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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파멸 (민수기 22장 15-22절)

 

오늘 설교는 발람이라고 하는 좀 특이하면서도 성경에서 이름이 꽤 언급되고 있는 한 이방인 예언자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주제는 금요일날 예배 후에 조한경 집사님으로 부터 질문을 받고 이것 저것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자료도 많이 찾게 되어 토요일 새벽에도 잠시 나누고 또 계속 묵상이 되어 발람을 통해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성도들과 함께 나누어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민수기 본문에서 차지하고 있는 발람의 사건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적 중요성과 발람에 대한 성경의 언급들, 그리고 민수기 에서 다루고 있는 발람과 관련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도대체 성경기자가, 혹은 하나님께서 이 발람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를 같이 나누어 보겠습니다.

 

1. 민수기에서 발람의 사건

먼저 민수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을 지은 이후로부터 약 38여년간의 광야생활을 담고 있습니다.

민수기는 전체가 36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10장초반까지는 첫번째 인구조사를 비롯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이 나옵니다.

10장부터 12장까지는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에서부터 가데스바데아 땅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머물면서 13장에서는 그 유명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땅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잘못된 보고로 말미암아 38년간을 광야에서 보내는 장면이 19장까지 소개되고

20장부터는 이제 38여년을 다 보낸 후에 드디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다시 진격하는 새 시작의 장이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앞길을 막는 시혼왕과 바산왕 옥을 물리치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해 광야를 덮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메뚜기떼 처럼 몰려드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 광야에 머물던 모압왕 발락이 그 지방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는 사건이 22장부터 24장까지 아주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25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락의 백성인 모압여인들과 행음하는 장면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다시 징계 받게 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발람과 발락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정탐꾼들의 잘못된 보고로 말미암아 38여년을 멈추었던 발걸음을 새롭게 정비하여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에 발생된 또 다른 신앙의 방해를 다루는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두 번째 큰 걸림이 되는 사건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점쟁이인지도 불분명하고, 더군다나 나귀사건으로 불리우는 나귀가 소리지르며 발람의 길을 멈추게 하는 사건은 요나의 물고기 사건과 더불어 역사적인 허구로 여겨지는 그런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학자들은 오랫동안 발람에 대한 본문은 그냥 넘겨버리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별 관계 없는 Minor로 취급하며 별다른 연구를 하지 않은 것이지요.

 

2. 고고학적 발굴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성서 고고학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발굴을 하게 됩니다. 1967년 요르단의 데이르 알라(Deir Alla)에서 지진의 잔해로 여겨지는 파괴된 건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검정색과 붉은색 잉크로 새겨진 119 개의 석고 파편들이 발견됩니다. 발굴자들의 연대 계산에 따르면, 그 잔해들은 BC 760년경인 웃시아(Uzziah/Azariah) 왕과 선지자 아모스(Amos)가 있었던 시기로서 여겨지는데 그 때에는 암 1:1, 슥 14:5)에서 표현된 큰 지진이 일어났던 때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그 석고 파편들에는 "”브올의 아들인 발람으로부터의 경고들. 그는 신들의 예언자였다”라는 구절을 비롯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는 문장이나 단어가 똑똑이 여러번해서 언급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발견으로 인해서 그는 실존했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후대 아모스 선지자 시대때 까지 영향력을 끼치던 예언자였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람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발람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의 뜻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인데 5절에 보면 그는 "브올의 아들"이라 소개 합니다.

브올은 누구인가?

1.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인물로 발람의 부친 - 발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해석하는 자들의 견해

2. 모압의 신, 바알브올 - 발람을 처음부터 이방선지자로 해석하는 자들의 견해

 

바로 모압인들이 숭배한 신의 이름으로 바알브올로도 불리며 브올의 제사에는 여러가지 문란하고 부도덕한 행위가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발락은 발람을 통해 하나님으로 하여금 히브리인을 저주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발락이 발람을 어떻게 지칭하냐면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이 말은 누가 누구에게 말한 말씀인가? 창 1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주신 축복의 말씀...

