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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씨름인가?  (창세기 32장 22-32절) 

 

서양과 동양, 그리고 유대인들마다 각각 인간의 정의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각 문명의 가치관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인간을 사람 인(人) 자와 사이 간 (間) 자를 써서 관계를 중시합니다. 사람 인자 하나를 보아도 두 존재가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을 본따 만든 상형 문자이며 여기에다가 사이 간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사람들 사이라는 사회성, 공동체를 중시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유학와서 명어로 쓰거나 말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 - 우리집, 우리 엄마, 우리 교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라는 말 속에 나를 숨겨서 표현하는) 누가 그랬데....

 

라틴어, 영어권에서 인간 -human- humus - 흙, 먼지.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성경에서 근거한 어원이지만 결국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덧없음, 먼지, 허무주의, 니힐리즘... 

히브리인- 인간- Ish (욕망, 불덩이) - 인간은 곧 육망하는 존재. 

 

이 욕망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이다. 욕망은 죄의 근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신앙의 근원이기도 하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선악과의 해석을 요한일서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잘못된 욕망은 곧 남의 것을 탐하는 탐심이고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교만이고 곧 죄의 근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정의 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하면서 바라는 말씀에 근거한 선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욕망을 Lust, greed등을 표현하면 죄와 연관되지만 desire, hope등으로 표현하면 선한 갈망이 된다. 

그리고 그 선한 갈망 중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큰 갈망은 곧 passion이다. Passion은 그 의미가 아주 강한 열정, 열망을 가리키는데 욕망 중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이다. 삶을 전부 불태울 수 있는 욕망이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passion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뜻한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 제목이 그 의미를 보여준다. 

 

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욕망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욕망, 열망이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열망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볻받으며 따르는 삶 역시 passion 이다, 거룩한 열망을 가지는 삶이다. 

 

이 욕망에서 시작된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이스리엘 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ISh (인간, 욕망) + Rah (보다) + El (하나님)의 합성어이다. 

우리말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나 야곱처럼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이겨야지"하는 마음으로 마치 하나님을 이기려는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이해에서 근거한 잘못된 표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을 본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표현했을까? 

당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32장 30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Ish를 사람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란 의미이지만 어원 그대로 욕망,갈망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영성적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자, 하나님을 닮기를 갈망하는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닌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다. 

지금도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도 야곱을 신앙의 모델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위대한 왕 다윗, 모세와 엘리야 같은 지도자는 존경해도 자기 롤모델이 야곱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야곱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 장면이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만들어 진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와 씨름하신다. 이 씨름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가다듬이 가시는 씨름이 시간이고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우리의 옛 성품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한 씨름이다. 힘겨운 씨름이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지만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온 우주 만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와 씨름하시고 우리는 안변할려고 불순종하려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면케 하기 위해서 씨름하신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바로 우리 안의 죄된 본성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야심을 이루는 삶이었다.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잘못된 욕망에 이끌린 자. -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버린다. 자기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이지만 거래를 하는 것이다. 가족끼리의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야심을 이루는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도 속이고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도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진실이 밝혀져서 창피한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모사를 행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상 야곱의 삶이 이러했음을 말하며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복을 얻기 위해 남도 속이고 때로 속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하는 그러한 삶을 그럴수도 있다하며 합리화하지만 이것은 마귀적인 발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져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갔는데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는데 라반의 속임수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남을 속이면서 산 사람은 결국은 그 값을 이 땅에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끝을 보면 드러납니다. 

이 때부터 야곱은 라반과 속고 속이는 반복적인 삶의 전쟁을 치룹니다. 가축을 편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자 급기야 라반은 야곱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야곱은 다시 라반의 집을 떠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누가 있습니까?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꾀를 부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가는 곳마다 적이 있습니다. 편히 쉴만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적을 염려해야 합니다.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에 악인을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꾀부리는 자를 악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꾀부리는 자의 대표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악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그 사기꾼 같은 삶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내가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그대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입니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제 3의 거처를 삼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찌 이방인과 같이 살자고 떠날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왜 나누어 보냅니까?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 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냅니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가진 것을 다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고도 자기 목숨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계속 두려움이 남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보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지 할 데 없자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럴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와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염치없어도 다시 부르기가 창피해도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야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결코 천사를 놓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마저 떠나가면 더 이상 소망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온몸이 져러오고 아파와도, 살사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내가 엉터리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서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응답해주십니까? 

