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2020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마태복음 9장 9-13절 (마태에게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그의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제자입니다. 

우리가 읽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제외하면 마태의 행적이 나온 것이 거의 없습니다. 

 

출생 신분으로 보면 열 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 한 사람만 다른 지방 사람이고 나머지 열 한 명이 예수님이 자랐던 갈릴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시각으로만 보면 다른 열 한 제자가 당시 열심당원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로부터 독립을 외치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과도 같은 급진적 성향을 지녔다면 마태는 로마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착취하며 살았던 당시 열심당원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오히려 목숨이 위태할 정도로의 정반대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마태였습니다. 

 

그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공동체의 돈관리를 마태가 아닌 가룟 유다에게 맡긴 것도 의아한 일입니다. 

여하튼 열두 제자 중의 하나임에도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마태가 신약성서의 시작을 알리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고, 그가 기록한 성경이 신약성경의 첫 권이 된 것도 참 신비하고 의아한 일입니다. 

 

영향력 면에서는 베드로나 요한의 글이 더욱 권위가 있었을 것이요, 가장 먼저 쓴 글이라면 마가의 복음이 더욱 빨랐을 터이요, 가장 사실적인 기록하면 뭐니뭐니해도 의사의 눈으로 객관적 사실을 기록했다고 알려지는 누가의 복음이 더욱 신빙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약의 시작은 마태복음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일어난 역사일 것입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마태복음의 가장 큰 특징이자 주제어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이 왕대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여기에 마태가 경험하고 마태를 통해 보이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마태복음에는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1. 먼저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로서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장)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 1장 1절은 언약의 족보:하나님 나라의 족보 - 아담으로부터 이어온 죄악의 계보를 떠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새 언약의 계보가 바로 마태음에서 소개되는 아브라함으로부터의 족보입니다. (사실을 기록한 누가 - 아담으로부터 시작)  
  • 그 족보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연약한 자, 부족한 자, 부정한 자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1) 연약한 자 (아브라함, 75세의 나이, 자식도 없고 이방땅에서 우상을 만들어 살던 소망이 없는 자..) 

2) 부족한 자(원래 은혜의 흐름은 장자를 통해서,,, 그것이 이스라엘의 신앙../ 그러나 14명 중에서 장자는 단 5명, 나머지 9명은 아니다. ex)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다윗 

오직 온전한 장자는 헤스론,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 뿐이다. 

3) 부정한 자 

다말 - 시아버지에게 기생으로 둔갑하여 베레스를 나음

룻 - 이방여인, 거기다가 보아스의 잠자리에 스스로 들어가서 누워있음...

라합 - 직업 자체가 기생... 매춘부...

 

그러나 그러한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한 자들을 하나님이 택하셨고, 그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을 통해서 신앙의 피가 전해져 내려왔음을 보여줍니다.  

 

- 아담의 족보와 예수의 족보 

  • 차이점: 창세기의 족보 - ~를 낳고, ~낳다가, 몇세때 죽었더라....결국은 죽음으로 끝남.... 죽음의 족보...
  • 마태복음: 낳은다는 동사가 자그만치 40회 등장 -> 죽음이라는 표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자들의 족보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 - 산상수훈, 팔복  (마태복음 5-7장) 

또한 마태복음은 이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복,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을 이른바 산상수훈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 말씀들은 구약의 사람들이 율법을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예수님의 설교요, 새 율법이요, 삶의 방향들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길로서 받아들여졌다면, 산상수훈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요 (5장 17절), 그분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서 (5:13) 원수를 사랑하고 (5:43) 모래 위가 아닌 반석위에 기초한 집을 짓는 자들임을 말씀하십니다. (7:24) 

 

3. 하나님 나라의 방해꾼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불화했던 세 집단이 나옵니다.

