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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 개척 비전 및 2021년도 목회 계획  

 

I. 비전 선언문 (Vision Statement) 

트레이시 제일교회는 2020년 코로나 시대를 맞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적 비전을 꿈꾸며 2021년 1월에 개척된 한인 교회로서 트레이시 및 인근 지역의 한인 공동체를 주의 복음으로 양옥, 훈련하여 한 성도를 한 교회로 세워 성도의 가정과 이웃을 하나님 나라로 세우는 데에 목적을 두고 개척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의 능력을 경험하며,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는 교회된 성도를 세워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목회적 사명과 교회적 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건물, 성도수, 재정이 아닌 한 성도의 교회화, 내면의 변화, 성령의 열매를 목적으로 사역하는 성도의 교회 공동체이다. 

2.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예배가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접한 신자를 제자화, 교회화 시키는 데 중점을 둔 사역을 한다. 

3.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모여 선교, 구제의 사역에 힘씀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적 책임을 다하는 사역을 한다.

4. 온 성도가 예배와 교육(영성학교), 그리고 소모임에 동참하여 온성도가 함께 참여하여 변화와 성숙을 위한 교회사역을 한다. 

5. 통일한국과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 공동체가 된다. 

 

 

II. 2021년도 표어: 복된 성도 복된 교회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장 2-3절) 

 

  • 복이 되어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 (교회) 
  • 복이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성도 (가정) 
  • 복이 되어 이웃을 섬기는 성도 (선교와 구제) 

  

III. 목 회 중 점

(1) 참된 예배, 참된 예배자 

   ㉮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예배,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예배 (회개, 헌신) 

㉯ 금요예배 – 찬양과 말씀으로 은혜 받아 온 맘으로 간구하는 기도 예배 (주제 설교)  

㉰ 아침묵상 - 말씀 기도를 통하여 묵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삶으로 살아가는 예배 (강해설교)  

         아침묵상을 통한 Q.T 훈련

㉱ 특별예배 -  부활절, 가정의 달, 추수감사절, 성탄절 특별 예배 준비 

 

 (2) 영성학교를 통한 전교인 성도의 교육

   ㉮ 2월 개강 (4주 과정) - 성결교회 교리와 영성 

   ㉯ 부활절 이후 (10주 과정) - 영성적 성경읽기 1 (구약편) 

   ㉰ 8월중 개강 (4주 과정) - 종교개혁과 개신교 교단의 기원과 영성 

   ㉱ 9월 개강 (12주 과정) - 기독교 영성과 영적 분별 (박누리 사모) 

   

 (3) 선교와 구제에 힘쓰는 교회 

   ㉮ 선교지, 선교사 확정 및 선교 활동 시작 

   ㉯ 지역 공동체를 향한 구제 활동 계획 및 실시 

 

 (4) 홈페이지 구축을 통한 on-off line 사역의 활성화 

    홈페이지/블로그를 통한 On-line 사역/소통 강화, 온라인 전도 실시 

   

 (5) 춘계/추계 대심방 및 수시 심방으로 가정목회 활성화 (3-4월/9-10월) 

 

 (6) 하계 전교인 수련회 실시 (7-8월 중, 코로나 상황에 따라 수정될 수 있음) 

 

 (6) 예배당 및 사택 이전을 위한 기도와 노력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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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4장 - 두 곳에 세운 돌 

 

1. 홍해와 요단강 

 

출애굽 여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개의 큰 강을 건너게 됩니다. 

하나는 출애굽 할 때에 건넜던 홍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본 요단강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으로 볼 때에 홍해를 건너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얻는 중생이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화의 문을 건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도 홍해와 요단강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구속론적 관점, 구속론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이러한 구속론적 해석을 중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역사였습니다. 

홀해를 건넌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구원의 사건, 세례의 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삶, 중생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바로 성도의 성화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성화되지 못하면 불평하다 끝납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한채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신앙의 참 맛을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은 성화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이 은혜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중생의 강을 넘어 성화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홍해는 일생에 한 번 건너지만 요단강은 우리가 매일 건너가야 하는 강입니다. 

성경에도 홍해에 대한 사건은 단 한번 기록되어 있지만, 요단강에 대한 사건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이외에도 엘리야, 엘리사때 옷을 치며 건넌 사건, 나아만 장군이 문등병을 고치게 되는 사건,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는 사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 등 세례의 의미와 더불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거듭남의 완성이 홍해의 물세례를 거쳐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2. 두 곳에 세운 기념비 (오늘 나눌 4장) 

요단을 건넜습니다. 

앞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성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말씀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요단을 건너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십니다. 

