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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4.04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메시야는 고유명사입니까? 보통명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즉 예수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메시야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는,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같은, 삼손같은, 기드온 같은 장수요, 홍해를 가르고 바로를 항복하게 하는 능력자요, 모든 문제를 풀어줄 솔로몬 같은 지혜자였지 십자가를 지는 메시야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께서 스스로 나는 십자가를 질 것이다. 나는 고난 당하여 죽을 것이라고 거듭 말씀을 하셔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가 무릎 꿇듯 헤롯이 무릎 꿇을 것이요, 홍해를 가르듯 이적이 나타나서 로마 군사들이 다 멸절 될 것이요, 다윗왕국의 태평성대같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전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는 이전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요, 인도자요, 그들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능력자요 치료자로 오셨지만 그의 사명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메시야는 잠시 잠깐 승리를 주고 평안을 주고 복을 주었다면 예수는 영원한 승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잠시 잠깐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훼방놓았던 사탄의 일을 멸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두시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려, 죄로 인해 막혀 있었던 그 모든 장벽을 제거하시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1. 성막, 제사, 제물

우리는 성막, 성전, 제사 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가대가 늘 찬양하고, 향기로운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처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막, 성전, 제사의 모습을 재현하면 그 모든 환상이 깨어져 버립니다.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서 임재하셨고 그곳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죄 때문입니다.

그곳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기름부음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함께 거하던 그 평안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함 가운데 절대로 서지 못하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고, 기쁨에 넘치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날마다 번제가, 속죄제가, 화목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동물의 피가 진동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가져온 동물들을 죽여 각을 뜨고 내장을 씻고, 그 피를 담아 제단에 뿌리고,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어쩔 땐 하루에도 몇번씩 그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성막은 동물들을 잡는 비명 소리가 늘 가득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동물을 태우는 냄새로 그을렸습니다.

그 모습은 천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수라장이요, 도살장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장소, 그와 같은 예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바로 조금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의 길로 가지 마세요. 왜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려 합니까? 구약시대 하나님처럼 대적들을 무찌르고, 기적으로 놀라게 하고, 꼼짝못하도록 항복하게 하세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님 십자가 못지게 막을 것입니다.

붙들고 항변했다. 주님을 꽊 움켜 쥐고 항변했다.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자신이 메시야라고 불렀던 예수를 움켜 쥐고, 꾸짖기까지 하는 이 마음.

십자가와 부활을 가로막는 이 마음.

도저히 평소의 제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마음.

 

십자가를 피하고 고난을 피하고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길, 편한 길, 높임 받는 길, 칭찬받고 대우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

결국 가이사랴 빌립보, 또 다른 왕국, 제국, 세상의 왕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그런 마음.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어디에서 돌이키신 것인가? 베드로와 마주보고 있다가, 지금 갑자기 뒤를 돌아 다른 제자들을 보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작 듣기를 원하시는 대상은 제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33b)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일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지고 부활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남들 다 가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 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뽐내고 자랑하고 높아지고 대우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34절 이제는 그 분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에게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그 길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예외없이, 나를 따르는 자 모두...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이익, 자기 이기심, 자기 욕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짐, 부담, 모욕, 수치)

나를 따르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6절)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 안지고 칭찬과 명예와 성공과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도 정작 구원이 없으면 무엇이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예수가 지신,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워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메시야는 고유명사입니까? 보통명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즉 예수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메시야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는,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같은, 삼손같은, 기드온 같은 장수요, 홍해를 가르고 바로를 항복하게 하는 능력자요, 모든 문제를 풀어줄 솔로몬 같은 지혜자였지 십자가를 지는 메시야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께서 스스로 나는 십자가를 질 것이다. 나는 고난 당하여 죽을 것이라고 거듭 말씀을 하셔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가 무릎 꿇듯 헤롯이 무릎 꿇을 것이요, 홍해를 가르듯 이적이 나타나서 로마 군사들이 다 멸절 될 것이요, 다윗왕국의 태평성대같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전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는 이전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요, 인도자요, 그들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능력자요 치료자로 오셨지만 그의 사명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메시야는 잠시 잠깐 승리를 주고 평안을 주고 복을 주었다면 예수는 영원한 승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잠시 잠깐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훼방놓았던 사탄의 일을 멸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두시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려, 죄로 인해 막혀 있었던 그 모든 장벽을 제거하시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1. 성막, 제사, 제물

우리는 성막, 성전, 제사 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가대가 늘 찬양하고, 향기로운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처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막, 성전, 제사의 모습을 재현하면 그 모든 환상이 깨어져 버립니다.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서 임재하셨고 그곳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죄 때문입니다.

그곳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기름부음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함께 거하던 그 평안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함 가운데 절대로 서지 못하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고, 기쁨에 넘치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날마다 번제가, 속죄제가, 화목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동물의 피가 진동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가져온 동물들을 죽여 각을 뜨고 내장을 씻고, 그 피를 담아 제단에 뿌리고,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어쩔 땐 하루에도 몇번씩 그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성막은 동물들을 잡는 비명 소리가 늘 가득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동물을 태우는 냄새로 그을렸습니다.

그 모습은 천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수라장이요, 도살장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장소, 그와 같은 예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바로 조금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의 길로 가지 마세요. 왜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려 합니까? 구약시대 하나님처럼 대적들을 무찌르고, 기적으로 놀라게 하고, 꼼짝못하도록 항복하게 하세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님 십자가 못지게 막을 것입니다.

붙들고 항변했다. 주님을 꽊 움켜 쥐고 항변했다.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자신이 메시야라고 불렀던 예수를 움켜 쥐고, 꾸짖기까지 하는 이 마음.

십자가와 부활을 가로막는 이 마음.

도저히 평소의 제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마음.

 

십자가를 피하고 고난을 피하고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길, 편한 길, 높임 받는 길, 칭찬받고 대우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

결국 가이사랴 빌립보, 또 다른 왕국, 제국, 세상의 왕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그런 마음.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어디에서 돌이키신 것인가? 베드로와 마주보고 있다가, 지금 갑자기 뒤를 돌아 다른 제자들을 보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작 듣기를 원하시는 대상은 제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33b)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일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지고 부활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남들 다 가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 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뽐내고 자랑하고 높아지고 대우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34절 이제는 그 분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에게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그 길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예외없이, 나를 따르는 자 모두...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이익, 자기 이기심, 자기 욕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짐, 부담, 모욕, 수치)

나를 따르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6절)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 안지고 칭찬과 명예와 성공과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도 정작 구원이 없으면 무엇이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예수가 지신,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워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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