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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왕상 18:41-46) 


17장에 처음 등장하는 엘리야

아합왕 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바알과 앗세라의 숭배자들이 가득하던 때.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이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이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다. 보장이 없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한다. 

순서가 바뀌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전하는데, 엘리야는 선포하고 나서야 말씀이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엇인가?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충만히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훈련시키셨다. 


마치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머물면 머물게 하고

만나가 내리면 먹고 물이 나오면 마시고, 메추라기가 떨어지면 배불리 먹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은 그릿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고독의 훈련, 만나 (말씀의 훈련) 을 시키셨다. 

이 훈련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나는 정말 무력하다. 나는 정말 할 수 있는게 없다. 세상은, 신앙은 신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없는 믿음은 단지 신념이다. 

무능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가 마르니까 바알과 앗세라의 수괴, 이세벨 여왕의 고향, 그 중심 사르밧으로 엘리야를 보낸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동역자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한다. 

거기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는 우선수위의 훈련을 한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내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서 언제나 내 믿음, 내 생각, 내 환경, 내 감정을 우선했던 실패를 되돌아보고 이젠 실패하지 않도록 훈련시키신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늘 실패하는 훈련, 이기적인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훈련

기복적인 신앙인이 매일 같이 위선 속에서 자기를 속이는 그런 훈련. 

먼저하고 나중에 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니까 결국 하나님이 채우시고 보장하신다는 것을 경험케 하신다. 

풍요로울 때에 그 훈련을 시키시지 않으셨다. 

마지막 먹고 죽으려 할 만큼 기근이 극심할 때

없어도 정말 없을 때에 하나님의 것 먼저 할래? 결국 네것 하다가 죽을래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그리고 나서 죽은 아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신다. 

죽은 한 영혼을 살리는 기도

기도는 결국 한 사람을 향한 애끓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간절한 기도는 사랑에서부터 나온다. 다급함에서부터 나온다. 

한 영혼을 위한 기도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 간절함에서부터 기도가 시작된다. 

바알과 앗세라를 향한 영적인 전투에 앞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영적인 죽음을 살리는 기도에 앞서, 연약함 가운데 죽은 한 영혼을 향한 기도를 시키신다. 


그리고 다시 아합왕에게 보낸다. 

18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순서가 바로 잡혔다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많은 날이 지났다"고 말씀이 증거한다. 

하나님은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는 서둘고 급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서둘지 않으신다. 

차곡 차곡,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첫 번째 큰 비는 노아 때 왔었다.

그 큰 비는 죄악을 다 씻어 내렸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다 씻기 위해서는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비는 심판의 비가 아니다. 반대로 이 비는 은혜의 비다. 모든 기근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 쏟아지는 비다. 

우리의 냉랭한 신앙이 물러가고 눈물이, 은혜가, 평화가 찾아오는 비다. 

그야말로 큰 비다. 


(큰 비에 대한 묵상) 바알과 앗세라가 도저히 줄 수없는 은혜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해도, 가진 것이 많아도 비가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큰 비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의 복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또 이것이 세상 사람들을 다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엘리야는 이 은혜를 맛보면 아합과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꼐로 돌아올지 알았지만 그들은 비가 없어도, 또한 비가 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 이 실망이 로뎀나무의 사건을 인도한다. 

이것은 믿는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은혜다.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은혜가 큰 비다. 우리는 1년동안 이 큰비의 은혜를 묵상할 것이다. 


그런데 큰 비의 약속을 받은 엘리야가 바로 큰 비를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아합왕에게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싸그리 모아 갈멜산에 모이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백성에게 질문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언제까지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여전히 바알을, 돈을, 쾌락을, 정욕을 쫓을 것인가 묻는다. 

백성들이 한 마디 말도 답변하지 못한다


여호수아 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오직 여호와를 따르겠습니다 말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도 해깔린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모여 기도하기 시작한다. 

제단 주위에서 뛰어 놀고, 큰 소리로 울부 짖다가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한다. 

미친 듯이 떠든다. 미친 것이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귀신 들린자가 미친 듯이 떠돌아 다니며 소란을 피우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미친 예배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미친 짓이다. 예배는 내가 미쳐서 날 뛰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서 춤추는 것이다. 