그런데 발락이 이방인 예언자 발람을 그러한 자로 지칭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호칭에 걸맞게 발람은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와:"라고 부르며 하나님은 그의 부름에 세번이나 말씀을 주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발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생각하였다.

 

그는 발락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께 뜻을 물으며 세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뜻을 듣는다.

 

  • 첫번째 하나님을 구하는 장면

[민 22:7-12]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들이니이다 이르기를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 이교적 모습 : 복채를 받고, 밤에 유숙하는 동안에 어떠한 의례를 통해 묻고 답하는 장면

- 신앙적 모습: 여호와라 부르는 모습. 그리고 분명한 응답 -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 (히브리인)들을 저주하지도 말라.

 

  • 두 번째 하나님을 구하는 장면

[민 22:15-20]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 이교적 모습: 더 높은 고관들 (더 많은 복채) , 아무 것에도 거리끼지 말라. (왜? 왕이 곧 신이기에...) 그에게 신은 남을 저주하는데만 필요하다.

- 신앙적 모습: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굉장히 신앙적인 모습)

 

그런데...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밤에 시행되는 의식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 말은 아무리 많은 복채를 주어도 하나님의 뜻만 전하겠다 하지만 한 번 말씀하신 하나님이 뜻을 더할는지 알아보겠다고 스스로의 모순된 말...(말과 행동에 균열...)

 

- 하나님의 응답: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왜 NO하지 않으신가? 이미 발람의 마음이 그 쪽으로 가 있기 때문이다.

 

  • 세번째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장면

2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아브라함이 순종하듯 일찍 일어나는 것일까? 마음이 발락에게 가 있으므로...

22: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 하나님의 사자와 나귀와 발람의 뒤엉킴.

하나님의 사자는 칼을 들고 막아서고 나귀는 그 사자를 피해 돌이키고 발람은 그 나귀를 자꾸만 채찍질하고. (25절)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고 (27절)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심

나귀: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발람: 네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 나는 당신의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느냐?

발람: 없었다.

 

눈을 밝혀 보니 칼을 들고 죽이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왜 이런 장면을 보여주셨을까?

 

22절: 그가 감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거역하는 것은 나귀인가, 발람인가?

죽어야만 하는 것은 나귀인가 발람인가?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냐?

 

34절: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 당신이 나의 길을 막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어서 무엇이라 말하는가?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아니 지금 가는 것을 막으시는 것 자체가 기뻐하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

 

-> 가고 싶으면 가....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

 

가서 얻은 것

37절: 내가 특별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 그가 간절히 원한 것

 

38절: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 정말 멋있는 고백같은가? 정말 위선적인 고백 아닌가?

 

41절: 결정적인 장면-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어디로?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그가 구한 곳

  • 첫번째 예언 - 바알의 산당에서 -> 그러나 이스라엘을 축복 (22:41)
  • 두번째 예언 23:13)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리라. (이 곳 저 곳 터를 달리하면 저주하고자 하는 방법) - 관점에 따라 상대적인 세상의, 사탄의....but 하나님의 진리는 어디에서나 변함이 없다.
  • 세 번째 예언(24:1) :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그러한 그의 사술적인 방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발람의 입술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죽임당한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돌아간 후(민24:25),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데, 그 음행을 벌인 브올 사건이 사실은 발람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민31:16). 입으로는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으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게책을 제공한 이중적인 선지자인 셈이다. 결국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정복할 때 발람까지 죽인다(민31:8, 수13:22)

[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신약성경은 발람을 폐역하고 사악한 사람(벧후 2:15; 유 1:11)으로, 또 이스라엘을 죄 가운데로 유혹하는 자(계 2:14)라고 한다.

