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손 마른 자 (마가복음 3:1-6)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3:1)
* 언제 회당에 들어가셨는가?
1장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에 갈릴리에서부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1:16절 갈릴리 지역에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후에 이제 가버나움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거기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십니다.
안식일 날 하나님께 예배하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귀신을 고치시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고 귀신은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며 소리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처소에서 사람들은 정작 복음다운 복음을 들어본적이 없고 그 곳은 귀신이 진치고 있었으며 오히려 안식일의 주인, 회당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며 소리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렸던 안식일과 회당을 다시 회복시키신 것이지요.
성전의 회복, 잃어버린 하나님 주권의 회복.... 이것이 예수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나오는 손 마른 자의 기적은 예수의 여러 이적들 가운데 하나로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다른 특정한 의미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6절을 읽으면서 순간 멈추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의논하니라.
2장 16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2장 18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 목회자들과 수도자들
3장 6절- 목회자들과 정치가들
- 바리새인과 헤롯당
바리새인- 로마에 대항하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할 것을 기대하는 자들
헤롯당- 헤롯을 따르는 무리,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들에 순응해서 자기의 살 길을 도모하는 자들 .
세리 마태와 열심당 시몬과도 같은 관계.
그들이 지금 손을 잡았다. 도저히 이데올로기 적으로 정치적으로 손을 잡을 수 없는 자들이 손을 잡았다. 왜?
예수를 죽이기 위해...
마태와 시몬: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사역을 위해.
헤롯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예수, 바리새인의 신앙을 겉보기만 번드르하고 위선이라 하는 예수
그 예수 앞에 원수들은 동지가 됩니다. 참 사랑으로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연합하는 것이지요.
자, 지금 이 두 무리들이 회당안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는 듯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을 위협하는 자를 죽이기 위해서, 자기만을 위하여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지요.
지금도 겉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자, 예수 그 분이 아니라 단지 그 분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자, 결국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자들은 예배당 안에서 예수를 죽이는 자라는 것입니다.
- 마음의 완악함
또 하나의 사람이 회당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손마른 자입니다. 손이 마비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자.
초대 교회의 문헌을 보면 그는 석공일을 하는 자였는데 갑자기 손이 오그라들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간절히 도움이 필요하고 치료가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무리가 그 손마른 자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마른 자를 쳐다보는 것은 그를 돕거나,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 나라를 위한다 하면서 결국 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자를 바라다보면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들... 그것이 오늘 바리새인과 헤롯당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손 마른 자가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를 고치시는가 안고치시는가를 주시합니다.
예수가 그를 고치시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고 그를 고치지 않으면 도움이 필요한 자를 외면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이 이 가엾은 한 사람의 회복에 관심이 없을 때, 이것은 이 한 사람만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유대 땅에 있는 모든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 이 세상의 약자와 헐벗은 자들의 회복을 잊은 것입니다. 열방의 빛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가 '중산층 경건운동' 입니다.
하나님, 말씀, 그것이 이들의 힘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을 보고 누구나 "저 사람 왜 그러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평범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참 의미, 금식의 참의미를 그들에게 바로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처음으로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을 완악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노하십니다.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필요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에, 오직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예수만을 주시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완악하다고 탄식하시면서 노하심으로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 안식일날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그들의 완악함을 정통으로 찌르는 말. 그들은 지금 예수가 안식일날 손마른 자를 고쳐주어도 죄인이라 정죄할 것이고, 고치지 않으면 그의 복음이 거짓이라 비난할 것이지만 예수님은 고치는 것과 구하는 것이 옳지 않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그들의 완악함에 묻는 것입니다.
- 손마른 자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뚝 서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병든 자에게 치료를, 상처입은 자에게 용서와 회복을, 아무도 주목지 않은 인생을 성전의 가운데에 세우면서 그들을 주목받는 자로, 치유받는 자로, 용서받는 자로 세우는 것 이것이 교회이고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어떤 무대에 가운데에 있어본 적이 없는 자에게 교회의 가운데에 서서 하나님 자녀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예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예수님은 지금도 다시 회당에 들어가 손마른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그 일을 감당할 제자들을 찾습니다. 1장에 회당에 들어가기 전에 제자를 세우시고 이제 3장에서도 손마른 자를 고치신 후에 또 열두 제자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제자입니까? 자기 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겉으로는 예수를 따르지만 결국은 예수를 죽이는 자들이 아니라 어디 가서나 손마를 자를 찾아, 도움이 필요한 자를 찾아, 그를 주목하고 그를 예배당 한 가운데 서게 만드는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예배당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손이 말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손을 고치시어 그 손으로 하여금, 기도의 손으로, 선을 행하는 손으로 채우십니다 .
묵상 질문)
1. 존경받고 의롭다고 여기던 바리새인들이 절대 함께 하지 않았던 헤롯당과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는 모습을 통해 우리 안의 완악함을 묵상해보자. 남을 비난하거나 경계하기 위해 평소에 어울리지 않거나 마음에 맞지 않던 자들과 함께 한 경험이 없는가?
2.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면서 성전의 중심에 선 모습을 생각해보자.
내 손을 고치기 위해 내 부끄러운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 놓는 모습
그러한 그를 성전 중앙에 세우시는 주님의 모습. 논쟁이 가득한 성전 한 가운데서 치료함을 받는 모습- 이 메시지를 통해 복음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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