내 감정에 들떠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감격하는 것이다. 

성령은 내 가슴을 찢고, 목이 쉬도록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예배는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예배이다. 

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는 훈련이 담겨 있는 예배고, 순종이 담겨 있는 예배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는 고백이 담겨 있는 예배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다. 

자기 감정의 예배, 축복만을 부르짖는 정욕의 예배, 쾌락을 위한 예배를 무너뜨리고 말씀의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다시 드린다. 


31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32절: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36절: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성령 충만은 순종이다. 그 분의 뜻대로 따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엘리야는 제단과 번제물에 물을 가득 붙고서 기도한다. 

한 죽은 아이를 살렸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회복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해서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왜 비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제단에 불을 내리시는가? 

회개가 없이는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는 은혜는 오히려 타락이고 교만이고, 죄악을 낳기 때문이다. 


아합은 우리 안의 죄이다.  

바알과 앗세라는 우리 안의 돈을 사랑하는 탐심이고, 음란함과 쾌락이고, 화려함과 외모를 최고로 하는 우리 안의 이세벨이다. 


이것을 몰아내시지 않고선 비를 내릴 수가 없다. 

은혜를 맛볼 수가 없다. 큰 비는 우리 안의 하나님의 성전, 우리 안의 바알과 앗세라, 우리 안의 아합가 이세벨을 죽이지 않고서는 내리질 않는다. 


큰 비를 맞아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 돌아가냐 하지 않는가? 


그러면 다시금 갈멜산에 올라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여야 한다. 

번제물에, 제단에 성령의 물을 뿌리고 그 성령이 내 죄를 불태우도록 해야 한다. 


내 감정에 들떠서 날 뛰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신 것과 당신은 나를 되돌이키시는 분임을 알게 하옵소서."  


단지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의 복,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복, 하나님 나라의 심령이 열리기 위해서 내 안의 바알과 앗세라. 내 안의 아합과 이세벨을 몰아내야 한다. 


불로 태워야 한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태워야 한다. 

내 안의 불평, 내 안의 판단, 내 안의 정죄, 내 안의 교만, 내 안의 탐욕, 내 안의 변명, 내 안의 핑계, 

내 안의 게으름, 내 안의 모든 죄를 태워야 한다. 


불을 내려달라 기도했던 엘리야가 이젠 물을 위해 기도한다. 

3년 6개월동안 이나 오지 않던 비를 위해 머리를 무릎에 쳐박고 기도한다. 

엘리야는 바알과 앗세라가 없는 것을 가졌다. 아합왕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을 가졌다. 

그것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 열쇠는 오직 믿음을 동반한 기도에서 나온다. 


첫번째 기도는 회개를 위한 기도였다. 불을 위한 기도는 회개의 기도이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죄를 불태우게 된다. 자기 안의 모든 우상을 불태우게 된다. 하나님 외에 의지했던 세상의 물질과 힘과 권력을 던져버리게 하신다. 


두 번째 기도는 은혜를 향한 기도다. 이제 하나님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회개를 하게 하신 하나님은 성결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비를 향한 기도는 성령 충만을 향한 기도요, 성결을 위한 기도다. 

회개의 기도가 비움을 위한 기도라면 은혜를 향한 기도는 채움을 위한 기도다. 

우리는 은혜로 채우지 않은면 넘어진다. 

성도는 은혜로 산다. 은혜가 없으면 죽는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시다.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왕상 18:42) 


-겸손한 기도, 간절한 기도

회개 후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만하지 않았다. 이제 이것으로 되었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목말랐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물릴쳤을 때에 승리감에 도취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산꼭대기로 기도하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불쌍한 죄인이 되어 엎드린다.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하게 했던 베드로가 평소랑 똑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에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보게 된다. 은혜는 또 기도할 때 온다. 또 무릎꿇을 때에 온다. 

예수님의 승천을 본 제자들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이 임한다. 


그름조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그 증거품이 구름조각이다. 

7번의 기도는 그 증거를 향한 변함없는, 끊질긴 간절한 기도.... (1년동안 묵상해야 할 것들...)  

7번-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기도이자 순종이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법칙이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을 순종이다. 

