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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 아침묵상'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1.09 요단강을 건넘 (여호수아 3장)
  2. 2021.01.09 백성을 향한 세가지 명령 (여호수아 1장 10-18절)

4. 요단강을 건넘 (여호수아 3장) 

 

  • 여호수아 전체의 내용 - 가나안땅 정복. 가나안의 의미가 무엇인가?
  • 가나안 : 어떤 이는 행복, 어떤 이는 축복, 어떤 이는 물질적인 축복만을...어떤 이는 유혹...간단하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땅. 

             지금의 이스라엘 전체의 땅. 그 중심엔 예루살렘 성전 - 하나님의 임재, 통치.

             그러나 그 땅 자체가 복이 아니다. 그 땅은 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물리적인 예루살렘 땅은 물론 선택받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땅은 불모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선민, 집착, 신앙이 강헀다. (가나안, 예루살렘, 이스라엘..)

              북왕국이 망했을 때에도 예루살렘이 있는 남왕국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던 성전도 불타 없어졌다.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그 땅 자체가 아니다.   

             가나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누구의 입술을 통해 하는가? 바로 라합이다. 

             (수 2장 11절)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문제는 가나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곧 가나안이다. 내가 어떤 가나안을 생각하는가가 내 신앙의 특징을 보여 준다. 

             가나안이 단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엄밀히 말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이 된다. 복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그 복은 곧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부재가 어떤 고통을 가져다 주는 줄을 삶을 통해 제험하고 그 은혜를 체험한다. 

             그런데 큰 아들은 한시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큰 아들에게 가나안은 빨리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왕이 될 때 까지만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신앙의 여정에 가나안은 유혹이고 타락을 가져다 준다. 가나안을 얻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건 축복이 아니다. 실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다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기독교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유럽, 미국, 한국 교회 모두가 가나안 이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한다. 

             

 2. 하나님의 계획, 준비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하다. 

 첫째, 사람을 세운다. 모세를 잃고 무너져 있던 여호수아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이다. 

          맡긴 자에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충성이다. (고전 4:2) 

 둘째,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들에게 명령하신다.   

         백성에게 하신 말씀은 사흘 양식(사흘- 십자가의 시간, 죽음의 시간; 양식- 고난을 이기는 힘은 믿음, 믿음은 오직 말씀으로부터...그렇게 때문에 사흘 양식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말씀으로 준비하라는 것이다.) 을 준비하고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를 통해 자기 목적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여호수아의 말에도 절대적 순종을 명령하신다.              

             

 셋째, 2장에서는 그 땅을 정탐케 한다. 12명 대신 하나님께 집중된 2명의 사람을 보낸다. 

             그리고 라합을 만나게 한다. 정탐꾼이 가서 한 일은 라합을 만나서 함께 머물고 라합을 말대로 사흘을 산에서 피신했다가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2명의 정탐꾼은 라합을 통해서 여리고성의 상태를 보았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았다. 

             처음 12명을 보냈을 때를 기억하라. 그들은 좋은 땅을 보았고 열매를 보았다. 그 다음 본 것이 그 나라 사람의 장대함과 자기 자신을 보았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함께 보았지만 다수는 부정적인 것 때문에 좋은 것을 포기한다.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은 항상 부정이 긍정을 이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메시지, 약속, 보장을 발견한다.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계산에 밝은 사람은 오히려 신앙에 실패하는 자들이 많다. 

             믿음은 여러 사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이다. 

             말씀은 늘 해석이 동행한다. 

             누구에게나 말씀이 주어져 있지만 그 말씀을 붙잡는 자만이 레마를 경험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3장에서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다. 

             

  • 1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광야의 역사는 새벽의 역사다. 새벽에 홍해가 갈라지고 새벽에 만나가 내리며 새벽에 요단을 건넌다. 새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성실한 믿음 가운데서 역사된다. 게으른 자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자는 곧 부지런한 자이다. 움직이는 자이다. "깨어 일어나"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고이다.  아침형 인간....한 때 유행했던 베스트셀러. 거기에서 말하는 것-> 인간의 싸이클이 자연의 싸이클에 맞추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는 것이 자연의 싸이클이고 곧 인간의 싸이클이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이 싸이클을 깨어버린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시작해서 육체적으로도 건강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 2절: 사흘 후에- 계속적으로 사흘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신앙은 계속적으로 나를 죽이는 것이다. 사도바울 처럼 날마다 죽지 아니하면 또 넘어지고, 불평하고, 절망한다. 

