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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 눈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내 영혼은 방황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 눈은 주님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내 육신은 피곤합니다.

주여 보리를 원하나이다.

 

내 눈은 주님이 바라보는 눈으로 내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내 마음은 어둡습니다.

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지 못하는 나는 언제나 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사람들을 찾아 헤매며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보이는 것은 없고

온통 눈 감은 내 모습만이 날 당황스럽게 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가 만드신 세상, 주가 만드신 영혼, 주가 사랑한 내 모습을

그 진짜의 모습을, 그 원래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에바다, 내 눈을 뜨게 하소서

 

 

Posted by 소리벼리

 

신뢰, 원치 않는 것을 따름 (요 21:18-19) 


지난 주 설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 그 이름의 의미, 물에서부터 건저낸 자. 그의 인생의 대 사건- 홍해를 건넘과 출애굽

구원받은 자의 삶. - 포기의 삶(애굽의 왕자로서의 삶. 애굽의 영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된 삶.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께 대한 원망, 불신, 의심의 삶. 자기 의의 삶, 자기 열심의 삶

좋은 뜻을 가졌지만 그 방법은 자기 방법, 자기 열심. 

네 신을 벗어라. 불타는 떨기나무... 마르고 가시많은 나무- 모세의 모습. 앙상한 가지, 가시 투성이, 소진된 삶. 

이제 내가 너를 쓰리라. 나를 의지하라. 나의 방법대로 살아라... 네 권리를 나에게 맡기라. 

 

"네 신을 벗어라"의 신약적인 표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 진정한 사명을 주시는 장면. 

오늘 나눌 말씀입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시냐면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목되는 말씀은 19절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의문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는 이 말씀은 주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따르라 하면 따르겠는데 이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려고 하는데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로 따라 올라가라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가서도 나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로 따라 오라는 소리가 아닌 이상 이 땅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이전에 따르던 모습과 어떻게 다르게 따르라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제자 삼으실 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하루 하루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고단한 어부의 사는 삶을 사는 베드로에게 예수꼐서는 이제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 뒤로 3년 동안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랐습니다. 

그는 제자 중의 제자.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렇게 3년동안 예수님을 죽으나 사나 따라 다녔는데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럼 그 동안 따른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1장 18장 19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구절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요 13: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면서 이제 잠시 너희와 함께 있을 테지만 조금 지나면 너희를 떠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떠난다는 소리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 올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나를 따라온다고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날 위해 죽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서 날 배반할 것이다. 

-> 이 때까지의 베드로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르고, 앞장섰지만 그 열심은 누구의 열심입니까? 자기의 열심입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입니까? 자기의 의를 위한 열심입니다. 창찬받고,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한 열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인정받고 높아지는 한에서 열심을 냈지만 정작 자기를 인정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자기 한계 안에서의 신앙입니다. 자기 배를 위한 신앙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신앙을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닌 신앙"이라 말씀합니다. 

"스스로 띠 띠다"는 말은 "스스로 옷입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가 주인된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옷입고 포장하고 드러내기 위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베드로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말이겠습니까? 

왜? 그는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을 제외하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하라는 대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스스로 옷입고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말에 항변하고 거절했던 베드로가 이 말에는 감히 항변하지 못합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 주님께 가고자 했던 열심이 주변을 바라보다 빠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고백했던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만류하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하시면서 책망받는 자가 됩니다. 

주님을 붖잡으려는 마고의 귀를 베려다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하면서 힘으로 해결하려는 베드로의 태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는 말이 하루 밤 사이에 돌변합니다.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 21: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반대로 늙어서는 어떻습니까? 

남이 옷 입히고 남이 인도하는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가리키는 남은 누구입니까? 


물론 나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 신앙이 성숙되면 타인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고, 보살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그러나 이 때으이 남은 결국 주님이 승천하시면 오실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내 열심, 내 행위대로 주님을 따랐지만 이제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옷입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데로 해석하고 싶은데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몇번씩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데도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헤롯왕까지도 삼일 후 부활하신 다는 말을 기억하는데 제자들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하는 데로 신앙생활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너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주님이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인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비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인류의 구원을 맡기셨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승리하도록 허락한 두가지는 단 두가지 입니다. 