7번은 끝까지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을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손바닥 만한 작은 구름을 통해 큰 비를 보았다. (18:44) 

아합에게 선포할 때 이미 큰 비의 소리를 들었다. (18:41) 

작은 것 안에 담긴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 작은 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축사... 

겨자씨 하나에 담긴 100배의 열매... 


(겔 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말랐던 강들이 물로 가득차게 되고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 온 나라 백성이 비에 젖게 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뜻과 때 (왕상 18장 1-19절)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 방법 - 하나님의 뜻과 때.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              

  • 그릿 시냇가 - 세상으로부터 격리하여 하나님 주시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훈련, 광야의 훈련, 만나의 훈련
  • 사르밧의 훈련 - 
    • 말씀의 적용 훈련, 우선순위 훈련(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 동역의 훈련: 왜 동역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동역을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신다. 동역하는 것 자체가 전도이다. 
    • 하나님을 주인삼는 훈련- 영접은 구호가 아니라 실재다. 사르밧 여인, 하나님을 섬겼지만 결코 주인삼지 못했다. 그 분을 주인삼으려니 자신의 죄가 드러난다. 
    • 중보의 훈련- 한 영혼을 위해 금기를 깬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초월이자 완성이다. 한 영혼을 위한 사랑이 결국 하나님 일의 시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만을 가지고 일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 뜻대로 사는대도 일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부딪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살아가는 훈련이 준비의 기간이라면 이 뜻을 "하나님의 때"를 통해서 성취된다. 


(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숨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왕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드디어 엘리야에게 다시 아합왕에게 가라 명하신다. 

(단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광야의 때를 바꾸어 이제 엘리야를 드러내게 하신다. 갈멜산의 계절이 왔다.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때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작용한다. 만물의 통치자가 만물의 때를 알아 바로 그 때에 실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숨어라 하면 숨고, 드러내라 하면 드러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기를 좋아하지만 숨어지내는 것은 못견뎌 하는 사람이 있다. 

남이 함께 있고 남들이 날 인정해주고 하면 행복감을 느끼지만 남이 없이 홀로 되면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활발한 것 같지만 자기의 의미를 남들이 시선을 통해서 찾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기에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다. 오히려 남들에게 나서는 자리는 피하고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그 사람은 건강한 것 같지만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다. 홀로 있을 때만 편안한 사람은 "일어나 가서 제자를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보다 귀찮고 부담스럽고 어려운 명령이 없다. 

그런데 주님은 때로 우리가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드러나게 하신다. 

이 홀로 있을 때 드러날 때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균형잡힌 사람이다. 숨어 기다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내공을 쌓고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내공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하고 훈련하여 얻는 것이 내공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숨어 있는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동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온유"한 자가 된다. 온유란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에게 붙이는 성경의 전문 용어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광야의 전문가가 되어 향후 40년동안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생활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된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그 집의 감옥에서의 13년간을 집 안일을 돌보고, 감옥을 돌보는 총무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그 훈련이 나라를 책임지는 총리가 되게 한다. 그 곳에서 요셉은 애굽의 언어와 문물을 배우고 떡맡은 관원과 술 맡은 관원등을 만나 정치를 배운다. 무엇보다도 요셉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 받는다. 


[시 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아버지의 편애로 자기 밖에 모르던 요셉이 배려의 사람이 되고 검소한 자가 되고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된다. 


  • 엘리야의 또 다른 만남

오바댜 - (왕상 18:2-6)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 -

(왕상 18: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아합왕을 섬기기는 하지만 아합왕과 다른 길을 가는 자. 여호와를 따르는 자. 

(왕상 18: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 7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그동안 아합: 각 나라마다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기심을 얻은 엘리야는 아합의 손길에서 피할 수 있었다. 

오바댜에게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그러나 내가 그 말을 하면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니이다. 

그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음에도 이전의 엘리야나 사르밧 과부처럼 훈련 받지 아니한 자. - 몰래 주의 선지자들에게 물과 고기를 가져다 주는 선한 일을 하였지만 언제나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하면 고통을 당하는 자. 


그러나 엘리야와 만난 오바댜는 죽음을 무릎쓰고 아합에게 엘리야를 말한다. 

(왕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엘리야를 통해 아합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자가 된 것이다. 아합이라는 공포를 이긴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믿음


아합과 엘리야의 대면 :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인가? 

