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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원치 않는 것을 따름 (요 21:18-19) 


지난 주 설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 그 이름의 의미, 물에서부터 건저낸 자. 그의 인생의 대 사건- 홍해를 건넘과 출애굽

구원받은 자의 삶. - 포기의 삶(애굽의 왕자로서의 삶. 애굽의 영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된 삶.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께 대한 원망, 불신, 의심의 삶. 자기 의의 삶, 자기 열심의 삶

좋은 뜻을 가졌지만 그 방법은 자기 방법, 자기 열심. 

네 신을 벗어라. 불타는 떨기나무... 마르고 가시많은 나무- 모세의 모습. 앙상한 가지, 가시 투성이, 소진된 삶. 

이제 내가 너를 쓰리라. 나를 의지하라. 나의 방법대로 살아라... 네 권리를 나에게 맡기라. 

 

"네 신을 벗어라"의 신약적인 표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 진정한 사명을 주시는 장면. 

오늘 나눌 말씀입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시냐면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목되는 말씀은 19절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의문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는 이 말씀은 주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따르라 하면 따르겠는데 이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려고 하는데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로 따라 올라가라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가서도 나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로 따라 오라는 소리가 아닌 이상 이 땅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이전에 따르던 모습과 어떻게 다르게 따르라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제자 삼으실 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하루 하루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고단한 어부의 사는 삶을 사는 베드로에게 예수꼐서는 이제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 뒤로 3년 동안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랐습니다. 

그는 제자 중의 제자.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렇게 3년동안 예수님을 죽으나 사나 따라 다녔는데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럼 그 동안 따른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1장 18장 19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구절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요 13: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면서 이제 잠시 너희와 함께 있을 테지만 조금 지나면 너희를 떠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떠난다는 소리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 올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나를 따라온다고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날 위해 죽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서 날 배반할 것이다. 

-> 이 때까지의 베드로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르고, 앞장섰지만 그 열심은 누구의 열심입니까? 자기의 열심입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입니까? 자기의 의를 위한 열심입니다. 창찬받고,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한 열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인정받고 높아지는 한에서 열심을 냈지만 정작 자기를 인정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자기 한계 안에서의 신앙입니다. 자기 배를 위한 신앙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신앙을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닌 신앙"이라 말씀합니다. 

"스스로 띠 띠다"는 말은 "스스로 옷입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가 주인된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옷입고 포장하고 드러내기 위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베드로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말이겠습니까? 

왜? 그는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을 제외하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하라는 대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스스로 옷입고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말에 항변하고 거절했던 베드로가 이 말에는 감히 항변하지 못합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 주님께 가고자 했던 열심이 주변을 바라보다 빠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고백했던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만류하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하시면서 책망받는 자가 됩니다. 

주님을 붖잡으려는 마고의 귀를 베려다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하면서 힘으로 해결하려는 베드로의 태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는 말이 하루 밤 사이에 돌변합니다.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 21: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반대로 늙어서는 어떻습니까? 

남이 옷 입히고 남이 인도하는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가리키는 남은 누구입니까? 


물론 나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 신앙이 성숙되면 타인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고, 보살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그러나 이 때으이 남은 결국 주님이 승천하시면 오실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내 열심, 내 행위대로 주님을 따랐지만 이제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옷입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데로 해석하고 싶은데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몇번씩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데도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헤롯왕까지도 삼일 후 부활하신 다는 말을 기억하는데 제자들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하는 데로 신앙생활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너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주님이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인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비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인류의 구원을 맡기셨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승리하도록 허락한 두가지는 단 두가지 입니다. 

1. 서로사랑해라. 한 마음으로 화합하라. 

2.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 외에 내가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주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 머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령이 임하자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자기 재산을 헌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유물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나면 교회에 모이고 거기서 밥먹고 예배하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모이는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흩으사 믿는 자들이 하나 둘 씩 흩어져 전 세계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흩어지는 곳마다 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또 다른 제자들이 생겨나고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모이는 부흥이 아니라 흩어지는 부흥으로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 자기 행위,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결국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무한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제한한 세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난 여기까지만 믿어야지. 자기가 기도의 시간, 예배의 참여 다 제한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의지하는 자는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을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면서 하시는 것 

이름을 바꾼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베드로를 시몬으로 바꾸신다. 

