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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현장을 사수하는 자 (출애굽기 33:7-11절) 


  • 구약의 처음 5권의 책을 기독교에서는 모세 오경, 유대교에서는 :토라"라고 합니다. 

이 모세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말씀은 우리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 교에서 공통적으로 핵심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경전입니다. 왜 오경이라고 하면 이 책은 원래 한 두루마기로 보관되어 전해졌기 때문에 한권의 책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모세가 기록했다고 여겨져 왔지만 현대 성서학에서는 모세가 기록했다고 보기 보다는 모세가 중심이 된 성경으로 여전히 모세어경이라는 말읋 사용합니다. 


  • 신약의 첫 시작인 사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듯이 구약의 첫 시작인 오경에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모델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서 제 2 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모세 오경이 모세 중심으로 읽혀지고 연구되어져 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진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여호수아 입니다. 
  • 모세가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인도한 자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가나안을 정복한 인물은 바로 여호수아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홍해를 건넌 모세는 물로 세계를 베푼 세례요한으로,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는 오히려 예수의 예표적인 인물로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여호수아란 말은 예수라는 말과 같은 어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2017년도에 금요예배 시간에 여호수아를 강해하면서 여호수아의 삶과 여호수아서의 내용이 우리 성도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라 있음을 거듭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홀해를 건너는 모세의 사건이 세상으로부터 거듭나는 중생의 세례를 가리킨다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성령세례, 성결의 세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여호수아의 등장 (출애굽기 17장 - 아말렉과의 전투)- 르비딤 전투 - 여호와 닛시  

출 17:8-14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홍해를 건너자 마자 르비딤이라는 장소에 진을 침- 물이 없어서 불평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옴. - 맛사, 므리바 : 여호와께서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시험. 


그리고 곧이어 아말렉과의 싸움 - 구원받은 후의 영적 싸움, 떡으로 사는가, 믿음으로 사는가? 

아말렉- 에서의 자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 믿음을 판 자. 무엇 때문에 육신의 정욕 때문에...

-> 아말렉과의 전투- 이스라엘 역사를 거쳐 대대로 이어진 전쟁. - 여호와 닛시

사울왕 - 아말렉을 진멸하라! - 좋은 것 숨겨두다가 사무엘 선지자에게 발각, 하나님께 제사하려 하였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 결국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왕 위에서 물러남. 

에스더 왕비 때 - 사울왕의 후예였던 모르드게와 아말렉의 후예였던 하만이 맞붙어 결국 하만이 죽게 됨으로 질긴 아말렉과의 전쟁에 종지부. 


우리는 모세 때 아말렉과의 전투의 내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산 꼭대기에 올라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피곤하여 손이 내려가면 지고.... 

항상 모세와 모세를 돕는 아론과 훌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호수아 입장에서 이 전쟁은 어땠을까? 


전쟁의 성패는 우리가 알듯이 모세의 손에....그렇다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손만 의지하여 가만히 있다면.,...

아니 모세의 손이 보이기라도 했을까?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좀 쉬었다가 내려가면 열심히 하고.... 여호수아의 눈에 모세의 손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의 눈에는 아말렉만 보인다. 모세의 손과 상관없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 


오히려 나중에 자기가 이긴 것이 자기 떄문이 아니라 모세의 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화가 날까? 

난 도대체 뭐한거냐? 이럴 수가 있냐? 믿지 못하겠다. 우리가 싸워 이긴거지 어떻게 산꼭대기에서 기도해서 이긴거냐.... 


축구선수가 열심히 경기해서 승리했는데 엄마가 기도해서 그래.... 

열받지. 

아니 감독이 잘해서 그래... 이 소리만 들어도 억울할꺼다. 경기를 뛴 것은 선수가 아닌가? 


그런데 14절 -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이스라엘 백성의 귀에 외워 들리라 하지 않는다.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왜? 어떻게 해서 전쟁에 이기는가? 내가 현장에서 전쟁하더라도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구나. 잊지 말아라.  