우선은 내가 자격없고 엉터리임을 인정할 때입니다. 야곱은 이제 가진 것도 없고 아무 자격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육탄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나옵니다. 돈도 없고 상의할 사람도 없고 하니까 최후의 보루로 결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질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셨습니다

야곱은 여지껏 누구에게 진 적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왔던 것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렇게 형 에서도 이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겨서 축복을 받았고 라반에게도 이겨서 두 아내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 아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첫째 이름을 바꿉니다. 사기꾼을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신비의 원리가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이기려고 살았던 야곱이 알고 보니 다 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형을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것을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자였고 라반을 이겼다고 했지만 도망하여 피해다니는 그야말로 패자 중의 패배자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기려면 항상 지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승리자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니까 하나님께서 날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 길들여 진자. 말씀으로 훈련된 자. 

순간만 하나님 앞에 굴복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약하게 해서 계속적인 연약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패역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대개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야곱은 환도뼈가 상해서 평상을 절뚝발이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뚝 절뚝 걸어다니면서 매일 순간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시금 의지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니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남을 이기려고,  지는 것 같을 때는 한 없이 초라하게 느끼고 원망함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고치고 싶은 것 - 성형 수술 하듯이,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필요한 부분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이름을 바꾼다. 내 본질을 바꾸신다. 

나를 부모의 유전이나, 세상의 풍습에서 떼어 하나님의 가지에 접붙인 자가 되게 하신다. 

 

https://youtu.be/p8xqOlamQDQ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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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3-16절 영향력

 

 

한국 사회, 한국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같은 목사님들이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게 하는 데 영향을 준 1세대 목사님들이라면 순복음교회와 영락교회, 조용기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 특성이 다른 목사님께서 70-80년대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이른바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하는 옥한음 목사, 하용조 목사, 홍정길 목사, 이동원 목사님 같은 분들이 한국교회의 롤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앞의 두 목사님이 부흥회 중심, 기도원 중심의 오순절 운동파와 예배 중심, 성경 중심의 약간은 상반된 한국교회 영성의 두 측을 대표하는 분들이었다면 복음주의 4인방은 청년 시절 CCC와 같은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훈련 받아 미국 유학도 하시고 서로 가깝게 교제하면서 미국교회들과도 상호 교류하면서 각각 제자훈련, 열린예배, 가정사역, 찬양예배등과 같은 목회적인 다양한 모습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분들 중 하용조 목사님, 옥한음 목사님은 소천하시고 나머지 두 목사님은 은퇴를 하시어서 그 분들의 뒤를 잇는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거나 영향력을 끼치는 뚜렷한 목사님들이 나오지 않고 한국교회 자체가 주춤하며 위기를 느끼고 있는 상태가 현재의 상태이지요.

지난 주에 이른바 복음주의 4인방 중에 가장 늦게 은퇴를 하셨던 홍정길 목사님이 한 모임에서 목사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목사로서의 삶을 되돌아 보시면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는 목회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더 깊이 목사로서의 삶에 대해 정리하며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그러면서 자신을 한국교회의 한 실패한 목사의 단면을 보여 준다며 뉘우치셨습니다.

“속지 말라. 좋은 생각을 한다는 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론 나쁜 사람이 많다”며 “특히 기독교인들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인다. 말을 멋지게 하고 굉장한 글을 쓴다. 그런데 그 삶에 실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언제나 진리는 예배에만, 말에만, 신학 속에만 있지 실제 삶 속에는 없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수치고 또 나의 수치”라고 고백했다. 삶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원로가 된 그의 고민, 누구보다 치열하게 목사의 길을 걸어온 그의 자기 성찰이었다.

나는 예수 믿기만 하면 이 땅에 천국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민족복음화에 매달렸다천만 성도를 달라 했고, 이 나라 59천 마을에 교회를 세워 달라고 간구했다. 보이지도 않았던 서쪽 대륙, 중국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런데 마침내 이것이 이뤄졌다. 마을마다 교회가 섰고 중국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는그래도 교인들의 삶은, 목회자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 예수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참 열심히도 했다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의 삶에 엄청난 지식들이 쌓여갔지만 삶은 그대로였다