무슨 소리인가? 

이젠 네 이름으로 살지 말고 내가 인도하는 삶으로 살아라. 

내가 준 사명 안에서 살아라. 


기도는 무엇인가? 

내 욕망의 표출로서 요구하고 청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두 팔을 벌려 성령이 내게 옷입히고 그 분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기도다. 

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기 까지 싸우면서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컸 부르짖고 울었다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부르짖듯이 그 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성경을 쓰고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이 들렸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단, 내가 깨달은 말씀이 정말로 성령께서 주신 말씀인지 성경과 교회의 전통 안에서 그것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성령은 질서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인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난 예수를 사랑하는가? 

난 예수를 신뢰하는가?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해도 난 그 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린아이의 믿음- 자기의 옷을 입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장년의 믿음 - 그리스도로 옷입고 원치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는 맡겨진 길을 가는 것

청지기는 맡은 것을 감당하는 것. 

십자가는 자원하는 것이 아니다. 

맡긴 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십자가 지기를 자원하라? 

사람많은 큰 교회도 늘 봉사자가 부족하다고 한탄...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정받고 싶은 일, 자기가 호고 싶은 일... 

그런데 십자가는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네 팔을 벌리리니...(이제 내 한계에서 벗어나 비로서 주님께 내 맘을 여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살 것이라는 말씀의 완성이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믿음은 팔장을 끼는 것이다. 

두 팔을 잠그고 오직 "나, 나, 나"만 생각하고 나만 나타내고 밖으로의 음성에 문을 닫는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제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 했던 주님은 오늘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물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억지로 지운 십자가 (마가복음 15:21절) 


예전에 신학교 다닐때에 꿈마을 예닮 이라는 기독교 출판사를 다니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선교잡지를 편집하는 일을 도울 때에 출판사 사장님께서 연말이 되면 제게 부탁하시는 것이 연말 말씀카드에 넣을 성경말씀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각자 그 해의 축복의 말씀을 뽑는 것이 한창 유행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에 가장 인기있는 말씀이 구약의 복을 대표하는 신명기 28장의 말씀입니다. 


1절부터 14절까지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 요약하면: 땅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번영의 복
  • 구약의 역사: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의 우상에서부터 떠나서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우상을 왜 믿느냐? 땅의 복을 달라고… 그런데 그 땅의 복도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누구냐? 애굽이냐, 가나안이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의 싸움.  


문제제기) 그런데 이렇게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기준으로 볼때에 신약성경의 인물 중에서 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해보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도 그러한 복, 땅을 얻고, 자식을 많이 낳고, 물질 축복을 많이 받았다는 사람을 잘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도, 제자들도, 바울도, 디모데도 이런 구약의 복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불행하게 산 사람들이고, 복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약성경에서 복을 대표하는 구절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첫 부분에 나타나는 이른바 팔복에 대한 말씀이다. 

팔복의 말씀은 신명기 28장의 복의 말씀과는 전혀 상반되는 말씀이다. 신명기 말씀은 말씀 잘 지키면 부유하다 하시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신다. 신명기 말씀은 말씀 잘 지키면 대적이 없고 다 무찌른다고 하시는데 여기서는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신다.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을꺼라 말씀하는데 산상수훈은 큰자가 되려거는 먼저 섬기라 하신다. 


복을 보는 기준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한 마디로 답하면 → 하나님의 나라 때문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팔레스틴에 지상천국을 이루고 온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세상적 왕국은 꿈꾸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없었다. 흔히 우리가 천국이라 부르는 것, 그것은 바로 Kingdom of God,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다. 

복음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약속하셨다. 

가나안은 땅의 복으로 충만한 땅이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도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지면 그 땅은 축복의 땅이 아니라 저주받은 땅이 된다. 우상숭배의 땅이 된다. 사사기서는 땅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에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준다. 

사사기서의 핵심구절은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더라"이다. 참 왕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 마치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찬 삶을 이룬다. 