아니 아예 외워라. 너는 싸워도 전쟁의 성패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여기에 나타난 여호수아- 현장의 장수. 신앙의 승리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삶의 현장, 직장에서, 가정에서, 삶의 일상적인 일터에서....

그런데 그 현장을 성실하게 지키면서 그 현장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 삶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의 현장을 바라보게 하신다. 

그리고 보이는 현실 너머에 영적 현실에 눈을 뜨게 하신다. 


예수님-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분이 아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세리의 집에서,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2. 시내산에서 모세와 함께 (출 24장) 

(출 24: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장면
  • 이제 신앙의 눈을 뜬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시내산까지 함께 간다. 아말렉 전투에서 모세와 함께 산에 올랐던 아론과 훌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남아 있는다. 
  • 물론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산 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산 밑에서 모세가 내려오기까지 40일간을 기다려야 했다. 
  • 모세는 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였다 쳐도 여호수아는 40일동안 무슨 일을 했을까? 모세가 언제 내려오나, 도대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름으로 가려져 있는 산을 바라보면서 40일간을 기다리는 여호수아 - 
  • 부지의 구름이라는 영적 고전 - Cloud of Unkowing -  신비에 가려 있는 구름 저편의 하나님을 육신의 한계인 40일 동안 바라다 보는 훈련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직접 말씀을 주시는 십계명의 현장에 홀로 기다리며 모세를, 하나님을 바라다보는 여호수아의 영적 현장 


3. 출 33:7-11 (영적 갈망의 절정) - 회막을 떠나지 아니한 여호수아 

(출 33:7-11)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 출 32장- 황금 송아지 사건 (내가 저를 멸하리라) - 아니 되옵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은 주지만 함께 가지는 못하겠다. 아니 외옵니다. 모세와 하나님과 단편하듯 기도하는 장면- 33장 
  • 회막- 성막을 짓기 전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위해 세운 장막 - 진에서 멀리 떨어진 구별된 장소 
  •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이 나아가는 곳 
  • 그런데 여기서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
  • 떠나지 않고 그는 무엇을 했을까? 
  • 그도 하나님과 대면했을까? 그런 기록이나 흔적은 없다. 
  • 그저 그는 회막 안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말하는 것을 보면서 갈망했을 것이다. 
  • 나도 모세처럼, 나도 그 분과 대면하고 싶다. 나도 당신의 깊은 임재를 경험하고 싶다. 
  • 이 장면에서 여호수아는 모세라는 자기의 스승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모세의 수종자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수종자가 된다. 모세의 부하에서 하나님의 수종자가 된다. 


4. 이 후의 일

  •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와 백성들은 남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비롯한 열 두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 정탐. 그 땅을 보게 한다. 
  • 민 27장 12-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1)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 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 모세는 남고 여호수아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된다. 
  •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가리켜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라 말씀하신다.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 이미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 하나님과 동행 하는 자. 이제 그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 된 자라고 명한다. 
  • 여호수아는 철저한 현장 주의자였다. 그는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서 언제나 가장 열심히, 가장 성실히, 가장 오랫동안 그 현장을 지키는 자였다. 떄론 그 분의 임재가 보이지 않아도, 때론 자기 보다 다 친밀히 하나님과 교제하는 모세의 뒤편에서도, 여호수아는 포기하지 않고, 또 시기하지도 않고,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낙심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나타냈다. 나도 주를 뵈옵고 싶습니다. 나도 주를 만나고 싶습니다. 나도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난 여호수아와 같은 현장 주의자가 되고 싶다. 

