은 인간의 가치의 끝이 어디까지 떨어질까 할 정도의 사건이 연일 계속 일어나고 있다. 

지난 주에는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모텔에서 혼자 애를 낳아 창문 너머로 아이를 던져서 죽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몇 주 전에는 새엄마란 사람이 소풍을 보내달라는 초등학생 아이를 때려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구타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부검한 결과 그 아이의 몸에는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한 흔적이 여기 저기서 발견 되었습니다. 

또 유명 연예인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부모를 모시다가 힘이 들다고 부모와 함께 죽는 사건도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부모, 부부, 자녀 할 것 없이 정말 입에 담기 조차 부끄러운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방송에, 뉴스에 소개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지요. 

지난 주 미국의 텍사스 지방인가요? 미국의 내륙지방의 기온이 체감온도 영하 50도까지 떨어져서 남극보다도 더 추운 기상으로 인해 수십명이 동사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대륙에 있는 남미는 50도가 넘는 찜통 더위로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기사도 나옵니다. 

지진을 걱정하는 학생의 이야기... 


여러분은 안전하십니까? 

그리고 안전한 곳에 거하십니까?  여러분이 사는 집은 안전하십니까? 

과학은 날로 발전하고 교육도 사람들은 더 많이 받게 되었는데 시대는 점점 불안하게 흘러 갑니다. 

안전하지 못합니다. 

가장 편안히 거해야 할 가정도 안전하지 못하고 가족 구성원들 끼리도 서로 믿지를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모도 자식도 서로 함께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짐이 되기 싫어하는 이면에는 너무 일찍 부터 떨어져 지내와서 같이 있어도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 같이 있으면 편안해도 계속 함께 사는 것은 불편하기 때문에 차라리 혼자 있으려 한다는 보고서도 올라오곤 합니다. 

 

창세기 6장에 보니까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닮게 지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지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그러한 것들을 사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땅의 것들을 사모해서 아내로 삼는 것은 다시 말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면서 인간들과의 교제를 끊으십니다. 

아니 인간 스스로사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버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은 세상에 취해서 즐거워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육신 가운에 거하면서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리 성공하고 부를 누리고, 쾌락을 누리며 살아도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세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그들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모두 악하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부패했다. 포악했다. 라는 말이 계속적으로 반복이 됩니다. 

마치 요즘 시대의 뉴스를 방송하듯 하나님께서 당시의 사람들의 모든 모습이 부패하고 포악했다고 거듭 증거하시지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사 근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찌보면 지금 돌아가는 우리 세상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 때처럼 한탄하사 근심하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탄하고 근심하셨다는 표현은 인간으로 인해 마음에 고통을 느끼고 심히 슬퍼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창조한 것들 가운데 가장 걸작품인 인간, 자기의 불후의 명작인 인간이 부패해서 포악해져서 만물이 다 병이 들어서 심히 고통스럽고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정성들여 가꿔왔던 계획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변할 때도 있습니다. 

꿈꾸어 왔던 것들이 풍지 박산 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때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패하고 포악해진 사람을 보시고 한탄하사 근심하셨다.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포기가 없으십니다.

우리 같으면 우리가 가꾸고 지켜오고 계획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고 풍지박산이 되면 절망하고 낙담해서 자포자기 할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의 자녀들을 위해 아파하고 근심할 지언정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기가 사랑한 사람, 비록 부패하고 포악해져서 못쓰게 된 인류일지라도 하나님은 방주를 통해서 새로운 계획을 여십니다. 

삼층으로 층을 두어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켜서 부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오직 하늘로만 창문을 두어서 하늘을 향하도록 합니다. 역청으로 나무를 칠해서 물이 조금도 세지 못하도록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또 구원을 위한 준비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기도 합니다.


  • "방주는 모든 종류의 생물을 담을 수 있도록 그 안이 넓어야 하고" 

우리끼리만, 자기와 맞는 사람만 모이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은혜가 필요한 자, 자원해서 그 분앞에 나오는 자라면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안이 넓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넓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역청을 발라 물이 새지 않아야 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나의 삶을 뒤흔들이 않아야 합니다. 

 

  • "물 위를 떠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늘을 향해 주님만을 바라보며 고난 위를 떠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를 통해 방주를 짓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쓰게 하십니다. 그 곳에만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홍수가 나고 폭풍우가 불어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의 임재 가운에 안전히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누고 싶은 로고스 교회에 대한 비전 

* 방주같은 교회- 이 곳에만 들어오면 안전하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교회. 