 

팔복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한 통로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참여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 5병이어의 기적: 배고픈 자들을 먹이심- 똑같이 땅의 복을 내려주심, 병든 자, 약한 자, 부정한 자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치료하심- 그 결과:

요 6:14)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구약의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 주는 자 

요 6: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빌 3:18-19]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 분의 제자들에게도 이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요즈음 신앙생활들을 이야기 하면서 요새는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고 영광 만을 받으려 한다는 소리도 많이 듣지요? 십자가는 참 신앙인들이라면 마땅히 지어야 하고 동참해야 할 것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데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려, 적어도 기도합니다.  아무래도 참 신앙이 있는 자라면 적어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더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있고 인내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십자가를 잘 지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기에 막상 힘든 일이 닥쳐도 내 십자가다라고 지어야지 하는 마음을 먹고 견딜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자원하는 그 심령을 받으시고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겪는 고난, 고통보다 수만 배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생활 하다보면 십자가를 지다가 은혜 받은 간증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십자가를 지다보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셨다라는 간증들을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려는 심령?.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신자의 마음입니다. 십자가를 지려 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의 일기에서, 순교자들의 전기에서, 그리고 벤허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원하는 십자가- 선교사, 순교자, 벤허 -> 고난 중에 기뻐하는 성도의 모습. 

  • 참 그리스도인 -> 고난에 강하다. 십자가에 대한 인식, 훈련이 되어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에 요한 복음을 제외하고 세 복음서에 각 한절씩 소개되는 짧은 내용이지만 우리는 구레네 시몬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 다른 태도로 십자가를 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이 십자가는 자원하는 십자가가 아니었다. 
  • 상황 설명: 지친 예수님, 그 전날부터 심문과 고문, 십자가를 지심으로 걷지도 못하는 피곤함과 주리심, 매맞으심? 극도의 고통. 도저히 십자가를 지고 걸을 수 없는 상황. -> 할 수 없이 대신 질 사람이 필요해서 주위에서 찾은 사람이 구레네 시몬
  • 한 사람의 자원하는 제자들이 있었더라면 이 순간에 자원해서 자신이 지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한 사람도 그 십자가를 대신 질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그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요한(예수의 십자가에 있었던 제자) 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땅의 복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 예수를 떠났다. 마가복음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 하나는 예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온통 땅의 일을 생각하느라 아무리 십자가를 말씀하셔도 듣지를 못합니다. 
  • 그래서 예수와 아무런 상관없는 시몬이 십자가를 짐 
  •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자원하는 신앙, 직분을 세워도 순종하지 않는 신앙...


  1. 아무런 칭찬이나 위로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 
  •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힘들어도 예수님은 알아주시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위로하심이 있다. 
  • 시몬에게 보인 예수님: 죄인, 나약한 자? 초라..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초라한 자?.
  • 그래서 억지로 들 수 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만 싶은 십자가
  • 왜 목사님은 안알아 주실까?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성도들이 몰라줄까.... 그건 십자가가 아니다. 


  1. 본인이 짊어져 야 할 십자가.
  • 예수가 당하는 수치심을 똑같이 체험. 사람들의 원성을 당하는 입장에서 들음. 
  • 모여있던 군중들: 제자들은 도망가있거나 숨어있고 오직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군중. 어쩌면 시몬도 예수를 욕하면서 서있다가 병사들에게 끌려왔을 지도 모른다. 
  • 십자가를 들면서 욕을 하는 입장에서 욕을 듣는 입장으로 
  • 아무런 위로나 대가 없이 당하는 그런 수치감. 모욕. 
  • 수로보니게 여인- 자녀의 


억지로, 아무런 위로 없이, 수치를 당하면서 지어야 하는 십자가. 


혹시 이런 십자가 여러분들이 지시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이건 하나님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치욕스런 고통들. 피할 수만 있다면 도망쳐버리고 싶은 문제들.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누군가로부터, 때로는 예수님으로부터도 아무런 위로를 받을 수 없는 문제들. 이런 건 신앙에 걸림돌만 되고 아무런 유익이 안 될 것 같은 자신 만의 문제들. 가만히 보면 많은 신앙인들 중에 아니 대다수 신앙인들 중에 잘 알릴 수 없는, 비밀스런 그런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십자가가 있지요? 

하나님도 해결해 주시지 않는 듯 한 ? 

기도해도 기도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 도망쳐 버리고 싶고, 피하고 싶은, 그러나 견딜 수 밖에 없는 나만의 아킬레스 건. 

