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72018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사도, 목자 없는 양을 먹이다!(마가복음 6장 30-44절)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2지파의 정탐꾼 - 가나안땅을 정탐하라. 

각 지파의 가장 지혜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한다. 

열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땅을 보고 자신을 본다. 그 땅은 너무 좋지만 자신들은 너무 약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땅도 나쁜 땅이라고 폄하한다. 지혜가 그들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땅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약하지만 그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은 나를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소망을 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교회 2015년도 표어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이 말씀을 늘 기도하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먹일 수 있는 선교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번 우리가 첫 번째로 함께 사역한 나바호 선교를 준비하면서, 또한 사역을 감당하면서 저는 정탐꾼의 심정이 되어 우리가 이들을 먹일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하는가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지역, 산호세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이었고, 이곳에서부터 강제 이주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살기 힘든 땅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곳에서 다른 세계와 차단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백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한이 서려 그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자기들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중학교까지는 학교가 있지만 고등학교에 가려면 한두 시간 도시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의무 교육인 고등학교조차 가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조상때 부터 써오던 나바호어를 젊은 세대들은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불과 100여년 전 한국 땅에 온 선지자들은 "이 땅에도 과연 복음의 빛이 비췰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에도 그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우리 나라에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이 땅 미국의 원주민을 향한 복음의 장에 초대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 연약한 우리지만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개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 위에 축사하셔서 수 많은 영혼들을 먹이고 남는 것이 없게 하신 후, 낭비 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교회가 쓰기에 넉넉하도록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실 것입니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먹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1. 기쁜소식 (이스라엘과 복음)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밤- 어두운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집으로... 또 내일 걱정)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선포>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은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2015년도의 우리 로고스교회의 표어는 바로 이  "너희가 먹이라"라는 이 말씀이었다. 

처음 이 말씀을 나눌 때에는 누굴 먹여야 할지, 무엇을 먹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단지 먹이라는 말에 누굴 먹여야 할지, 어떻게 하여야 할지 기도했다. 

그러던 중 주신 지혜, 너희 교인 가운데서 가장 필요한 연령이 어디이냐? 

아이들이 없고, 30대 어른들이 너무 없어요. 

그럼 너희 주변에 어린 아이들과 30대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공부방. 아이들 숙제를 돌봐 주는 사역. 

그런데 전반기 지날 때까지 마음만 있는데 자원이 없었다. 

하고는 싶은데 아이들 숙제를 봐줄 자원 봉사자도 없었고, 혼자 하려니 엄두도 안났다. 

그런데 갑자기 수련회를 앞두고 한 집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이 지역 elementary school 학부형인데 한글학교 자리를 알아보고 다닌다는 것

그분을 통해서 한글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글학교 시작되면서 그 분은 나오질 않고 연락이 끊어졌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보다 낫다 할지라고 먹이고 품을 수 있는 성도, 내가 비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여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고 사도이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교회 안의 관계- 섬겨라, 발을 닦아 주어라! 낮아져라. 그러면 산다. 

가정- 배우자! 너희가 먹여라. 내가 먹일 존재라고 생각하면 화평하다. 

서로 상대방을 통해 내가 먹으려 하니까 사랑이 아닌 거래가 되고 늘 내가 대우 받지 못하는 것 같구...

 

 우리를 통해 열방을 먹이시는 주님! 

 2015년 그 분께서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2지파의 정탐꾼 - 가나안땅을 정탐하라. 

각 지파의 가장 지혜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한다. 

열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땅을 보고 자신을 본다. 그 땅은 너무 좋지만 자신들은 너무 약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땅도 나쁜 땅이라고 폄하한다. 지혜가 그들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땅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약하지만 그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은 나를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소망을 보는 것이다. 


2015년도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교회의 사명,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주신 말씀이 "너희가 먹이라"라는 이 말씀이다. 

지금까지 제가 목회한 3년동안 우리는 광야를 지내왔고, 없는 중에 우리를 먹이신 하나님의 기적을 체혐했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체험한 우리에게 너희가 저들을 먹이라 하신다. 

아직까지 "누굴 먹여야 할지, 무엇을 먹여야 할지" 모른다. 단지 기도로 준비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다. 


우리보다 낫다 할지라고 먹이고 품을 수 있는 성도, 내가 비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여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고 사도이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먹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산, 오병이어, 그리고 나 


두 시간에 걸쳐서 니고데모(3장)와 사마리아여인 (4장)과의 만남. 