 

  • 3~5절: 언약궤를 따르라. 거리를 유지하라 (이천규빛: 약 1km) : 이전에 가보지 못한 너희의 행할 길을 알게 하리라.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앞서지도 뒷서지도 말고 말씀을 앞에 두고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멈추라 하면 멈추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은 항상 현재형으로 받는 것이다. 나아가라 하신 분께서 갑자기 멈추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이제 떠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이 변화 무쌍한 세상에 변함없는 말씀이 변화한 것처럼 감각되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너희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과소평가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이럴꺼야 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대를 넘어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 6절: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실 수 있도록 

-> 언약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임재, 그가 앞서가게 하라. 자신이 먼저가지 말라. 말씀을 따라 가라. 기다리고 인내하라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이라. 

                 백성들에게: 성결하라.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진군하라. 

                 

  •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땅에 가기 위에서는 나의 장막을 떠나야 한다. 내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고 있는 내 안의 안식처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말씀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중생 혹은 칭의)이라고 생각하며,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자

(1) 구원받을 때를 기억해 보자.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삶은-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거기에는 용기도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에 발을 담궈야 하는 제사장들의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용기말이다. 그리고 그 후 할례받은 백성처럼 하나님의 태초의 계획 "나로 성결케 되길 원하신" 그 거룩의 목적을 쫒아 행해야 한다. '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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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향한 세가지 명령 (여호수아 1장 10-18절)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세가 죽고 영적, 육적 혼란기를 맞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먼저 여호수아를 부르신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70여명의 가족으로 시작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서의 400여년간의 시간동안 그 숫자가 민족을 이룰 정도로 급증했고 출애굽할 때 따라나온 허다한 잡족까지 합하면 200만명의 숫자입니다. 

그들이 집도 없고, 땅도 없이 광야에서 40여년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만 모면 모세라는 뛰어난 영적인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40일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큰 방황과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살펴보면 그의 리더십의 영향력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그것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바로 앞둔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모세가 있어도 감히 갈 수 없었던 땅을 지금 모세 없이, 건너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여호수아를 일으켜 그에게 영적인 부흥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 처럼 우연한 일이 아니라 모세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마치 다윗을 왕으로 훈련시킨 것처럼 차곡차곡 훈련 시킨 결과였습니다. 

 

  • 여호수아를 불러 그에게 "일어나" "건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수 1:2) - 동사로 주어지는 명령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실 때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건너 - 두려움이라는 장벽, 요단강이라는 장벽, 여리고라는 장벽, 하나님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 모든 장벽을 넘으라고 하십니다 

가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 - 주저 앉지 않고, 몸을 움직여 가는 길. 

예배를 쉬지 말고, 기도를 쉬지 말고, 말씀을 쉬지 말고 가는 길. 

 

이제 그를 통해 너의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움직여 내 발로 밟는 땅, 내가 걸어온 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세 번이나 걸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과 감정에 요동하지 말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야로 떠나지 않도록 하라 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함을 체험할 적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평강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한영혼을 일으키사 그 영혼을 통해 절망에 빠져 있는 한 공동체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작은 불꽃 하나에서부터 불길이 번지게 하십니다. 

한 영혼을 통해 가정을 일으키시고, 한 영혼을 통해 교회를 일으키시고, 한 영혼을 통해 민족을 일으키십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신 세가지 말씀은 무엇입니까? 

