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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4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1.09 여호수아 4장 - 두 곳에 세운 돌
  2. 2016.08.20 여호수아 4장 - 두 개의 기념비

여호수아 4장 - 두 곳에 세운 돌 

 

1. 홍해와 요단강 

 

출애굽 여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개의 큰 강을 건너게 됩니다. 

하나는 출애굽 할 때에 건넜던 홍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본 요단강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으로 볼 때에 홍해를 건너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얻는 중생이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화의 문을 건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도 홍해와 요단강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구속론적 관점, 구속론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이러한 구속론적 해석을 중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역사였습니다. 

홀해를 건넌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구원의 사건, 세례의 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삶, 중생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바로 성도의 성화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성화되지 못하면 불평하다 끝납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한채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신앙의 참 맛을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은 성화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이 은혜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중생의 강을 넘어 성화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홍해는 일생에 한 번 건너지만 요단강은 우리가 매일 건너가야 하는 강입니다. 

성경에도 홍해에 대한 사건은 단 한번 기록되어 있지만, 요단강에 대한 사건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이외에도 엘리야, 엘리사때 옷을 치며 건넌 사건, 나아만 장군이 문등병을 고치게 되는 사건,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는 사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 등 세례의 의미와 더불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거듭남의 완성이 홍해의 물세례를 거쳐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2. 두 곳에 세운 기념비 (오늘 나눌 4장) 

요단을 건넜습니다. 

앞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성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말씀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요단을 건너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십니다. 

"백성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선 곳에서 열 두 돌을 가져다가 오늘밤 유숙할 그곳에 두게하라." (수 4:2-3)

 

그리고 6절에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표징이라는 것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이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한결같이 "표징"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적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의 표징이고, 물고기가 사람 낚는 물고기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듯이 돌들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이라는 증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표징입니까?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단물이 여호와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때의 요단 물은 어떤 물입니까? 생명을 삼키는 물입니다, 고난의 물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그 고난이 어디서 끊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고난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인생의 파도가 일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낙망하고 넘어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해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말씀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에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유혹이 역사합니다. 

사람을 기대다가 실망하게 되고, 돈을 의지하다가 탐욕때문에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은 형식적이고 남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처럼 되다가 급기야 믿음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가로막는 모든 강과 장벽을 말씀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이것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볼 때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2절부터 이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2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으니" (23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4절) 

 

모든 표징은 우리로 하여금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삶을 통해 알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은 제사장들이 요단강 사이에 서있는 그 자리에서 돌을 취하여 그들이 유숙하는 길갈이라는 땅으로 와서 거기에 돌을 세우고 기념하게 하신 것인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또 한 무더기의 돌을 세웁니다. 

 

9절을 봅니다. 

(수 4: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한 돌입니다. 

이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 요단강 중심에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를 상상해 봅시다. 

이 광경을 무엇을 보여줍니까? 

 

9절에 보면 그 돌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증거하고 있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차면 그 돌은 전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그 장소, 언약궤가 서 있던 장소에 돌을 두어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왜 여호수아는 요단 물밑에 보이지도 않는 돌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까? 

강물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 - 옛생활은 장사지내고 마음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세기라. 

그렇지만 물이 마르면, 은혜가 마르면 다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돌..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은 우리의 죄입니다. 

 

  •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는 가나안, 홍해, 요단강, 법궤, 성막, 계명, 기념비와 같은 수 많은 신앙의 상징물들이 등장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신앙의 상징물들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더불어 바라보았습니다. 

 

물은 고난임과 동시에 세례이고 은혜입니다. 

물은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갈급하게 합니다. 

물에 빠지면 허우적 거리고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물을 건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물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곧 은혜로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한 물은 세례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 애굽의 나, 광야의 나는 죽고 이제 이젠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처럼 거듭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두 번의 강을 건넙니다.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첫 번째 세례, 바로 중생의 강입니다. 

 

두 번째는 광야를 통해 예전의 나를 죽이고 비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성화의 강, 우리 성결교회에서 말하는 두 번째 세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할 때에 일어납니다. 

 

요단강을 건너면서 여호수아는 두개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는 요단강 가운데 묻어두었던 숨겨진 기념비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내 옛 죄와 옛 자아를 죽이고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게 합니다. 

이돌은 은혜가 덮이면 항상 가리우지만 은혜가 마르면 다시금 튀어나와 우리를 자꾸만 옛자아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길갈에 세운 돌은 구원의 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날 살리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건너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여기로 인도하셨다는 찬양의 돌, 확신의 돌, 영광의 돌입니다. 

영광스러운 돌입니다. 산돌입니다. 

 

요단의 강을 건너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기억해야 할 두 가지 기념비, 요단강 가운데 십자가와 함께 장사지낸 우리의 죄, 우리를 새롭게 한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길갈에 세운 기념비, 오늘의 우리,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인도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통치의 기념비가 항상 우리의 심령안에 새겨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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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4장 - 두개의 기념비

1. 홍해와 요단강 


출애굽 여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개의 큰 강을 건너게 됩니다. 

하나는 출애굽 할 때에 건넜던 홍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본 요단강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으로 볼 때에 홍해를 건너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얻는 중생이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화의 문을 건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해석도 홍해와 요단강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구원을 출애굽으로 보느냐, 가나안입성으로 보느냐도 많은 논쟁이 되는 부분입니다. 