[왕상 18:17-18]

(왕상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왕상 18: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아합: 현재의 현상- 엘리야의 말대로 기근이 왔으므로.... 세상의 사람들의 관심. 당장의 눈앞에 현실에 민감...

엘리야: 그 근원, 원인... 하나님과의 관계... 


무엇이 진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누가 우리에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영적 전투를 선포 


자. 하나님의 사람에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은 말씀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 내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신앙 생활은 우상숭배다. 황금 송아지 신앙이다. 그들의 고정관념대로, 경험대로, 전통대로 신앙생활을 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황금 송아지를 하나님인 줄 알고 섬겼다. 

황금 송아지는 권력과 힘이다. 물질과 성공이요, 쾌락과 방종의 신이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으로 훈련된 자는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때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다. 때로 숨어 있어야 하고 피해 있어야 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런데 그 삶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일어나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시고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게 하시고, 큰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다. 

그 때를 얻기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내공을 쌓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충성함으로 삶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게을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영성은 일상에서 훈련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왕상 17:17-24절 이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때에는 명목상의 하나님 신앙도 다 사라지고 바알과 앗세라, 돈과 쾌락만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던 자였고, 이런 시대는 하나님이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를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아합왕앞에 섭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고 누구보다도 열정이 뛰어나고 의기에 찬 엘리야였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한 시대에 의로운 청년 엘리야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아합왕에게서 떠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지난 주 우리가 나눈 첫 번째 훈련은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릿시냇가는 "고립, 분리"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심을 경험하며 자신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 땅으로 보내십니다. 

이 곳은 어디냐? 바로 그 악한 이세벨의 고향이요, 이세벨의 아비였던 엣바알이 통치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의 시대를 심판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이세벨의 본 고장 사르밧으로 보내어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와 함께 우선순위의 훈련을 합니다. 사르밧은 "용광로, 제련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릿 시냇가가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이었다면 사르밧에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는 훈련,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를 훈련시키십니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를 통해 떡을 만들어 자녀와 함께 죽고자 헀습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이것이 지난 금요일날 나눈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르밧에서의 훈련 두번째 시간으로 엘리야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사건을 다룹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있어서 과부, 고아, 나그네는 가장 소외된 자, 도움이 필요한 자, 믿음의 사람들이 돌봐야 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이건 좀 특별하고 영적인 표현 입니다. 


고아는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고, 과부는 남편을 잃은 사람이고, 나그네는 집,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아, 나그네, 과부를 돌보라는 율법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선교적인 명령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돌보아 그들이 잃어버린 남편, 아버지, 본향을 회복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방 땅에 그것도 애 딸린 과부의 집에 유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입니다. 그것도 3년간이나 유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시선으로도 이것은 부정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한 그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하나님이 그 집안의 가장이 되시고, 주인된 하나님의 집으로서 그 사르밧 과부를 구원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과 엘리야의 만남은 하나님을 믿지만 불완전하던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훈련받아 성숙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훈련시키시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열정으로 가득차 있지만 훈련 되지 아니한 엘리야가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했지만 능력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체험하는 학교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함으로서 우리 또한 엘리야가 받았던 교육,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7절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우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위하여, 그 다음 너를 위하여 하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약속을 성취한 후입니다. 한 줌의 가루, 기름 조금이던 그녀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먼저 심었더니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체험한 후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중에 일어날 적에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확실한 믿음이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참으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늘 내 것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것을 나중에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백만 있고 체험이 없습니다. 생각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오고 순종을 통해서 훈련 받으면 우리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제는 과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편이 되시고 그 집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다음의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이 집의 주인 되는 여인"이라 이 과부를 표현합니다. 기름 조금, 가루 한 웅큼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가난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마땅히 그 집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할 공간에 여전히 주인은 그 여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주인 삼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자기가 주인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죽음을 앞둔 여인처럼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와서 부르짖습니다.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감사헌금 한 번 드리면 그만입니다. 그 다음 삶은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주님은 문을 열라 하시는데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다락방 구석에 몰아 놓고 자기가 또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언제까지?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기까지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가 나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증세가 점점 위중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병이 들어도 엘리야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증세가 악화 되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영이 죽고, 병들어도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을 때까지 그를 찾지도 않습니다. 