  1. 9:1-8절: 율법학자들-그들은 중풍병자를 향해서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2. 9-13절: 바리새인들- 그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 14-17절: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런 금욕적인 삶을 추구해야만 했는데,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걸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은 셈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신학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목회자들이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수도승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듯 당시의 유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형식적으로, 전통적으로 굳어져 있던 신학자들, 목회자들, 구도자들과 신앙의 모든 태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해꾼들은 이 세상의 권력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었고 이단이나 권세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하건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하시면서 세금을 낼 것과 위에 있는 권력에 순종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오히려 당시의 종교인들,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들만이 잘 믿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믿는 자들, 혹은 세상 권력과 손을 잡고 그 안에서 안주하며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이 행해왔던 전통과 관습을 더 우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보다 그들의 행위에 기초해서 인정받으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장 의롭다고 내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4. 하나님 나라의 방법 -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수님은 이미 전 이스라엘에 유명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예수님은 이미 한님의 아들이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그들에게 내려오던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로서 그를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메시야로서의 예수님께 기대했던 것은 오만하고 힘쎈 로마의 권력을 몰아내고 다윗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로마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뿐만 아니라 다윗의 떄, 솔로몬의 때처럼 이웃의 열방들이 부러워하고 무서워하는 힘쎈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언하고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세력보다 더 큰 힘으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나라. 자신들을 맨 밑에서 맨 위로 올려줄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요 18: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 나라는 칼과 힘으로 정복되는 나라도 아니요 오직 십자가의 피로, 그 은혜로,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힘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올라서는 권력이 아니라 낮아지며 섬기는 나라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방법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결론 

지난 한 주, 대한 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광복절 집회로 말미암은 코로나 확산 - 그 중심에 선 한 목회자, 그가 이끄는 교회와 무리. 

 

그들이 외치는 것 - 이 정권을 몰아내서 공산화를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애국이다. 

 

이 땅 미국에서는 종종 받게 되는 메시지. 

서로의 당을 주장하면서 다른 당이 집권하면 망한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그러면 그들의 뜻대로 정권을 바꾸거나, 정권을 몰아내면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정치권력에 의해 세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인가?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 - 오직 여호와의 증인들 뿐.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이 땅에 세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지 - 그들만의 나라. 

 

물론 기독교인은 사회의 변화에 둔감해서는 안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 정치적인 문제에도 눈감지 말고 시대를 분별하고, 때로는 참여하고, 동참해야 한다. 

 

나라가 힘들 때,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고, 불의에 눈감지 말고 맞서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갖되,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려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의 영혼에 깃드는 나라요, 그 영혼을 통해 영생하는 나라이다. 

 

  • 온갖 핍박을 인내와 믿음으로 견디고 견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들의 국교로 삼았을 때, 이젠 불행은 끝나고 새 시대가 옮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공인과 로마의 기독교의 국교화는 오히려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정부패를 통해 교회의 몰락을 초래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으로 얻어지는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고 부인하는 나라이다. 

 

  • 마태는 세리였다. 세리는 로마에 대항하기 보다는 그 권력에 순응하면서 자기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자였다. 

탈무드에 보면 어떤 짐승보다도 가장 사악한 짐승이 바로 세리라고 표현한 구절이 나올 정도로 세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본문은 막2장, 눅5장에서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면서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 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의 준수자였고 수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비추어서 볼 때 마태는 자기가 세리와 같이 죄인 중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아 자기는 사형에 처할 만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자였음을 자기가 쓴 마태복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했더니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를 택하시고 ‘나를 따르라’며 제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마태를 제외한 열 한 제자는 마태의 반대편에 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없다면 그들은 언제든 마태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둘을 하나된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공산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 이땅에 속하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난 이데올로기에 빠진 교회를 경계합니다. 

노예해방을 두고 남북전쟁을 치룰 때에 정치 문제보다 더 치열하고 극심했던 싸움은 교리전쟁이었습니다. 

노예가 성경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그것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노예를 지지했던 남부측 교회들은 노예는 구약에도 신약에도 존재했던 내용이고 그 존재를 인정했기에 그들에 대한 법이 세워졌다고 말했고 북측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싸웠습니다. 

이 때에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이 치열하게 다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한 문제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지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기 위한 필요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에 따라서 한 편은 죽여야 하는 적이 되고 한편은 의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싸움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화 된 기독교는 서로를 적으로 돌리며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복음으로 화합하는 나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이단이 설치고, 온 세계가 혼란스럽고, 무엇이 옳은 지 그른지 조차 분별하기 힘든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금 복음으로, 기본으로,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 다른 누가 아닌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비둘기가 물고 온 새 잎사귀 (창 8장 6-11절) 

 

노아의 사건은 인류에게 임한 첫 번째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누군가에게는 심판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는 홍수의 사건에 있어서 교회의 상징적 모델로서의 방주의 역할을 또한 말해 주고 있다. 

