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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2.19 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2. 2016.02.06 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지난 시간엔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부터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책망받는 장면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1. 예수살렘과 갈릴리, 그리고 두로와 시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제사장 등 당시 모든 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도 활동의 무대를 미천하고 소외된 시골 갈릴리로 삼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헐벗고, 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곳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상하고 찢긴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연약하고 상처입은 심령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곳 갈릴리에서 12제자 중에 11제자를 이 곳 갈릴리 출신으로 뽑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살렘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지내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천하디 천한 상놈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도 씻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면서 비아냥 거리고 헐뜯습니다. 지금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이 누구인가, 말씀을 듣고 은혜를 간구하며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는데, 자기들이 가진 전통과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들이 온 목적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앞에두고 헐뜯고 비난하고 그러다가 책망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 기준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해 실컷 비판만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에 한이 맺혔는지, 집에서 받은 상처, 직장에서 받은 상처까지 다 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혜 받으러 왔다가 오히려 더 기분 상해져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을 잃어버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은혜 받으러 왔다가 책망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간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땅이었고,  유대인들이 여행을 삼가는 곳이었습니다. 공생애를 걸쳐서 예수님의 주 무대는 갈리리 지방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 여인을 만나기 위해 두로와 시돈 땅, 갈릴리 보다도 더 멀고, 소외되고,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어둠의 땅,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들이 사는 땅, 우상이 가득한 땅, 귀신들이 역사하는 그런 땅에 지금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31절에 보면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인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감히 가지 않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땅으로 가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지역은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비옥한 골짜기와 부유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곳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 문명의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지식적으로도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헬라의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에비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들이 보기에는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앞에 있어도 신분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을 멸시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적으로는 대단할 지 모르지만 이방인이 보기에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갈릴리 출신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입니다. 식민지 국가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하층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오직 딸을 낫게 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조차 그렇게 비난 받던 예수를 수로보니게의 귀 부인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간구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흔히 듣는 얘기가 무엇입니까? 

설교 듣다가 상처 받았다. 교회 갔다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았다. 

그래서 시험에 들고 상처받고 교회를 나오질 않습니다. 이유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만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 자존심에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지키러 교회 오는 것 아닙니다. 

자존심 세우려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 은혜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자존심 세우면서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그러면서 "내가 교회까지 나와서 이런 대접 받아야 하나?"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니까 어떤 대접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수모를 영생과 바꿀 수 있습니까? 

자존심은 집에서 세우고 교회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딸을 고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자세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다른, 나아가 제자들과도 다른 여인의 태도입니다. 

그녀는 귀부인인데도 불구하고 갈릴리 출신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립니다. 이성적인, 사회적인 기준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은혜 주는 자가 누구인가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해도 전혀 요동치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이 본문은 여인의 믿음,  즉 여인의 겸손함과 간절함에 초첨을 맞추어 설교 되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관점을 제자들에게 맞추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마치 제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것은 예수님이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마가요한이 나중에 제자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이지요. 

두로와 시돈 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목적- 이 여인의 딸을 고치러...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숨어 있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 

억지로 이방 땅에까진 왔지만 그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것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차별을 받았지만 그들 역시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 


거룩해지는 일에 힘쓸 때에 짓게 되는 잘못 

- 금긋기, 구별하기, 난 다르다는 정체성... 

난 너희와 다르다. 너희는 더럽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볼 때 더러운 자들이었고 제자들이 두로와 시돈 땅의 이방인을 볼 때에 더러운 자들이었다. 


일본의 차별 속에서 고난을 당해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한국 땅에 들어온 동남아나 러시아 사람들을 얼마나 차별하고 착취하는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이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인가? 혹시 제자들이 품고 있던 생각은 아닌가?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 앞에 엎드린 여인을 보며 속으로 품었던 정죄의 마음, 교만한 마음, 선긋는 마음, 구별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가? 

자기 자신들도 바리새인들의 차별을 받았으면서도 똑같이 이방 여인을 멸시하는 제자들의 마음.... 