때로 성도들처럼 산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는 그런 전쟁처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고, 그렇지만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때로는 산에 올라가 구름 같은 미지의 영적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난 우리 성도들을 그러한 믿음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싶다. 여러분들에게도 여호수아처럼 아말렉과의 전쟁터에서도 묵묵히 일하면서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떄로는 무지의 구름 너머의 영적 세계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누구보다 더 깊은 갈망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영적 현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꿈꾼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본질을 바꾸시는 은혜 (창세기 32장 22-32절) 


서양과 동양, 그리고 듀대인들마다 각각 인간의 정의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각 문명의 가치관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인간을 사람 인(人) 자와 사이 간 (間) 자를 써서 관계를 중시합니다. 사람 인자 하나를 보아도 두 존재가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을 본따 만든 상형 문자이며 여기에다가 사이 간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사람들 사이라는 사회성, 공동체를 중시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유학와서 명어로 쓰거나 말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 - 우리집, 우리 엄마, 우리 교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라는 말 속에 나를 숨겨서 표현하는) 누가 그랬데....

 

라틴어, 영어권에서 인간 -human- humus - 흙, 먼지.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성경에서 근거한 어원이지만 결국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덧없음, 먼지, 허무주의, 니힐리즘... 

히브리인- 인간- Ish (욕망, 불덩이) - 인간은 곧 육망하는 존재. 


이 욕망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이다. 욕망은 죄의 근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신앙의 근원이기도 하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선악과의 해석을 요한일서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잘못된 욕망은 곧 남의 것을 탐하는 탐심이고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교만이고 곧 죄의 근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정의 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하면서 바라는 말씀에 근거한 선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욕망을 Lust, greed등을 표현하면 죄와 연관되지만 desire, hope등으로 표현하면 선한 갈망이 된다. 

그리고 그 선한 갈망 중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큰 갈망은 곧 passion이다. Passion은 그 의미가 아주 강한 열정, 열망을 가리키는데 욕망 중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이다. 삶을 전부 불태울 수 있는 욕망이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passion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뜻한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 제목이 그 의미를 보여준다. 


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욕망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욕망, 열망이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열망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볻받으며 따르는 삶 역시 passion 이다, 거룩한 열망을 가지는 삶이다. 


이 욕망에서 시작된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이스리엘 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ISh (인간, 욕망) + Rah (보다) + El (하나님)의 합성어이다. 

우리말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나 야곱처럼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이겨야지"하는 마음으로 마치 하나님을 이기려는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이해에서 근거한 잘못된 표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니님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을 본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표현했을까? 

당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32장 30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Ish를 사람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란 의미이지만 어원 그대로 욕망,갈망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영성적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자, 하나님을 닮기를 갈망하는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닌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다. 

지금도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도 야곱을 신앙의 모델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위대한 왕 다윗, 모세와 엘리야 같은 지도자는 존경해도 자기 롤모델이 야곱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야곱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 장면이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만들어 진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와 씨름하신다. 이 씨름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가다듬이 가시는 씨름이 시간이고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우리의 옛 성품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한 씨름이다. 힘겨운 씨름이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지만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온 우주 만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와 씨름하시고 우리는 안변할려고 불순종하려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면케 하기 위해서 씨름하신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바로 그의 죄된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야심을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욕망에 이끌린 자. -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버립니다. 자기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이지만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가족끼리의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야심을 이루는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도 속이고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도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진실이 밝혀져서 창피한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모사를 행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상 야곱의 삶이 이러했음을 말하며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복을 얻기 위해 남도 속이고 때로 속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하는 그러한 삶을 그럴수도 있다하며 합리화하지만 이것은 마귀적인 발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져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갔는데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는데 라반의 속임수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남을 속이면서 산 사람은 결국은 그 값을 이 땅에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끝을 보면 드러납니다. 

이 때부터 야곱은 라반과 속고 속이는 반복적인 삶의 전쟁을 치룹니다. 가축을 편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자 급기야 라반은 야곱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야곱은 다시 라반의 집을 떠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누가 있습니까?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꾀를 부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가는 곳마다 적이 있습니다. 편히 쉴만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적을 염려해야 합니다.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에 악인을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꾀부리는 자를 악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꾀부리는 자의 대표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악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그 사기꾼 같은 삶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내가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그대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입니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제 3의 거처를 삼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찌 이방인과 같이 살자고 떠날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왜 나누어 보냅니까?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 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냅니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가진 것을 다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고도 자기 목숨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계속 두려움이 남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꽈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보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지 할 데 없자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럴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와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염치없어도 다시 부르기가 창피해도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야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결코 천사를 놓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마저 떠나가면 더 이상 소망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온몸이 져러오고 아파와도, 살사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내가 엉터리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서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응답해주십니까? 