 

방주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 홍수의 때, 즉 심판의 때까지 사람들은 그것을 주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 사람들은 방주를 외면했지만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 평생의 작업이었고, 동시에 외로운 작업이었다. 
  • 방주는 산꼭대기에서 만들어져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곳에서 만들어졌다. 
  • 그 문은 늘 열려 있었으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홍수가 났을 때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 그 곳의 내부는 홍수의 기간동안 모든 생명을 안전히 지켜주었지만 그 안의 환경은 결코 좋을 수는 없었다 (동물들의 소리와 냄새, 식량의 한계, 홍수로 인한 눅눅함, 햇빛을 쬐지 못하는 환경. 어쩌면 곰팡이와 악취와 소음으로 가득찼던...그런데 그곳이 바로 가장 안전했던 곳) 

 

홍수의 내용 

  •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7:12) -둘째 달 열 이렛날 시작 
  • 그리고 물이 백오십일 동안 줄지 않고 땅에 넘쳤다 (7:24) 
  • 열째 달 초 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 
  • 그리고 나서 또 40일 후에 노아는 드디어 창문을 열었다. 
  • 언제 밖으로 나오는가? 육백 일년 1월 1일 - 물이 걷혔다. 2월 27일날 땅이 말랐다. 일 년하고 열흘 만에 마른 땅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40일 홍수나고 좀 지나서 곧 방주를 연 것이 아니라 비가 쏟아진 날만 40일이고 150일 동안은 그 물이 하나도 줄지 않고 땅에 가득했으며, 방주 안의 사람들은 거의 일년 내내 방주 속에 갇혀 지낸 것. 

 

동서남북이 모두 물

그 안에서의 삶 -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 

코로나 정국을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어느 때 보다 조금은 그들의 답답한 삶이 더 잘 이해할 만한 상황. 

동물들이 가득 있었지만 있는 식구는 딱 노아의 가족 - 노아와 아내 세 아들과 그 며느리, 아직 손자 손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10명도 채 안되는 가족이 일년 내내 방주 속에서 먹고 이야기하고...

그 때에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아니 라디오나 TV, 신문이나 잡지도 없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코로나가 길어지며 못견디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그런데 방주는 나갈 수가 없다. 나가면 물이다. 

코로나 불화, 코로나 이혼...

 

얼마나 답답했을지....그들이 그 안에서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노아가 처음 배 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낼 때 심정이 어땠을까? 

마치 우리가 언제 가게 문 여나, 식당 문 여나, 교회 문 여나 그러한 기분보다 몇 갑절은 더 기대와 염려가 교차했을 것이다. 

 

첫 번째 까마귀를 내어 보내고 물이 많아 앉을 곳이 없자 좀 날다가 곧 돌아오고..

두 번째 비둘기를 보내자 비둘기 역시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곧 돌아온다. 

 

그 오랜 기간 날기를 원했을 새가 앉을 곳이 없어 다시 배로 돌아오는 광경도 생각하면 참 딱하지 않은가!

 

돌아오면 또 비둘기를 보내는 노아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칠 일을 기다렸다는 것은 비둘기가 돌아오자 실망한 마음을 또 참는 기간 - 하필이면 완전 수 칠일이란 말로서 낙심 뒤에 또 인내하는 지극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동 서 남 북이 물로 가득찬 세상에서 기다리며 인내하며 비둘기를 보내는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가 기다렸던 작은 구름 조각 하나같은 소망을 갈급해하는 표현일 것이다. 

 

  • 이 말씀을 나누는 우리 역시 여러가지 인생의 홍수를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다녔던 직장을 잃고, 건강했던 몸이 상하는 일, 아니면 코로나에 이어 한국에서 전해지는 이어지는 장마로 인한 말 그대로 홍수를 경험하는 인생들은 그 심정을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이 때 방주를 열고 비둘기를 보내는 마음 - 바로 소망을 찾는 마음이다.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새벽같이 보낸 비둘기가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다. 점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 그의 마음은 무슨 사고가 있나...걱정 반 기대 반이었을 것이다. 저녁 때가 되어서 돌아온 비둘기...그런데 11절에 보니 "그 잎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물려 있었다.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 비둘기는 단지 잎사귀가 아니라 소망을 물고 온 것이다. 어딘가에 마른 땅이 있다는 증거를 물고 온 것이다. 

