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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감사가 곧 행복입니다. (누가복음 17:11-19)

by 소리벼리 2022. 11. 27.

감사가 곧 행복입니다. (누가복음 17:11-19) 

 

11월 한 달은 한 해 동안의 우리 삶을 되돌아 보면서 추수하면서 감사하는 달로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등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고도 예수님께 다시 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인으로 인해서 감격해 하셨습니다. 동시에 문등병을 고치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다른 아홉명에 대해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17절 - 18절)

그러나 단순한 내용이지만 말씀 한절 한절을 들여다보며 묵상하면 더할 수 없는 신앙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펴 놓고 한절 한절 깊이 이 말씀을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Now on his way to Jerusalem, Jesus traveled along 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

  •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과 같은 곳이고 우리가 궁극적을 가야할 하늘나라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마리아는 더럽혀진 땅이고 죄악의 땅이고, 유대인들이 상종치 않는 땅입니다.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수르에 의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에 앗수르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하면서 혼인을 통한 식민화 정책에 의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피가 더럽혀진 사람들"로서 경멸과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갈릴리는 북쪽 끝의 도시이고 예루살렘은 남쪽의 도시이기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이 사마리아 지방은 우회해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지방의 경계선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오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눅 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 그러한 사마리아 지역의 한 마을에 나병환자들이 살고 있었나 봅니다. 이들은 일단 문등병이 걸리면 추방되어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가지 않는 그곳에서 함께 모여 산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병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문등병이라는 것은 아파도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죄를 지어도 무감각하고 이것이 죄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손가락이 부러지고 상처가 나도 도무지 아픈 줄 모르는 병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문등병을 죄인의 상징처럼 중하게 여겨 저주받은 병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병보다 더 중한 고통은 일반일 누구와도 상종치 못하는, 어울리지 못하는 짖눌린 소외감에 있습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변두리에 사는 것이 바로 문등병자들의 삶이었습니다. 
  • 예수를 만나: 그렇게 소외되어 아무 낙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더군다나 누구나 회피하고 따로 고립되어 살 수밖에 없었던 문둥병자들에게 있어서 이 만남은 최고의 기회를 가져다 주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와 병의 치료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은 교회 오래 다녔다고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성경공부했다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에서도 오직 38년된 병자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건 내가 그 분을 발견하고 그 분의 지나감을 놓치지 않는 자가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데도 여전히 괴롭고, 두렵고, 힘들다면 다시 예수 만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다가 지금 이 시간 다시 힘들어 지셨다면 예수님 다시 만나셔야 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멀리서서: 멀리 서서)은 당시 문둥병자들의 생활 환경의 일면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적어도 50야드(백보)는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가 내 앞에서 지나가는데도 가까이 나가지 못하고 멀리서서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 죄인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가까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감히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지 못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멀리감치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 넘어 무리를 뚫고 지붕을 뚫고 나무에 올라가서 주님을 가까이 바라보다 주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비록 그렇게 멀리 서서 예수를 바라보더라도 예수가 그를 외면치 않으시고 주목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주 가까이 나아오지 않더라도 우리를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눅 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그들의 질병으로 인해, 죄로 인해, 사회적인 규범으로 인해 그들은 멀리서서 주님을 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는 먼 거리지만 그 거리를 채우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함의 표시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꼭 큰 소리로 기도하여야 하냐, 하나님이 작은 소리는 못들으시냐 하면서 크게 기도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못 들으셔서 크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절하기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죽음의 길, 절망의 길, 소망없는 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주님을 붙잡으려는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르짖는 기도가 수없이 나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 3)”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특별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시편에는 그가 얼마나 자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환란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 6)”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30 : 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 1-2)”

또한 예수님 스스로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눅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  5:12-16에는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갖다대시며 권위있는 치료의 말씀으로 고치신 사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는 그가 그 열 사람의 문둥병자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각자 그들이 온 마을이나 촌으로 가서 정결법 준수 여부를 감독하는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단순히 명령만 하셨습니다. 
  • 그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물러갔다: 더러는 그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별 기대 없이 실망하고 돌아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향해 갔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에 행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안믿어지는대도 불구하고 한 번 해보기라도 하자 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보다, 잘 안믿어지는대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자가 오히려 믿음 있는 자입니다. 
  • 가다가: 가는 도중. 자기도 모르게.... 말씀을 믿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얻은 깨달음.