1. 서로사랑해라. 한 마음으로 화합하라. 

2.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 외에 내가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주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 머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령이 임하자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자기 재산을 헌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유물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나면 교회에 모이고 거기서 밥먹고 예배하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모이는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흩으사 믿는 자들이 하나 둘 씩 흩어져 전 세계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흩어지는 곳마다 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또 다른 제자들이 생겨나고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모이는 부흥이 아니라 흩어지는 부흥으로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 자기 행위,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결국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무한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제한한 세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난 여기까지만 믿어야지. 자기가 기도의 시간, 예배의 참여 다 제한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의지하는 자는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을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면서 하시는 것 

이름을 바꾼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베드로를 시몬으로 바꾸신다. 

무슨 소리인가? 

이젠 네 이름으로 살지 말고 내가 인도하는 삶으로 살아라. 

내가 준 사명 안에서 살아라. 


기도는 무엇인가? 

내 욕망의 표출로서 요구하고 청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두 팔을 벌려 성령이 내게 옷입히고 그 분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기도다. 

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기 까지 싸우면서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컸 부르짖고 울었다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부르짖듯이 그 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성경을 쓰고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이 들렸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단, 내가 깨달은 말씀이 정말로 성령께서 주신 말씀인지 성경과 교회의 전통 안에서 그것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성령은 질서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인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난 예수를 사랑하는가? 

난 예수를 신뢰하는가?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해도 난 그 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린아이의 믿음- 자기의 옷을 입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장년의 믿음 - 그리스도로 옷입고 원치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는 맡겨진 길을 가는 것

청지기는 맡은 것을 감당하는 것. 

십자가는 자원하는 것이 아니다. 

맡긴 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십자가 지기를 자원하라? 

사람많은 큰 교회도 늘 봉사자가 부족하다고 한탄...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정받고 싶은 일, 자기가 호고 싶은 일... 

그런데 십자가는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네 팔을 벌리리니...(이제 내 한계에서 벗어나 비로서 주님께 내 맘을 여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살 것이라는 말씀의 완성이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믿음은 팔장을 끼는 것이다. 

두 팔을 잠그고 오직 "나, 나, 나"만 생각하고 나만 나타내고 밖으로의 음성에 문을 닫는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제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 했던 주님은 오늘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물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도, 목자 없는 양을 먹이다!(마가복음 6장 30-44절)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2지파의 정탐꾼 - 가나안땅을 정탐하라. 

각 지파의 가장 지혜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한다. 

열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땅을 보고 자신을 본다. 그 땅은 너무 좋지만 자신들은 너무 약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땅도 나쁜 땅이라고 폄하한다. 지혜가 그들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땅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약하지만 그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은 나를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소망을 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교회 2015년도 표어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이 말씀을 늘 기도하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먹일 수 있는 선교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번 우리가 첫 번째로 함께 사역한 나바호 선교를 준비하면서, 또한 사역을 감당하면서 저는 정탐꾼의 심정이 되어 우리가 이들을 먹일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하는가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지역, 산호세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이었고, 이곳에서부터 강제 이주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살기 힘든 땅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곳에서 다른 세계와 차단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백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한이 서려 그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자기들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중학교까지는 학교가 있지만 고등학교에 가려면 한두 시간 도시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의무 교육인 고등학교조차 가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조상때 부터 써오던 나바호어를 젊은 세대들은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불과 100여년 전 한국 땅에 온 선지자들은 "이 땅에도 과연 복음의 빛이 비췰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에도 그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우리 나라에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이 땅 미국의 원주민을 향한 복음의 장에 초대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 연약한 우리지만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개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 위에 축사하셔서 수 많은 영혼들을 먹이고 남는 것이 없게 하신 후, 낭비 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교회가 쓰기에 넉넉하도록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실 것입니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먹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믿는 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 (출애굽기 3장 1-5절) 