1. 양식을 준비하라 (11절) 

2. 요단 동편에 거하게 되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지파에게 "가서 그들을 도우라" (14절) 

3. 순종하라, (17-18절) 

 

1. 양식을 준비하라 

그 동안의 양식 - 만나, 매일 같이 내리는 하늘의 양식 

                          준비할 필요도 없었고, 준비해서도 안되었습니다. 매일 그 날의 양식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매일의 경건)  

                          그런데 사흘 동안 요단을 건널 때에는 이 준비된 양식이 없으면 건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말씀- 일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말씀) 

                          마치 홍해를 건너기 전 무교병을 먹도록 하여 유월절을 준비시킨 것처럼 이번에도 만나를 대신하여 3일 동안 견딜 수 있는 양식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큰 일을 시작하시기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준비하라" "네 의복을 깨끗케 하라" "거룩하라"등의 특별한 말씀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3일간의 양식은 무엇일까? 나에게 준비시키는 양식은 무엇일까? 요단을 건너기 위해 준비해야할 양식은 무엇인가? 양식은 매일같이 동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별한 일을 위해 예비하신 특별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에게 주신 것이지만 특별히 나에게 주신 말씀이 곧 레마, 나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때에 준비된 말씀이 있습니다. 깨어있는 자, 들을 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는 그 말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3일을 견딜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2. 가서 그들을 도우라 

르우벤, 갓 지파, 므낫세 반지파의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고 요단 동편의 땅에 정착한 민족이었습니다. 

민수기 32장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옵니다. 

(민 3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민 32:5)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많은 가축 떼를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똑같이 광야 생활 가운데 이었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은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농사 짓는 땅이요, 자기들은 가축을 가꾸어야 하기 때문에 요단 동편의 땅이 좋기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대신 이곳에 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자기가 지금 가진 것, 자기 환경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그들 보기에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끌고 있는 모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극히 이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각자 자기 보기에 좋은 곳에 남고자 하면 결국 남는 것은 힘없는 자, 다른 계획과 소망이 없는 자들만 남는 것입니다. 

 

모세가 불같이 화를 냅니다. 

(민 32: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민 32: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모세는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 그들이 합리적인 생각, 자기 중심적이 생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다 준지를 상기시킵니다. (8절~14절) 

40인의 정탐꾼을 보내었을 때에 그들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을까? 

그 근본적인 원인이 가축이 너무 많아 그 땅 자체를 원하지 않은 것을 밝혀냅니다. 그들은 가축을 키울 땅을 구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 자체를 반대한 것입니다. 

 

분노하는 모세에게 이들은 약속합니다. 

[민 32:16-19]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이들이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2장에 보면 이들은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켜서 여호수아와 다른 족속들의 칭송을 받으며 당당하게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가나안 땅 밖에서 머물면서 그들의 왕국을 이루고자 했던 그들은 결국 그들의 분리된 예배처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다가 우상숭배를 통해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합니다. 

왜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에 가려고 하지 않고 요단 동편에 머무르려 합니까? 

가축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광야의 삶 속에서 남들보다 가축이 많은 고로 가나안의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광야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땅에서의 축복을 따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단 동편을 선택한 세 족속에게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네 형제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너희들이 먼저 가서 도우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 땅의 복을 사모하는 자들과 영원한 복을 사모하는 이들이 섞여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리더자는 이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순종하라. (16-18절) 

무엇을 말하던지 들을 것이요, 어디를 가라 하던지 가겠나이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순종을 서약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그들의 말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순종에는 교만함과 어리석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절)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의 영어 번역은 "Just as we fully obeyed Moses, so we obey you" 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기를 fully하게, 온전히, 완전히, 넘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했으며 모세를 죽이고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순종한 것 만큼만 당신에게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전제가 있습니다. "Only may the Lord your God be with you as he was with Moses" 

오직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할 때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들을 애굽에서 부터 인도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할 때에만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광야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순종 서약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서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하신 말씀과 이들의 입술을 통해 들리는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는 같은 말이지만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든 결국 여호수아에게 요구하는 것은 강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승리요 이스라엘의 승리요, 바로 우리의 승리인 것입니다. 

 

질문) 

1. 난 하나님의 말씀하신 가나안을 소망하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정, 내 가축들을 위한 땅을 더 원하지 않는가? 

2. 난 공동체를 위해 먼저 가서 싸우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3. 순종했는가? 순종하는가? 순종 할 것인가? 내 순종의 정도는 어디까지일까?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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