우선은 내가 자격없고 엉터리임을 인정할 때입니다. 야곱은 이제 가진 것도 없고 아무 자격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육탄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나옵니다. 돈도 없고 상의할 사람도 없고 하니까 최후의 보루로 결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질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셨습니다

야곱은 여지껏 누구에게 진 적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왔던 것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렇게 형 에서도 이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겨서 축복을 받았고 라반에게도 이겨서 두 아내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 아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첫째 이름을 바꿉니다. 사기꾼을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신비의 원리가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이기려고 살았던 야곱이 알고 보니 다 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형을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것을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자였고 라반을 이겼다고 했지만 도망하여 피해다니는 그야말로 패자 중의 패배자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기려면 항상 지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승리자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니까 하나님께서 날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 길들여 진자. 말씀으로 훈련된 자. 


순간만 하나님 앞에 굴복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약하게 해서 계속적인 연약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패역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대개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야곱은 환도뼈가 상해서 평상을 절뚝발이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뚝 절뚝 걸어다니면서 매일 순간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시금 의지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니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남을 이기려고,  지는 것 같을 때는 한 없이 초라하게 느끼고 원망함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주보- 성형 수술 하듯이,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필요한 부분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이름을 바꾼다. 내 본질을 바꾸신다. 

나를 부모의 유전이나, 세상의 풍습에서 떼어 하나님의 가지에 접붙인 자가 되게 하산다. 

 

Posted by 소리벼리

 

빈그릇을 모으라  (왕하 4:1-7) 


열왕기상, 열왕기하에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선지자의 제자, 선지자의 생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열왕기하 2장에 보면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상당한 수의 제자들의 수(50여명)가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선지자라는 것이 교육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를 제외하곤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구약의 시대, 성경은 적어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시기에 현재의 신학교와 같은 선지자를 양성하고 훈련시키는 기관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신앙적으로 부흥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타락하였던 시대였습니다. 

갈멜산의 전투로 유명했던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라 평가 받던 아합왕과 그의 뒤를 이은 여호람은 계속적으로 악을 행하던 왕들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셀라 선지자들 850명을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다 진멸한 뒤에도 엘리야는 이세벨의 추격을 받으며 "이스라엘에 오직 나만 남았으니..."하며 영적인 외로움을 하나님께 하소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천명의 사람을 남겨둘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로뎀나무 사건 이후로 엘리사를 후계자로 임명하며 남은 생을 이러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남은 자들을 찾아내어 훈련시키면서 곳곳에 선지자의 무리들을 양육하거나 훈련시켰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라의 분위기가 왕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신앙에서 멀어져 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들 선지생도들의 삶은 대게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한 아내의 남편되었던 선지자의 제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악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위한 선지생도가 되었지만 무슨 경위인지 모르지만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빚만을 남긴체 그만 죽고 만 것입니다. 

당시 여인들의 경제 활동은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과부들은 가장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이었지요. 

룻기를 보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밭에 남기워진 이삭을 주어 살아가는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갚는다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니까 빚쟁이들이 독촉을 하다가 급기야 두 아들을 데려가 종을 삼고자 합니다. 남편도 죽고 이젠 두 자녀 마저 팔릴 기가 막힌 환경이 이 여인이 처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권자이시니까 이런 고통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 얘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가정에 닥친 이 여인과 같은 가정의 고난은 선한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래도  어두운 세상에서 신앙적으로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신앙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결국 고통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고통의 현장에 들어서면 그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고통은 현실로서 여전히 많은 신앙인들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빚만을 남긴 채 죽은 선지자의 제자.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경우는 여전히 우리 일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죄나 악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그릇된 생각입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렇지 하는 생각이나 말들은 신앙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 입니다. 


