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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원치 않는 것을 따름 (요 21:18-19) 


지난 주 설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 그 이름의 의미, 물에서부터 건저낸 자. 그의 인생의 대 사건- 홍해를 건넘과 출애굽

구원받은 자의 삶. - 포기의 삶(애굽의 왕자로서의 삶. 애굽의 영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된 삶.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께 대한 원망, 불신, 의심의 삶. 자기 의의 삶, 자기 열심의 삶

좋은 뜻을 가졌지만 그 방법은 자기 방법, 자기 열심. 

네 신을 벗어라. 불타는 떨기나무... 마르고 가시많은 나무- 모세의 모습. 앙상한 가지, 가시 투성이, 소진된 삶. 

이제 내가 너를 쓰리라. 나를 의지하라. 나의 방법대로 살아라... 네 권리를 나에게 맡기라. 

 

"네 신을 벗어라"의 신약적인 표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 진정한 사명을 주시는 장면. 

오늘 나눌 말씀입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시냐면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목되는 말씀은 19절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의문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는 이 말씀은 주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따르라 하면 따르겠는데 이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려고 하는데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로 따라 올라가라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가서도 나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로 따라 오라는 소리가 아닌 이상 이 땅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이전에 따르던 모습과 어떻게 다르게 따르라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제자 삼으실 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하루 하루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고단한 어부의 사는 삶을 사는 베드로에게 예수꼐서는 이제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 뒤로 3년 동안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랐습니다. 

그는 제자 중의 제자.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렇게 3년동안 예수님을 죽으나 사나 따라 다녔는데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럼 그 동안 따른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1장 18장 19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구절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요 13: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면서 이제 잠시 너희와 함께 있을 테지만 조금 지나면 너희를 떠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떠난다는 소리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 올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나를 따라온다고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날 위해 죽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서 날 배반할 것이다. 

-> 이 때까지의 베드로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르고, 앞장섰지만 그 열심은 누구의 열심입니까? 자기의 열심입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입니까? 자기의 의를 위한 열심입니다. 창찬받고,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한 열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인정받고 높아지는 한에서 열심을 냈지만 정작 자기를 인정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자기 한계 안에서의 신앙입니다. 자기 배를 위한 신앙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신앙을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닌 신앙"이라 말씀합니다. 

"스스로 띠 띠다"는 말은 "스스로 옷입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가 주인된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옷입고 포장하고 드러내기 위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베드로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말이겠습니까? 

왜? 그는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을 제외하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하라는 대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스스로 옷입고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말에 항변하고 거절했던 베드로가 이 말에는 감히 항변하지 못합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 주님께 가고자 했던 열심이 주변을 바라보다 빠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고백했던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만류하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하시면서 책망받는 자가 됩니다. 

주님을 붖잡으려는 마고의 귀를 베려다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하면서 힘으로 해결하려는 베드로의 태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는 말이 하루 밤 사이에 돌변합니다.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 21: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반대로 늙어서는 어떻습니까? 

남이 옷 입히고 남이 인도하는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가리키는 남은 누구입니까? 


물론 나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 신앙이 성숙되면 타인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고, 보살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그러나 이 때으이 남은 결국 주님이 승천하시면 오실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내 열심, 내 행위대로 주님을 따랐지만 이제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옷입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데로 해석하고 싶은데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몇번씩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데도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헤롯왕까지도 삼일 후 부활하신 다는 말을 기억하는데 제자들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하는 데로 신앙생활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너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주님이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인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비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인류의 구원을 맡기셨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승리하도록 허락한 두가지는 단 두가지 입니다. 

1. 서로사랑해라. 한 마음으로 화합하라. 