결국 그 목사님이 삶의 변화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자녀 교육이었다. 그는내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이 후회는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며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저 세상에 나가 승리할 수 있겠나. 부모밖에 답이 없다. 바른 신앙을 가르쳐 바른 삶을 살게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생을 목회를 하다가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해 기도한 대부분의 것을 이루고 자신의 목사로서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린 결론이 나는 목사로서의 삶이 부끄럽다. 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조차, 자녀에게 조차 떳떳하지 못한, 온전히 내 신앙을 전수해주지 못한 삶을 살았다며 자책하는 모습에서 진실하지만 후배 목사로서 안타까운 마음도, 과연 나는 어떤가하는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의 내린 결론, 결국은 내 가장 가까운 사람, 내 가족, 내 자녀에게만이라도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신앙을 전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최소한이면서도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결론 지은 모습에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TV가 우리 삶에 깊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생각에는 어느덧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속의 본질보다 보여지는, 이미지에 더 신경을 쓴 것이지요. TV에 한 번 나오려면 더 자연스러워보이게 하기 위해서 화장을 합니다. 화장을 안 한 얼굴은 카메라를 통해서 보면 초라하고 이상하게까지 보입니다. 자신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서 옷에 자신의 가치를 두기도 하고, 표정이나 말 한 마디 마디, 사람들의 모습에 비춰지는 내 모습에 더 신경을 씁니다. 대통령 선거라도 할치라면 TV 토론회를 둘러쌓고 얼마나 많은 이미지의 신경전이 펼쳐지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그러한 이미지에 속아 넘어 갑니다. 잘 생긴 사람이면 속도 착할 꺼라 생각하고 TV에 범죄자나 악한 사람으로 등장하면 그렇게 생긴 사람은 똑같이 악하고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TV가 사람들의 가치관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결국 상업적인 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영향력과 이미지의 차이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미지는 인기와 맞물리고, 짧은 시간에 당장에라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향력이라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미지에 꽂혀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미지 관리 잘해서 참 신앙인, 참 그리스도인 인 것처럼 보여지길 원합니다. 즉 좀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시간에 누구보다 아멘 잘하고 찬양 할 때 뜨겁게 뛰고, 사람들에게 늘 웃음으로 대하고, 헌금도 꼬박 빠지지 않고 하면 이보다 더 멋진 그리스도인은 없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분명 믿음의 행실로 나타나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의 중심이 잘 잡혀지지 않았으면서 그저 사람들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게 되어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사람들은 죽을 것 같이 아파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들의 시선만을 의식했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행동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문화는 유교문화입니다. 양반문화입니다. 양반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픈 채 하면 안됩니다. 소변이 마려워도 급한 채 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그냥 말하면 체면 문화, 좀 좋게 말하면 품위, 교양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체면문화, 품위 문화는 이미지 관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은혜에 배고프라 하십니다. 나의 죄를 보고 애통하라 하십니다. 체면 따지다 보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이미지로 살아가려했던 자와 영향력으로 살아가려했던 자의 대표적인 예는 사울왕과 다윗왕입니다. 사울왕은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인기 때문에 다윗왕을 질투해서 평생을 험한 곳에다 낭비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을 때마저 사람들의 눈 때문에 사무엘에게 제발 덮어달라고 애걸복걸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날 어떻게 보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죄 앞에서 사람들이 알건 말건 간에 철저히 회개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든지 왕이면서도 옷이 벗어질라 춤추며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칭찬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서 살았지만 사울은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의 인정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자신의 인격도 잃고 인기도 잃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버림받아, 급기야 스스로도 버림을 받게 되는 종말을 맞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가 쭉 다루워왔던 팔복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원리를 말씀 하신 후에 이제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 소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은 소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설탕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설탕이 없어도 살 순 있지만 소금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설탕을 많이 먹으면 이가 썩고 당뇨에 걸리지만 소금은 성인병을 낳게 하고 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 인간의 피, 채액의 성분은 바닷물의 성분과 비슷해서 염류, 즉 소금은 인간 생명의 원류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금의 역할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썩는 것으로부터 음식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소금에 절이는 것, 음식물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것은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세상에 뿌려지라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산에 올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정치가 잘못 되어서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라 말합니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말을 합니다. 부자들이 부패해서 세상이 어둡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세리와 창기, 어부, 농부들과 같은 서민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세상이 부패되는 것을 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유교는 왕이나 가장, 선생에게 주신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나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가정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통치자에게 주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통치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 문제 투성이인 애통하는 자를 불러내어 세상의 평화를 만들고 부패를 방지하고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그렇게 살면 성령께서 함께 그 일을 이루어 가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2. 소금은 부패를 방지할 뿐 아니라 맛을 냅니다. 소금이 없으면 싱거워서 먹질 못합니다.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살맛 나는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싱거운 남편을 멋과 맛을 내는 남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내의 소금역할 입니다. 싱거운 아내를 멋과 맛을 내는 아내로 만드는 것이 신앙 있는 남편이 할 일입니다. 무엇으로 맛을 내게 합니까?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를 통해서 싱거운 세상, 더러운 세상을 비추고 맛을 내어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맛을 내기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국은 자신이 죽어 세상의 맛을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그 역할을 못할 때에, 자신이 맛을 내기 못하고 세상을 비판만 할 적에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봅니다. 모든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이 저질러 놓고 왜 우리에게 뒤집어 씌우느냐? 죄된 세상을 비추고 맛을 내게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어디입니까? 교회이고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제 역할을 하는지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곳은 사찰입니다. 문화제를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갖가지 명목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찰이 부패했다고 조사하며 신문에 내고 방송에 내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기 저기서 감시합니다. 억울한 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산 위의 동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 위에 두어서 세상을 비취게 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3. 소금은 우리의 인체에서도 음식물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지만 소금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이 중요하다 해도 소금만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금의 진정한 맛은 자신의 짠 성질로 인해 다른 것을 살릴 때에 그것이 비로소 소금의 진정한 맛입니다. 즉 소금은 다른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이란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과자에 들어가면 과자의 맛을 살리고,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을 살리고, 여러 가지 음식에 들어가면 그 음식을 살립니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서 그 음식의 본래의 맛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고, 그것이 소금의 맛입니다.