처음부터 말씀 하실 때에 문등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다보니 문등병이 나았습니다. 순종할 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 가득 물을 담아 손님들에게 갖다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들은 자기 주인도 아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항아리 가득 물을 채우고 이동합니다.요한복음 2장 9절에 보면 연회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좋은 포도주를 맛보고도 이것이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그 말씀에 순종했던 "종들은 알더라"하고 증언합니다. 순종하는 자들만이 주가 하신 일을 압니다. 경험합니다. 

 

14절에서 예수도 멀리 떨어진 채로 '나았다'는 선언도 없이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았다는 말 한마디나 어떤 다른 행위도 없이 그냥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기 위한 명령입니다. 너희가 내말을 믿고 의지해서 제사장에게 나아갈 수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연회장에게 항아리에 가득채워 물을 가져다 주라고 하지 가다보면 포도주가 되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순종을 통해 주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그 순종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앞 구절을 보면  

17:5: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17:6: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17: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라. 

-> 믿음은 무엇이냐? 주께 받은 명령을 마땅히 다 행하는것. 주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믿음은 단지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눅 17: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 고침을 받은 것은 열명인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주님 앞에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합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18절)

어디있느냐?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 모습. 어디 있느냐? 다른 사람들은 어디가 있느냐?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  지금 온 자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은 자를 간절히 찾으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올 사람들이 안왔다는 것입니다.

 

  • 대부분의 관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 예수님 만나서 응답받는 것. 그래서 응답받으면 할렐루야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응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그 경험을 통해 주님과의 더 깊은 교제와 관계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풍성히 누리게 되었는가? 죄에서 멀어지고 주님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는가? 그들의 삶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는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깊은 삶으로 돌아왔는가?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오직 내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영광은 그냥 좋은 일 생겨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그 분이 드러나신 것이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 그 행복한 삶으로 나아오는 것. 하나님과 교제하고 함께 하는 삶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문제해결하였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살아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영광이요 또다른 우상숭배일 따름입니다.  

 

  • 자, 지금 열명의 문등병자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 중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인은 함께 다니지 않지요. 그런데 그들이 같이 있었다는 것은 문등병때문에 같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적인, 신앙적인 차이보다 훨씬 더 불행하고 가혹한 상황때문에 평상시 상종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이 치료를 받자 그들은 또다시 분리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분리가 예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도 찾아가서 그들 구원하고 제자 삼지요. 즉 예수님 안에서는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명의 유대인 문등병자들은 고침을 받은 것 때문에 다시 사마리아인과 분리되어 사라졌습니다. 예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고침받고 죄인의 길로 다시 들어간 것이지요. 

다시 말해 감사가 없는 생활이란 무엇인가? 은혜를 경험하고도 구원의 길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받아놓고도 멸망의 길로 다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감사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9절) 

일어나 가라: 엎드렸던 것에서 일어나라! 회복하라. 가라: 이제 되었다. 완성되었다. 이루었다. 

주님은 엎드려 있는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 

 

* 감사하지 않는 자의 마음 

1. 이기적 본성

 아홉 문둥이들이 예수로부터 치유를 받고도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들은 이제 건강하게 된 이상 예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 감사하는 자의 마음 

 이스라엘의 절기 :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초막절(수장절) 

 이 절기 만큼은 다같이 모여 기념하라. 기억하라. 하나님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Thank-think (감사는 기억에서부터) 

 단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경험하는 것- 무교병을 먹고, 초막을 지으며.... 출애굽하던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하나님의 역사-> 아무리 커도 기억하지 못하면 잃어버린다. 홍해를 건넌 후 3일 만에 불평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감사한다. 기억하지 못하면 현재는 언제나 불행하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는 감사하고 감사하는 자는 주꼐로 돌아오는 자이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는 구원을 완성시키는 자이고 그는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자이다. 그 영광을 누리는 자이다. 감사가 곧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