아이가 숨이 끊어진 뒤에야 비로서 엘리야에게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7절) 


1.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었던 여인이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 나를 왜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느냐? 왜 자꾸 간섭하느냐? 

자기가 주인되어 사는 사람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샤머니즘은 뭡니까? 

문제가 일어나면 찾아갑니다. 빌고 굿하고 부적 부치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나면 돈주고 그만 딱입니다. 더 이상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 다음 자기 맘대로 살다가 또 문제 터지면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함께 하기 위해서 입니다.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이 내 남편이요, 내 아버지요, 내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에야 안전하고 완전하고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우리 신앙은 이것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엘리야를 다락방에 가두어 두고 대화 하지 않듯이 주를 영접하고 성령이 내 안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죽을 때까지, 문제가 터질 때까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2.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아들의 죽음 앞에 비로서 자기의 죄를 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죄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깨닫는 것이 회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나가 심문 당하는 것을 보니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뉘우쳤다" "후회했다"고 표현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깨닫게 합니다. 

깨달았으면 주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돌이켜야 하는데 사람이 미련한 게 잘못을 알았어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개합니다. 탓을 하고 변명을 하고 오히려 성을 냅니다. 

인정해야 할 때에 숨기고 회개해야 할 때에 성냅니다. 

그런데 일찍 회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3.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오기 전에 그 여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2절)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애굽에 종살이가 힘들어서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출애굽기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로 보냈는데 당장 물이 없다고 백성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우리를 나오게 했습니까? 거기서는 우리가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부족함이 없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오고 위기가 오면 우리는 하나님 탓을 합니다. "잘되면 내 덕, 안되면 하나님 탓."

성경에 어디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다. 위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 되도록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죄 아닙니까? 


그런데 은혜가 되는 것은 엘리야의 반응입니다. 

여인의 항변에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하나님 잘못이냐? 네가 잘못하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왔느냐?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 했느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텐데 그냥 여인의 분노를, 하소연을, 원망을, 묵묵히 듣고 참습니다. 

여인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 지킨 것이고 아들은 다른 문제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하며 외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들이 십자가로 몰려 들어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빈정대고, 소리칩니다. 

옷을 찢고,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하늘 가는 마지막 길에 주님이 하신 기도는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랬습니다. 

저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변호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하나님 잘못한 것 알지만 저들의 편에서 생각해 주세요. 


은혜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죄하고 싶고, 꾸짖고 싶고,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애굽이 훨씬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 보면 그럼 애굽으로 가서 실컷 먹고 살아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저 사람 어떻게 저래요? 하면서 기도하다 보면 광야 생활하면서 피곤한 그들의 모습, 만나를 먹으며 지겨워 하는 모습, 광야 가운데서 불기둥 구름기둥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고 그 연약함을 위해 울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고통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를 잃은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묵묵히 그녀의 아픔을 자기 품에 앉고 자기의 기도처소로 옮니다. 

여인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품에 가득 안고 자기 침소에 가지고 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여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인의 편에서 하나님께 변호합니다. 

이것이 근데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죄인을 구하는데, 죄인의 편에서 죄인을 이해하며 그들의 아픔을 안타까지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고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습니다 .

"주께서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주님,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심은 하나님께서 이곳의 주인이 되심이 아니십니까? 

주인 잃은 여인의 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서 여인이 마음으로 "왜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여인의 언어로서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시체는 부정한 것입니다. 시체에는 근처에도 가면 안됩니다. 

일단 죽은 시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시체를 자기 품에 안았습니다. 그 시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자기가 그 위에 엎드립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이전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 앞에 두고 기도할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살리시려면 진작 했겠지 여기까지 오게 하셨을까? 