2.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 외에 내가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주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 머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령이 임하자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자기 재산을 헌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유물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나면 교회에 모이고 거기서 밥먹고 예배하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모이는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흩으사 믿는 자들이 하나 둘 씩 흩어져 전 세계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흩어지는 곳마다 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또 다른 제자들이 생겨나고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모이는 부흥이 아니라 흩어지는 부흥으로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 자기 행위,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결국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무한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제한한 세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난 여기까지만 믿어야지. 자기가 기도의 시간, 예배의 참여 다 제한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의지하는 자는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을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면서 하시는 것 

이름을 바꾼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베드로를 시몬으로 바꾸신다. 

무슨 소리인가? 

이젠 네 이름으로 살지 말고 내가 인도하는 삶으로 살아라. 

내가 준 사명 안에서 살아라. 


기도는 무엇인가? 

내 욕망의 표출로서 요구하고 청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두 팔을 벌려 성령이 내게 옷입히고 그 분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기도다. 

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기 까지 싸우면서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컸 부르짖고 울었다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부르짖듯이 그 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성경을 쓰고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이 들렸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단, 내가 깨달은 말씀이 정말로 성령께서 주신 말씀인지 성경과 교회의 전통 안에서 그것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성령은 질서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인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난 예수를 사랑하는가? 

난 예수를 신뢰하는가?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해도 난 그 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린아이의 믿음- 자기의 옷을 입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장년의 믿음 - 그리스도로 옷입고 원치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는 맡겨진 길을 가는 것

청지기는 맡은 것을 감당하는 것. 

십자가는 자원하는 것이 아니다. 

맡긴 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십자가 지기를 자원하라? 

사람많은 큰 교회도 늘 봉사자가 부족하다고 한탄...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정받고 싶은 일, 자기가 호고 싶은 일... 

그런데 십자가는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네 팔을 벌리리니...(이제 내 한계에서 벗어나 비로서 주님께 내 맘을 여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살 것이라는 말씀의 완성이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믿음은 팔장을 끼는 것이다. 

두 팔을 잠그고 오직 "나, 나, 나"만 생각하고 나만 나타내고 밖으로의 음성에 문을 닫는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제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 했던 주님은 오늘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물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멀찍이 따르는 제자 (눅 22:54-57) 


베드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12명의 제자 중에서도 중요한 곳에 함께 했던 세명의 제자, 그 세명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수제자는 누가 뭐라해도 바로 베드로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5장 1-11절) 이 장면은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너무나 인상이 깊은 장면이기에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눅 5: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눅 5: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1절: 무리는 해변가에서 말씀을 듣는데 어부들은 대신 그물을 씻고 있다.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들릴 리 없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로 치면 그들은 이 때에 길가에 속한 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갑자기 시몬의 배에 오르십니다.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시몬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여전히 무리들을 보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가 내 삶에 들어오긴 했는데 여전히 그 말씀이 나에게 들리지 않고, 내 삶의 한 부분이 되긴 했는데 그 말씀의 뜻도, 자신의 관심도 별로 없었던 신앙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배에 오르신 주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다가 드디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4) 