이 곳에만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 분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다른 교회는 다 타락했고 우리 교회만 깨끗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른 곳이랑 비교하자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세상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고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도 적어도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예배 드리는 그 교회에 내가 머물고 기도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줄 수 있는 교회를 세워가자는 것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어떤 목회자들은 그럽디다. 

교인들 중에 10%만 잘 이끌어도 성공한 목회고 건강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크나 작으나 신실한 자 10%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 분은 자기에게 오는 자, 자기에게 맡기신 영혼, 잃은 양 하나라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맡긴 영혼 단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다시 살리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까지 구원의 선포를 계속하셨습니다. 

비록 배반할 것을 알고, 떠나갈 것을 알았어도 끝까지 가롯 유다의 발을 씻겨가며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세번씩이나 부인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던 제자를 불러 네가 날 사랑하냐? 네가 날 사랑하냐? 세번씩이나 물으시면서 그 분이 맡긴 영혼을 의탁하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생명같이 여기고 있는 사명.... 

내게 맡긴 영혼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안전한 교회, 하나님의 방주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러면 여러분, 방주 안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교회 안으로, 신앙 안으로, 예배 안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산꼭대기에서 배를 세우는 노아를 바라보며 비웃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배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은혜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정욕과 욕심과 죄악과 부패와 포악을 벗어던지고 

더 깊이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도록 기도로 역청을 바르고 세겹 층으로, 성도들의 삽겹줄 사랑으로 교제 가운데 거하며, 파도 위를 걸어가면서도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파도 위를 떠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기도하고, 성도들이 아무리 애쓰고 권면해도 결국은 구원은 본인이 받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나의 모든 죄를 그 분 앞에서 사함받고 그 분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렇게 예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회개하고 영접할 수 있도록 예배와 말씀과 교육을 통해서 거듭되는 복음의 기회를 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 6: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창 7: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왜 6장에서는 각기 암수 한 쌍씩 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 바로 7장에서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들어오게 하는가? 


부패해서 세상을 멸하시는데 왜 부정한 짐승을 둘 씩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가? 그들을 섞이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류인가?


6장은 처음 배를 지을 때에 말씀하신 말씀. 

7장은 배를 다 짓고 홍수를 일으키기 전에 하신 말씀. 


왜 하나님의 계획이 바뀌셨는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처음 배를 지을 때는 오직 노아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자.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낳고 그들을 결혼 시킴. 뭘 하면서? 배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런데 의로운 것은 노아 하나였다. 그의 아내와 자녀와 심지어 며느리는 오직 노아를 통해서 방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심지어 노아 마저도 창 6:8절에 보면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증거한다. 

즉 노아도, 노아의 식구들도 방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던 것이다. 


부정한 짐승도 방주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부정한 사람도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들어오라는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못 들어온 것 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의 문화 가운데 병든 사람이나 장애인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고, 장애인들은 모두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사회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주님은 그런 문화적 편견을 파격적으로 깨버리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각종 병든 사람을 고쳐 주셨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문둥병자를 고치셨고, 냄새 나는 가장 부정한 병자였던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나 창기와 함께 음식을 먹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난을 받으시면서 주님은 잃어 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99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 버린 이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인자가 온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방주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대해 주실 때 어떻게 대해 주셨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은혜로 대해 주셨습니다. 은혜로 나를 받아 주셨습니다. 은혜 가운데 나를 불러 주셨습니다. … 나만 그렇게 대해 주셨을까요?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은혜를 지금도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내게 부담스러운 존재이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기분 나쁜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언제나 은총의 태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로 바라보고 은혜로 받아 주고 은혜 가운데서 용납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방주 안에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함께 있게 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멧세지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모든 것을 용납한다 하더라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을 없애라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부정한 것을 잘 분별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죄인이 와서 그대로 활개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부정한 것이라 할지라고 구원의 방주 안에서 선으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로고스교회 성도님들은 방주 안의 거룩한, 정결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섞여 있는 부정한 자, 부정한 행위들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정결케 하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우리 로고스 교회는,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안전히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게 하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편하지 않으십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안식하십시오. 결코 교회의 구경꾼이나 손님이 되지 마시고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되십시오. 주의 가족이 되십시오. 

여러분,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해 보십시오. 병원에서도 못고치는데 오직 하나님만 고칠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내 가장 사랑하는 자녀가 부패하고 포악한 친구들 사이에서 병들어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쫓아다니면서 친구들을 멀리하게 하여 아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병들지 않도록, 부패하고 포악해 지지 않도록 방주 안에, 그리스도 안에, 은혜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세상의 폭풍우가 침범치 못합니다. 하늘을 향해 창문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런 방주 안의 성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평안함과 안식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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