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굼 (마가복음 5:21-24, 35-43)
1. 들어가는 말
예전에 아이엄마가 일하러 가고 제가 한솔이 한별이를 집에서 돌볼 때 가끔씩 하던 놀이가 있었다.
눈가리고 길 찾기 (수건으로 가리고 부엌에 가서 물병 가지고 오기)
-> 그냥 시키면 안 가지고 오는데 게임하듯이 하면 재미있어 했다..
인도하는 자의 중요성
그리고 따라가는 자의 중요성
눈이 되어 인도하는 사람은 주위를 잘 살펴서 혹시라도 발 앞에 무엇이 있지는 않은지 낱낱히 알려 줘야 한다.
따라가는 사람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혹시라도 한별이가 한솔이를 믿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 큰 일이 난다. 분명 어디 부딪치거나 넘어지고 만다.
처음엔 알려줘도 '너 거짓말하는거지'하면서 안듣는다. 그런데 좀 하다보면 말을 안 듣고서는 버틸 제간이 없다. 자기는 아얘 눈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 모두 인생의 긴 여정을 눈 먼채 살아가는 인생들이 아닌가?
꼭 장애가 있어야 눈이 먼 것이 아니다. 많이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기 인생의 내일 일도 잘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죽을 날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올해 경제가 어떻게 될지, 내가 누구를 만날지, 결혼 안 한 사람은 누구랑 결혼을 하게 될지...
우리는 우리 인생길에 대해서, 한 치 앞도 모른다.
양쪽 눈을 감고 암흑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똑바로 걸으려 해도 작은 일에 우리 마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요동한다.
혹 건강이 상하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꽈당 넘어지기라도 하면 회복하기가 쉽지가 않다.
우리 인생길이 눈을 감고 집안을 헤메는 아이들 놀이와도 같은 것이다.
2. 야이로와 그의 딸
야이로라는 사람은 똑바로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사람이다. (야이로라는 뜻은 깨인자, 각성된 자, 깨우친 자, 통달한 자)
회당장이라는 것은 학교로 말하면 교장 선생님이고 교회로 말하면 수석 장로쯤 되는 분이다. 시로 말하면 시장이다. 예수님 당시의 회당은 교육과 종교, 그리고 정치까지도 관할하는 종합기구였다. 거기의 수장이니까 지역에서는 이름꾀나 떨치던 유지였다. 그 동네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 사람을 깔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야이로에게도 어김없이 꽈당넘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딸이 다 죽게 된 것이다.
병에 걸렸는지, 사고가 났는지 설명이 없다. 예수께 찾아와서 "내 딸이 죽게 되었다"고 "그 위에 손을 좀 얹어 달라"고 간구를 한다.
유대인은 결코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지 않는다. 이건 전적인 예수께서 하신 방법이다. 예수 앞에 자기 위치를 내세우지 않는다. 나아만은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러 엘리사 앞에 왔다가 엘리야가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씼으라는 말을 듣고 화를 냈다. 그런데 곧 요단강에 가서 씼을 수 밖에 없었다. 고침을 받으려 한 자가 자기 방법대로 고침틀 받기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예수 앞에 왔을 떄는 예수의 방법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어떤 거만함도 딸의 죽음 앞에서는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예수님의 손길만을 의지한다.
누구나가 평안한 삶을 원한다. 문제없는 삶을 원한다.
그런데 문제없는 삶이란 없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자아가 살아 있는 한 모든 고통이 사라질 수 없음을 말한다.
인생의 정의를 그저 고통이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죄의 결과인 고통은 이 세상에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단지 문제가 있어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뿐이다.
하루 앞, 인생의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야이로는 예수님께 매달린다.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자기 딸의 문제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안다. 그 분은 미래를 아시고 그리고 그것을 바꾸실 능력도 있으신 분이시다. 고난의 때에 누구를 의지하는가? 중요한 문제이다.
야이로의 간구를 들은 예수님이 야이로를 따라 나선다.
고통받는 자, 그리고 간구하는 자와 함께 하는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분은 외면치 않으신다.