모세의 삶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삶의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하는지에 대한 신앙인의 삶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그는 120년간의 삶을 살았는데 그 삶은 40년씩 3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 40년간은 이스라엘민족으로 태어났으나 죽음을 피해 물가에 던지어져 바로의 공주의 아들, 즉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의 선진 학문과 동시에 유모가 된 친모로부터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살았던 시기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 시기를 가리켜 “I am Something”의 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때는 자시의 자존감이 강해지는 시기입니다. 내가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는 기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그 민족이 가장 어려운 중에서도 자신들을 압제하는 애굽의 왕자가 되어서 특별함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삶의 목표를 굳게 세우고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포기한 것 

1)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 - 권력과 명예 -> 이생의 자랑 

2) 죄악의 낙 - 육신의 정욕 

3) 애굽의 모든 보화 - 재물 -> 안목의 정욕 


신앙인의 모습 - 죄악의 근본이 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포기하고 사는 자... 

그리고 나서의 삶 - 광야 가운데서 자기 소유의 양은 한 마리도 없이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삶... 40년 동안 - 40년이란 기간은 육신의 한계점.... 육신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의 기간 -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보낸 기간, 예수께서 금식하신 기간,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


그는 자기가 포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단의 땅 광야에서 살고 있었다. 

->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행위...


그는 좋은 환경 속에서도 세상이 즐거움에 빠져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가 배운 학문과 교양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용하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뜻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꿈도 주시고 신자에게 좋은 뜻도 주시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뜻, 내 방법이 아니라, 그 방법, 과정도 하나님의 길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뜻을 세웠는데 그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좌절감, 실망감, 상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자신을 의지하는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자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의 리더로서 그들을 위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가졌지만 그 이루는 방법은 철저히 애굽적, 즉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인 자신이 이스랴엘 편을 들면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를 지지할 테고 또 애굽 병사들도 어느 정도 자기가 가진 힘과 권세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을 테이지만 그 결과는 애굽 병사 한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애굽의 병사들은 두려워져서 미디안 광야로 피해 40년간을 양을 치는 목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 기간을 가리켜 "I am Nothing"의 기간이라 표현합니다. 즉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는구나하면서 자기의 한계를 극명하게 깨닫게 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이 시기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모세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원망감, 반항감으로 가득찬 시기일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선한 뜻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 자기의 뜻을 꺾으신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거나 아니면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내면적으로 채워져 있는 불만과 불안의 시기입니다. 성경이 인간 중심적인 책이면 이 시기의 모세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다룰테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를 다루고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책이기에 이러한 시기에 대해 잘 다루지 않습니다. 요셉이 팔려가서 당했을 고난, 야곱이 라반에게 도주해서 일어났을 불안감의 시기.... 그저 한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룹니다. 


이 모세의 불만과 반항심이 표출된 사건- 

하나님의 끈질긴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을 향해 떠나고자 하는 모세에게 발생한 사건 


[출 4:24-출 4:26]

(출 4: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출 4: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 4: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난해한 구절 - 왜 부르시고 그를 죽이시려 하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 

[창 17:7-10]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이 출생 후 8일만에 할례를 행하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다. -> 모세: 신앙생활 중에도 온전히 말씀을 행하지 않았다. 다 포기했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십보라가 모세가 죽을 위기를 당하자 곧바로 할례를 행하는가? 

그들은 하나님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자식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미디안이니까... 아무도 안보니까... 이제 이렇게 살아가 그냥 죽을 것이니까... 

현실의 삶 속에서 마땅히 해야할 성도의 의무를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알면서 불순종하는 불신앙의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의 표시이자 모세의 쓴 뿌리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 수도 있다. 내가 애굽의 그렇게 좋은 환경, 높은 학식을 배웠는데 그것을 다 잊어버리게 하다니.. 그러면서 자신이 꿈꾸었던 비전도 잃어버리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신앙생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가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자 마자 하나님은 그의 신앙적인 불순종을 꾸짖으시고 십보라는 단번에 그 불순종이 할례를 뜻하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 


I am nothing의 기간동안 모세는 철저히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거짓을 드러나게 하신다. 요나에게 찾아와 니느웨로 가라 했을 적에 드러나는 요나의 거짓 의, 반항심, 고집.... 