고통의 현실에 있어서 "왜?" 라는 문제에 매달리면 우리는 점점 더 절망하게 됩니다.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에게, 저들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을까? 

왜 하나님이 이런것을 허락하셨을까? 생각하다보면 미로에 갇힌 것처럼 점점 더 하나님이 멀어지고 해결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피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1. 대화의 대상이 누구인가? 

원망이나 기가막힌 일이 일어났을때, 대개 사람들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앞에서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문을 닫아 스스로 자기를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데 선지생도의 아내는 엘리사에게 나왔습니다"당신이 이 모든 일을 아시지 않습니까?" 

자기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자를 만났습니다. 

1절에 보니까 "부르짖어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조용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응어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엘리사를 찾아가 조용, 조용하게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답답하고, 죽을 것 같고, 괴로운 그 마음을 토합니다. 

엘리사에게 갔다는 것은 그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원망이나마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소연을 하던, 원망을 하던, 아니면 부르짖고 매달리던, 이 여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가 그 분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렘 33:2-3)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결국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에게 나와서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할 수 있는 자에게 나아가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행할 수 없는 자에게 이야기 할때가 살펴 보면 더 많습니다. 

그냥 들어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능력없는 자가 아무리 듣고 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일을 행하십니다. 성취하십니다. 크고 비밀한 것들을 보여 주십니다. 


2. 여인의 고백-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여인은 엘리사에게 절규합니다. 

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한 자였습니다. 이제 빚쟁이들이 와서 두 아들을 종삼겠다고 합니다. 

여인의 의도는 이겁니다. 

  • 신앙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가 있습니까? 
  • 그리고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신앙 좋은 사람이 좋게 죽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정한 신앙인 이었지만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죽을 때에 자기 자녀들의 권력 투쟁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나라의 기울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그 분의 제자들은 갖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당했습니다. 


신앙인이 좋게 죽으면 좋겠지만 좋지 않게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든지 신앙인은 죽으면 하늘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결국 신앙인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지껏 남편의 신앙에 의지해서 살았는데, 남편만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떠났습니다. 이제 나 어떡해요...

아내의 말은 무엇입니까? 그의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는 부르짖지만 정작 중요한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앙은 말을 못합니다. 

여인은 믿음 좋은 사람의 아내였을는지는 모르지만 믿음 좋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엘리사의 응답 -너의 믿음을 채워라. 

여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엘리사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아내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신앙좋은 남편이 죽었으니 내 하소연좀 들어주십시오. 거기다가 좀 더 기대하는 것은 '내가 억울하니까 날 좀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엘리사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네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 말이 엘리사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네 집에 있는것이 무엇이냐?" 


지금 아내가 엘리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가진 것이 있다면 날 도와줘야 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도와줄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네가 의지하는 남편이 없어졌을 때에,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냐? 

믿음 좋은 선지 생도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여인이 말합니다. 

"기름 한 그릇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살 길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방법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엘리사는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아니다.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남긴 것이 있다. 너에게 찾을 것이 있다.” 고 하십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기름 한 그릇, 기름 한 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름 한 병이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 기름 한 병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남편과 남편의 믿음만을 의지하던 여인에게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은 남편의 신앙, 남편의 믿음이 아닌 너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내 남편도 죽고, 빚은 넘치고, 두 아들마저도 빼앗길 처지이지만….그래도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내 도움이시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신, 당신이 주신 성령이 남아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건, 우리 성도들에게는 기름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이라면 내게 도울 수 있다라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 안에는 기름이 있는 것입니다. 

설사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큰 믿음을 가지진 못했어도, 확실한 체험을 가지진 못했어도, 때로 흔들리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기도하지 못했어도,,, 그래도 끈덕지게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 내게 작은 기름 한 병 남아 있습니다.”라고 깨닫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름 있다는 여인의 대답에 엘리사는 또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빈 그릇은 무엇입니까? 

채워지길 원하는 은혜의 공간입니다. 빈 그릇은 내 영의 갈급함의 공간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분량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더 이상 빠지면 광신에 빠지고, 친구도 잃게 하고, 남들로부터 주목받게 되니까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같습니다. 갈급해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면 그만 아니어도 그만입니다. 