오늘 본문은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 누군가가 자원하길 바랬지만 자신들의 여러 가지 이유로 아무도 자원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넘겨져 온, 억지로 떠밀려 온 십자가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아무도 자기 편이 없고, 혼자서만 모든 짐을 지셔야 하는 그 순간에?. 이제는 너무 지쳐서 예수님 조차도 더 이상 한 걸음조차 걸음을 땔 수 없는 그 순간에? 

어느 시골 지방에서 올라 온 낯선 사람 하나가 지는 십자가가 유일하게, 어떤 제자도 감당하지 못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였습니다. 

직접 칭찬을 들을 수도, 위로를 받을 수도 없었고 대신 예수님이 당하던 수치와 모욕을 당해야만 했지만 구레네 시몬은 그 십자가를 대신, 억지로 지면서 놀랍게도 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마 16: 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그 순간 오직 구레네 시몬 만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로마서 16장의 말씀을 보면 (롬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그 구레네 시몬과 그 부인, 그리고 그 자녀 알렐산드리아는 초대 교회의 신앙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구레네 시몬과 같은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지고 계시진 않습니까? 

이건 하나님도 알아 주지 않고 아무런 위로를 찾을 수 없어서 힘들게 힘들게 하루를 견디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이지신 외로운 십자가 입니다. 여러분이 지시는 그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참 제자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위로가 없다고 말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지고 있는 십자가에 이제는 여러분의 구레네 시몬이 되어서 여러분의 십자가를 대신 들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십자가, 하나님의 마음 (고전 1장 18-24절) 


지난 주에 우리는 사도바울을 살펴보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왜 핍박하고 왜 믿지 아니하였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메시야는 곧 하나님이라 생각하지만 히브리 말로 메시야, 곧 헬라말로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로 구약성서에서, 즉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메시야, 기름부은 자라는 의미는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압제, 예수님의 시기때는 로마의 압제에서부터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을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는 그런 왕, 혹은 그런 선지자를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전역에 알려지면서, 또한 그의 이적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예수께 대한 관심은 갈릴리 지방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 속해 있는 유대 땅을 비롯해 전 이스라엘 지역에 예수님이 오실 그 메시야인가하는 기대감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께 대한 질문들이나 반응들은 그런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을 잘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당신이 그 오실자이십니까? 

당신이 우리에게 보일 표적은 무엇입니까? (메시야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왕은 그들과 신분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전통을 따르지 않습니까? 

당신은 왜 율법을 어깁니까? 

이 사람의 모든 지혜가 어디서 났는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주어 먹게  하겠는가? 

갈릴리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있겠는가? 

당신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가? 

우리가 가이샤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가 메시야라면 더이상 가이샤에게 세금을 내지 않게 하실 것이다) 

당신은 유대인의 왕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당신은 진정 메시야인가? 

당신이 메시야라면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당신이 메시야라면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가? 


이 모든 질문은 그가 메시야임을 기대하든지, 혹은 의심하든지 하기에 사람들이 예수께 던진 질문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대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부흥시킬 왕은 아니었지만 그 분은 파도와 폭풍우를 잠잠케 하며 모든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모든 만물의 왕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생각했던 제사장, 성전 안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하고 집례하는 제사장은 아니었지만 성전의 장사치를 몰아내고 죽은 성전을 깨뜨리고 자신이 참성전이 되실 것과 모든 믿는 자의 육체가 결국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게 하는 진정한 제사장이셨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생각했던 선지자보다 훨씬 더 큰 자였으며 사람들이 참 선지자라고 여겼던 세례 요한 역시 그를 가리켜 나는 그의 신발끈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며 선지자보다 큰 자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여겼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요 10:22-33]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자, 그럼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예수께서 구약의 성경에 기초한 유대인들이 보기에 근거가 없는 그런 주장을 했던 것이어서 그 때에도 지금도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이 보기에 신성모독이요 사기꾼 같은 자에게 속고 있는 것인가요? 

그런데 구약의 말씀에도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신구약 할 것 없이 증거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까지 하지 않습니까?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 -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 그는 태초부터 있던 자이다!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갈릴리 지역에서 자라고 갈릴리 어부들이 사도가 되고..)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밖에도 구약에는 예수에 대한 예표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은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믿지 못합니까? 자기의 생각, 자기의 전통에, 자기의 습관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베드로의 고백을 필두로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들에게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를 지는 현장에서 제자들은 뿔뿔히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미리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가시는 데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나살려라 도망갑니다. 