이것은 객관적인 말씀에서 나에게 하신 말씀, 로고스에서 레마로, 일반적인 하나님에게서 나의 하나님인 여호와로의, 얕은 물 신앙에서 깊은 물 신앙으로, 무리에서 제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중심에 들어오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로 베드로는 줄곧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으뜸인 수제자가 됩니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가로막힌 물 사이로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하며 몰아치는 물에 뛰어들어 예수님을 향해 갔을 정도로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데 가장 앞선 자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인해 수많은 인파가 예수께 몰려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하시면서 자신이 하늘로 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말하심과 동시에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을 때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하면서 어려울 때에도 예수님을 지켰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에 있어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했던 바로 그 고백,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마 16:16절) 라는 교회의 기초가 되고 모든 신앙인의 고백의 기초가 되었던 바로 그 위대한 고백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꼐서 알게 해준 사건이기 떄문입니다. 이 고백은 유대인 누구도 생각할 수 조차 없었던 고백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다윗왕의 영화를 되찾게 해줄 하나님의 대리자, 대언자이지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어 오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고백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믿는 자의 고백의 중심이 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 이후로 예수님은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와서 해야 할 일, 바로 십자가와 구원의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가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예수께 항변했다? "rebuke"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예수를 도리어 꾸짖었다. 혼내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니까 안된다고 하면서 예수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꾸몄던 계획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베드로가 사탄의 계략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이고 희생을 통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 사탄의 일은 무엇입니까? 적당히 가고 죽지 말고 가고, 고생없는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베드로의 모습은 갈팡질팡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앞장섰던 제자에서 가장 실수 많고, 칭찬과 꾸짖음이 반복되는 불완전하고, 무언가 분열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을 짓고 살자라는 뚱딴지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다가 거듭되는 예수의 십자가 예언을 무시하고 외면하기도 하고,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라는 논쟁의 사이에 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발을 씼기시는 예수님에게 절대 안된다고 하다가 그럼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그럼 발 뿐만 아니라 온 몸을 다 씻어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금 장소가 만찬을 하기 위한 다락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베드로의 요구는 좀 엉뚱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 이후로 베드로 삶의 변화 

- 자기 신념, 확신, 고정관념에 의한 믿음 (붙잡고 싶은 말씀만 붙잡고,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는 믿음, 예수님과 함꼐 있지만 실재로 그가 보는 것은 자기 내면의 욕망만을 보는 것) -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목적 (왕이 되기 위해, 크기 위해, 좋은 자리 얻기 위해) 

- VS 예수님의 말씀 (십자가를 향하여...) 구원을 위해, 영생을 위해...


그 절정의 순간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를 앞두고 벌어집니다.

[눅 22:31-눅 22:34]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마 26:33-마 26:35]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왜 그의 이 고백은 거짓 고백으로 될 수 밖에 없을까요? 그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마 26:36절부터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 26:36)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너희가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다. 

무엇으로부터의 시험인가?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이요, 공격이다. 

사탄을 이기는 능력은 기도 외에는 없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검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길 힘이 없다. 

기도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의 고백이자 몸부림이다. 


왜 상식에 근거한 신앙, 자기 확신, 신념에 근거한 신앙이 무너지는가? 

사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무너뜨려서 제 정신을 잃게 만든다.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잘못된 선택, 잘못된 행동으로 후회하게 한다. 


자, 예수님이 잡혀 갔다. 자기 눈앞에서 함께 죽고자 했던 예수가 끌려갔다. 너무도 힘이 없고, 너무도 무력하게 예수가 세상에 끌려갔다. 

예수님은 자기가 말씀한 대로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데 자기 생각에 갇혀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는 멀어져간 주님을 보며 앞장 서던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가장 앞장 서던 자가 이젠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Peter followed him at a safe distance 

<베드로가 안정거리를 두고 예수를 따라갔더라> 

앞장 서던 베드로가 적당히 신자가 됩니다. 안정장치를 두고 한 발은 예수를 따르고 다른 발은 이제 도망하여 세상으로부터도 욕먹지 않고, 고난 받지 않고, 언제나 도망갈 방도를 마련해 두고 예수를 쫓은 것입니다. 

그래도 뒤돌아서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본 바가 있고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죠. 



이 장면을 요한복음에서는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요 18:15-요 18:18]

(요 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요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요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요 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요한은 뜰 안까지 가서 예수를 보는데 베드로는 처음에 문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한이 블러서 그를 데리고 오는데도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찍이 예수를 바라보다가 이제 아랫사람들과 함께 둘러 서서 불을 쬡니다. 

이것은 무슨 장면입니까? 

자기의 믿음으로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랫사람들의 여론이 어떠한지, 언제나 예수의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서서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고, 문밖에서, 바깥뜰에서, 사람들 옆에서 예수와 점점 멀어지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다가 "너도 예수편이지" 하니까 부인하고 저주하며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세번씩 부인하는 것! 이것이 멀찍이 따르는 베드로의 결말입니다. 