이렇게 다른사람들과 구별하며 자신을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시는가?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은혜는 선긋지 않는 것이다. 품어 주는 것이다. 받아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을 사랑하고 도와줘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죄있는 자가 돌로치라. 하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갈릴리를 넘어 사마리아, 두로와 시돈, 이방지역까지 다니시면서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보여 주신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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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지난 시간엔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부터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책망받는 장면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1. 예수살렘과 갈릴리, 그리고 두로와 시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제사장 등 당시 모든 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도 활동의 무대를 미천하고 소외된 시골 갈릴리로 삼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헐벗고, 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곳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상하고 찢긴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연약하고 상처입은 심령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곳 갈릴리에서 12제자 중에 11제자를 이 곳 갈릴리 출신으로 뽑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살렘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지내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천하디 천한 상놈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도 씻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면서 비아냥 거리고 헐뜯습니다. 지금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이 누구인가, 말씀을 듣고 은혜를 간구하며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는데, 자기들이 가진 전통과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들이 온 목적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앞에두고 헐뜯고 비난하고 그러다가 책망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 기준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해 실컷 비판만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에 한이 맺혔는지, 집에서 받은 상처, 직장에서 받은 상처까지 다 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혜 받으러 왔다가 오히려 더 기분 상해져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을 잃어버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은혜 받으러 왔다가 책망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간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땅이었고,  유대인들이 여행을 삼가는 곳이었습니다. 공생애를 걸쳐서 예수님의 주 무대는 갈리리 지방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 여인을 만나기 위해 두로와 시돈 땅, 갈릴리 보다도 더 멀고, 소외되고,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어둠의 땅,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들이 사는 땅, 우상이 가득한 땅, 귀신들이 역사하는 그런 땅에 지금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31절에 보면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인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감히 가지 않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땅으로 가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지역은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비옥한 골짜기와 부유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곳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 문명의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지식적으로도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헬라의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에비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들이 보기에는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앞에 있어도 신분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을 멸시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적으로는 대단할 지 모르지만 이방인이 보기에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갈릴리 출신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입니다. 식민지 국가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하층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오직 딸을 낫게 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조차 그렇게 비난 받던 예수를 수로보니게의 귀 부인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간구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흔히 듣는 얘기가 무엇입니까? 

설교 듣다가 상처 받았다. 교회 갔다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았다. 

그래서 시험에 들고 상처받고 교회를 나오질 않습니다. 이유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만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 자존심에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지키러 교회 오는 것 아닙니다. 

자존심 세우려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 은혜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자존심 세우면서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그러면서 "내가 교회까지 나와서 이런 대접 받아야 하나?"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니까 어떤 대접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수모를 영생과 바꿀 수 있습니까? 

자존심은 집에서 세우고 교회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딸을 고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자세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다른, 나아가 제자들과도 다른 여인의 태도입니다. 

그녀는 귀부인인데도 불구하고 갈릴리 출신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립니다. 이성적인, 사회적인 기준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은혜 주는 자가 누구인가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해도 전혀 요동치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이 본문은 여인의 믿음,  즉 여인의 겸손함과 간절함에 초첨을 맞추어 설교 되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관점을 제자들에게 맞추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마치 제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것은 예수님이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마가요한이 나중에 제자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이지요. 

두로와 시돈 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목적- 이 여인의 딸을 고치러...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숨어 있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 

억지로 이방 땅에까진 왔지만 그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것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차별을 받았지만 그들 역시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 


거룩해지는 일에 힘쓸 때에 짓게 되는 잘못 

- 금긋기, 구별하기, 난 다르다는 정체성... 

난 너희와 다르다. 너희는 더럽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볼 때 더러운 자들이었고 제자들이 두로와 시돈 땅의 이방인을 볼 때에 더러운 자들이었다. 


일본의 차별 속에서 고난을 당해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한국 땅에 들어온 동남아나 러시아 사람들을 얼마나 차별하고 착취하는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이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인가? 혹시 제자들이 품고 있던 생각은 아닌가?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 앞에 엎드린 여인을 보며 속으로 품었던 정죄의 마음, 교만한 마음, 선긋는 마음, 구별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가? 

자기 자신들도 바리새인들의 차별을 받았으면서도 똑같이 이방 여인을 멸시하는 제자들의 마음.... 

이렇게 다른사람들과 구별하며 자신을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시는가?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은혜는 선긋지 않는 것이다. 품어 주는 것이다. 받아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을 사랑하고 도와줘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죄있는 자가 돌로치라. 하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갈릴리를 넘어 사마리아, 두로와 시돈, 이방지역까지 다니시면서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보여 주신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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