 

[벧후 2:15-16]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유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죽임당한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돌아간 후(민24:25),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데, 그 음행을 벌인 브올 사건이 사실은 발람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민31:16). 입으로는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으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게책을 제공한 이중적인 선지자인 셈이다. 결국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정복할 때 발람까지 죽인다(민31:8, 수13:22)

[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발람

하나님의 법과 나라가 완전히 세워지기 전

- 아브라함 때의 멜기세덱, 모세때의 이드로와 같은 미디안 제사장...

동방의 욥 - 히브리인이 아님에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전하는 사명을 주셨다.

발람은 광야의 예언자로서 아마도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자였던 것 같다.

하나님은 나귀의 입술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하셨다.

 

나귀는 서양에서는 가장 고집센 동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발람은 그 고집센 나귀보다도 더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스스로 존귀하게 높아지려는 욕망으로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뜻을 정해놓고 그 뜻을 이룰때까지 기도했다.

발락이 장소를 바꾸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한 것처럼 발람은 자신의 뜻이 관철 될 때까지 주장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한다.

 

그이 입술은 현란하다. 아무리 많은 은금을 주어도 거짓을 말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성경을 읽는 우리 조차도 이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한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누구보다도 발람의 정체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신약성경은 발람을 폐역하고 사악한 사람(벧후 2:15; 유 1:11)으로, 또 이스라엘을 죄 가운데로 유혹하는 자(계 2:14)라고 한다.

 

[벧후 2:15-16]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유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사람의 눈과 귀는 속일 수 있어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먼저 자신의 뜻을 버리라.

자신의 뜻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지 말라.


발람의 이름의 뜻은 "무너뜨리는 자, 파멸자"이다. 자신을 속이는 자는 곧 신앙의 파멸자이다.

무엇이 우리 신앙을 파멸시키는가? 결국 탐욕이고 교만이고 높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은 길이요 좁은 문이라고 한다.

섬기는 자가 되고 낮은 자가 되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데로 임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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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영생을 위해 오늘을 죽는 삶 (사도행전 20장 24절)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기 전에, 이방 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열심히 사역을 하였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나눈 장면과 그의 당부가 그려져 있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유대교인으로서 가장 앞장 서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내어 처형하고자 했던 열심당원이었지만,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열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적인 이력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사도요, 그리스도인이요, 교회의 공공의 적과도 같은 위험에 빠지곤 했습니다. 유대교에선 배반자라는 죄목을 붙여 40여명이나 되는 열심당원들이 그를 잡아 죽이고자 하는 모임이 조직되기도 하였고, 반대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선 그가 진짜 회심한 것이 맞는가? 회심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사도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끊임없는 의심과 깎아내림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죽을 것이다. 암살단이나 적대적인 유대교인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그를 만류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행 20:22-23]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무슨 소리입니까?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내 임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매여 간다. 사실 그가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도 원래 채비를 다 갖추어서 1차전도여행으로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 위해 떠나고자 했지만 성령께서 그의 목적지를 바꾸어 유럽땅 마게도냐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성령께서 이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 명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구절을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오직 성령이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신다.

 

성령이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그 길은 평탄하고 환영받는 길이 아니라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고 미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사도행전 21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 21: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곳곳에 흩어져서 바울을 붙잡고자 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까지 따라와서 그를 붙잡게 한 것)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행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행 21:30-31]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행 21: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얌전히 끌려 나간 것이 아니라 들것에 실려 나갈 정도로 지금 폭행을 당하고 죽을 위험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일 당할 것을 알고 그리로 들어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을 밝힌 구절이 우리가 읽은 24절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

 

난 내 목숨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예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완수하고 내 삶의 경주를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 임무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것 - 주가 주신 일을 완수하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것 - 다 이루었다. - 값을 치루었다. 저들의 죄를 사했다.