 

극심한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오는 소망의 메시지. 

검사를 해 보았더니 아무 이상 없답니다. 

내가 빌려줄 테니 빨리 해결 해. 

내가 도와줄테니 같이 해보자. 

 

삶의 홍수와도 같은 그러한 절망의 현장에서 작은 소망으로 다가오는 그런 소식. 

비둘기가 물고 온 잎사귀는 그래서 고난당한 자에게는 복음인 것이다. 

 

  • 우리가 왜 예수의 이야기를 복음이라 하나 - 감람나무 잎사귀 - 복음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을 보자. 

그녀가 남자를 유혹했을지, 남자가 그녀를 겁탈했을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요즘처럼 미투운동으로 자기의 침해된 인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대면 모를까! '

불행히도 당시 여인들에게는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렸다는 것은 간음하고 있는 현장에 사람들이 들어닥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악의 현장에 더한 책임이 있는 남자는 그 현장을 슬며시 빠져 나가고 여인 홀로 사람들의 온갖 수모와 시선을 맞으며 지금 돌에 맞아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 어디에선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뜻 밖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예수와 여인 둘만 남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천국의 비둘기처럼 나타나 감람나무 잎사귀를 내미시는 것이다. 

 

오라비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제자들에게, 38년된 병자에게, 바디메오에게, 문등병자에게, 이방 사람 백부장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심지어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죄수에게조차 주님은 비둘기처럼 나타나서 그들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신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인생의 홍수를 만난 우리들에게도 그 분은 여전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 성도- 소망을 갈급해하는 노아, 비둘기를 날리는 성도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홍수를 만난 이 세상에서 교회 라는 방주에 거하며 비둘기를 날리는 노아같은 인생들이다.

비둘기를 날리는 것은 무엇인가? 소망을 찾아 말씀을 갈급해하는 것이고, 주의 음성 듣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자이다. 우리가 날려 보내는 비둘기는 다름아닌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향기나는 기도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고백이다. 

그렇게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 보장된 소망의 약속을 주신다. 

성경은 잎사귀가 가득한 바구니다. 그 곳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망의 메시지가 넘쳐난다. 

 

  • 성도 - 잎사귀를 전하는 비둘기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온 잎사귀를 어떻게 했을까? 그 소식을 기뻐하면서 그냥 방주 밖으로 던져 버렸을까? 아니면 호주머니에 귀하게 넣고 자기 홀로 간직했을까? 

아니면 가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잎사귀를 보여주며 땅이 말랐다고, 드디어 나갈 수 있다고 외쳤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증인된 삶은 결코 숙제가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전도를 훈련하고, 전도 구절을 암기하고....

그런 부담을 가지고 주님의 증인 되기를 원하시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그 복음. 나에게 날라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는 그 좋은 소식을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너두 나두 크고 작은 홍수에서 남은 생존자들이다. 

그리고 그 남은 생존자들에게는 각각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그런 새 잎사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왔던 그런 풍파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도우시면 두려울 것 없다고 고난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가 가진 잎사귀,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잎사귀가 지금 당장 필요한 자도 있을 것이다. 

혼자 절망하며 잠 못 이루는 남편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는 한 마디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에게 찾아가 "내가 기도하고 있어요.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도 되심을 난 믿어요"라는 그 따스한 한 마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는 자에게 조그마한 정성을 담아 격려하는 일, 모두 우리 자신이 비둘기가 되어 잎사귀를 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비둘기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신다.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그가 먼저 우리를 위로하셨고, 그 위로를 가지고 또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인내할 수 있도록,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게 한다. 

 

[히 13:5]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의 구주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 

내가 주로 말미암아 누군가의 의미있는 존재가 된 다는 것! 행복한 일 아닌가? 

 

아침마다 전하는 로고스 아침묵상

누군가 그 전하는 말씀을 듣고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 

 

목사에게만 한정된 일일까? 

이 어려운 때에 믿음 있는 자들이 함께 자신의 의미를 찾는 일 아닌가? 

