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42018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  
  •  
 

로뎀나무에서 (왕상 19:1-8절) 


엘리야의 시대 - 아합왕 때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대 부흥기였지만 신앙적으로는 극심한 타락기 

바알과 앗세라가 하나님을 대신하던 시기 

성경엔 이러한 시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첫 타락 -아담...어디에서? 에덴 동산 (기쁨, 행복의 공간. 부족함이 없는 공간..) 그 곳에 임한 사탄의 유혹..너 그거 없잖아! 

가나안의 타락 - 어디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왜? 가나안 족속을 쫓지 않아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가축이 너무 많아서..

사울의 타락- 블레셋을 물리친 후..왜? 다윗의 인기가 자신보다 높아서..

다윗의 타락 - 전쟁의 휴무기에 성적인 타락과 인구조사의 타락 

솔로몬의 타락 - 지혜를 얻은 후에..

부자청년... 너무 부해서 


우리의 신앙 판단 기준- 상황이 좋으면 믿음생활도 좋은지 착각---상황이 신앙을 보장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이 그 삶의 신앙을 보여주는 잣대가 절대 아니다! 

교회의 성도수가 그 교회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첫 번째 만날 때는 훈련받지 않고 자기 신념, 자기의 말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만났습니다. 

두번째 만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큰 비를 내릴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합을 만납니다. 그러나 큰 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모두 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사이의 엘리야의 신앙적 여정 

1. 그릿 시내가- 말씀의 훈련 

2. 사르밧 ㅡ 말씀의 적용 훈련, 우선순위의 훈련..

           -- 동역의 훈련 

           --중보의 훈련 


그 다음 말씀을 따라 아합왕에게 가서 큰 비의 소식을 전함.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므로 다시 한 번 다룰 것임.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가 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회개의 선지자, 능력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 한 명의 위협에 도망하였을 뿐 아니라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 성경에 등장하는 3대 영적 침체

민수기 11장 - 모세의 침체, 열왕기상 18장 엘리야의 침체... 

복음서의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말씀을 통해 본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1. 형편을 보고 (모세, 엘리야, 예수)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골방의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하나님 앞에 단독...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기 속 동굴로 들어간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엘리야와 모세는 죽기를 간구-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역설적 소망, 예수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갈기를 간구->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드러나 있는 영적 교만감 - 내가 열심이 특심하여.... 

모세) 내가 그들의 아버지입니까?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목회자) 설교 이후에 성도들에 대한 기대...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Posted by 소리벼리

 둘째날 저녁

 

로뎀나무에서 (왕상 19:1-8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면 “엘리야”라고 하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두 명을 만나 대화하는데 하나는 모세이고 하나는 엘리야였습니다. 사람들도, 예수님도 엘리야를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꼽았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으로 여겨지는 아합 왕 때에 부정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합왕은 하나님만 예배했던 성전은 바알과 앗세라의 선지자로 가득한 성전으로 바뀌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1000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이 1000명의 아내와 첩을 두고 그들을 위하여 산당을 지어주어 이스라엘을 분열시켰던 것 처럼 누구를 아내로, 파트너로, 사랑하며, 의지하며 사는가? 누구를 기대어 사는가가 어떤 삶을 사는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합의 아내 여왕 이세벨은 이방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엣바알은 이름의 뜻이 “바알과 함께”의 뜻으로 바알의 신부, 숭배자였고 여신 아세라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버지, 혹은 자기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세벨의 원 의미는 ‘순결, 순수’를 뜻하는데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겉으로는 가장 순결하고 순수하게 보였지만 그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섬겼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민족이 섬겼던 우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상인데 그들이 이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땅의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신적인 힘이 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농부들은 이러한 힘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신전에서 음란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신전 안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소위 거룩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자극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면 비가 내려 땅을 적시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을 위한 신앙, 땅에서의 삶을 위한 예배는 결국 바알과 앗세라를 위한 신앙입니다. 자기 만족, 감정에 충만한 예배는 결국 바알과 앗세라를 위한 예배일 수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 한 후에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아세라의 신전과 제단을 지었고 음란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와서 보살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영향 안에서 사는냐가 그의 온 인격과 삶과 그리고 평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이 나의 하나님이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엘리야와 바알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였던 아합왕과 그 배후 이세벨의 대결은 그렇기 때문에 이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인가를 보여주는 영적 전쟁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릿시냇가에서,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납니다. 