사도바울의 사명 -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

 

우리가 읽은 21장 후반절- 죽을 위기에 폭행을 당하고 들것에 실려 들려나가는 바울

 

[행 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22장 23(유대인들 앞에서-> 공회 앞에서-> 로마로 가서 가이사 앞에서...) 선포

 

꼭 미친 사람처럼 육신은 지금 다 죽어 가는데 기운 날 때마다 나가서 전파...

 

자기가 말한 대로... 왜 그래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 저렇게 지독하게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하시는가? 너무하지 않은가?

 

비전 -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삶을 보는 것

소명 - 부르심을 아는 것

바울은 분명한 부르심의 사건이 있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중 다메섹 길 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건 - 사도행전 9장

 

예수를 만났지만 예수가 어떤 목적을 위해 바울을 불렀는지 깨닫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나니아에게 가서 안수를 받게 하는데 그 때 아나니아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

 

[행 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니니아가 바울에게 이것을 전했는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면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지내면서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시간을 거쳐 그의 사명과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고난 받아야 할 것을 깨닫고 보게 되는 시간...

 

예수를 만나고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목적이 바뀌었다. 비전은 갖는다는 것은 게으른 자가 열심히 된다는 정도가 아니다. 삶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보았지만 대개의 신앙의 위인들 - 사명을 주셨을 때 즉각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

모세, 예레미야, 이사야, 기드온..... 자신의 익숙한 삶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바울은 거절하지 않는다. 뒤돌아서지 않는다.

왜 그는 가치 있는 것에 자기 삶을 바칠 줄 아는 열심이 있는 자였기 때문.

열등감과 자기 비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남들을 바라보며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 비전이 주어져도 행동하지 못한다.

오직 가치 있는 것에 자기 전체를 부을 수 있는 자- 비전이 주어지면, 목적지가 주어지고 방향이 주어지면 거치름이 없다.

 

[빌 3:7-14]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 구절이 유명한 구절인데 정말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이 도대체 무언가?

영어 성경도 관계대명사 절로 해석이 난해하다.

 

예수님께서 나를 잡으셨는데 나도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그것을 나도 붙잡고 싶은데 그것은 예수님께 잡힌 바 된 나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여러 주석들도 다 제각각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공동번역 성경]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현대어 성경] 그리스도께서 내게 바라는 사람이 될 그날을 향해서 계속 노력할 뿐!

[한글 흠정역]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그것은 곧 나의 가능성! 나의 창조의 목적, 내 삶의 비전

예수가 붙잡은 것은 현재의 나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실 바로 그 모습을 붙잡은 것이고 바울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예수가 붙잡은 그 모습, 바울의 비전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바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것이 제일인 줄 알고 좋은 학벌, 좋은 가문, 좋은 스승에 심취해있던 바울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의 중요성을 알아 그것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다가

바나바와 갈라서고 마가를 꾸짖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일의 목적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성품의 연약함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고, 결국 데모데와 누가와 마가같은 사람들을 불러 동행하고자 하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무엇이라 말하는가?

 

[행 20:28-32]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 삼가라: Keep watch over yourself. -자기 및 양떼를 위해..
  • 여러분을 감독과 교회의 보살피는 자가 되게 하셨다.
  • 그와 반대의 사람 -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는 이리. 자기를 따르게 하기 이해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

 

24절 다시

주 예수께 받은 사명 - "디아코니아"

디아코니아-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 - 봉사, 심부름꾼...

디컨 (Deacon)이 이 단어에서 출발 -교회에서는 "집사"

 

사명은 무엇인가? 예수께 받은 임무- 심부름꾼. 내가 예수의 심부름꾼이라는 의식이 좋게는 청지기의식, 직분으로는 집사직분.

그런데 예수께 받은 그 사명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수가 나를 보고 붙잡은 내 가능성!

내 참모습. 나를 창조하신 이가 나를 바라보시면서 붙잡은 바로 그 모습.

그 모습을 붙잡고자 실수하고 실패해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바울.

 

궁금하지 않으세요?

예수께서 당신을 바라보며 붙잡고자 하는 모습은 무엇인지?