왜 도망갑니까?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보다 더 어려운,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그 메시야가 왜 십자가를 지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십자가의 현장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께 비웃듯이 이야기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그럼 내가 믿겠다. 네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니 이제 그가 널 구원하나 안하나 보자..." (마 27: 41-43)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진정으로 고백했던 베드로나 나머지 제자들도 이 십자가 앞에서 다 떠나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 십자가, 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의 결정체가 십자가라고 말씀합니다. 

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걸림이 되는 이야기요, 왜? 자기들이 기다렸던 메시야, 아니 메시야보다 더 큰 분, 하나님의 아들을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으므로...

헬라인들이 보기에는 아니 신이 왜 인간 손에 죽냐?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의 길이냐? 힘으로 (로마의 황제처럼) 지혜로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구원을 이루는 것이지... 

그런데 부르심을 받는 우리들에게는 그 십자가야말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요, 제가 드리고 싶은 결론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완전한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신학은 너무도 풍성하고 깊고 넓어서 이렇게 설교로서 설명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주보에 실린 컬럼이 십자가의 한 면을 보여주는 묵상입니다. 


십자가는 팔레스틴 지역의 일종의 사형틀이었습니다. 

지배자들은 사형틀을 대중에게 공개하여 죄의 무서움을 경각시키고 두려움을 통해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함을 주는 죄와 죽음과 형벌과 고통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셨습니다. 가장 거룩하고 고귀한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자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에 의해, 성령에 의해 주님이 메시야로 고백되기 시작하자 이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요, 은혜의 상징이요, 믿음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가장 저주받고 더럽고, 고통스러운 곳에 주님이 임하니 그곳은 가장 거룩하고, 은혜롭고, 구원을 베푸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는 누가 달려야 하는 곳입니까? 

죄인입니다.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 죄인이 져야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니까 십자가를 볼 때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저 십자가는 바로 내가 달려 있을 사형틀"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감사하지 못하는가? 

그 십자가가 내가 달려야할 십자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악 무도한, 나보다 더 악한, 정말 나쁜 사람이 달려야 할 사형틀이지, 난 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도, 구원도, 소망도, 회개도, 믿음도 없습니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20-30년 감옥살고 나온 사람들....얼마나 억울할까? 얼마나 원망이 심할까?

그런데 희한하게 몇십년씩 억울하게 감옥을 살고 나온 사람들의 말... "그리 억울한지 모르겠다. 내 죄값이라 여겼다...."

군대에서 2주동안 하루 10장씩 반성문을 쓸 때...처음엔 어려웠지만 내 삶이 정말 반성할 것이 많구나...


십자가 상의 예수 양 옆에 있던 두 명의 강도 중에서 하나는 "네가 그리스도면 너와 날 구원하라!" 하면서 예수를 조롱하며 명령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조롱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또 한 명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눅 23:39-41) 

 그 십자가가 다름 아닌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나의 구원이 됩니다. 

 내가 거기 달려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에 비로서 나의 영혼에 구원이 임합니다. 

 내가 성경에서 이야기한 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십자가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형틀에 하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친히 달리사 우리가 겪어야 할 채찍의 고통, 가시 면류관의 고통, 손가락 마디와 발목의 못의 고통, 침뱉음의 모욕, 벌거벗음의 수치.... 모든 것을 나 대신 그 분이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받고, 고통스러운 십자가가 가장 거룩한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듯이, 세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목에, 귀에 거는 가장 귀한 보석이 되었듯이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나의 삶을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죽음의 십자가의 인생을 아름다운 보석같은 십자가의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여전히, 계속, 쭉~)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를 구원코자 어떤 일을 벌이시고 감당하셨는지, 하나님이시니 그 분이 이 땅에 내려와 그 숱한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미련하다는 소리와, 수치를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다름 아닌 나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작년 말부터 눈, 피부, 치아, 꼬리뼈...

계속 몸이 아프면서...