"백성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선 곳에서 열 두 돌을 가져다가 오늘밤 유숙할 그곳에 두게하라." (수 4:2-3)

 

그리고 6절에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표징이라는 것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이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한결같이 "표징"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적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의 표징이고, 물고기가 사람 낚는 물고기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듯이 돌들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이라는 증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표징입니까?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단물이 여호와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때의 요단 물은 어떤 물입니까? 생명을 삼키는 물입니다, 고난의 물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그 고난이 어디서 끊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고난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인생의 파도가 일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낙망하고 넘어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해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말씀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에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유혹이 역사합니다. 

사람을 기대다가 실망하게 되고, 돈을 의지하다가 탐욕때문에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은 형식적이고 남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처럼 되다가 급기야 믿음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가로막는 모든 강과 장벽을 말씀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이것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볼 때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2절부터 이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2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으니" (23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4절) 

 

모든 표징은 우리로 하여금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삶을 통해 알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은 제사장들이 요단강 사이에 서있는 그 자리에서 돌을 취하여 그들이 유숙하는 길갈이라는 땅으로 와서 거기에 돌을 세우고 기념하게 하신 것인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또 한 무더기의 돌을 세웁니다. 

 

9절을 봅니다. 

(수 4: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한 돌입니다. 

이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 요단강 중심에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를 상상해 봅시다. 

이 광경을 무엇을 보여줍니까? 

 

9절에 보면 그 돌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증거하고 있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차면 그 돌은 전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그 장소, 언약궤가 서 있던 장소에 돌을 두어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왜 여호수아는 요단 물밑에 보이지도 않는 돌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까? 

강물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 - 옛생활은 장사지내고 마음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세기라. 

그렇지만 물이 마르면, 은혜가 마르면 다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돌..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은 우리의 죄입니다. 

 

  •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는 가나안, 홍해, 요단강, 법궤, 성막, 계명, 기념비와 같은 수 많은 신앙의 상징물들이 등장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신앙의 상징물들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더불어 바라보았습니다. 

 

물은 고난임과 동시에 세례이고 은혜입니다. 

물은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갈급하게 합니다. 

물에 빠지면 허우적 거리고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물을 건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물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곧 은혜로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한 물은 세례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 애굽의 나, 광야의 나는 죽고 이제 이젠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처럼 거듭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두 번의 강을 건넙니다.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첫 번째 세례, 바로 중생의 강입니다. 

 

두 번째는 광야를 통해 예전의 나를 죽이고 비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성화의 강, 우리 성결교회에서 말하는 두 번째 세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할 때에 일어납니다. 

 

요단강을 건너면서 여호수아는 두개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는 요단강 가운데 묻어두었던 숨겨진 기념비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내 옛 죄와 옛 자아를 죽이고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게 합니다. 

이돌은 은혜가 덮이면 항상 가리우지만 은혜가 마르면 다시금 튀어나와 우리를 자꾸만 옛자아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길갈에 세운 돌은 구원의 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날 살리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건너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여기로 인도하셨다는 찬양의 돌, 확신의 돌, 영광의 돌입니다. 

영광스러운 돌입니다. 산돌입니다. 

 

요단의 강을 건너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기억해야 할 두 가지 기념비, 요단강 가운데 십자가와 함께 장사지낸 우리의 죄, 우리를 새롭게 한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길갈에 세운 기념비, 오늘의 우리,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인도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통치의 기념비가 항상 우리의 심령안에 새겨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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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단강을 건넘 (여호수아 3장) 

 

  • 여호수아 전체의 내용 - 가나안땅 정복. 가나안의 의미가 무엇인가?
  • 가나안 : 어떤 이는 행복, 어떤 이는 축복, 어떤 이는 물질적인 축복만을...어떤 이는 유혹...간단하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땅. 

             지금의 이스라엘 전체의 땅. 그 중심엔 예루살렘 성전 - 하나님의 임재, 통치.

             그러나 그 땅 자체가 복이 아니다. 그 땅은 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물리적인 예루살렘 땅은 물론 선택받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땅은 불모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선민, 집착, 신앙이 강헀다. (가나안, 예루살렘, 이스라엘..)

              북왕국이 망했을 때에도 예루살렘이 있는 남왕국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던 성전도 불타 없어졌다.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그 땅 자체가 아니다.   

             가나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누구의 입술을 통해 하는가? 바로 라합이다. 

             (수 2장 11절)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문제는 가나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곧 가나안이다. 내가 어떤 가나안을 생각하는가가 내 신앙의 특징을 보여 준다. 

             가나안이 단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엄밀히 말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이 된다. 복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그 복은 곧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부재가 어떤 고통을 가져다 주는 줄을 삶을 통해 제험하고 그 은혜를 체험한다. 

             그런데 큰 아들은 한시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큰 아들에게 가나안은 빨리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왕이 될 때 까지만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신앙의 여정에 가나안은 유혹이고 타락을 가져다 준다. 가나안을 얻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건 축복이 아니다. 실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다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기독교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유럽, 미국, 한국 교회 모두가 가나안 이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한다. 