2.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
그런데 가는 도중 갑자기 혈루증 앓는 여인이 와서 옷 가에 손을 대는 사건이 발생한다.
문학적으로 이 본문을 접근하면 이 본문은 샌드위치식 구조
(처음과 끝에 야이로와 그의 딸 이야기-> 그 가운데 혈루증 여인의 사건)
마가의 서술 방식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사건 -> 그 가운데 성전척결의 사건)
그 가운데 사건은 그것을 둘러싼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24절)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을 잇는 구절)
마을에서 가장 권위있던 그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하며 겸손히 나아가자 예수와 함께 거닐게 된다. 큰 믿음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둘러쌓이자 예수와 그가 멀어지도록 밀게 된다. 사람들로 인해, 남의 이목, 체면으로 인해 그의 믿음이 딱 거기까지임을 보여준다.
회당장과 예수님 사이를 이렇게 큰 무리들이 밀면서 떨어뜨리려 할 때 일어난 사건이 혈루증 앓는 여인의 사건이다.
지금 딸은 죽고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 딸이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데 무리들이 막고 있다. 사회적인 통념이, 고정관념이, 편견이, 체면이, 자신의 권위가 예수님과 나를 막고 있다.
야이로와 혈루증 앓는 여인: 남자와 여자, 회당장과 부정한 여인, 유명인과 무명인.
혈루증, 레위기에서는 유출병이라고도 한다. 유출병을 앓는 이는 자신도 부정하고 그를 만진 자, 그와 함께 있는 자까지도 부정하게 만드는 병이다. 그 여인이 12해를 이 병을 앓으면서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괴로움을 받았다고 하며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나 낫기는 커녕 더 심해졌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문등병처럼 격리시켜야 할 환자였다. 12년간 혈루증을 앓아 오면서 그녀는 건강도, 돈도, 사회에서의 지위도, 친구도, 여성으로서의 고귀함도, 안식도 모두 다 잃어버린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예수님 곁에만 있어도, 심지어 그 분의 옷만 만져도 그녀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용감하게 무리들 틈에 섞여서 예수님을 만진다.
그녀가 무리 틈에 끼인 다는 것, 그녀의 몸에 닿는 것마다 부정해지는 것-> 발각되면 죽는다. 그런데 그 위험을 무릎쓰고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 무리를 뚫고, 사회적 통념을 뚤고 남의 시선을 넘어 예수를 만진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그 믿음, 믿음으로 예수를 만진 그를 예수도 알아보고 그 여인 역시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예수 앞에 아뢴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간 자와 예수는 그들 사이에 일을 분명히 안다.
-> 지금 그를 둘러싼 무리들 때문에 길이 막힌 야이로에게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무리를 뚫고 나와 예수를 만진다. 사람들 때문에 멈춰선 야이로에게 사람들을 뚫고 나와 고침받은 여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의 믿음은 여기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 계속 나아갈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3. 딸의 죽음과 부활
혈루증 여인을 고치고 그런데 예수님과 야이로가 몇 걸음 떼지도 않아서 청천 병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온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5절)
본격적인 신앙의 사건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이제까지는 야이로가 다급해서 예수님께 나왔다. 야이로가 한 것은 예수 앞에 엎드려 매달리고 간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열심은 결국 사람들 때문에 떠밀려 멈추고 말았다. .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아는가? 지금까지는 야이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애썼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으신다.
야이로의 안내를 받던 예수님께서 이제 야이로를 이끌고 가신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네 상황이 어떻든,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믿음으로 살아라. 끝까지 믿어라. 네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라.
어느 순간인가? 이제 상식적으로 늦었다고 하는 순간, 믿기만 하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말고 들리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세상의 논리에 좌지우지 되지 말고, 전지전능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이다.
37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자신의 가장 아끼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가신다. 아마도 좀 전에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서 멈추어 섰던 것을 탓했던 제자들을 떼어놓으셨을 것이다.
집에 갔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어떤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을 통곡하며 운다.