출애굽으로만 본다면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면서도 동시에 고된 광야생활 가운데 불평하고, 원망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구원의 모습에 대해 회의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한정시켜서 본다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자들은 구원에서 벗어난 자들인가? 하는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도 결국 구원에 실패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역사였습니다. 

홀해를 건넌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 한 것이 구원입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삶, 중생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바로 성도의 성화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성화되지 못하면 불평하다 끝납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한채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신앙의 참 맛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냥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열가지 재앙으로, 홍해도 건너게 하셨는데 

광야 훈련소에서는 비록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만나와 매추라기로 계속 먹이고 보호하시지만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십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곳에서 순종으로 성막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며 

오직 순종함으로 훈련하여 땅을, 기업을,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성화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이 은혜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성화의 중생의 강을 넘어 성화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홍해는 일생에 한 번 건너지만 요단강은 우리가 매일 건너가야 하는 강입니다. 

성경에도 홍해에 대한 사건은 단 한번 기록되어 있지만, 요단강에 대한 사건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이외에도 엘리야, 엘리사때 옷을 치며 건넌 사건, 나아만 장군이 문등병을 고치게 되는 사건,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는 사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 등 세례의 의미와 더불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거듭남의 완성이 홍해를 거쳐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한 전도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오클랜드에서 학생부를 담당하고 계신데 아이들이 신앙생활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이야기해도 지루해 합니다. 심심할 것이라 합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한다면 나중에 죽기 전에 열심히 할 것이라 말합니다. 


아이들 뿐만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나님, 천국과 같은 말을 들으면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힘이 나는 것이 아니라

또 저소리여, 아이 지루해, 천국은 심심할꺼야...이런 생각들을 가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맛을 보지 않아서입니다.

가나안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2. 두 곳에 세운 기념비 

요단을 건넜습니다. 

앞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성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말씀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요단을 건너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십니다. 

"백성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선 곳에서 열 두 돌을 가져다가 오늘밤 유숙할 그곳에 두게하라."


표징이라는 것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이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한결같이 "표징"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적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의 표징이고, 물고기가 사람 낚는 물고기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듯이 돌들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이라는 증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표징입니까?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단물이 여호와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때의 요단 물은 어떤 물입니까? 생명을 삼키는 물입니다, 고난의 물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그 고난이 어디서 끊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고난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인생의 파도가 일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낙망하고 넘어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해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말씀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에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유혹이 역사합니다. 

사람을 기대다가 실망하게 되고, 돈을 의지하다가 탐욕때문에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은 형식적이고 남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처럼 되다가 급기야 믿음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가로막는 강으로부터 말씀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이것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볼 때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2절부터 이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으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표징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알고 그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은 제사장들이 요단강 사이에 서있는 그 자리에서 돌을 취하여 그들이 유숙하는 길갈이라는 땅으로 와서 거기에 돌을 세우고 기념하게 하신 것인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또 한 무더기의 돌을 세웁니다. 


9절을 봅니다. 

(수 4: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한 돌입니다. 

이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 요단강 중심에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를 상상해 봅시다. 

이 광경을 무엇을 보여줍니까? 


요단강을 절대로 우리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장벽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큰 벽, 죄의 벽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그 한가운데에 있으니 물이 갈라지고 벽이 사라졌습니다. 

광야와 가나안 사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의 한 가운데 모든 인간의 죄를 담당하고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요단강 한 가운데 서 있는 언약궤는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곳에 돌을 세우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 죽음에서 날 구원했음을, 그로 말미암아 내가 마른 땅을 건넜음을 기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9절에 보면 그 돌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증거하고 있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차면 그 돌은 전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그 장소, 언약궤가 서 있던 장소에 돌을 두어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왜 여호수아는 요단 물밑에 보이지도 않는 돌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까? 

강물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 - 옛생활은 장사지내고 마음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세기라. 

그렇지만 물이 마르면, 은혜가 마르면 다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돌..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은 우리의 죄입니다. 


  •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는 가나안, 홍해, 요단강, 법궤, 성막, 계명, 기념비와 같은 수 많은 신앙의 상징물들이 등장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신앙의 상징물들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더불어 바라보았습니다. 


물은 고난임과 동시에 세례이고 은혜입니다. 

물은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갈급하게 합니다. 

물에 빠지면 허우적 거리고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물을 건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물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곧 은혜로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한 물은 세례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 애굽의 나, 광야의 나는 죽고 이제 이젠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처럼 거듭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두 번의 강을 건넙니다.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첫 번째 세례, 바로 중생의 강입니다. 


두 번째는 광야를 통해 예전의 나를 죽이고 비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성화의 강, 우리 성결교회에서 말하는 두 번째 세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할 때에 일어납니다. 


요단강을 건너면서 여호수아는 두개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는 요단강 가운데 묻어두었던 숨겨진 기념비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내 옛 죄와 옛 자아를 죽이고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게 합니다. 

이돌은 은혜가 덮이면 항상 가리우지만 은혜가 마르면 다시금 튀어나와 우리를 자꾸만 옛자아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길갈에 세운 돌은 구원의 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날 살리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건너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여기로 인도하셨다는 찬양의 돌, 확신의 돌, 영광의 돌입니다. 

영광스러운 돌입니다. 산돌입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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