내가 몸이 계속 아픈 이유는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꾸 내가 감당하려고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그 분은 나의 모든 고통의 근원을 다 갚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구원했으니 불평하지 말고 나머지는 다 참아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감당하신 그 분께서는 또한 우리의 일상을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어버려두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께 맡기는 삶은 곧 예배의 삶이요, 기도의 삶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믿으면서도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은 십자가 의지 하지 않고 내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곧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능력으로 얻고 사는 사람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16장으로 이루어진 마가복음의 정확한 중간지점으로서 마가복음 신학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전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예수님의 관심의 초점이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사역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유대인의 땅에서 5천명을, 이방인의 지역에서 4천명을 먹이십니다. 폭풍우를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을 지나가십니다. 이 구절은 여러번 설교를 통해 말씀 드린 장면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인 카이샤르에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명명한 도시입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황제의 이름에 걸맞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원형경기장이 있어야 하고, 신전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크고 대리석로 치장한 화려한 신전이 있는 곳에서 주님은 초라한 옷을 입고 제자들에게두가지를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이 있는 곳.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 한복판에서 주님은 네가 믿는 주님이 세상 그 어떤 권력과 화려함보다 더 큰 분이심을, 하나님이 세상의 왕과 어떻게 다른 분이심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입니다"하는 이 고백은 이후 교회의 사명과 고백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신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릅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짖누르고 다스리는 나라, 부정과 부패를 일삼아도 돈만 있으면, 권력만 있으면 적당히 넘어가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동기든 다 허용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고, 우리 안에 선한 양심을 일어나게 하시고,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의 주인인 분이 바로 예수라는 것을 고백하는 곳. 그곳이 교회의 정체성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의 왕, 세상의 왕의 신전 앞에서 "예수가 나의 왕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자기의 가야 할 길을 처음으로 공개하십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십자가와 부활의 길" 입니다.  

왜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야 합니까? 바로 십자가와 부활, 고난과 죽음의 길, 수치과 모욕의 길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만이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바로 조금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의 길로 가지 마세요. 왜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려 합니까? 구약시대 하나님처럼 대적들을 무찌르고, 기적으로 놀라게 하고, 꼼짝못하도록 항복하게 하세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님 십자가 못지게 막을 것입니다. 

붙들고 항변했다. 주님을 꽊 움켜 쥐고 항변했다.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자신이 메시야라고 불렀던 예수를 움켜 쥐고, 꾸짖기까지 하는 이 마음.  

십자가와 부활을 가로막는 이 마음. 

도저히 평소의 제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마음. 


십자가를 피하고 고난을 피하고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길, 편한 길, 높임 받는 길, 칭찬받고 대우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 

결국 가이사랴 빌립보, 또 다른 왕국, 제국, 세상의 왕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그런 마음.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어디에서 돌이키신 것인가? 베드로와 마주보고 있다가, 지금 갑자기 뒤를 돌아 다른 제자들을 보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작 듣기를 원하시는 대상은 제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33b)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일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지고 부활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남들 다 가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 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뽐내고 자랑하고 높아지고 대우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34절 이제는 그 분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에게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그 길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예외없이, 나를 따르는 자 모두...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이익, 자기 이기심, 자기 욕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짐, 부담, 모욕, 수치)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무슨 소리입니까? 자기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외식이고 겉치례입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구원얻는 믿음, 은혜 받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구원 얻기 위해서 자존심 버리고 구원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하는 주님의 매정한 말씀에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맞아요 주님, 제가 참 개처럼 여김을 당해도 마땅하지만 개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십니까? "가라 네 믿음이 크도다" 합격! 


자기 십자가 할 때 마다 떠오르는 사람, 구레네 시몬 

(막 15: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이 십자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자원하는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우리는 자원하는 십자가에 익숙합니다. 힘들지만 내가 원해서, 어렵지만 내가 선택해서... 

그런데 시몬이 진 십자가는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떠밀려서 나에게 온 십자가, 그렇지만 피할 수 없어서 마지 못해 지는 십자가...


2. 대가나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십자가

시몬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저 길 지나다가 로마 병사에 의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질 때에 이런 생각 얼마나 하는지 모릅니다. 이거 힘들지만 잘 지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시몬은 전혀 그런 기대함 없이 그 십자가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Business입니다. 왜 회사에 나가서 피곤해도, 아파도, 하기 싫어도 일합니까? 