여러분의 안전장치는 무엇입니까? 

Return Policy: 한국에서는 반품하려면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절차가 복잡한데 여기와서 제일 놀라고 좋은 것이 영수증만 있으면 몇개월 지나도 반품....

결혼도, 삶도....결혼 안하고 동거하는 문화... 왜? 피할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조롱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변질되고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여러분도 사람들의 여론을 들으면서 안전장치를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믿긴 믿되 적당히 믿자. 거리를 두자. 안전장치를 두자.....그렇게 점점 베드로처럼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은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면 그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십니다. 


은혜는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이미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눅 22:31-눅 22:32]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서도 도망쳤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번씩이나 물으시면서 그 안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치유하시고 다시금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양들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수십번 수천번 주님을 배반하고 여전히 안전장치를 하면서 주님을 멀리하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런 나에게 네가 날 사랑하냐 하시면서 식었던 사랑을 일깨워 주시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주님의 친구로,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시는 로고스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베드로의 신앙여정 (누가복음 5장 1-11절)

 

(요 1: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1. 만남 

 

아버지는 요한, 형제는 안드레 

가버나움에서 아내와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형제인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께로 나옴

 

안드레- 예수님 이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

            똑같이 어부였지만 그는 갈릴리를 떠나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될 정도로 진리를 탐구하는 자였다. 

            그런데 동생 베드로는 진리 보다는 생활이 먼저였다. 그는 아내 뿐만 아니라 장모까지도 돌봐야 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는 말씀을 듣고 따른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대면한 더욱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눅 5:1-11) 

 

1절: 수많은 무리가 해변가에서 말씀을 듣는데 어부들은 말씀을 듣는 대신 그물을 씻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신다.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안드레를 통해 예수를 소개 받았지만 정작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 보다는 하루하루의 삶이 더 급했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해변가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베드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이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우선순위는 항상 고기 잡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아내와 장모를 돌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오셔서 자기 배에 오르셨다. 

자기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그가 내 삶에 들어와 버렸다. 

 


자기 인생에 들어오셔서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자기 배에 오르셨는데도 무리를 향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아직까지 개인적인 말씀을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자기를 향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누군가 다른 자들, 무리들을 향한 말씀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그 말씀을 깊이 듣지도 않는다. 

어쩌면 짜증을 냈을 수도 있다. 이제 쉬어야지 내일 또 고기 잡으러 가는데...저 말씀은 언제까지 하실까?...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저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먹고 살기 괜찮은 사람들만 듣는 말씀이라 여겼는지 모른다.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언제나 

"너의 삶을 주관하시고 너의 하루 하루를 책임지시는 주권자가 누구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전쟁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은 되었지만 정작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더 의지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였다. 

 


베드로는 광야에서의, 가나안에서의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리 천국의 귀한 말씀을 들려주어도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 얘기이고 뚱딴지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직접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하늘의 말씀을 들려주신 후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다. 

하루 하루 걱정스레 살던 베드로에게, 이것 때문에 따르지 않던 진리의 말씀을, 결국 진리의 말씀이 그의 삶의 고통을 다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깊은 데- 그가 살았던 삶은 그야말로 얕은 삶이었다. 얕은 신앙이었다. 

 

             이미 예수가 자기 인생에 들어와 있고, 그의 인생에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자기에게 향한 말씀으로 듣지 않았다. 

            38년된 병자가 은혜의 집이라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언젠가 때가 되면 은혜를 받겠지 하며 막연히,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베드로는 말씀을 듣기는 해도 그 말씀을 통해 진정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 앞에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한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멀리했던 진리의 삶, 신앙의 삶이 결국 하루 하루를 이기게 하는 능력임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이 삶은 이제 하루 하루 살 걱정을 하며 똑같은 삶을 살아가던 베드로에게 보다 깊은 삶의 목적... 영혼을 구원하는 위대한 삶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2. 환경이냐, 예수냐 (마 14:22-33)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가 이제 온 이스라엘에 소문이 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예수는 그들을 건너편으로 가라 말씀하신다. 그것도 예수 없이 그들을 물 가운데로 보낸다. 