 

  • 잎사귀의 역할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으며" 

의문을 품고 사다리를 올랐던 노아는 확신을 얻었다. 이제 고난이 지나고 소망의 때가 되었음을....

복음을 경험한 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산다. 

성령의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은혜를 주시며 확신시키시는 영이시다. 

 

소망이 필요하신가? 비둘기를 날리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올리고, 그 분의 잎사귀를 얻기 위해 성경을 펴자. 

잎사귀를 얻었는가? 

그러면 주위의 사람과 함께 그 잎사귀를 나누자. 전해주자. 

우리의 그 한 마디가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릴 수도 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다니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가장 참혹한 시대를 산 인물 

나라를 빼앗기고 성전이 불태워지고 포로의 신분이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온 무리들 중의 하나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자신을 추스릴 수가 있을까? 낙심을 넘어 자포자기. 자신을 방치.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지금 나라도 빼앗기고 교회는 불탔는데...그리고 좀 괜찮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바벨론의 궁에서 죽지 않고 그런데로 맛난 음식도 먹고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좋은 교육도 받아가면서 살만한 세상을 만난 듯, 어차피 이스라엘은 망했으니 이젠 바벨론에서 살 길을 찾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심정.  

 

그런데 다니엘은 그런 바벨론의 세상에 융화되지 않고 뜻을 정했다. 바벨론의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부흥의 시대에 이런 결심을 해도 잘했다 칭찬할텐데...믿음을 찾을 수 없을 때에, 모든 사람이 믿음에 회의를 느낄 때에, 다시 말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이 도무지 보이지 아니할 때에 뜻을 정했다. 

 

바벨론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왕의 음식으로,,,, 그 왕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는 상관없이 그 왕은 곧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자요,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운 자. 그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에 취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겠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 

어떻게 이러한 때에 자신을 지키리라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오묘한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바벨론의 왕 느부가넷살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지만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그러니까 온 나라의 술객과 술사들을 불러 그 꿈을 해석하라 명하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는 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다 죽게 되는 현상. 

 

그 때 다니엘이 나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꿈을 해석하여 왕에게 발탁되어 바벨론의 총리가 된다. 

이 때부터 다니엘은 기도에 취한 자가 된다. 다니엘서는 구약의 계시록이다. 

사도 요한이 모든 사도가 죽고 홀로 남았을 때에 밧모섬에서 기도를 통해 신비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듯이 다니엘은 모든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시대에 뜻을 정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어 계시록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미래의 일을 기도를 통해 볼 수 있는 자가 된다. 

 

6장은 느부가넷살왕의 뒤를 이은 다리오왕 때에도 여전히 총리직을 수행하며 나라를 이끌고 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왕은 다니엘이 필요하니까 중용을 하지만 다니엘과 경쟁해야 하는 고관들은 다니엘이 영 불편하다. 

어느 나라이던지 귀족들은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 이방인이 끼면 왕따를 시킨다. 재벌가에 평민 며느리가 들어오면 시누이들이 구박하고, 줄이 없는 자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영문과에 다닐 때에 졸업하고 비행기 승무원이 된 여동기생. 

한 2년 다니다 그만 두었는데 물으니 항공운항과가 아니여서 같이 다닐 수가 없어서....

 

바벨론의 고관들이 다니엘을 보니 이방인인데 두 왕조에 걸쳐서 총리가 되니 이젠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긴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그를 몰아낼 궁리를 한다. 

 

[단 6:4]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가 일하는 데에선 어떤 허물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그들이 보기에 약점 하나를 발견한다. 

 

[단 6:5]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그는 바벨론의 왕보다 하나님을 더 경배하는 자라는 것. 

교회 안에서는 이런 자가 칭찬 받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것은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자로 보이는 것. 

 

왕을 찾아가서 법령을 만드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어라"

 

다리오 왕의 입장 -  왕위에 오르자 마자 신하들이 자기 왕위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받아들여 덜컥 승낙하게 된다. 

 

다니엘의 입장 -  이 법령이 자기를 향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법령이 자기를 고발하여 죽이고자 하는 음모라는 것 

그리고 그 법령에는 묘한 유혹도 있었다. 그것은 30일 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 

 

여러분이 다니엘의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겠는가? 