엘리사는 집안의 모든 빈그릇을 모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 밖에 나가 모든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 합니다. 조금 빌리지 말고 빌리 수 있는 만큼 모든 이웃의 빈그릇을 긁어 모으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넘치는 은혜를 주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부어 줄 테니 네 주위의 갈급한 심령, 네 주위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심령, 모든 공허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긁어모으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 할 때에, 엘리사의 이 요구는 황당한 요구입니다. 

지금 빚쟁이가 독촉하며 아들을 달라고 하는데, 이웃에 나가서 또 빈그릇을 빌려 오라니,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빌려 오라니, 이웃이 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르고, 그 그릇을 가지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엘리사의 말을 듣습니다. 후다닥 달려나가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이 모라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가져 올 수 있는 모든 그릇을 가져 옵니다. 

4절) 너는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어디로 들어갑니까? 

네 집안의 골방,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세상의 것 생각지 말고, 빚쟁이도 생각지 말고, 죽은 남편도 생각지 말고 오직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가져온 빈그릇, 너 자신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의 모든 빈 그릇, 빈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까지, 문을 닫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성령의 은혜가 가득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준비하고 순종한 만큼 받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생활로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셔도, 성도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81:10-12)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다. 그러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이제 여인의 집에는 온통 기름 그릇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가족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빚으로 인하여 세상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습니까? 절망과 원망과 염려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됩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 그것이 크던 작던 여러분 안에는 작은 기름 한 병들이 있습니다. 그 기름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기름을 앞에 두고 더욱 갈급한 심령으로 빈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갈급함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왜 은혜가 충만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은혜를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 아닌 다른 도움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가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맡긴 것이 있다 하십니다. 네게 믿음이 있고 네게 성령이 있고 네게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갈급한 영혼들을 위해 골방에 들어가 기름을 채루라고 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물, 고난, 세례 (마태복음 14장 24-32절) 


오늘 본문 바로 전의 사건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가 이제 온 이스라엘에 소문이 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 모여들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흥분하였고 들떠있었으며, 사기가 충천했다. 큰 비의 은혜를 경험한 바로 그런 때였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들떠 있는 제자들을 "즉시 채시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마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치 가만 놔두면 큰 일 난다는 듯이 들떠 있는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왜 그렇게 급히 재촉하셨을까? 

무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과 게으름과 방심과 죄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틈을 타고 사탄이 역사하기 째문이다. 

지금 까지는 그들은 항상 예수와 함께 거닐었다. 

예수와 함꼐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 분만 바라보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적어도 그들에게 예수만 함꼐 있으면, 하는 믿음은 있었다. 


그런데 오병이어 기적 이후 예수는 홀로 남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게 하신다. 

실제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예수가 우리를 홀로 남겨 두게 하실 때가 있는가? 

물론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주의 임재가 어느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막막한 때가 있다. 

다윗도 그러한 심정을 시편에서 수없이 부르짖으며 자기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외친다. 


심자가 요한과 같은 영성가들은 이러한 때,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한 때를 "영혼의 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많은 경우 예수가 우리를 홀로 보내는 것보다는 우리가 예수 없이 홀로 떠날 때가 부지기수다. 

오병이어와 같은 큰 이적을 경험한 후에 대개의 신앙인들이 마치 그것이 자기 능력인양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에서 스스로 이젠 됐다고 생각하는 영적 나태함이 일어날 때가 많다. 