그 모습을 깨달으며 당신도 그 모습을 붙잡고자 경주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난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나, 내 자녀, 우리 로고스 교회를 바라보면서 예수가 붙잡는 그 것을 깨달아가는 재미보다 더 큰 재미가 있을까?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지 않을까?

 

한 십년 가까이 초등학생 장래희망 - 공무원...

대학생이라면 그래 그럴수도 있지.... 그런데 초등학생 때부터 안정된 직장

그거 아니면 건물주, 먹고 놀아도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 삶이 정말 재미있을까?

 

비전을 위해 열심을 낼 수 있는 자는 영생을 위해 오늘을 죽을 수 있는 자이다.

부흥은 다름아닌 내가 무엇을 위해 죽을까? 내 삶은 무엇하다 살까가 고민이 아닌 난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비전이고 부흥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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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내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민수기 14장 7-9절)

 

1. 되돌아보기

지난 시간, 마가복음 4장 18-22절 말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을 가지고 비전을 소명과 사명과 연관시켜 살펴 보았다.

 

비전은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나를 보고, 타인을 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얻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애써 보아야 하나님의 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에바다"하듯이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경험케 하신다. 그래서 비전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는 마음이 곧 소명이다.

소명은 Calling, 곧 하나님이 나를 특별한 목적을 향하여 선택하시고 부르셨음을 깨닫는 마음이다. 그리고 부르신 자에게 주신 것이 사명, 곧 부르심에 대한 특별한 임무, 소명에 대한 책임감이다.

소명은 나를 부르신 자를 아는 것이고 사명은 내가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지, 나의 임무를 아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소명은 거룩에의 초대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 비전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먼저 거룩이다. 뜻을 정하여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거룩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 사랑할 수 있는 비전을 주시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참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2. 도입 - 비전,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보는 것.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

오늘은 그 중에서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과연 어떤 눈을 갖게 하시길 원하시는가? 나에 대한 비전을 갖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민수기 1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내가 비전을 가진 다는 것은 단지 꿈을 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나를 본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볼 적에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죄와 벌>을 쓴 도스도에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대로 본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채 살아간다.

 

3. 하나님의 안목과 자신의 안목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사명을 주어 부르셨을 때에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출 4:10, 13) 라고 말했다.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라"라고 부르셨을 때에 예레미야는 "나는 어린아이라 말할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꾸했다.

[렘 1:5-6]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동시대를 살았던 이사야를 선지자로 불렀을 때, 이사야는 더 나아가 "화도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 (사 6:5)라고 말했다.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라고 말했다.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불렀을 때, 기드온은 미디안이 무서워 두려워 떨던 겁쟁이였다.

 

4.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 - 열등감과 교만함, 자기비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끔찍이 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보지 못한다.

대부분 참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하나님 주신 나의 고유함을 바라보는 대신에 남을 통해 자신을 보려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함을 통해 나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감과 교만함은 결국 하나이다.

남과 비교해서 우쭐한 것이 교만이고 남과 비교해서 움츠려 드는 마음이 열등감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교만함을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고, 판단하고, 높이 올라가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끝이 없고, 쉼이 없고, 결국 남을 무너뜨리려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

열등감과 교만함은 사탄의 강력한 무기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의미로 우리의 비전을 가로 막는 것은 '자기 비하', 혹은 '자기 학대'이다.

남과 비교하며 교만하거나 열등의식을 갖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기 안에 갇혀 끊임없이 자기를 비하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이 잘못된 자기 사랑의 표시라면 자기 비하는 전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표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전을 포기한 인생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다른 사람을 본다. 자신의 영혼의 창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내 안에 있는 세상을 통해 모든 것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모든 관계 형성의 열쇠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남을 대할 때도 끊임없이 나 자신과 비교한다.