유대인 관원이었던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구원, 모든 민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고 독생자를 주셨다. 그 독생자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 3:16절)

사마리아 여인들에게는 너희가 신실함은 있는데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 예배의 대상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예배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대상자는 바로 나다. 내가 그다." 하면서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야 할 예배를 말씀하신다. 

 

 5장에는 중요한 사건 하나가 나오는데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 

 예루살렘의 양문 곁 (예배 때 드릴 어린양을 바치는 곳) 

 베데스다 연못- 은혜의 집, 교회, 예배. 

 그런데 은혜의 집에 풍성한 은혜가 없다. 은혜를

사모해서 사람들이 찾아갔는데 풍성한 은혜가 없다. 가장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갔는데 필요한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 

  • 가끔 천사가 나타나 은혜를 주고 있다. 누가 은혜를 입었는가? 

      은혜라고 하면 무능한 사람에게 임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사람이 은혜의 혜택을 받음. 

  • 구약의 은혜, 율법의 은혜- 선택된 백성에게 임한 은혜, 구별된 사람에게 임한 은혜
  • 신약의 은혜 - 누구나 은혜를 사모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 예수님의 은혜는 특별히 가장 무력한 사람에게 임함. 

상황적 배경-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이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 5:3) 

  •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 -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서 자신들의 행위(내달려서...) 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    
  •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갔기 때문이다고 생각하기 때문... 나도 언젠가 그 연못에만 들어가면 세상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러나 정작 자기 힘으로 그 연못에 들어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세상의 죄인들이 바로 소경이요 절뚝발이고 중풍병자들이다. 
  • 가데스 바데아 - 여호수아가 열두 정탐꾼을 보낸 땅. 우리 힘으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한 땅.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곳에 들어갈 수 없어하면서 유리구걸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 네가 낫고자 원하느냐? 한마디를 가지고 다가가시는 주님.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니고데모나 베데스다 연못가의 사람들---내가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인정받겠지. 들어가겠지... 

은혜를 잃어버리고 오직 자기 방법만 남은 사람들... 


자, 이제 6장으로 넘어와서 우리가 몇번 나누었던 오병이어의 사건.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하시나? 

먼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오병이어 기록의 특징 

다른 복음서는 장소가 빈들이다. 음식을 구할 수가 없는 장소.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만큼은 장소가 산이다. 

  • (요 6:3)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산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산상수훈 마 5장에 함께 나누었던 산상수훈.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 여러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에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제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안 자들이 주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나아오는 곳. 제자들이 모인 곳 -> 산 

  • (요 6:4)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희생제사를 드리고 믿음의 식구들이 모여 유월절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큰 무리들. 무엇을 소망하면서 오는가? 구원, 영생, 치료, 영원한 것을 희망하여 오는 자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마치 자기가 무엇을 믿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예배하는 사마리아여인의 몰골과도 같이 너무 불쌍한 것이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마가복음 6:34) 


구약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백성들이 빠진 범죄 - 우상숭배 

하나님과 바알을 하나님과 아세라를 겸하여 섬김. 

왜 겸하여 섬기는가? 자기들의 영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육적인 만족,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세상의 신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 너희들이 언제까지 둘 사이에서 방황하려느냐? 

바알이 비를 내리고 풍년을 내리는 줄 아는가? 

그거 다 내가 주는 것 아니냐?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모든 복과 저주도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 그 사건이 엘리야와 바알, 앗세라 선지자와의 갈멜산 전투. 


자, 참 제자, 그리스도인들

육신의 떡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지금 산으로 오른 자. 

말씀을 사모하기에 육신의 떡이 없는 것도 알지 못하고 주님과 머물러 있기 원하는 자.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지금 영적으로는 이들이 주님을 알기 시작했고,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오르고 제자가 되었고, 또 제자들을 따라 산에 올랐다. 

그런데 육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궁핍하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여인, 영적인 체험이 없었다. 오직 육적인 믿음으로만 신앙생활 했다. 

거듭나야 된다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야 되나요? 하고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준다니까 빨리 줘서 다시는 물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영적인 말씀을 육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오병이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각각 마을로 보내어 귀신을 쫓게 하고 병을 고치게 하고 복음을 선포하게 한다. 이른바 영적인 훈련을 시키시고 영적인 능력에 눈을 뜨게 한다. 

