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가 물고 온 새 잎사귀 (창 8장 6-11절)
노아의 홍수와 방주 사건은 인류에게 임한 첫 번째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홍수의 사건에 있어서 교회의 상징적 모델로서의 방주의 역할을 또한 말해 주고 있다.
방주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 홍수의 때, 즉 심판의 때까지 사람들은 노아가 만들던 방주를 주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롱했다는 것 -> 예수: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그 빛을 외면했고, 십자가 위에 있는 그를 조롱했다.
- 사람들은 방주를 외면했지만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 평생의 작업이었고, 동시에 외로운 작업이었다. -> 십자가의 길, 교회를 세우는 길
- 방주는 산꼭대기에서 만들어져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곳에서 만들어졌다. -> 사람들이 외면함과 동시에 조롱과 비난의 대상 -> 외면함과 동시에 주목의 대상: 역설적 대상
- 그 문은 늘 열려 있었으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홍수가 났을 때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 때가 이르기 전에는 누구에게든 열려있지만 그 때가 오면 닫힌다. -> 열처녀비유,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 그 곳의 내부는 홍수의 기간동안 모든 생명을 안전히 지켜주었지만 그 안의 환경은 결코 좋을 수는 없었다 (동물들의 소리와 냄새, 식량의 한계, 홍수로 인한 눅눅함, 햇빛을 쬐지 못하는 환경. 어쩌면 곰팡이와 악취와 소음으로 가득찼던...그런데 그곳이 바로 가장 안전했던 곳) -> 교회 역시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회는 없다. 그 곳은 하늘에서 완성된다.
홍수의 내용
-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7:12) -둘째 달 열 이렛날 시작
- 그리고 물이 백오십일 동안 줄지 않고 땅에 넘쳤다 (7:24)
- 열째 달 초 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
- 그리고 나서 또 40일 후에 노아는 드디어 창문을 열었다.
- 언제 밖으로 나오는가? 육백 일년 1월 1일 - 물이 걷혔다. 2월 27일날 땅이 말랐다. 일 년하고 열흘 만에 마른 땅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40일 홍수나고 좀 지나서 곧 방주를 연 것이 아니라 비가 쏟아진 날만 40일이고 150일 동안은 그 물이 하나도 줄지 않고 땅에 가득했으며, 일년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방주 안의 사람들은 거의 일년 내내 방주 속에 갇혀 지낸 것.
동서남북이 모두 물
그 안에서의 삶 -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
코로나 정국을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어느 때 보다 조금은 그들의 답답한 삶이 더 잘 이해할 만한 상황.
동물들이 가득 있었지만 있는 식구는 딱 노아의 가족 - 노아와 아내 세 아들과 그 며느리, 아직 손자 손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10명도 채 안되는 가족이 일년 내내 방주 속에서 먹고 이야기하고...
그 때에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아니 라디오나 TV, 신문이나 잡지도 없다. 오직 배 안에 갇혀 자기들끼리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코로나가 길어지며 못견디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그런데 방주는 나갈 수가 없다. 나가면 물이다.
코로나 불화, 코로나 이혼...
얼마나 답답했을지....그들이 그 안에서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노아가 처음 배 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낼 때 심정이 어땠을까?
마치 우리가 언제 가게 문 여나, 식당 문 여나, 교회 문 여나 그러한 기분보다 몇 갑절은 더 기대와 염려가 교차했을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식당에 갈 수도 있고, 조심은 할 지언정 거의 대부분의 일상이 회복되었다.
그런데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우리의 마음을 늘 짖누른다.
첫 번째 까마귀를 내어 보내고 물이 많아 앉을 곳이 없자 좀 날다가 곧 돌아오고..
두 번째 비둘기를 보내자 비둘기 역시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곧 돌아온다.
그 오랜 기간 날기를 원했을 새가 훨훨 날다가 앉을 곳이 없어 다시 배로 돌아오는 광경도 생각하면 참 딱하지 않은가!