만약 음식에 들어간 소금이 다른 양념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짠 맛만 나면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소금이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이 나야지 소금의 짠 맛만을 내면 이미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소금 그 자체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소금은 아무 매력도 없는 독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은 짠 맛이 아니라 살리는 맛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품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의 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 성품이 녹아져서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내가 녹지 않고, 소금 그대로의 맛을 내려고 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입니다. 자기만을 나타내는 인생, 자신만을 드러내고 인기를 누리는 인생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생은 유명세를 타는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없어도 유지되지만, 살리는 사람이 없다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는 소금과 같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존재입니다.

서울의 동교동교회 음동성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이지만 영성을 이야기하는 주요 활동가들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분이 음동성 목사님이다." 그 분의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성은 개인수련으로 끝나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확고하다. 영성의 출발과 마지막은 예수를 닮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개인주의를 버리고 12제자 공동체를 이루셔서 그 공동체를 통해 영성을 표출하셨다. ,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성도는 별거 없다. 공동체를 잘 이루면 그 성도 영성이 참 좋다 생각하면 100% 맞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사는 지역에 마을 공동체, 일터 공동체, 가정 공동체를 잘 이루는 사람이 진짜다." 그 분이 영성을 정의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소금의 사명은 그 음식을 위해 죽은 것이며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바침으로 그 사람의 좋은 것을 끌어내어주며, 그 사람을 살게 해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로 인하여 그 사람의 단점은 덮여지고 장점만 나타나게 되므로 그 사람이, 그 공동체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맛을 잃어 어디에도 쓸모없는 소금이란 바로 자기 자존심에 갇힌 사람입니다. 자존심만을 꼭 쥐고 있어서 자신이 항상 잘하고 자기 말이 항상 맞는 틀림 없는 말이며, 자신만이 항상 깨끗함을 나타내는 사람은 맛을 낼 수 없는 소금과 같이 후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여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자기 맛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결국은 음식과 함께 버려지고 맙니다. 나도 죽고 공동체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우리들의 좋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 그 자체가 악이므로 나를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시고 지혜와 힘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끌어내고 그를 높여 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내게로 향하고 내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높아지고, 나로 하여금 귀히 여김을 받게 되면, 나 자신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소금이 음식에 꼭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고 낮아지는 자가 결국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비밀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고 영향력,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비밀입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잘 났다고 자기 자존심만 지키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자라지 않은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그 인격과 사고의 세계와 보고 듣는 세계가 자라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므로 자라지 않아 매우 유치합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자라고, 나를 통해서 자식이 자라고, 나를 통해서 형제가 자라고, 나를 통해서 이웃이 자란다고 한다면 나 자신은 이미 누군가의 소금이 된 것입니다. 목자라고 한다면 목자를 통해서 반드시 성도가 자라야 진정한 소금인 것이고, 건강한 목자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힘은 자존심을 사라지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남편은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에는 자존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누구에게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귀한 여인이 되도록 받들게 됩니다. 또한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어떻게 하면 남편이 고귀한 사람으로서 어디에 가든지 존경 받는 사람이 되게 할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행복하고 고귀하게 자라게 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남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서 자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나에게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생명이므로 반드시 자라게 합니다.

자존심은 생명을 막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막습니다. 남을 막다가 나도 죽고 남도 죽고 공동체도 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을 갖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나 혼자 서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정의 자체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사람 인자는 누군가 있을 때에 내가 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세워 줄 때에 나도 서고 그도 섭니다.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자라지 못합니다. 자존심 가진 사람이 당할 것은 곧 죽음입니다. 남을 자라지 못하게 하므로 나도 자라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이 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남을 높이고 살았는지 통회해야 합니다. 빛은 비추기 위해 있습니다. 남을 비추기 위해 있는 것이지 자기 자랑을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비추는 것은 태양입니다. 그런데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멉니다. 태양의 빛은 비추어 주는 사물을 통해 태양을 아는 것입니다. 내 빛이 아무리 빛나도 비취는 대상이 없다면 내 빛은 남의 눈을 멀게 하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자신을 비추고 빛을 자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등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아, 내가 저분을 만나서 귀하게 됐어. 저분이 없으면 내가 천하게 살았을 텐데. 저분이 있어서 내가 귀하게 됐어.’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목자의 자격이 있고,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의 자격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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