첫번째 만날 때는 훈련받지 않고 자기 신념, 자기의 말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만났습니다. 

두번째 만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큰 비를 내릴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합을 만납니다. 그러나 큰 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모두 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가 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회개의 선지자, 능력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 한 명의 위협에 도망하였을 뿐 아니라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말씀을 통해 본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1. 형편을 보고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기 속 동굴로 들어간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한별이 임신했을 때. 일하다가 크게 하혈....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난 더 힘들었다. 넌 너무 유난떤다. 유별나다. 

그런데 그 때 그 한 마디가 더욱 사람을 구렁떵이로 빠뜨린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기도하자. 

Posted by 소리벼리

본문 : 열왕기상 19 1-18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면 엘리야라고 하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 시대인 아합 왕 때에 부정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당시의 왕 아합은 반대로 이스라엘 역사상 우상숭배와 탐욕스런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준 악한 왕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아합의 아내 여왕 아세라는 이방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엣바알은 이름의 뜻이바알과 함께의 뜻으로 바알의 신부, 숭배자였고 여신 아세라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버지, 혹은 자기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세벨의 원 의미는순결, 순수를 뜻하는데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그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섬겼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민족이 섬겼던 우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상인데 그들이 이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땅의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신적인 힘이 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농부들은 이러한 힘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신전에서 음란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신전 안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소위 거룩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자극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면 비가 내려 땅을 적시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 한 후에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아세라의 신전과 제단을 지었고 음란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와서 보살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영향 안에서 사는냐가 그의 온 인격과 삶과 그리고 평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이 나의 하나님이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엘리야와 바알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였던 아합왕과 그 배후 이세벨의 대결은 그렇기 때문에 이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인가를 보여주는 영적 전쟁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함께 바알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고 있을 때에, 엘리야는 왕 앞에 나타나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슬린 형벌로 수년 동안 우로가 없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아합왕은 분노했겠지요, 이 분노를 피해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겼으며, 여호와께서는 매일 그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 등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셨다. 그의 예언대로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강물도 얼마 후에 말라 버렸지요.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으로 보내어 보내어 우리가 잘 아는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떡을 지어 먹게 합니다. 마지막 남은 그것을 주의 종에게 공궤하자 비가 올 때까지 그 집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되고 이어 아들이 병에 걸렸는 데도 죽지 않는 역사가 나타나죠. 시돈 땅이 어디지요? 바로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던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이름없는 과부를 통해 하나님이 엘리야를 먹이시고 또 그 때문에 그 과부에게 축복하시는 거죠.

3년 후, 계속 비가 오지 않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했다고 여기는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의 위협에 도망한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엘리야- 슬럼프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입니다. 육체적으로 지치고, 감정적으로 고갈됨. 그리고 누군가 그의 목숨을 위협. 이 때 일어나는 감정: 두려움, 적개심, 죄책감, 분노, 외로움, 걱정->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상태. 우리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다. 의기소침해 있었다.

슬럼프는 자신의 문제에 갇혀 부정적으로 생각 할 때 온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온다. 사람의 감정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이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낙심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가 지금 낙망하고 있습니까?

[왕상 19:3-왕상 19:4]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 사실들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해버리고 맙니다.  

           -> 감정은 항상 현실을 과장하고, 극대화하고 종종 거짓말을 합니다. 한 영역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에서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감정이 아닌 진실에 귀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

슬럼프의 두 번째 원인- 자신을 남들과 비교함으로 나쁜 감정으로 치달게 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고후 10: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 비교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일한 존재로 만드셨고 누구를 흉내내어 살지 않도록 인도합니다. 누구나가 나만의 삶의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맞게 훈련하신다.