 

그 사이에 있는 사건,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내가 뉘게로 가로리까? 이젠 말씀을 쫓는 자가 된다.

왜 물 가운데로 보내는가? 자기 배 부르기 위한 신앙이 아닌 참신앙, 깊은 물의 신앙, 내가 죽고 주가 사는 삶으로의 초대이다. 

 

큰 기적 이후에 그들은 예수 없이 험한 폭풍우를 만난다. 폭풍우 속에서 주님은 그들 곁에 없다. 없다고 느껴진다. 

밤새 폭풍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말한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어떤 물인가? 

 

 죄인인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이다. 사망의 물이다. 

 애굽과 광야 사이를 가로막은 물, 홍해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땅을 가로막은 물이다. 바로 세례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은 물, 요단강이다. 바로 말씀의 물,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이다. 엘리사가 가죽옷을 헤치며 걸었던 그 물, 성령의 능력이다. 

 그 물을 지금 예수를 바라보고 건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 14: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 14: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첫번째 베드로에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그치게 한다. 

 

신앙 생활은 결국 내 배에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분을 내 배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3. 믿음과 상식 

 

(마 16: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은 자란다

이제 내 삶의 주인, 환경을 넘어선 믿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에게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살아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아닌 여전히 세상의 상식에 기초한 믿음이다.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이다. 자기에 근거한 믿음은 감정만큼이나 요동치고 위험하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예수님은 비로서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반응은 무엇인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예수께 항변했다? 

대적했다는 것이다. 예수를 대적하는 자! 그것은 사탄이다. 그것이 상식이든, 사랑이든, 예수의 길을 대적하는 자, 바로 사탄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이 후부터 베드로의 삶은 참 믿음이 무엇인가하는 여정이다. 상식과 신념에 근거한 믿음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인가? 

 

변화산상에서 그는 "여기가 좋사오니....," 

 

그 절정에 마지막 만찬 사건이 있다. 

(마 26: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에 대해 주님의 대답은 싸늘하다. 

(마 26: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설명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덧붙여진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 26:36)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너희가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다. 

 

무엇으로부터의 시험인가?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이요, 공격이다. 

사탄을 이기는 능력은 기도 외에는 없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검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길 힘이 없다. 

 

왜 상식에 근거한 신앙, 자기 확신, 신념에 근거한 신앙이 무너지는가? 

사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무너뜨려서 제 정신을 잃게 만든다.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잘못된 선택, 잘못된 행동으로 후회하게 한다. 

 

4. 결국은 사랑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회개를 일으키는 것도, 무너진 나를 일으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다시금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배신자인 내가 다시금 주님께 염치없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엔 계산이 없다. 

거기엔 불사름만 있다. 타오름만 있다. 일어남만 있다. 

 

베드로는 다혈질에 속한 사람이다. 미국 레슬리 플린(Leslie B. Flynn) 목사는 베드로에 대해 ‘갈릴리 호수 같은 사람이다’고 했다. 갈릴리 호수는 잔잔하고 평온하다가도 순식간에 노도광풍이 몰아치는 알 수 없는 바다이다. 베드로는 성격이 갈릴리 호수 못지않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베드로를 처음 본 예수는 그에게 게바라 새 이름을 주신다. 요동치는 그에게 절대로 요동치지 않는 성품, 바로 사랑을 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베드로의 신앙을 연단하시고 그리고 다듬어 가셔서 결국 성숙케 하셨다. 

 

공회원들이 무서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고 담대히 말하고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말에 “사람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나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고백한다. 행4:18-21). 

 

  되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었던 그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고 권면하는 자가 된다. (벧전5:5). 

