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준비, 죽을 준비 (행 7:54-60)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초대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고 부흥하며, 또한 복음이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전반기에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며 후반기에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중심으로 복음이 어떻게 세계로 퍼지는가가 증언됩니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사역이 이어지게 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인물과 사건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일곱 집사가 세워지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며 스데반의 행적을 다루고 7장에서는 스데반이 공회에서 한 설교와 순교를 다룹니다.
어찌 보면 그는 집사가 되자마자 얼마 안 되어 공회에 끌려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한 인간이 삶으로 볼 때는 너무나 허무한 삶을 살아간 것 같습니다.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순교 직전 행했던 설교 외에는 남긴 유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구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6장과 7장 전체를 할애하여 스데반 이야기로 가득 채웁니다.
더군다나 7장에는 스데반이 순교 직전 했던 설교를 싣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한 집사의 설교 전체를 한 장에 채워 놓는 것입니다.
이 6-7장이 어떤 부분이냐 하면 사도행전의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인물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연결시키는 다리임과 동시에 예루살렘 중심의 초대교회와 교회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전환점을 맞게 하는 부분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장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퍼져 나가는 복음의 기초와 다리를 제공한 것이 한 사람, 스데반인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일을 첫 번째 행했던 사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 번째 행했던 자라는 것은 단지 첫 번째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 다음 사람의 길잡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위해 첫 번째 목숨을 바친 스데반의 뒤를 따라 열두 사도도, 사도 바울도 스데반의 뒤를 따라 순교의 대열에 동참합니다. 사도들에 의해 집사로 임명되었지만 그를 안수했던 열두 사도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른 것입니다. 게다가 그를 핍박했던 사울이 그의 발자취를 따른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바울과 더불어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돋보이고 빛나는 인물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누구에게도 붙이지 않는 예수의 모습을 스데반에게 대비시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죽은 이가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믿음의 동료로서 함께 했던 자들이 하늘의 열림을 본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 교회 사도들의 일을 분담하고 돕도록 임명된 일곱 집사 중 하나였습니다. 무슨 일을 나눈 것입니까? 6장에 보면 교회가 세워졌는데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구제의 문제로 다투게 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은혜만 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이런 저런 소란들이 일어납니다. 그 소란도 나쁜 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돕냐, 누가 돕냐 때문에 다툽니다.
초대교회의 대다수 - 히브리파 유대인
새로운 성도 - 헬라파 유대인
그런데 일곱집사의 이름 - 소수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일곱집사를 세운다. 일관된 성경의 중심 - 소외된 자, 약자의 편에 선다. 집사- 지금의 장로와 집사, 모든 임직들 - 행정과 구제. 사도들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들이 세워지자 교회의 어수선한 일들은 어느덧 정리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무리까지 이 도에 복종하여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증거합니다.
사도들의 돕는 자로서 교회의 굳은 일을 맡아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도록 도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6장 8절에서 보면 스데반은 구제와 행정적인 일만 했던 것이 아니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사람들에게 행하게 됩니다.
대개 어떤 일을 맡기면 맡긴 일도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 직분을 소흘이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칭합니다.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종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는데 연단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오래는 믿은것 같은데 도무지 좋은 열매가 맺히지 못합니다. 열매없는 신앙생활은 힘듭니다.
맡은 일에 충성된 자가 있습니다.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큰 도움이 됩니다. 좋은 동역자가 됩니다.
더 좋은 사람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감당하는 자 입니다.
시키지 않는 일도 합니다. 알아서 착착 일을 진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실 적에 하나 하나 일을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임의대로 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맞는 사람은 명령을 받기 전에 일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미리 알고 행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는 행복해집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집사의 일 뿐만 아니라 직접 사도들의 일까지도 행했습니다. 그렇다고 질서 없이, 교만히 행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행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질서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임의대로 행하나 질서 가운데 행합니다.
사도들의 일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분야,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성령의 지시대로 앞장서서 일합니다. 말씀에 충만하니 표적과 기사가 일어납니다.
표적과 기사는 능력 달라고 부르짖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일, 내 목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목적대로 일하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세가 임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뜻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적, 내 의를 위하여 일하기 때문에 영적인 권세가 없는 것입니다.