 

 물을 건너는데 예수가 없다. 결과는 폭풍우다.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렇기 떄문에 이 구절은 이중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소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불러 하늘의 복음을 들려주시는 장소이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는 그 산에 계신데 제자들은 예수를 홀로 남기고 지금 바다를 건너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은혜에 도취되어 예수없이 먼길을 온 것이라고, 예수를 홀로 남겨두고, 이제 자기 스스로 해 보겠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쩄든 결과는 예수는 홀로 남고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바다를 건넌다.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없이 너무 먼길을 나와 버렸다. 꺠어있지 않은 자는 언제든지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너무 바빠서건, 너무 아파서건, 예수 없이 너무 먼 길을 떠난 자의 결과는 고난이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어지자 허랑방탕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은 새벽 네시쯤 되는 아주 깊은 밤 새벽이 오기 전의 시간입니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둠이 가득찬 시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어둠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의 중심에서 그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밤새 폭풍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말한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성경에서 물을 건너는 것은 곧 구원의 모델로서 그려져 왔다. 


1.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엵지 재앙을 통해 바로의 항복을 받아내고 애굽을 떠나는데 마음이 바뀐 바로가 뒤에서 쫓아오고 앞은 홍해가 가로막고 있다. 


[출 14:13-출 14:14]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두려워말고 -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두려워하지 않은 유일한 방법- 기도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 가만히 서서 - 꺠어 있으라. 조급하지 말고 서둘지 말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를 바라라 
  • [고전 10:2-3]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홍해를 건너는 사건 - 세례, 혹은 중생의 사건, 세상 (애굽)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말씀)으로 살아가는 여정으로 들어오는 삶. - 중생의 세례는 일생에 유일한 사건. 

그 방법-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 -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런데 그 후에도 강을 건너는 사건은 계속된다. 


2. 여호수아 

  • [수 3:3-수 3:5]

(수 3: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수 3: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수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 언약궤를 따르라. 거리를 유지하라 (이천규빛: 약 1km) : 이전에 가보지 못한 너희의 행할 길을 알게 하리라.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앞서지도 뒷서지도 말고 말씀을 앞에 두고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멈추라 하면 멈추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은 항상 현재형으로 받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너희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과소평가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이럴꺼야 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대를 넘어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자. 


3. 엘리사 

  • [왕하 2:13-4]

(왕하 2: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왕하 2: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 겉옷- 성령으로 옷 입는 것- 성령의 내주는 아홉가지 열매, 전신갑주는 성령의 외적 능력.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일생에 한 번 경험하는 중생의 세례를 말한다면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의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다시금 주어지는 제 2의 은총이다. 



 4. 다시 베드로로 

 지금 베드로가 직면하고 있는 폭풍우는 어떤 물인가? 

 죄인인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이다. 사망의 물이다. 

 애굽과 광야 사이를 가로막은 물, 홍해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땅을 가로막은 물이다. 바로 세례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은 물, 요단강이다. 바로 말씀의 물,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이다. 엘리사가 가죽옷을 헤치며 걸었던 그 물, 성령의 능력이다. 

 그 물을 지금 예수를 바라보고 건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 14: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 14: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첫번째 베드로에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그치게 한다. 


신앙 생활은 결국 내 배에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분을 내 배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 물, 고난, 세례 

물은 성경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베드로가 만난 폭풍우, 바울이 만난 유리굴라와 같은 인생의 큰 고통이요 시험이요 고난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죽고 예수로만 사는 세례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둘은 별개가 아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고난이 곧 세례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의지하던 교만함에서 돌이켜서 고난 가운데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함을 깨닫게 된다. 

다시금 재가 죽고 예수만을 바라 보게 된다. 

고난을 통해 한없이 낮아지며 고난을 통해서 전적으로주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표현한 것처럼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향해 외치는 확성기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면서 누가 이기나 돌아오는 것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폭풍우를 뚫고 고난 당하는 베드로를 향해 물 위로 걸어오시듯이 고통 당하는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물을 건너는 사건은 중생에서 성화로 성화에서 성령의 충만으로, 그리고 물을 두려워 하지 않고 물 위로 묵묵히 건너는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으로 발전한다. 신앙의 성숙,단계를 표현한다. 

모세도 건너고, 여호수아도, 엘리사도 건너지만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실패한다. 마치 베드로가 실패한 그 자리에 우리를 초청하는 것 같다. 

주님을 볼 것인가? 주위를 볼 것인가? 


<군대에게서의 간증>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