그 사람이 나보다 잘 난 것이 있으면 내가 겸손해져서 다가가고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 생각하면 교만하여져서 함부로 대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보다 잘 나 보이면 나 자신의 교만함을 위해 상대하지 않고

나보다 못나 보이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가가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역시 무심한 것 같으나 혐오하거나 아얘 상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자식을 대할 때도 자신과 자녀의 인격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자기 비하의 전형 적인 예

"이런 못된 놈의 자식" "00놈의 자식"

자기의 자녀에게 이런 욕을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결국 자기가 못된 부모, 00이라는 존재라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5. 자기 안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 - 언어

그 사람의 언어를 보면 그가 비전의 사람인지,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사람인 지 알 수 있다.

 

작년 말에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 우리 육신에 있어서 혀, 말의 역할 - 배의 키, 말의 재갈-> 결국 인생의 목적, 방향이 말에 달려 있다는 것.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이 행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가 그 방향으로, 목적대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시면서 행하신 것 -

-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킨 것

- 홍해를 갈라 백성을 건너가게 하시고 애굽 병사들을 물리치신 것

-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신 것

- 만나를 내리신 것

-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것

- 공중의 매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신 것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갖가지 기적의 선물 세트를 다 보여 주신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의 12지파 대표 각 1명씩을 뽑아 정탐하러 보낸다.

정탐한다는 것은 보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라는 것이다.

 

이 때 그들의 안목이 드러난다. 누가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보는지, 누가 열등감과 자기비하로 자신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보는지....

 

먼저 정탐한 자들이 본 내용 (객관적 사실)

[민 13:27-28]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이 사실을 가지고 열 명의 정탐꾼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사실의 해석) 

[민 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부정적 언어)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비교에 의한 열등감)

악평하여 이르되 (잘못된 판단)

거주민을 삼키는 땅 (거주민이 누군가? 가나안 민족, 아낙 자손- 그들이 땅에 삼켜졌는가?) - 사실 왜곡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 자기 비하.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 - 막연한 추측에 의한 잘못된 판단.

-> 라합을 비롯한 가나안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을 때에 두려워 떨었더라.

 

실재 가나안 사람들의 히브리인들에 대한 반응.

[수 2:9-11]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을 통해 보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본 것은 라합과 가나안 사람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만을 보았다.

 

비전은 무엇?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는 것.

 

그들은 왜 자신들을 그렇게 보았는가?

하나님 이전에 애굽에 있을 때의 자신들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노예생활 하던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우리가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세계는 애굽의 세상. 노예로서 항상 부러워하고 눌려하던 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 불신앙은 불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

멸시 : These people treat me with contempt

contempt: 무시하다. 모욕하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어디서? 애굽에서...

그들이 당한대로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이다.

 

6.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민 14:7-9]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심히 아름다운 땅 Vs 거주민을 삼키는 땅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면 (경멸하지 않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무시하지 않고) 인도하고, 들이시고, 주신다.

Guide, Get a ticket in the Entrance, and give them to the land.

거역하지 말라. - 인정하라. 받아들이라. 맞이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 왜 여호와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지 않고 귀족이었나? 모세처럼 왕족이었나?

아니다. 똑같이 노예였다.

더군다나 갈렙의 족보를 살펴보면

[민 32: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그나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로서 에돔족속의 조상이다.

 

새벽예배시간에 에스더서 - 하만 - 아말렉 족속 아각의 후예,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후예

그런데 그 똑같은 에서의 후예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사람

 

갈렙의 족보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대상 2:18-20]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그 아내 아수바와 여리옷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 낳은 아들은 예셀과 소밥과 아르돈이며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이 그로 말미암아 훌을 낳았고 훌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

 

그는 아수바와 여리옷, 그리고 마지막에 에브랏이라는 아내를 맞게 되는데 한 성서학자에 의하면 아수바와 여리옷은 애굽에 있을 때에 얻은 처요, 에브랏은 출애굽 당시의 아내

그에게서 나은 아들이 훌, 그 훌의 손자가 브살렐

훌은 누구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준 사람

초대교회 역사가 요세푸스는 훌을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소개.