공회는 열두 제자들에게 아픈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공회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 의사당이고, 가장 높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모든 사회적, 종교적 재판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이 공회의 기세에 눌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자기들의 발을 씻기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어떤 위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공회의 권위에 맞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당당히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의 말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이 말을 들은 모든 자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우뢰소리처럼 들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희한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자기가 깨달으면 은혜라고 하며 회개하는데 남이 자기 잘못을 지적하면 마음에 찔리면서도 회개하지 못하고 이를 갑니다.
계속 이야기하면 귀를 막고 달려듭니다.
대개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잠언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은 잘 혼나는 사람이 결국 지혜로운 자구나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땐가 유명한 권투선수의 코치의 인터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 챔피언 제조기라 불릴 정도로 훈련 시키는 자들 마다 뛰어난 챔피언으로 키우는 능력있는 코치였습니다.
기자가 그의 훈련의 비결을 물으니 그 코치가 무엇이라 말하냐면 "잘 맞을 수 있는 사람이 결국은 챔피언이 됩디다. 맞기를 두려워하고 때리기만 잘 하는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결국 오래 맞을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훈계를 잘 들을 수 있는 사람. 잘 혼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온전해집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칭찬도 중요합니다. 잘하는 것은 칭찬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칭찬만 받고 큰 사람은 꾸중을 견디지 못합니다. 혼나면 분노하고 부모도, 선생도 외면합니다. 날 혼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날 혼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 칭찬이 없었다. 늘 훈계하고 꾸짖었다. 삼형제의 불만이 우리에게는 목사님만 있지 엄마가 없다는 불평이었다.
그런데 목사가 된 이후에 어느 순간부터 꾸짖지 않으신다. 기도만 하신다. 어쩔 땐 내가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 크게 혼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아무도 혼내지 않는다. 부모님의 훈계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우리를 혼낼 사람이 없다. 오직 말씀으로 훈계를 받는 것이다.
공회에 있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훈계에 달려들어 돌로 그를 칩니다.
그는 살기를 바라지 않고 죽음으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자기를 죽이는 자에게 분노를 발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했던 것처럼 똑같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서서"하며 그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진정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스데반은 짧고 굵게 살다간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발치에서 함께 돌을 던졌던 바울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주님을 만나 복음을 증거하다가 스데반의 뒤를 따랐습니다.
베드로도, 나머지 사도들도 모두 스데반의 뒤를 따라 마음껏 증거하다가 하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삶의 여운은 사도행전의 모든 인물들에게 메아리쳤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며 자신의 신앙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날마다 죽을 준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날마다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남겨둠이 없이 불꽃처럼 살아갑니다.
결국은 살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미운 채로, 화해하지 못한 채로, 용서를 빌지 못한 채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루를, 한 주를, 또 한 해를 그렇게 나 자신의 감정과 관계도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하루 하루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남겨야 합니다.
죽을 생각하고 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미워해야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꼭 말하고 싶은 말들, 편히 말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그날 풀어야 할 것을 그 다음날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은 나의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부활하는 심정으로 일어났습니다.
또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날의 사명을 완수하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에게 똑같은 일상은 없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루만이 있었습니다.
순교는 다름아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날마다 죽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기복생활과 다른 것은 기복 생활은 나를 위한 삶이지만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다름아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영광스럽게 오지 않습니다.
치욕스럽게, 못견디게, 피하고 싶게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질 때에 비로서 주님이 날 구원하셨을 때에 이런 수모를 당하셨구나를 몸소 체험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구원의 깊은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긴 계명은 다른 것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사랑의 시작은 오래참는 것이고 사랑의 끝은 끝까지 견디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랑은 별 거 없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입니다. 참다보면 사랑이 완성됩니다. 참지 못하기에 사랑하려다가도 실패합니다.
마지막 예화> 충청북도 청주인가 하는 한 성결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
십자가 권사
십자가는 주님 닮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교회 나오면 위로받고 즐거워여지 힘들면 누가 나오냐?
물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즐거움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의 회복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따르는 성도들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었으며 그 십자가를 따르며 주님을 내 안에 채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성도가 있는 교회는 승리합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모든 신앙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십자가 지고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묵묵히 헤치고 나아가시는 주의 자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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