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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첫째 아들과 아버지 (누가복음 15장 25-32절)

by 소리벼리 2021. 10. 24.

첫째 아들과 아버지 (눅 15:25-32) 

 

 

1. 이 비유는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원독자)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인가? 

[눅 15:1-3]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이 장면에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3. 그리고 예수와 함께 있는 제자들 

-> 3절에서 말씀의 대상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마 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 누가복음의 말씀과 평행하는 두 아들의 비유 사건 (내용상의 차이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유일한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마 21:23) 백성의 장로- 존경을 받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바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혹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 그동안 이 비유는 탕자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탕자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되어지고 이해되어져 왔지만 이 말씀을 하는 대상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의 일등 신앙인이라고 불리던 자들. 
  •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가 아닌 두 아들의 비유로 불리워야 할 것이요, 이 메시지는 두 아들 못지 않게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요, 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핵심을 담고 있는 비유이다. 

 

2. 예수님이 들으라고 하는 첫째 아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1) 그는 성실한 자이다. 

맏아들은 벝애 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25절) 

아버지는 부자였다. 품꾼도 많고 먹을 걱정도 없다.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동생은 유산을 챙겨 아버지의 돈을 챙겨 나갔다. 

형에게도 유혹이 없었을까? 나도 좀 놀면서 하자. 이제 나 밖에 없으니 눈치 볼 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돌아 올 때에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야 어떻든, 종들이야 어떻든 언제나 자기 일에 충실한 성실한 자이다. 

 

2) 아버지를 섬긴 사람이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29절)

동생은 아버지가 싫다고 집을 나갔지만 형은 그 말씀을 어김없이 순종하는 자녀였다. 그는 순종하는 자녀였고 또한 아버지를 섬기는 자였다. 

 

3) 검소한 사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

큰 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친구들과 파티를 한 적이 없다. 동생은 허랑 방탕하는데 형은 아마도 뭐 하나 즐긴 것 없이 검소하고 금욕적으로 산 것 같다. 

 

4) 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31절) 

아버지의 입으로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던 자라고 인정을 받는다. 

 

신앙생활 하면서 저도 그렇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고, 자기 자신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성실하고 검소한 자) 

어쩌면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신앙의 모든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 

 

3.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는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목사 중의 하나인 팀 켈러 목사님은 이 비유에서 나오는 두 아들은 모두 하나님과 멀어지는 두 길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둘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로, 이는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 밖에서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부류이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 믿고 "자아 성취"를 위하여 과감히 전통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심하게 말하면 "제멋대로" 길을 가는 자들이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은, 교회의 전통에 철저히 순응하고, 그 안에서 크고 자라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는 우월의식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동생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동생을 맞이하자 분노하여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적인, 형식적인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동생의 길은 "못되" 보이고 첫째의 길은 "착한 길"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동생이나 형이나 매한가지다. 그렇기에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오히려 비유의 결론은 충격적이다. 못된 인생을 살았던 둘째는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고 형은 아버지가 계속적으로 설득하지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로 끝이 난다. 

그가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눅 15:28-29]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의로운 전력, 자기의 선한 행동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 품을 떠난 죄인이요, 첫째 아들은 순종하지만 아버지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자 똑같이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다. 요나의 불순종처럼,...

 

영화 <아마데우스> 

젊은 살리에르라는 촉망받는 음악가의 기도 

"주여, 저를 위대한 음악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음악으로 주를 찬송하며 또한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제가 온 세상에 유명해져서 저와 제 작품이 사랑을 받는다면 저는 주님 앞에 저의 순결함과 근면함과 겸손함과 제 삶 전부를 드리겠나이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여자를 건들지도 않고, 무료로 젊은 음악가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자들을 열심히 구제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등장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뜻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처럼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여자들과 맨날 희희락락하면서 풍문이 끊이질 않고, 술취한 모습으로 연주하기 일쑤다. 

살리에르의 고뇌에 찬 기도가 시작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난 하나님께 재능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하며 매사에 신중을 가하고 흠없이 살려고 본능마져도 누르려고 애쓰는데, 저 젊은 친구는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어찌 아무일이 안 나타납니까?" 

그러면서 급기야 "이제 하나님, 당신과 나는 적입니다."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다. "모짜르트, 그 자가 나타나면서부터 하나님도, 그리고 나 자신도 싫어졌다..."하면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살게 된다. 

 

둘째의 희망은 허랑방탕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오지만 형의 정말 큰 문제점은 돌아오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방법에 분노하게 되고 둘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에 참여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끝까지 자기가 하나님보다 옳다고 주장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욘 4:9b) 

 

구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으로서...

절대로 선행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니다. ->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구원관이다. 다른 종교나 사람들의 생각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가 다가가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신앙생활의 기준에서 볼 때 첫째에게서 없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없다. 그는 매말라 있었다.  즐거움이 없다. 그는 친구들과 잔치할지도 모르고, 가족의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화평(Peace)이 없다. 그는 동생과도 불화하고 급기야 아버지와도 불화한다. 자비(Mercy,Forgiveness)가 없다.  그는 동생을 용서하지 못한다. 동생을 용서한 아버지는 더더욱 용서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결국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금할 수가 없는 성령의 열매이다. 

 

형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그런데 교만은 그 어떤 죄보다 우선된 죄다. 왜? 교만은 하나님 위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잘못된 행실에 대한 회개도 해야 되지만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자기 의의 뿌리까지도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4. 아버지

탕자라고 할 때 영어. Prodigal의 의미는 "무모할 정도로 다 써버리다" "남김없이 다 쓰다"의 의미다. 

아까 언급한 팀켈러 목사는 이 비유에서 정말 프로디갈한 존재는 둘째 아들이 아닌 아버지이다고 말한다. 

 

왜? 두 아들이 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각자의 방법대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만 허랑방탕하고 돌아온 둘째는 뛰어나가서 반기시며 어린 양을,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피로 먹이시고 입히시며 잔치를 여시고 

그런 자신의 사랑에 분노하며 집밖으로 뛰쳐나간 큰 아들에게는 "얘, 내 아들아!" 하시면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시면서 여전히 설득하시면서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그 모습이야 말로 아낌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 

신앙은 무엇인가? 하나님 주신 은혜 안에서 그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예배는 그런 잔치에 초청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