돈을 벌기 위해,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건 비지니스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잘못 교육하고 있는 것이 이거 하면 복준다. 이거하면 이렇게 된다. 

십자가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비지니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도 손해볼 일 전혀 안하려고 합니다. 


3. 주님이 당한 수치와 모욕을 똑같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 모여있던 군중들: 제자들은 도망가있거나 숨어있고 오직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군중. 어쩌면 시몬도 예수를 욕하면서 서있다가 병사들에게 끌려왔을 지도 모른다. 
  • 십자가를 들면서 욕을 하는 입장에서 욕을 듣는 입장으로 
  • 아무런 위로나 대가 없이 당하는 그런 수치감. 모욕


그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억지로, 아무런 위로 없이, 수치를 당하면서 지어야 하는 십자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6절)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 안지고 칭찬과 명예와 성공과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도 정작 구원이 없으면 무엇이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예수가 지신,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워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지난 주에 박사 논문을 통과하신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논문도 교수들의 격찬을 받으면서 미국과 한국에서 출판이야기도 교수가 먼저 제안하고 할 정도로 실력있고 학식이 뛰어나신 분.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한국 교회를 위해 어떻게 하고....그런 거창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 안의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가끔 목사라는 직분을 담당하면서 제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부끄럽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언제? 

세상적인 기준 앞에 설 때에... 

연봉으로 직업을 평가하고 교인수로 목회를 평가할 때. 

위축당하고 소심해질 때가 있어요.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교인수가 목회의 전부인양 자꾸 그런데서 자유하려고 해도 그런 말을 듣고 대우를 받을 때마다 제 자신이 부끄럽게도 영향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신전 앞에 서 있는 제자들처럼 성공을 자랑하는 세상의 위용 앞에서 자신이 초라해 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어머니, 장인어른 은퇴하시고 여기 저기 아프시고 할 때에 자식된 도리도 다 하지 못하는 자녀

자녀의 아픈 곳을 마음껏 치료해주지 못하는 부모. 

아내의 생일날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남편,

성도님들을 만나고 심방할 때마다 대접하지 못하는 목사...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일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한 교회에서 식당봉사에 대한 갈등을 토로하며 한국에서 여행오신 권사님께 고출을 토로하니까 "우리 교회는 서로 식당봉사 안한다고 해서 아얘 사설업체에게 맡겼어요." 

희생없는 신앙생활, 헌신 없는 예배 

예배는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희생. 

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위로받고, 힘을 얻으니까...

참 예배는 주일 날 드리는 한 시간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그리고 주일 날 예배를 통해서 감사하고 회복하고 충만하여져서 돌아가는 것이다. 

예배 드린다고 표현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는다. 

그런데 얘기 하다보면 마치 예배가 자신이 드리는 최선의 희생이고 헌신인양....


새벽예배 시간이 끝나면 간단히 아침식사 하고 교회 청소.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토요일 날 새벽예배 드리는 성도님 수가 확 줄었습니다. 

이수연 집사님 화장실 청소, 이귀자 권사님 강대상 청소, 제가 청소기 돌리고 바닥 닦고....

그것을 보기가 넘 딱하다. 

그래서 언젠가 부턴가 토요일날 청소를 안하고 간다.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에 혼자 청소한다. 

성도들 누구를 보아도 딱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부담 안주고 내가 하려고 한다. 

그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힘들게 일주일 일하고 토요일 하루 푹 자는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끌어서 나오라는 말 차마 못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목숨을 위해 천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구원에서 멀어지면 어떡하는가? 

자기가 손해보고 힘들어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구원을 이룬다. 그래야 구원을 이룬다.

이제 무더운 여름도 지나고 아이들은 새 학기가 시작된다. 

우리 교회도 9월부터는 새로운 그룹으로 성경 공부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글학교가 시작된다. 

새롭게 시작되는 일이 개인들에게 어떤 부담이나 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자원하는 심령이 있을수도 있지만 자원하지 않고 억지로 맡기워진 십자가가 주어질 수도 있다. 

기억하자.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존심 내려놓고, 자기 이기심 내려놓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때로는 억지로 맡기워진, 달가와하지 않는, 피하고 싶은 일들이 주어져도 

나를 따르라. 

주님이 하셨듯이 나도 주님따라 순종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 로고스 성도들이 되자.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