             

 2. 하나님의 계획, 준비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하다. 

 첫째, 사람을 세운다. 모세를 잃고 무너져 있던 여호수아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이다. 

          맡긴 자에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충성이다. (고전 4:2) 

 둘째,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들에게 명령하신다.   

         백성에게 하신 말씀은 사흘 양식(사흘- 십자가의 시간, 죽음의 시간; 양식- 고난을 이기는 힘은 믿음, 믿음은 오직 말씀으로부터...그렇게 때문에 사흘 양식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말씀으로 준비하라는 것이다.) 을 준비하고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를 통해 자기 목적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여호수아의 말에도 절대적 순종을 명령하신다.              

             

 셋째, 2장에서는 그 땅을 정탐케 한다. 12명 대신 하나님께 집중된 2명의 사람을 보낸다. 

             그리고 라합을 만나게 한다. 정탐꾼이 가서 한 일은 라합을 만나서 함께 머물고 라합을 말대로 사흘을 산에서 피신했다가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2명의 정탐꾼은 라합을 통해서 여리고성의 상태를 보았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았다. 

             처음 12명을 보냈을 때를 기억하라. 그들은 좋은 땅을 보았고 열매를 보았다. 그 다음 본 것이 그 나라 사람의 장대함과 자기 자신을 보았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함께 보았지만 다수는 부정적인 것 때문에 좋은 것을 포기한다.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은 항상 부정이 긍정을 이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메시지, 약속, 보장을 발견한다.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계산에 밝은 사람은 오히려 신앙에 실패하는 자들이 많다. 

             믿음은 여러 사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이다. 

             말씀은 늘 해석이 동행한다. 

             누구에게나 말씀이 주어져 있지만 그 말씀을 붙잡는 자만이 레마를 경험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3장에서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다. 

             

  • 1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광야의 역사는 새벽의 역사다. 새벽에 홍해가 갈라지고 새벽에 만나가 내리며 새벽에 요단을 건넌다. 새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성실한 믿음 가운데서 역사된다. 게으른 자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자는 곧 부지런한 자이다. 움직이는 자이다. "깨어 일어나"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고이다.  아침형 인간....한 때 유행했던 베스트셀러. 거기에서 말하는 것-> 인간의 싸이클이 자연의 싸이클에 맞추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는 것이 자연의 싸이클이고 곧 인간의 싸이클이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이 싸이클을 깨어버린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시작해서 육체적으로도 건강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 2절: 사흘 후에- 계속적으로 사흘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신앙은 계속적으로 나를 죽이는 것이다. 사도바울 처럼 날마다 죽지 아니하면 또 넘어지고, 불평하고, 절망한다. 

 

  • 3~5절: 언약궤를 따르라. 거리를 유지하라 (이천규빛: 약 1km) : 이전에 가보지 못한 너희의 행할 길을 알게 하리라.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앞서지도 뒷서지도 말고 말씀을 앞에 두고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멈추라 하면 멈추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은 항상 현재형으로 받는 것이다. 나아가라 하신 분께서 갑자기 멈추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이제 떠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이 변화 무쌍한 세상에 변함없는 말씀이 변화한 것처럼 감각되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너희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과소평가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이럴꺼야 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대를 넘어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 6절: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실 수 있도록 

-> 언약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임재, 그가 앞서가게 하라. 자신이 먼저가지 말라. 말씀을 따라 가라. 기다리고 인내하라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이라. 

                 백성들에게: 성결하라.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진군하라. 

                 

  •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땅에 가기 위에서는 나의 장막을 떠나야 한다. 내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고 있는 내 안의 안식처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말씀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중생 혹은 칭의)이라고 생각하며,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자

(1) 구원받을 때를 기억해 보자.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삶은-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거기에는 용기도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에 발을 담궈야 하는 제사장들의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용기말이다. 그리고 그 후 할례받은 백성처럼 하나님의 태초의 계획 "나로 성결케 되길 원하신" 그 거룩의 목적을 쫒아 행해야 한다. '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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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장 - 여리고 정탐 

 

가나안 땅 정복 - 

- 여호수아를 세우고 약속과 사명을 주심 (이제 일어나 요단을 건너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 백성에게 명하게 하심 - 지도자와 백성이 하나님이 일에 합심하게 됨 (양식을 준비하라,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도우라, 순종하라) 

- 강하고 담대하라 

 

3일간의 기다림의 기간 동안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한 일 

- 양식 준비(말씀으로 무장), 

- 정탐 (믿음의 눈으로 약속을 바라보는 것) : 믿음은 오직 말씀을 통하여 역사한다. 말씀의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2장 - 그 땅으로 보냄

  • 정탐꾼을 보냄 

2명의 정탐꾼 -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1절) 

정탐꾼 하면 생각 나는 것 - 가데스 바데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것 - 12명의 정탐꾼, 

- 그런데 여리고를 앞두고는 두 명만을 보낸다. 영문성경을 보면 "secretly" 은밀히 보냈다고 기록한다. 왜 두 명만을 그것도 은밀히 보내는가? 나누어지지 말고 하나된 보고를 하라. 

