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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사무엘서 강해)

조금함과 믿음 (삼상 13:5-14절)

by 소리벼리 2021. 12. 11.

조금함과 믿음 (삼상 13:5-14절)

 

40세에 왕이 된 사울은 이듬해 즉, 즉위 2년째에 이스라엘 군사를 모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자 이른바 믹마스 전투를 일으키게 됩니다. 맨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강력한 왕을 통해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요나단으로 하여금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먼저 치게 한 후에 온 이스라엘에 고하여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운 목적에 부합되는, 사울왕에게 있어서는 가장 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몇번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사울은 지금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용기를 낼 때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큰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힘을 의지해서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완전히 구해내려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의 수배대를 친 것과 이로 인해 이젠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미움을 받게 되었음을 알고 사울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이젠 블레셋과 적당히 타협할 수가 없을 처지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울을 따르게 됩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결단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이 공격해 옴을 듣고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가 병거가 삼만(마차가) 마병이 육천명이고 군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조차 없어 해변의 모래와 같았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싸우려고 모이기는 모였는데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적을 보면 싸울 용기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위급함을 보고"라고 표현된 구절은 상황이 어려움을 보고 군사들이 심한 압박을 받았다고 영어성경은 번역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다고 전합니다. 어떤 군사들은 아얘 요단강을 건너 도망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직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명한 싸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8절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다" 

 

이 전쟁은 미리 사무엘과 약속된 전쟁이었습니다. 

약속된 때가 되면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여호수아가 그랬듯, 기드온이 그랬듯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쟁을 치루고자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사무엘이 오질 않습니다. 

백성은 두려워서 떨며 숨거나 도망하고, 블레셋 군사들은 곧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상황이 점점 조여오자 사울은 나름대로 결단을 내립니다.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와서 본인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사울이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하여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행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소립니다. 

 

11-12절은 사울의 변명입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부득이하여" 라는 말은 내가 어쩔수 없이, 그렇지 않을 수 없다는 소리지요. 

달리 말하면 상황이 이래서 어쩔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무엘의 답변은 차갑기 그지 없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영어의 표현을 보면 "You acted foolishly" 바보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왕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만약 그리하였더라면...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지켰더라면...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그 다음절 말씀을 보면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실 것이라." 

 

이 구절을 통해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명령하신 전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울이 보기에 상황이 어려워지자 미리 약속된 명령을 벗어나 스스로 번제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 실수로 말미암아 사울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 듭니다.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게 되지요. 

만약 사울이 이 전쟁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했더라면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다."는 말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를 통해 예수가 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만큼 이 전쟁은 중요했고 사울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실수가 그토록 용서받지 못할 죄였을까? 

우리가 그의 상황이라면 과연 사울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일은 점점 다급해지고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과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은 흩어지거나 요동치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을까? 

 

  • 영적 분별-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에 마음이 분주하고, 잠잠하지 못할 때,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할 때-

그때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말고 중심을 잡으라. 하나님께 집중하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재로 이러한 상황을 맞으면 가만히 있는 것이 어쩔 땐 가장 힘들 때가 있다. 

 

  • 사울의 변명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11절을 다시 보자.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블레셋 사람은 막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고 

그런데 그 사이에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정한 날은 며칠인가? 7일 

7일은 온전한 것. 완전한 기다림이다. 

사울은 7일 째가 되자마자 사무엘이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다. 7일이 되었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자 아얘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7일이 지나서 왔는가? 아니다 7일째 왔다. 

언제? 사울이 번제를 마치자마자. 

결국 그가 정한 시한에 온 것이다.

기다림은 초조한 시간이다. 조바심이 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을 갖고 기다리는 것은 다르다. 본문의 사울은 분명한 약속을 손에 쥐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자기가 기대한 순간이 지나자 그는 약속을 잃어버리고 조급함을 택한다. 

 

조급함을 택하니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미리 염려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들이 아무리 많고 강대하다 할지라도 결코 사울을 해할 수 없다. 그런데 조급해지니까 모든 염려가 다 금새 닥칠 사건으로 다가온다.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번제를 드렸다.

내가 달라고 해서 주고 안달라고 해서 안주면 그것을 "은혜"라고 할 수 있을까? 

 

은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다. 내 행위때문에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삯이지 선물이 아니다. 

사울의 예배는 잘못된 예배이다. 

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배가 아니라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예배를 드렸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마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만 가져가면 전쟁에 이기겠지 하면서 마음대로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져갔다가 언약궤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것처럼 승리를 위한 형식적인 예배, 형식적인 기도를 드린 것이다. 

 

사울은 무엇때문에 실패했는가? 

눈에 보이는 상황이 그를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했다. 

엄청한 수의 블레셋군들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흩어지고 도망치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모습. 

 

이 모습은 기드온의 전쟁과 극한 대립을 이룬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13만여명의 군사들을 무찔렀다.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거나 세상에 무릎꿇는 모든 군사들을 제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300명만을 남기시어 그들을 통해 승리를 이루게 하셨다. 

칼과 방패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빈항아리와 그 속의 횃불, 그리고 나팔을 통해 승리를 이루셨다. 

빈 마음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조급함의 반대는 느긋함이 아니다. 느긋함은 때로 게으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신앙안에서 조급함의 반대는 간절한 기다림이다. 

시므온이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듯,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듯,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기다리듯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 분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 깨어있는 것이다. 

 

간절한 기다림은 곧 믿음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상황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을 지키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그 분이 주신 감동, 그 분이 주신 확신, 그 분이 주신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로고스 교회는 부흥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여러 성도들의 입술을 통해, 그리고 제 기도 가운데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어서 내려오라는 올해의 표어를 묵상하며 여전히 내려오지 못한 우리의 교만함과 세상욕망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