  • 하나님이 그런 중에 이제 모세를 통해 원래 꿈꾸워왔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시겠다고 부르는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다. 애굽에서의 40년, 광야에서의 40년 끝무렵에 만난 호렙산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은 5절의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모세가 보았던 불붙은 떨기나무이다. 

이 사건은 무디 목사님의 표현을 빌자면 비로서 I am Nothing 에서 I am Real Christian, I am God's person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네 신을 벗으라! 

(출 3:5)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신을 벗으라는 소리는 룻기서 말씀에 보면 바로 권리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다. 


[룻 4:7-8]

(룻 4:7)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룻 4:8)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


배경 설명 - 룻을 얻기 위해서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에게 찾아가 룻의 권리를 양도받는 장면..


신을 벗으라 ->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라고 표현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하나님이 네 신을 벗으라->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적지도자들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장면

1) 모세-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신 말씀

2) 여호수아 - 여리고성 가까이 갔을 때에 군대장관이 말씀하신 장면


왜 하나님은 광야가운데서 40년 동안이나 연단 가운데 삶의 아무 의욕도 없고 희망도 잃어버린 모세를 찾아가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무엇을 더 포기하라는 것인가? 그 단서가 바로 불타는 떨기나무이다. 


1절에 보면 모세는 장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아마도 양떼를 먹이기 위해서 좋은 목초지가 있는 땅으로 이동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호렙산에 이른 듯 하다. 호렙산은 그 뜻이 건조한 땅이라는 의미이다. 습기가 없어서 생명체가 잘 살지 못하는 땅, 한 번 불 붙으면 모든 것이 다 타버리는 땅.. (이것은 무슨 나무든지 불만 붙으면 활활 탈 수 밖에 없는 물리적의미의 건조한 땅이기도 하지만 목적도 없이 의욕도 없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모세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건조한 땅, I am Nothing의 땅 호렙산은 동시에 바로 하나님의 산 이었다. 희망 없는 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떨기나무가 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떨기나무 가운데서부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건조한 땅에서 불이 붙었다면 그 나무가 금새 타서 없어져야 하는데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모세에게 이런 기적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을까? 

40년전 애굽의 백성을 죽이고 의기양양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는 틈에 끼어든 모세-> 

내가 너의 편이다. 내가 널 도와줄께.. 내가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줄께…내가 애굽의 왕자지만 난 이스라엘 편이다. ? 자기 뜻, 자기 방법, 자기 의를 통해서 일하던 모세-> 동족에게도 버림받고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광야로 도망쳐버리는 모세. 


이제 네 방법, 네 뜻, 네 열정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일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메시지. 

내가 널 불타오르는 지도자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아무리 불타올라도 네 육신이 쇠하지 않고 네 영혼이 다치지 않고 오직 내 능력으로 널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네 육신의 털끝도 상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니 네 권리를 나에게 주어서 나로 널 통해 일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내 능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날 불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능력이라고 하면 실수한다.

엘리야-> 400여명의 이방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이사벨 여왕이 쫓아온 다는 말에 “주님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며 낙심하는 선지자. 왜 자기 능력대로 일했다고 생각하나. => 로뎀나무 아래로 인도해서 그를 안식시키고 물과 음식을 공급해 주시지만 그 사역이 거기서 끝난다. 내가 내 능력대로 일한다고 생각할 때 내 사역이 끝이 날 수도 있다. 


하나님 주신 능력으로 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불타오르게 주를 위해 일할지라도 내 육신은 털끝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라. 

일하는 자는 주가 버리지 않는다. 건강도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열매도 주실 것이다. 

사탄은 여전히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너 너무 무리했잖아. 이제 쉬어야지. 너 그렇게 기도하다가 이제 다친다. 못일어난다. 육신이니까 쉬어야지.  


여러분 일터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타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지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이제 네 능력, 네 방법, 네 열정으로 일하지 말고 그 모든 권리를, 그 모든 짐을 나에게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맡기십시오. 그 분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