 

  산중에서도 기도하다가 잠자다가 정신 못 차려서 예수님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버렸던 그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권면한다. (벧전5:8). 

 

  늘 준비성 없이 즉흥적으로 행하다가 실패한 그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본받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되”라고 권면한다 (벧전3;15).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실수가 많은 사람, 실수가 없기에 조심하는 사람. 

누군가를 짝사랑하는데 어떤이는 고백했다가 툇짜 맞을까봐 그저 그런 관계로 쭉,,,

어떤이는 툊짜 맞더라도 용감히 고백. 

베드로는 언제나 앞장섰던 자. 그래서 실수도 많았던 자.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나서기가 쉽지 않다. 점점 움츠려들고 조심하고 가만히 있어서 본전만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본전을 유지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모험이 없는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먼저였다. 그래서 칭찬도 제일 많이, 꾸지럼도 제일 많이 받았다. 

요동치는 그의 성격을 과감없이 예수님께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처음부터, 아주 처음 부터 베드로라 부르셨다. 시작부터 예수님은 그를 다듬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시몬은 게바, 즉 베드로, 반석이 되어 죽는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신앙, 결국 다듬어져 말씀을 이루는 신앙. 

그가 바로 베드로,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베드로 

(요 1: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1. 만남 

아버지는 요한, 형제는 안드레 

가버나움으로 옮겨 아내와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형제인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께로 나옴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는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는 장면. 


이 장면이 누가복음 5장에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눅 5:1-11) 

1절: 무리는 해변가에서 말씀을 듣는데 어부들은 대신 그물을 씻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신다.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안드레를 통해 예수를 소개 받았지만 정작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해변가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베드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이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우선순위는 항상 고기 잡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아내와 장모를 돌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오셔서 자기 배에 오르셨다. 

자기 인생에 들어오셔서 듣지도, 들리지도 않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저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먹고 살기 괜찮은 사람들만 듣는 말씀이라 여겼는지 모른다.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언제나 

"너의 삶을 주관하시고 너의 하루 하루를 책임지시는 주권자가 누구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전쟁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은 되었지만 정작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더 의지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였다. 


베드로는 광야에서의, 가나안에서의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리 천국의 귀한 말씀을 들려주어도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 얘기이고 뚱딴지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직접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하늘의 말씀을 들려주신 후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리고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다. 

하루 하루 걱정스레 살던 베드로에게, 이것 때문에 따르지 않던 진리의 말씀을, 결국 진리의 말씀이 그의 삶의 고통을 다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깊은 데- 그가 살았던 삶은 그야말로 얕은 삶이었다. 얕은 신앙이었다. 


그 앞에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한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멀리했던 진리의 삶, 신앙의 삶이 결국 하루 하루를 이기게 하는 능력임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2. 환경이냐, 예수냐 (마 14:22-33)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 예수는 그들을 건너편으로 가라 말씀하신다. 

그 사이에 있는 사건,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내가 뉘게로 가로리까? 이젠 말씀을 쫓는 자가 된다. 

큰 기적 이후에 그들은 예수 없이 험한 폭풍우를 만난다. 

밤새 폭풍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말한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어떤 물인가? 

 죄인인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이다. 사망의 물이다. 

 애굽과 광야 사이를 가로막은 물, 홍해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땅을 가로막은 물이다. 바로 세례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은 물, 요단강이다. 바로 말씀의 물,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이다. 엘리사가 가죽옷을 헤치며 걸었던 그 물, 성령의 능력이다. 

 

 그 물을 지금 예수를 바라보고 건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 14: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 14: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첫번째 베드로에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그치게 한다. 


신앙 생활은 결국 내 배에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분을 내 배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3. 믿음과 상식 

(마 16: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은 자란다. 

이제 내 삶의 주인, 환경을 넘어선 믿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에게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살아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아닌 상식에 기초한 믿음이다.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이다. 자기에 근거한 믿음은 감정만큼이나 요동치고 위험하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예수님은 비로서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반응은 무엇인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예수께 항변했다? 