 

비가 오면 우선 피하자.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자. 

30일만 참자. 30일만 숨자. 멈추자.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먼저 그는 기도했다. 이전에 하던대로....그럴 수 있지. 
  •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창문을 닫고 조용히 기도하면 되잖아. 그런데 구태여 창문을 꼭 열어서 자기를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여야 할까... 너무 나간 것 아닐까? 

 

다니엘에게 창문을 연다는 것 -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연다는 것 

내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주님을 향해 내 온 마음을 여는 것. 

 

그 열린 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내 온 마음을 쏟아 붓고 그 열린 창을 통해 하나님

열린 창은 그의 신앙 고백 

남의 시선 때문에 창문을 닫는다면 하나님 앞에 그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 

 

포로로 잡혀와서 지금 총리의 자리까지 온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그런데 지금 자기가 위험하다고 하나님꼐 대한 기도를 쉰다면 그것은 자기 삶을 부인하는 것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자기 목숨을 드리는 감사, 자기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기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해주실 줄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는 차라리 자기 신앙을 부정하느니 죽음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 번영의 신앙. 긍정적 사고 

감사하면 복이온다? 

결과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면서 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위험을 무릎썼다. 

하나님을 모든 환란 중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분임을 믿지만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식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일까? 

3절에 보면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아니 그는 그 나라의 그 어떤 자보다 지혜로왔다. 

그는 이 절체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어떤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사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바벨론에 왔을 때의 다니엘 15살 전후.... 

그곳에서 처음에 살아남기 위해서 기도했을 터이다.

모두가 바벨론의 궁에서 현실에 순응하며 왕의 진미와 포도주에 취해 있을 때에 그는 뜻을 정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기도했을 것이다.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 그는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영생이요, 천국인 것이었을 것이다 

 

기도하는 다니엘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니엘의 신앙을 순교적인 신앙이라고 말하지만 다니엘에게 순교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고 자신 답게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  마틴 루터 킹 

 "왜 이렇게 위험한 길을 가십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 영혼이 자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게 사는 것! 

 참 나답게 사는 것! 

 주님의 멍에를 메고 사는 것, 주님께 붙잡혀 사는 것! 

 

 그 모든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것. 기도하며 예배하고 사는 것

 그것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처음 바벨론에 왔을 때에 왕의 진미와 포도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좋았듯이 

 총리가 된 이후에도 그 모든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 

 

 아침 묵상을 통해 

 다섯번째 나팔 - 황충의 재앙 

 

 황충의 재앙의 결과 

 [욜 1:9-12]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

  • 황충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 : 예배가 사라진다. -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다-> 사람의 즐거움이 마르다. 

 

그런데 똑같은 재앙 속에서 고백하는 또 다른 선지자의 고백 

[합 3:16-18]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종교 생활 -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자기 만족 행위, 영혼 없는 신앙

신앙 생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누리는 것. 내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코로나 신앙 - 점점 하나님 없는 현실 속으로 점점 내몰리는 성도들 

주위 곳곳에서 확진자들이 나오는데도 한국의 뉴스를 통해 교회에 대한 이목이 집중되면서 성도라는 것이 자부심이 아니라 숨기고 싶은 현실.

오랫동안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어느덧 기도생활도, 말씀 생활도 희미해져 버리는 때 

그저 유튜브로 뉴스 보듯이 지나가듯 예배하는 자가 되어 버리진 않았는가? 

부정적이게는 불안한 삶 가운데, 

좀 다른 표현으로는 게으르고 단순한 삶 가운데에서 

어느덧 자포 자기, 자기 연민, 즐거움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진 않은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듯이, 어느덧 코로나의 포로가 되어 버리진 않았는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가? 

다니엘이 처한 현실 - 사방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로 가득찬 세상 

                             - 위축될 수 밖에, 움츠려들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 모든 현실을 놓아버린다. 창문을 열고 온 마음을 하나님께 열고, 그 창문으로 하나님을 초대한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난 안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으신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길 원하시지 고난에 빠져 허우적 대는 꼴을 보지 못하신다. 

그 고난을 뚫고 나오기를 기다리신다. 아니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길 원하신다. 

 

  • 다니엘의 결말 

기도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는 사자굴에 던져진다. 