 

그리고 그의 손자 브살렐 - 오홀리압과 더불어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데 총 책임자.

 

[출 31:2-5]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에돔의 후예였던 갈렙의 자손이 어떤 지파에 속하게 되는가? 유다지파....

다윗과 예수님의 지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열악한 배경과 환경에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했다. 그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나중에 가장 고령이면서도 기개있게 아무도 가지 않은 땅, 헤브론 땅을 취하면서, 비전의 사람이 된다.

 

7. 결론 여러분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치유받은 세상, 하나님이 충만한 세상을 지니고 그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신앙 생활 하면서도 여전히 이전의 세상, 부모와 타인으로부터 욕먹던 나, 멸시받던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천국의 시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삶의 다인것 같은 세상의 풍조와 문화와 가치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젠 그 세상을 떠나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에게 거저주신 그 땅 안의 사람,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비전은 결국 하나님이 바라보는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회복된 나로 세상을 바라볼 때, 꿈이 열리고, 열매가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린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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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거룩과 사랑에의 초대 (마 4: 18-22)

 

[마 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비전-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타인을 보는 것.

비전 - 무엇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 소명, 곧 사명과 연결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된 책

그 목적이 바로 소명 (Calling) - 내가 이 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 부른 자에 초점. 소명이 있는가?

사명 (duty, mission, responsibility) - 내 임무, 책임감 - 소명을 받은 자가 가지는 책임감.

 

지난 시간 설교의 본문 말씀 창세기 13장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임해서 "눈을 들어 지금 서 있는 그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다니라" 하신다.

비전은 주님의 말씀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바라본 세상을 두루 다니는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하나님은 조급함을 싫어하신다. 비전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조급함이다.

조급할 때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인내했더니 이삭이 태어난다. 조급했더니 사울은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방향이 잘못된 경우 속도가 빠르면 오히려 비극을 가속화 시킨다.

비전은 옳은 방향을 선택하고 걸어감과 동시에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돌이키고 걸어가지 않는 것이다.

 

한 방향을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외의 방향을 포기하는 것이다.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뜻을 정했다고 한다. 무슨 뜻을 정한 것일까?

왕에게 쓰임받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비전을 본 것이다. 그가 정한 뜻은 거룩함이다.

그는 왕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선택했다.

 

  • 그리스도인이 된 다는 것 - 내 결단, 내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다가옴. 하나님의 선택

모든 그리스도 인들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소명,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얻었는가?

바로 거룩이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은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귀하게 쓰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깨끗한 그릇이다.

깨끗한 그릇을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고난은 고통스러운 환경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인간관계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힘든 환경이나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모난 부분을 깎으신다.

고통스러운 환경을 통해 우리를 낮추시고, 고통스러운 관계를 통해 우리를 거룩케 하신다.

 

[신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웠다.

하나님이 귀히 쓰신 인물들은 고난 중에서 위로 성장하기 전에 아래로 성장했다.

외적으로 성장하기 전에 내적으로 성장했다.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자신을 변화시키라. 환경을 변화시키기 전에 자신의 속마음을 변화시켜라.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켜라.

어떻게 생각을 변화시키는가?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생각을 변화시키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니엘처럼 분별력이 있다.

분별력은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됨을 아는 능력이다.

무엇에 자기 자신을 투자하고 무엇에 자기를 피할 줄을 아는 지혜이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절제할 줄 알고 자기가 피해야 할 사람과 때와 장소를 분별하고

자기가 교제 해야할 사람을 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는가?

자신을 깨끗히 하라. 거룩함을 열망하라. 거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이다.

 

거룩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소명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사명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비전은 새롭게 보는 능력이고 다르게 보는 능력이다. 그러한 비전의 시각은 사랑의 시선과 함께 간다. 비전과 사랑은 같은 눈을 가진다.