대적했다는 것이다. 예수를 대적하는 자! 그것은 사탄이다. 그것이 상식이든, 사랑이든, 예수의 길을 대적하는 자, 바로 사탄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이 후부터 베드로의 삶은 참 믿음이 무엇인가하는 여정이다. 상식과 신념에 근거한 믿음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인가? 

변화산상에서 그는 "여기가 좋사오니....," 


그 절정에 마지막 만찬 사건이 있다. 

(마 26: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에 대해 주님의 대답은 싸늘하다. 

(마 26: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설명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덧붙여진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 26:36)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너희가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다. 

무엇으로부터의 시험인가?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이요, 공격이다. 

사탄을 이기는 능력은 기도 외에는 없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검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길 힘이 없다. 


왜 상식에 근거한 신앙, 자기 확신, 신념에 근거한 신앙이 무너지는가? 

사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무너뜨려서 제 정신을 잃게 만든다.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잘못된 선택, 잘못된 행동으로 후회하게 한다. 


4. 결국은 사랑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회개를 일으키는 것도, 무너진 나를 일으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다시금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배신자인 내가 다시금 주님께 염치없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엔 계산이 없다. 

거기엔 불사름만 있다. 타오름만 있다. 일어남만 있다. 


5. 최후 

쿼바디스의 명장면 

예루살렘에 임한 핍박을 뒤로하고 예루살렘을 피해 도망치는 베드로 

그 때 만난 예수님 

"쿼바디스 도미니?"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의 말씀 

"네가 버린 십자가를 내가 지러 간다." 

"네가 버린 십자가를 내가 지러 간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지고 가겠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죽기까지 말씀을 버리지 않는 자가 된다. 

다시는 배신하지 않는 자가 된다. 



베드로는 다혈질에 속한 사람이다. 미국 레슬리 플린(Leslie B. Flynn) 목사는 베드로에 대해 ‘갈릴리 호수 같은 사람이다’고 했다. 갈릴리 호수는 잔잔하고 평온하다가도 순식간에 노도광풍이 몰아치는 알 수 없는 바다이다. 베드로는 성격이 갈릴리 호수 못지않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베드로를 처음 본 예수는 그에게 게바라 새 이름을 주신다. 요동치는 그에게 절대로 요동치지 않는 성품, 바로 사랑을 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베드로의 신앙을 연단하시고 그리고 다듬어 가셔서 결국 성숙케 하셨다. 


공회원들이 무서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고 담대히 말하고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말에 “사람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나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고백한다. 행4:18-21). 

  되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었던 그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고 권면하는 자가 된다. (벧전5:5). 

  산중에서도 기도하다가 잠자다가 정신 못 차려서 예수님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버렸던 그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권면한다. (벧전5:8). 

  늘 준비성 없이 즉흥적으로 행하다가 실패한 그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본받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되”라고 권면한다 (벧전3;15).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실수가 많은 사람, 실수가 없기에 조심하는 사람. 

누군가를 짝사랑하는데 어떤이는 고백했다가 툇짜 맞을까봐 그저 그런 관계로 쭉,,,

어떤이는 툊짜 맞더라도 용감히 고백. 

베드로는 언제나 앞장섰던 자. 그래서 실수도 많았던 자.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나서기가 쉽지 않다. 점점 움츠려들고 조심하고 가만히 있어서 본전만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본전을 유지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모험이 없는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먼저였다. 그래서 칭찬도 제일 많이, 꾸지럼도 제일 많이 받았다. 

요동치는 그의 성격을 과감없이 예수님께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처음부터, 아주 처음 부터 베드로라 부르셨다. 시작부터 예수님은 그를 다듬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시몬은 게바, 즉 베드로, 반석이 되어 죽는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신앙, 결국 다듬어져 말씀을 이루는 신앙. 

그가 바로 베드로,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