그리고 우는 사람들 곁에 있는 자들이 있다. 떠드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들이 비웃더라! (40절)
아주 짧은 한 문장이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을 비웃는 자들은 도대체 왜 어떤 자들일까? (초상집에서 예수님을 비웃는 자들, 그 예수님을 데리고 온 야이로를 비웃는 자들)
아마도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에 대해서 수근수근했을 수도 있다. 다 늦은 후에 도착해서 이제 당신도 별수 없다하면서 비웃은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어 보내셨다. 그들에게 거기 똑바로 서서 내가 하는 것을 잘보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같은면 자신을 비웃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을 텐데 예수님은 그저 그들을 내어 보내셨다.
사방에서 야유가 날아오지만 신경도 안쓰신다. 사람들의 수근거리는 소리에 귀를 닫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아얘 자리를 뜨는 것이다.
잠시만 나가 달라 정중히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마구 등을 떠밀어 내보내신다. 원문을 보면 내보내시다의 동사는 성전에서 잡상인들을 내어 쫓으셨던 바로 그 동사이다.
그리고 야이로와 자기와 함께 온 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무엇인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 기적을 믿는 자,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을 간절히 바라는 자와 함께 방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에 방해가 되는 자들, 소음을 내는 자들은 과감히 내어 쫓으신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에게 구태여 믿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이 짖건 말건, 비웃건 말건, 그들의 소리에 열받거나 논박하지 않고 그저 믿는 자에게, 오직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능력을 보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권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역사, 경험할 수 없는 역사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고 얘기 하지 않는다. 단 어떤 고난이 와도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오른팔로 우리를 돌보시고 주의 날개 안에 거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물 가운데를 지나도, 불가운데를 지나도 나와 함께 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절망한다. 절망은 바라는 것이 다 끊어졌다는 것이다. 꿈꾸던 것이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꿈꾸지 않는 자, 바라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이다. 절망하는 자는 우울해지고 절망하는 자는 그래서 자살한다.
신앙인은 고난을 당하면 인내한다. 그리고 소망한다. 하나님이 나와 더 가까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신앙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동행이고 감사이고 찬양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두려워 말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딸에게 가서 달리다굼!하고 외치신다.
달리다굼’이란 말은 원문이 Ταλιθα κουμ(탈리다 쿰)인데, 이 말은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다 쿰’에서 유래한 말이다.
‘탈리다’는 ‘연약한 것, 불쌍한 것, 미천한 것’을 뜻하는 단어로서 여기에서는 ‘소녀'를 뜻한다. ‘쿰’은 ‘일어나라’는 말인데 이 말의 합성어가 ‘달리다굼’인 것이다.
이 ‘달리다굼’은 당시의 가정에서 일상화 된 용어였다. 곧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아이들을 깨울 때 사용한 단어로서 "자녀들에게 아들 일어나!"하며 깨우던 일상용어이다.
금요일 나누었던 말씀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믿음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만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하나님의 한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자기가 보는 한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살아갑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언제나 현실을 바라보며 소망을 잃어버리지만 믿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창조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믿음 없는 백성들은 사막에서 물이 없어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믿음 있는 모세는 사막에서 샘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 없는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이젠 끝이라고 절망했지만 믿음 있는 모세는 바다에서도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 없는 데마는 세상의 것을 보고 갔지만 믿음 있는 바울은 하늘의 것을 보고 갔습니다.
저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믿음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듯, 예수님이 일하는 현장에 여러분들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중간에 너희는 여기 남아라하며 뒤쳐지는 신앙인이 나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지금 와서 뭐하냐고, 이제 끝났다고, 늦었다고 비웃는 자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5. 결론 – 마지막 반전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딸의 나이 – 12살, 혈루증을 앓던 여인 – 12해
12-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숫자 – 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지만 그 나날 – 연약하고 병들고 전통과 남의 시선과 무리들 앞에 병든 영혼
교회 – 무리 가운데서 불러낸 자
스스로 무리로 전락하고자 하는 신자- 눈에 띄지 않게, 남들과 똑같이...->주님을 그 무리 밖으로 나와 진정한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달리다굼!
연약한 자여 일어날 지어다. 무리 속에 갇히지 말고 그 무리를 뚫고 예수님을 만지시기 바랍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일어나야 합니다.
이젠 모든 연약함의 싸이클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두려워 말고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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