어차피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니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지 그런거 기도해서 "하나님도 부담, 나도 부담, 괜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살려달라고 간절히 시체를 앞에 두고서라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하는 사람,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기에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분명하기에 자기 뜻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아직 포기하라는 응답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립니다. 아니 그의 기도가 오히려 수넴여인이 아들을 살리는 엘리사의 기도,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기도를 앞서는 전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세번씩이나 그 몸에 엎드려서 자기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그냥 정도껏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는 문제있는 자의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는 것입니다. 짊어지고 주님앞에 나와서 그 짐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기가 그 문제을 안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하면 됩니다. 남의 문제를 내가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만 담대하게 선포하면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영적인 리더들이, 설교자만 되려고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자된 삶, 참된 목자는 형제 자매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내 양을 치라하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설교자는 신학교 나오면 될 수 있지만 목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목사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목자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저 또한 목사라는 이름보다 목자라는 이름이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영적인 목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문제를 자기 품에 안았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앞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기도를 시키시기 전, 한 여인의 문제를 위해 목숨을 건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이 기도의 훈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갈멜산에서의 영적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아이를 안고 내려오는 엘리야와 아이를 건네 준 사르밧 과부가 마주칩니다.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 이전에는 안믿었을까요? 

아니요 그 이전에도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믿음이 단지 지식적인 믿음이었다면 이젠 온 몸으로 체험된 믿음이고 삶으로 고백된 믿음입니다. 

이제 여인은 온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

엘리야는 이제 사르밧 신학교를 마칩니다. 디셉 사람 이름없는 무명의 사람에서 이젠 하나님의 선지자로 공인됩니다. 자기 스스로 인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심젇을 가진 자, 죄짐 맡은 자,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다락방이 아닌 내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서로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왕상 17장 8-16절   악의 가장 중심에서 



아합과 이세벨 여왕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부흥과 함께 영적인 타락이 오게 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축출되고 그 자리에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음란한 제사를 드리면 예루살렘 성전을 변질시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에 홀연히 일어난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가문도 지파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집안 사람 무명의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그 이전이 모세나 다윗의 집과는 근본 태생이 다른 선지자입니다. 

그가 감히 아합왕 앞에 서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열정으로 가득한 선지자였습니다. 자기말대로 그는 열심이 특심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열심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열정은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훈련되지 아니한 이 엘리야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훈련시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17장의 첫 절은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로 시작되지만 마지막 절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그릿 시냇가와 오늘 나눌 사르밧 신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8장 그 유명한 갈멜산에서의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950명과 1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엘리야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며 홀로 되는 훈련을 시킵니다. 열정이 가득한 자에게 홀로되는 훈련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홀로되는 훈련, 매일 같이 까마귀로부터 공급받는 만나의 훈련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열정에 훈련이 더해질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헌신된 열정이 있어도 훈련받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이제 그릿시냇가가 말랐다"

사르밧의 훈련은 이제 홀로 하나님과 고립과 기근을 통해 대면하던 그릿 시냇가의 시기가 끝났을 때에 시작됩니다.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 끝이 납니다. 신학교 1학년이 끝이 난 것입니다. 

이제 훈련이 끝났을까? 아니 이제 정말 제대로 된 2학년 생활을 시작합니다. 사르밧의 의미는 "용광로, 제련"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욥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에서 말한 대로 정금이 되기 위해 용광로로 들여보내십니다. 


9절에 등장하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 어디인가? 

(왕상 16: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시돈은 이스라엘에 죄악을 가져다 준 이세벨의 고향이고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세벨을 정복하기 전에 엘리야를 이세벨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해서 그 땅을, 그 땅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의 왕궁에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애굽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요셉을 군대장관의 가정 총리로, 감옥의 총무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의 시대를 정복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악의 중심지에서 엘리야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 가기 싫은 땅,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그 땅에서 하나님은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그토록 가난한 과부일까?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사르밧 과부의 헌신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읽고 들었습니다. 

없는 중에 하나님께 헌신한 과부의 헌금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곳에 보내셨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눅 4: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예수님께서 고향 땅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 당하자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예를 드신 것이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사르밧땅 과부를 택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 문등병자가 아니라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치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믿음을 찾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사르밧 과부에게서, 나아만에게서 참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세벨의 고향, 바알의 땅에서 살고 있는 이름 없는 가난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었던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왕상 17: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섬기고 성공을 섬기고 권력을 쫓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선 엘리야의 출사표는 무엇입니까? 

17장 1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2절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대에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심을 믿는 두 명의 믿음의 사람을 만나 동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단지 선지자 엘리야가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나에게 그 음식을 줘라' 하는 것을 들으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그렇게 무정하신 하나님이냐? 