그리고 나서 몰려오는 무리들을 보시고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까?" 하고 묻는다.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반대로 영적인 사람은 또한 육적인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38년간의 신앙의 연단을 그쳐 마침내 약속의 땅, 은혜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범한 죄-> 우상숭배다. 

영적인 것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이제 육적인 것은 세상의 법에서 얻으려는 것이다. 


요한복음만의 특징 2.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요 6:7) 


은혜 충만한 사람- 난 떡이 없어도 말씀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은 없습니다. 난 없습니다. 주님만 있습니다. 주님이 다 해주세요.  

각 사람으로 받는 것- 계산을 0원. 

오직 하나님이 다 하실꺼야... 

이건 교회에서 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결과는 한 아이의 헌신. 

아이- 계산 없는, 순수한 헌신. 깨끗한 헌신. 

각 사람의 것을 조금씩 받아도 - 0원. 

그런데 각 사람이 아니라 한 아이의 깨끗한 헌신, 계산없는 헌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

장정만 5천명- '계산하는, 걱정많은, 믿음없는....' 을 먹임.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요한복음만의 특징 3. 

  •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 하나님의 은혜를 낭비하지 말아라. 흥청망청 하지 말아라. 헛된 것이 쓰지 말아라. 
  •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 열두 지파- 교회를 가득 채웠다. 뭐 후에? 모든 자들이 배불리 먹고 난 후에.. 


오병이어 교회 

- 먹을 것이 풍성한 교회... 배고픈 자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먹일 수 있는 교회 

   그런데 누가 먹느냐? 말씀을 들으러 온 자들이 음식을 먹는다. 이들이 처음부터 양식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니다. 

   말씀을 들으러, 그들의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산에까지 올라온 것이다. 

   교회에 오는 목적은 영혼구원이다. 그것이 첫번째요 유일한 목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이 육적으로도 배고픈 것을 아셨다. 누가 먼저 나 배고파요 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배 고픈 것을 아셨다.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육신의 구세주임을 알게 하기 원하신다. 

   

-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까? 

이것이 제자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아이 은혜 받게 했으면 되었지, 말씀만 들었으면 되었지...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을 잘 들었나 체크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어떻게 먹일까를 생각하게 하셨다. 

그리고 다름아닌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먹일까 하고 물으신다. 

우리는 무리를 먹이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제자다. 

구약의 백성들은 모세를, 엘리야를, 선지자를, 다윗을 의지하기만 했다.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귀신을 쫓고, 병자들을 고치며, 그리고 이제 그들을 떡으로 먹이라고 까지 하신다. 너희들이 그 일을 하라고 하신다. 

ex) 유람선, 어선, 군함. 



- 그리고 한 사람, 한 어린아이의 계산없는, 의심없는, 순전한 헌신을 통해 모든 무리를 배부르게 하길 뿐만 아니라 남은 음식으로 열두 방주리, 모든 교회를 넉넉하게 하신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 스스로의 헌신 위에 축사하신다. 우리의 순종과 우리의 믿음과, 우리 각자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마지막 요한복음 오병이어 사건의 특징 4. 

다른 복음서는 먹인 것으로 사건이 끝나지만 요한복음은 먹인 후의 예수님에게로 초점을 맞춘다. 

(요 6:15)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육적인 것을 채운후에 다가오는 유혹은 칭찬듣고 싶은 욕망이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교만해지고, 자만하게 되고, 그곳에 머물러 대접받고 싶고....

그런데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신다. 사람들의 시선을 떠나, 자기 교만의 유혹을 떠나, 유유히 하나님과 교제하러 가신다. 


ex) 은혜 가운데 채워진 재정. 물론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 어린아이의 오병이어의 헌신처럼 많게 적게 헌금하신 성도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 

그런데 전 누가 아무리 헌금을 많이 했어도 절대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치하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혹시하고 그런 사람의 칭찬 받으려고.... 하나님이 주실 칭찬을 내가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감사하지만 내가 말한 감사 때문에 그 분의 신앙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한 것이다. 이것은 영육간의 구원이다. 물론 영적인 충만함이 먼저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충만한 자를 결코 주리게 하시지 않는다. 영적으로 채워진 자가 육적으로도 채우게 하시고 남들도 채우게 하신다. 

어릴적,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믿으면 꼭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해? 

아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쉴 수 있는 곳. 

평안한 곳. 그 곳에 나를 앉게 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