           3. 잘못된 비난을 하지 말라.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저는 열심히 일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주님과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자책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의 기대와 현실, 혹은 하나님의 응답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이세벨입니다. 사탄이 그를 위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연약함이 현실 모두를 자기의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저희가 내 생명을 취하려 하나이다."

           -> 모든 사람이 나를 대적합니다. -> 단 한 사람만이 그를 위협하고 있다. 그것도 단지 말로 대적하고 있다.

           이세벨-사자를 보내 협박, 정말 죽이려면 자객을 보내어 죽였을 것이다. 그녀는 백성들의 지도자를 죽일 수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18절에보면 아직 이방 종교에 굴복하지 않은 수천 명의 선지자들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치료방법

           1.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라.

           [왕상 19:5-6]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하나님은 그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쉬게 하시고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 주신다. 영혼을 회복시키기 이전에 육체를 회복케 하신다.

           2. 속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라.

           [왕상 19:8-왕상 19:9]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원기가 회복된 다음 동굴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냄. 동굴- 골방

           -> 엘리야야,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엘리야는 자기 속내를 모두 토해냈다. 하나님은 그가 울분을 통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억눌렸던 감정들을 분출하게 하셨다.

           엘리야는 많은 것들을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감정만도 두려움, 적개심, 죄책감, 분노

           "저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전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가 없자 허무하고 화가났다. 외로워서 절망했다.

           여기서 무엇하느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느냐?  무엇이 너를 집어 삼켰는냐?

           3.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으라.

           [왕상 19:11-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바람, 지진, 불의 모습->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했던 모습,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인생. 전쟁과도 같은 영적인 전쟁. 사역의 연장. 지금으로부터 말하면 큰 부흥회만 다니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또한 수 많은 영적인 우상들과 전쟁하던 삶->

하나님의 응답- 불과 지진과 바람도 나의 능력이지만 난 너와 은밀히 교제하기를 원한다. 은밀한 교제를회복하자하고  나지막한 소리.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심->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투가 아닌 하나님과의 은밀한 속삭임. -> 새로운 일을 주심. 그리고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 일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1) 첫째는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삼는 것이었고, 2) 두 번째는 예후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북이스라엘의 왕을 삼는 것이었고, 3) 세 번째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의 뒤를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고 아합에게 예언했다 (왕상 21:23).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 이세벨이 예후의 말에 따라 내시에게 창문으로 던져져 죽은 다음 장사할 때는 두개골과 수족 외에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개들이 그 시체를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삼는 예후에 의해서 이세벨 여왕은 창문으로 던지워저 죽임을 당하고 개들의 먹이가 됨.        

지금도 우리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복 받으려면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 때로는 타협할 수도 있어야하고 부정한 것도 눈감아 줄 수 있어야 하고, 때론 술자리도, 음란한 자리도 낄 줄 알아야 한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죄이다. 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모든 것이다. 때로 그런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는 지치고 상하고, 넘어진다. 끝없는 사탄의 괴롭힘에 지긋지긋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드시 끝나는 전쟁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넘어져도 결코 우리에게 실망하지 않고 또한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연민에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도 원치 않으시고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목적과 방향을 주신다. 우리를 도와 주신다. 그런데 사실 이런 침체에 빠지면 다시 회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로뎀나무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고 기력이 회복한 다음 사십일을 가서 호렙에 간다. 사십일 길을 가서 호렙에 간다? 낯선 단어들 아닌가? 바로 모세가 바로의 궁을 빠져 나와 사십년 동안 광야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I am Nothing의 시간,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시간이다. 자존감이 무너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영적으로 보면 축복의 시간이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또한 힘든 시간이다. 그것을 연단을 다 거친 엘리야,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를 맛보았던 엘리야가 다시 그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에 한 번 선 자들은 될 수 있으면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침체가 이르기 전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예화: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볍고 편한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침체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