돌아오면 또 비둘기를 보내는 노아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칠 일을 기다렸다는 것은 비둘기가 돌아오자 실망한 마음을 또 참는 기간 - 하필이면 완전 수 칠일이란 말로서 낙심 뒤에 또 인내하는 지극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동 서 남 북이 물로 가득찬 세상에서 기다리며 인내하며 비둘기를 보내는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가 기다렸던 작은 구름 조각 하나같은 소망을 갈급해하는 표현일 것이다.
- 이 말씀을 나누는 우리 역시 여러가지 인생의 홍수를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다녔던 직장을 잃고, 건강했던 몸이 상하는 일,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의 정국을 빠져나오질 못했고, 오미클론이란 신종바이러스로 또 한번의 긴장을 하고 있다.
백신을 다 맞고 부스터샷까지 다 맞았는데 또 다시 오미클론이라는 바이러스 앞에 움츠려들 수 밖에 없다.
이 때 방주를 열고 비둘기를 보내는 마음 - 바로 소망을 찾는 마음이다.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새벽같이 보낸 비둘기가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다. 점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 그의 마음은 무슨 사고가 있나...걱정 반 기대 반이었을 것이다. 저녁 때가 되어서 돌아온 비둘기...그런데 11절에 보니 "그 잎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물려 있었다.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 비둘기는 단지 잎사귀가 아니라 소망을 물고 온 것이다. 어딘가에 마른 땅이 있다는 증거를 물고 온 것이다.
극심한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오는 소망의 메시지.
검사를 해 보았더니 아무 이상 없답니다.
내가 빌려줄 테니 빨리 해결 해.
내가 도와줄테니 같이 해보자.
삶의 홍수와도 같은 그러한 절망의 현장에서 작은 소망으로 다가오는 그런 소식.
비둘기가 물고 온 잎사귀는 그래서 고난당한 자에게는 복음인 것이다.
- 우리가 왜 예수의 이야기를 복음이라 하나 - 감람나무 잎사귀 - 복음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을 보자.
그녀가 남자를 유혹했을지, 남자가 그녀를 겁탈했을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요즘처럼 미투운동으로 자기의 침해된 인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대면 모를까! '
불행히도 당시 여인들에게는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렸다는 것은 간음하고 있는 현장에 사람들이 들어닥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악의 현장에 더한 책임이 있는 남자는 그 현장을 슬며시 빠져 나가고 여인 홀로 사람들의 온갖 수모와 시선을 맞으며 지금 돌에 맞아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 어디에선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뜻 밖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예수와 여인 둘만 남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천국의 비둘기처럼 나타나 감람나무 잎사귀를 내미시는 것이다.
오라비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제자들에게, 38년된 병자에게, 바디메오에게, 문등병자에게, 이방 사람 백부장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심지어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죄수에게조차 주님은 비둘기처럼 나타나서 그들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신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인생의 홍수를 만난 우리들에게도 그 분은 여전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 성도로서의 노아 - 소망을 갈급해하는 노아, 비둘기를 날리는 성도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홍수를 만난 이 세상에서 교회 라는 방주에 거하며 비둘기를 날리는 노아같은 인생들이다.
비둘기를 날리는 것은 무엇인가? 소망을 찾아 말씀을 갈급해하는 것이고, 주의 음성 듣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자이다. 우리가 날려 보내는 비둘기는 다름아닌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향기나는 기도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고백이다.
그렇게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 보장된 소망의 약속을 주신다.
성경은 잎사귀가 가득한 바구니다. 그 곳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망의 메시지가 넘쳐난다.
- 성도로서의 비둘기 - 잎사귀를 전하는 비둘기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온 잎사귀를 어떻게 했을까? 그 소식을 기뻐하면서 그냥 방주 밖으로 던져 버렸을까? 아니면 호주머니에 귀하게 넣고 자기 홀로 간직했을까?