기도했다고 금방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현실은 그의 대적들이 생각했던 대로 사자굴로 그를 내몬다.  

그러나 모두가 죽음을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에 사자는 다니엘을 죽이는 존재가 아니라 다니엘의 친구가 된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다니엘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사건을 통해 금식하고 기도하는 자가 된다. 

 

[단 6:18]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

 

왕을 의지하고 사는 땅의 사람이었다면 다니엘의 생명은 그가 의지했던 한 왕의 시대였을 뿐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왕은 바뀌어도 다니엘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당신의 의지하고 있는 기초는 반석인가, 모래인가? 

 

물론 예언서에 예언된 내용이기 때문에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국으로 귀한 시킨 것을 우리는 자연스런 결과로 보지만 세속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사건은 유래를 찾을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승전국이 그의 식민지 사람들을 조건없이 귀국시킬 수 있는가? 

그것도 바벨론이 빼앗아 갔던 모든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을 함께 보내고 그것에 성전 지을 제목과 제물까지 얹어서.... 

 

이방왕이었던 고레스가 그러한 결정을 한 것에는 왕조가 바뀌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했던 한 사람 

다니엘을 통하여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입을 모은다.  

 

[단 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현실에 주눅들지 마시라. 

그 모든 현실 속에서 뜻을 정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삶 가운데 즐거움을 찾으라. 

즐거움은 내 삶의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 깊은 내부에서 샘솟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두번째 인구조사 (민수기 26장 1-2절)

 

[민 26:1-2]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민수기- 백성들의 수,  영어로는 Numbers

두 번의 인구조사 (1장과 26장) 

  • 첫번째 인구조사 - 애굽에서 나온 수를 세라 , 애굽에 들어갈 때- 70명이던 인구가 지금은 어언 이백만명... 민족을 이루는 인구, 60만 삼천 오백 오십 명 - (1:46)
  • 26장의 인구조사 - 가나안에 들어가는 수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 - 60만 천 칠백 칠십 명 -(26:51) 

 

조금 줄기는 줄었지만 거의 비슷함 

  • 그런데 중요한 것 -

그들이 여리고 맞은 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민 26:63-65) 

 

  •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들어간지 400여년이 좀 넘는 기간동안 70여명의 식솔들이 장정만 60만이 넘는 200백만 명이 넘는 대 민족이 된 것도 기적인데 
  • 그 민족이 40여년의 광야생활 동안 첫 세대가 다 죽어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곤 한 명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도 엄청난 사건 
  • 그리고 400여년 동안 늘어났던 그 인구가 첫 세대가 다 죽고 40여년 만에 그 인구를 다 채우는 역사도 역시 엄청난 사건 
  • 두 번째 인구조사 전에 일어난 사건 - 발락과 발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여인들과 음행하며 바알을 섬기게 된 사건 - 염병으로 이만 사천명이 죽었더라 (민 25:8) - 계시록의 니골라의 교훈, 이세벨의 유혹을 이야기할 때에 항상 인용되는 사건 - 바알브올의 사건 - 신앙인의 영적 타락 
  • 이 사건 이후로 이제 가나안에 들어갈 인구를 조사  

 - 옛 자아가 죽지 않고는 가나안을 들어갈 수가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  민수기의 히브리 제목 - "베미드바라" - 광야에서... 여기에는 훈련의 의미 

 애 첫 세대는 실패했는가? 왜 그렇게 광야를 힘들어했는가?  

 

광야 - 40일이면 지날 수 있는 광야. 그런데 그들은 40여년을 지나면서가 아니라 단 삼일 만에 못견뎌 했다.  

광야라는 환경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고 부정. 

광야에서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오직 과거로만 돌아가려고 함. 

몸은 광야인데 의식은 광야를 회피하려고 했다. 

애굽을 떠나면 당장 행복할 줄 알았는데 광야를 만나니 애굽이 더 좋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야할 가나안은 아얘 생각지도 못한다.  

왜?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땅이므로... 

그러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불평했는가? 

과거의 경험, 과거의 내 삶의 방식...

그리고 무엇때문에 불평했는가? 지금 맞대고 있는 불편함. 불안함.  

 

광야를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가나안으로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40일 될 길이 40여년이 지날 때까지...