아무리 복을 주셔도 그렇지 죽으려는 사람 앞에서 그 음식을 가지고 시험하는 하나님이라면 누가 이 시험을 통과하겠는가? 하면서 많은 신앙인들에게 부담감과 절망감,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로 하여금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하시고,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를 만나게 하시는가? 

각자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상황에 얽메이지 않고 믿음 만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는 두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만나 고난의 때를 이기고 훈련 받아 이스라엘과 시돈 땅 사르밧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이를 해산하지 못하거나 남편이 없는 여인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할 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과부가 되어 자식과 같이 죽으려 하는가? 

이세벨의 신, 바알을 의지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면서 자원하는 고통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라합처럼 자기 민족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자기 동족의 반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에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녀가 이 사르밧에서 바알을 믿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에서 하나님의 만나와 같은 매일 매일 기적과 같은 연명함이 있었겠지만 이제 그 은혜마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공급함을 받고, 사르밧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영적 죽음의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좁은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이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기가 막히게 대면한 것입니다. 


(왕상 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냥 무작정 헌신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보장을 주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순종 할때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약속은 씨앗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듣다가 약속을 받고 보장을 받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것을 성취하고 열매맺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믿음의 순종으로 추수하는 것입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여러분,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이기면 정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믿음이 됩니다. 

열성만으로, 열심 만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열매맺는,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말만 번드르하고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말과 삶이 함께 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이 능력이 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 아시지요? 내 마음 아시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넘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은 자기 일 우선하는 사람이 대부분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셔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니까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르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나는 떡이 없고 다만 기름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아주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냥 있는 떡 주는 것도 어려운 것인데 그걸 가지고 요리까지 해서 주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믿는다고 애썼지만 결국 내 처지가 이렇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내 처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안다. 아니까 두려워 말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이라." 

하나님도 그 처지를 아시니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씨앗은 우리의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 믿음의 행위가 있는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기에 두려워말고 믿어라. 순종해라. 하는 것입니다. 


  •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행할 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절대로 말로 인해서 "믿습니다"한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함 없이 보여달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행하라 그러면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팽팽히 맞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굽히고, 자기 의지를 꺽고 말씀에 순종하면 은혜를 맛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10절의 "물 조금"과 11절의 "떡 한조각"입니다. 

 대단한 것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 만한 믿음, 그렇지만 정말 나를 죽일 수 있고 헌신 할 수 있는 땅에 떨어져 죽을 수 있는 작은 씨앗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에 얽매인 우리는 그것이 전부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사르밧 과부에게 말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입니다. 

 이 말씀의 대상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에게 동역자로 주어진 사람이 사르밧 과부입니다. 그는 이방여인이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이세벨의 고향사람이고 가난하고 율법도 모르는 수준낮은 사람입니다. 길에서 보면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힘든 때에 그녀와 함께 사르밧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에게 붙여주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주신 사람,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붙여 주신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과 함께 동역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옆에 붙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마음 들어 결혼했던 사람도 며칠 지나고 몇 년 지나면 마음에 안들지 않습니까? 

하물며 정말 모르는 사람을 교회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가정에서 만나 함께 어우러 사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일하도록" "사로 맞추어 나가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난 이 사람 안맞아. 난 이 사람과는 도저히 못하겠어..하는 사람은 결국 난 하나님 하라는 대로는 절대로 못살아. 

난 내맘대로 살거야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 맘에 들도록 하십니까? 

"먼저 나를 위해 그 다음 너를 위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 함께 신앙 생활 하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동역자구나 하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은 완전합니다. 선합니다. 나보다 지혜로우십니다. 내게 꼭 필요하니까 그런 사람, 그런 장소, 그런 사건들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에 믿음을 보이십시오. 순종하십시오. 

결국 신앙 생활은 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열심만 있던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의 훈련을 통해 이제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고립과 고독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 왜 고립하게 하십니까? 사람이 고립되기 전까지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이름 부르지만 결국 자기 의의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용광로와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연단은 우선순위의 훈련입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중 무슨 일을 할래? 

육신의 일과 영적인 일 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너 자신을 위한 일과 하나님을 위한 일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그것을 통해 내 정욕을 끊고, 내 자아의 무거운 성을 무너뜨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특별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특별합니다 보통 사람 엘리야를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을 통해서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라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