눈이 많을 수록 다양한 관점, 다양한 의견. 그러나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일관성. 목표 지향성

믿음의 눈을 가진 서로 연합된 두 명을 보낸다. (마치 열 두 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 갈렙 두 명만이 믿음의 보고를 한 것처럼 믿음의 두 명을 정탐하여 보낸다) 

- 가데스바데아에서 열 두 명은 40일동안 철저히 그 땅을 정탐한다. 그러나 2명이 가 있는 기간은 고작 3일간이고 한 일이라고는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숨어있다 산에 올라가 3일동안 숨어 있다 도망친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와서 믿음의 보고를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고자 하신 것은 현실의 보고가 아닌 현실 넘어 믿음의 눈을 증거하는 자를 찾는 것이다.  

- 신앙생활은 많은 경험과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한 자도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놓치고 만다면, 본질을 보지 못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두 명의 정탐꾼은 짧은 시간동안 하나님의 메시지를 정확히 깨닫고 보고한다. 

   

  • 기생 라합 

신분적으로, 민족적으로 그는 이방인이요, 생물학적으로 그녀는 여자요, 사회적으로 그녀는 기생이었다.  

왜 하나님이 그녀를 만나게 하셨는가? 

- 많이 배우고 좋은 집안 사람의 증거를 바라지 않는다. 믿음의 증거를 하는 한 연약한 이방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려 주신다.  

->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에 그녀는 신뢰할 수도, 의지할 수도 없는 여인이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 그녀는 하나님의 메신저였고, 피난처였다. 또한 그녀를 통해 정탐꾼들은 여리고의 민심과 그들의 목숨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라합은 그들을 통해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 가정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라합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 왜? 그녀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첫째, 누가 진짜 왕인가에 대한 물음에 믿음으로 화답했다.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 발각되었다. 왕이 직접 사신을 보내어 지시한다.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을 건 모험이다. 

세상 사람들은 목숨을 위해 믿음을 버리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 히브리 산파가 바로의 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다. 다니엘이 느부가넷살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대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택했다. 누가 나의 왕인가?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가? 

 

9절: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시혼과 옥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정작 믿음을 잃어버린다. 사용하지 못한다. 

체험이 있어도 믿음을 잃어버린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순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수많은 말씀을 듣고, 보았어도 정작 문제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가? 

 

11절 -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온전한 신앙고백 안에서 구원을 구함.

지금 누가 누구를 구해주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정탐꾼의 목숨을 구해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입장에서도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과 집을 구해달라고 간구한다. 

믿음은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아는 것이다.  

 

  • 언약 

사흘 동안 숨었다가 너희의 길을 가라 (16절) -> 남아있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양식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시간

정탐꾼에게는 산에 올라가 라합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묵상하는 시간

라합에게는 붉은 줄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시간. 

 

계속되어서 반복되는 사흘이라는 시간, 고통의 시간, 죽음의 시간, 그러나 부활의 시간

내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뜻이 사는 시간 

산으로 가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골방으로 가서, 은밀한 중에...)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야 할 곳. 하나님과의 대면, 기도의 처소. 삼일간의 양식을 준비하라

 

  • 창문에 달린 붉은 줄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와 같은 주의 보혈 

네 집 문을 나가면~ 너와 함께 있는 자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의 길은 나와 내 집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그 안에 거하는 것. 내 방법이 아니라 예비된 방법, 지정된 방법, 계시된 방법만이 구원의 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보고 (22-24절) 

정탐꾼이 본 것, 경험한 것 - 라합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 

여리고 땅에서 그들의 편은 오직 라합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오직 라합 뿐, 

그 나머지는 자기들을 위협하고 죽이고자 했던 군사들. 그 군사를 피해 3일 동안 산에 올라가 피해있음. 

그런데 그들이 붙잡은 것은 라합의 고백 

 

무엇을 붙잡고 살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은 항상 여러가지다. 

믿음의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는가하면 세상의 사정이 보이고 환경이 앞설 때가 있다. 

약속을 붙잡을 것인가? 환경에 의지할 것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다! 

 

  • 하나님이 오묘한 섭리 

-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참 믿음의 증표를 

- 라합에게는 그녀로 말미암은 한 가정의 구원을...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라합은 다윗왕의 조상이 되고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인으로서, 기생으로서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하나님이 계획은 맞불린다. 섭리는 깊고 오묘하다. 

 

묵상) 누구를 왕으로 삼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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