 

비전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 속에 감추어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는 능력이다.

누가 새롭게 볼 수 있고 잠재력과 가능성을 볼 수 있는가?

누가 아이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가?

바로 부모이다. 왜?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비전을 본 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를 그 사람에 대해 비전을 품게 된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비전을 보았다.

 

[마 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깁는 것을 보셨다. 그 모습 속에서 사람낚는 어부, 예수의 제자의 모습을 보았다.

 

'흔들리는 갈대'라는 의미의 시몬에게서 '반석'이라는 베드로를 보시고 결국 뜨거움과 차가움을 오르락내리락 하던 베드로는 요동치 않는 믿음의 소유자 반석이 되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윗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양들을 칠 때에 양들을 돌보는 다윗을 통해 연약한 영혼을 보살 필 줄 아는 목자의 마음을 보았고

자연 속에서 누구도 보지 않을 때에 수금을 타며 찬양하는 예배하는 다윗을 보았다.

 

[삼상 16:1]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삼상 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아버지는 양을 지키는 다윗을 하찮케 보았지만 하나님은 양을 지키는 다윗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았다.

 

양들을 돌보며 수금타며 찬양하던 다윗이 사울의 부름을 받는다. 부르심은 소명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수금을 타기 위해 부른 다윗에게 사울이 맡긴 것은 단지 수금을 타는 것이 아니라 "무기 드는 일"을 맡긴다.

사명을 주는 것이다.

 

[삼상 16: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물고기 낚던 베드로에게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 하신 예수님처럼 사울은 수금 타러 부른 다윗에게 수금타는 일이 아닌 무기드는 임무를 맡긴다.

 

부르신 자에게 주는 뜻밖의 사명은 때론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때론 생각지 못한 일을 맡기신다.

수금타는 자에게 수금을 타게 하시지 않고 물고기 낚는 자에게 물고기를 낚으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기드는 일을 맡은 다윗은 얼마 되지 않아 골리앗을 상대하여 그를 제압하게 된다.

수금타는 일과 무기드는 일이 절묘하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다윗의 일생을 통해, 아니 그를 넘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과 전쟁하는 일은 놀랍게도 동떨어진 일이 아닌 하나의 일이 된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전쟁의 맨 앞에 찬양대를 앞세우고 전쟁에 나선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사명은 내가 원해서,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부르신 이가 맡긴 일을 감당하는 것이고, 그 일에 충성할 적에 비로서 맡긴자의 뜻이 드러나게 된다.

사명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순종이요 충성이다.

 

예수께서 그물 던지는 베드로를 보시고 그를 부르시는데 베드로는 그 그물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는다.

예수께서 자기 아버지의 배에서 그물 깁는 요한을 보시고 그를 부르는데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좇는다.

 

하나님은 내 실력을 보시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의 삶 속에서 뜻밖의 것을 찾아 그것을 사용하신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서 주어지는 뜻 밖의 일, 내가 전혀 원치 않고, 해 보지 못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절묘하게 나를 다듬어 가신다.

 

사랑은 상대방의 현재 모습 그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모습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면서 이미 그렇게 변한 듯이 대하는 능력이다.

괴테는 "한 개인을 대할 때 그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는 사람 대하듯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그러한 비전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셨다.

 

비전을 본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면 비전을 보게 된다.

 

믿는 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소명은 거룩에의 초대다.

비전을 얻기를 원하는가? 뜻을 정하여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거룩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 사랑할 수 있는 비전을 주시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참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양치기 소년 다윗을 발견하여 수금타는 다윗으로 하여금 그것으로 전쟁을 승리하게 하셨고

예수님은 물고기 잡는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세상을 낚게 하셨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뜻밖의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세워가시고 가다듬어 가시고 온전하게 하신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알게 하고 남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신다.

 

거룩을 열망하고 비전을 꿈꿔라. 비전은 다름아닌 사랑하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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