그 기간... 1 세대들이 다 죽는 기간. 옛 자아, 옛 경험들이 다 죽는 기간. 

 

2세대 -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 그곳만이 경험의 전부.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세대.  

그런데 광야라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니까 못살것 같은 그 삶이 살아지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고, 그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광야에서 배움이 시작된다. 

 

  • 그곳에서 시작 된 것. - 십계명. 그리고 성막 (말씀과 예배의 삶이 비로서 열린다) 

 

40일이 지나면 끝날 것이라는 생각만 있으면 어떤 자가 그곳에서 성막을 세울까? 

40일이 지나면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면 어떤 자가 그곳에서 40일을 두번씩 기다리며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오라 할까? 

 

그곳을 수용하지 못하면 그 안에서 어떤 배움도 없이 불평과 원망, 다툼과 자학...

만나를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매추라기를 먹어도 만족이 없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아도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질 않는다. 

현실이 하나님 보다 크게 보인다. 매일 같이 만나를 내리고 메추라기를 내려도 그것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질 않는다. 

고통은 그 어떤 사랑도 느껴지지 못하게 만든다. 고통은 은혜를 사라지게 하고 감사를 잊어버리게 한다. 

 

이 때 하나님이 하신 것 

기억하라. 순종하라. 지켜라. 그리고 불평의 현장인 너희의 집에서 나와 장막으로 나오라. 

성막과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과 과거부터 행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신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으니 그곳에 하나님이 임한다. 

하나님이 임하는 곳은 바로 천국 

하나님과 천국을 누리는 것 - 영생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 이구나. 

그런데 그것을 수용한 백성 - 광야를 수용했더니...그 곳에서 예배하게 되고 십계명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순종한다. 

광야 가운데서 훈련이, 배움이, 교육이 시작된다. 

그리고 광야를 받아들였더니 비로서 가나안이라는 소망의 땅이 보이는 것이다.  

 

코로나 19- 엄청나게 낯선 삶. 

처음은 지나갈 때까지 버티자. 기다리자. 마치 40일만 참자 하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새로운 삶의 패턴, 직장의 패턴, 가정의 패턴, 그리고 신앙의 패턴. -> 불안하기도 하고 낙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를 수용해야 한다. 자꾸만 과거를 생각하며 현재의 불편함에 넘어질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받아들이며 이 현재가 지나가면 새롭게 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그러면 미래가 보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그 안에서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40일이 40년이 되듯, 배움이 없이 시험은 넘어가지 않는다.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보아야 한다. 

 

코로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벌하는 것이다. 

너희가 왜 여기에 있게 되었냐고 생각해보라. 

아담아 어디있느냐? 

엘리야야 왜 여기있느냐?

요나야 무엇 때문에 이 광풍이 몰려왔느냐? 

 

  •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가정 중심으로 
  • 건물 중심의 신앙에서 내면의 지성소를 건설하는 신앙 
  • 밥상공동체, 사역 공동체에서 관심과 격려, 중보의 신앙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 

이때 그들이 행한 것 - 들어오고 행하던 성경을 비로서 모으고 기록하기 시작 

모세의 성경을 모으고 창세기를 기록하며 창조의 하나님을 기억 

  •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신약 - 예수와 함께 할 때 - 사역 

그런데 그 분이 승천하시고 교회에 핍박이 임하니...전하기만 하던 말씀에서 이젠 그 말씀을 기록

마태가, 요한이, 바울이 감옥 속에서, 유배지에서, 순교의 현장에서 말씀을 기록... 

  • 일 중심의 신앙에서 진정한 말씀 신앙으로...

 

고난이 임하면서 그들이 비로서 말씀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을 두고 묵상하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그들의 현장에 은혜가 임하기 시작한다. 

 

바벨론의 포로들이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니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무너진 성벽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신약의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 말씀을 찾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들의 모든 것을 정복했던 로마가 신앙으로 정복되어 진다. 

 

도망가지 말고 받아들이고 이 받아들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배우자. 

우리가 해야할 훈련과 교육, 그리고 기록을 하자. 

감옥 속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부르고 누가와 함께 성경을 기록하고

밧모섬에서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듯 

각자의 신앙을 기록하고 묵상하고 배우기에 힘쓰자. 

광야는 심판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막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게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개인과외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