아니면 가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잎사귀를 보여주며 땅이 말랐다고, 드디어 나갈 수 있다고 외쳤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증인된 삶은 결코 숙제가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전도를 훈련하고, 전도 구절을 암기하고....
그런 부담을 가지고 주님의 증인 되기를 원하시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그 복음. 나에게 날라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는 그 좋은 소식을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너두 나두 크고 작은 홍수에서 남은 생존자들이다.
그리고 그 남은 생존자들에게는 각각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그런 새 잎사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왔던 그런 풍파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도우시면 두려울 것 없다고 고난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가 가진 잎사귀,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잎사귀가 지금 당장 필요한 자도 있을 것이다.
혼자 절망하며 잠 못 이루는 남편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는 한 마디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에게 찾아가 "내가 기도하고 있어요.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도 되심을 난 믿어요"라는 그 따스한 한 마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는 자에게 조그마한 정성을 담아 격려하는 일, 모두 우리 자신이 비둘기가 되어 잎사귀를 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비둘기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신다.
성탄은 하늘 보좌를 떠나 아기예수가 되어 내가 너희들을 위해 지금 왔다는 비둘기가 된 하나님의 선물이고, "나를 따르라"는 그 분의 초대는 예수 믿는 우리가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 감람나무 잎사귀를 전하는 비둘기가 되라는 하나님의 초대이다.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그가 먼저 우리를 위로하셨고, 그 위로를 가지고 또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인내할 수 있도록,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게 한다.
[히 13:5]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의 구주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
내가 주로 말미암아 누군가의 의미있는 존재가 된 다는 것! 행복한 일 아닌가?
아침마다 전하는 아침묵상 -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목회자들도 이 기간을 쉬는 기간으로, 매일 묵상을 하는 목회자가 줄어들고 있다.
매일 녹화를 해도 점점 더 그것을 듣고 시청하는 성도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매일 아침 예배하고 말씀을 전하는 나라 - 한국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전하는 것은 이 엄중한 시대에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고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그 전하는 말씀을 듣고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자로서의 내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목사에게만 한정된 일일까?
이 어려운 때에 믿음 있는 자들이 함께 자신의 의미를 찾는 일 아닌가?
- 잎사귀의 역할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으며"
의문을 품고 사다리를 올랐던 노아는 확신을 얻었다. 이제 고난이 지나고 소망의 때가 되었음을....
복음을 경험한 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산다.
성령의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은혜를 주시며 확신시키시는 영이시다.
소망이 필요하신가? 비둘기를 날리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올리고, 그 분의 잎사귀를 얻기 위해 성경을 펴자.
잎사귀를 얻었는가?
그러면 주위의 사람과 함께 그 잎사귀를 나누자. 전해주자.
우리의 그 한 마디가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릴 수도 있다.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히는 홍수의 한 복판에서 개척된 교회이다.
마치 방주에서 일년넘게 가족끼리만 생활했던 노아의 가족처럼 우리 또한 한 해를 가족처럼 그렇게 살았다.
때론 함께해서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일년이라는 세월이 때론 너무 길고 지루해서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아갈 때도 있었다.
이제 2022년도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해 비둘기를 날려야 할 해이다.
이 홍수같은 세대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과 사명을 찾기 위해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해 구하고 또 날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 안 팎으로 전할 때에 이 홍수는 끝날 것이다.
아니 코로나가, 오미클론이 우리의 소망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부르심과 소명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트레이시 제일교회 > 주일예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벧전 5:7-11: 염려를 던져 버리라 (1) | 2022.01.16 |
---|---|
내 영혼의 중재자 (욥기 16:18-22, 호세아서 6:3-6) (0) | 2022.01.09 |
예수, 빛이 세상에 오다 (요 1:9-14) (0) | 2022.01.09 |
동방박사의 성탄 (마 2:1-12) (0) | 2021.12.16 |
마리아, 평안의 의미를 새롭게 하다. (눅 1:26-38) (0) | 2021.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