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72018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질그릇에 맡긴 사명 (고후 4장 1-7절)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로 잘사는 도시였습니다. 국제적인 운동장이 있어서 올림픽과도 같은 경기도 하고 학문도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18개월간 머물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특별히 평신도의 신앙이 잘 발달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서 하면 성령장, 사랑장이 있듯이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에서 가장 성령이 충만한 교회요, 은사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은사가 많은 대신 항구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향락문화 또한 잘 발달되었고 때문에 문란한 일들이끊이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유난히 갈등과 분열이 심히 많은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분파를 만들어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나누어 싸웠고 평신도의 기세가 강했기 때문에 좀처럼 리더들에 대해서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가 무슨 사도냐? 그는 왜이렇게 말주변이 없냐? 그는 왜 이렇게 못생겼냐? 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2대 목회자로 세워졌던 사람은 아볼로 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또한 말을 누구보다 잘하는 웅변가였습니다. 처음에 아볼로의 말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겐 성령의 충만함이 없고 은사가 없다 하면서 아볼로를 쫓아냈습니다. 바울이 아볼로를 권면하면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의 삶의 수준이나 신앙의 수준은 높아서 경제적이나 지식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성령의 은사도 활발한데 비해 그들의 삶에는 문제나 스캔들이 끊이질 않고, 또 그들 사이에 분쟁이나 갈등도 끊이질 않고, 또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세워진다 해도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아볼로에게도 만족을 못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베드로가 왔다해도 갈릴리 어부 출신이라 만족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좀 더 수준높고 부족함이 없고, 그들보다 월등히 낳은 그런 지도자를 찾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기대를 맞추는 지도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과 및 동역자들의 자세와 변론을 하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이 직분, 전하는 자의 직분, 가르치는 자의 직분을 받아 우리가 주로 부터 긍휼하심을 입었듯이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지 않을 것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하는 말이 결코 속이는 말이 아니요 오직 진리를 나타냄을 2절을 통해 증거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시하건 하지 않건 자신과 및 동역자들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5절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5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고후 4: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만약 복음이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라면 누가 떳떳히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있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진리를 7절의 유명한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는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가 됨이요, 질 그릇은 무엇입니까? 바로 연약한 우리 자신들입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그릇을 빚고 유약을 바르지 않은 그릇입니다. 즉 광채도 없고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왜 그런 그릇에 보배를 담습니까? 

능력이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논문을 쓰는데 한 마디의 내 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권위있는, 믿을 수 있는 저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말에 신빙성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했더라도 더 유명하고, 더 권위있는 학자의 글을 인용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또 찾습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자격이요, 신뢰성이요, 권위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성도들도 좀더 많이 배우고, 좀 더 믿을 수 있고, 좀더 권위 있는 목사님의 말을 들으려 합니다. 또 목사는 그런 성도들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 타이틀을 중시하고, 외모에도 신경쓰고, 어떻게 해서든지 권위를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어떨까요? 

[눅 2:8- 11]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 

역사상 이 사건 보다 더 파격적이고 새로운 사건이 있을까? 왜 이 사건이 파격적이고 중요한 사건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말씀하신 대로 이 소식, 이 뉴스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구에게만 중요한 사건,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좋은 소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11절의 말씀은 이 좋은 소식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눅 2: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 바로 지금, 다윗의 동네, 그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 땅에, 너희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구원자, 바로 지금, 바로 이 땅에 나를 위해 메시야가 오셨다. 구원자가 오셨다. 


사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의 오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주로 율법이 중심이 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나심을 뒷받침 하기 위해 유대인의 족보를 이야기 하고, 동방박사와 헤롯 대왕의 입을 빌려 예수의 나심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보다는 남편 요셉의 꿈을 이야기하며 좀더 남성중심으로, 율법과 족보를 통해, 또 지식과 권력의 사람들을 통해 예수의 나심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 소개되지 않은 여러 이야기들을 말합니다.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않았던 제사장 사가랴의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굳게 닫히고 반면 가브리엘의 소식을 듣고 이를 굳게 믿고 찬양했던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으로 부터 칭찬받은 이야기, 그리고 시므온이라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한 사람, 안나라는 과부 선지자의 이야기...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목자들의 이야기...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바와 같이 이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의사입니다. 또한 이 글은 데오빌로 각하라는 당시의 권력자에게 복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했던 어쩌면 보고서적인 기록입니다. 

누가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사실을 중시했습니다. 의사로서 과학자와 같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 꾸미지 않고 기록하여 보고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그런 증거들...

마리아의 꿈이라던지, 시므온이나 안나 같은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중심에 나와 있는 가장 중요한 소식.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늘 이 땅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한 목자들...

누구하나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상 가장 믿기 힘든 일을 증거할 증인들로서 별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믿기 힘든 사건을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하셨다! 

unbelievable news를 unreliable한 사람에게 맡기셨다! 

우리는 이런 일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도 아니고, 무언가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전혀 신뢰받지 못하는 그런 여인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알렸던 이야기...

요한복음 4장에 전혀 신뢰받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내가 메시야를 보았다"며 마을을 뒤흔들었던 이야기....

예수의 삶을 당시 가장 소외되고 믿을 수 없었던 갈릴리의 어부들을 통해 증언케 하신 열두 제자들을 통해 전파된 이야기...

어쩌면 신약성경의 모든 일들은 이렇게 가장 믿기 힘든 일들을 신뢰받지 못한 자들을 통해 전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목자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목자들 하니까 어감이 좋아보이지만 이 단어를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이름으로 바꾸면 어감이 확 달라집니다. 

목자를 뭐라 부릅니까? 양치기...양치기 소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죠.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하고 하도 거짓말을 하니까 정말 늑대가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이 전혀 믿지 못하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

어쩌면 목자들의 이야기는 그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 만큼이나 신빙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나심은 한 명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명의 목자들...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자들의 여러 입술을 통해 증거된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방법을 가리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 표현합니다. 


(고전 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믿을 수 없는 양치기라도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이면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열두 제자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목자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을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그저 나에게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를 자랑하고, 성도들을 자랑하고, 무엇보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나같은 자에게 맡기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그 놀라운 이야기,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증언이 바로 성경이고, 그러한 자들의 활동이 기독교의 역사이고, 그러한 자들의 사는 이야기가 바로 간증입니다


하늘의 천사와 주의 사자들은 예수의 탄생의 증인으로 목자들을 택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나 요한이 아닌 막달라마리아 같은 여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들고 그들은 그들에게 임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광고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이 믿건 말건, 외면하건 반기건 주가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하고 고치신 일들을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가장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소식을 저희들의 입술에 맡기셨습니다. 


바울이 말한 질그릇은 첫째는 자기 자신 입니다. 

자기 자신도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말들을 계속들으면 자존감이 무너집니다. 화가 나고 역정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핍박했던 예수 앞에 오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수를 어떻게 처음 만났습니까? 

바울을 만난 예수의 첫번째 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예수를 핍박한 자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조금 아프다고 역정이 납니다. 

사랑하기 싫다고 합니다. 

예수는 날 위해 죽었는데 난 조금 아픈 것 같고 무너지기가 일수 입니다. 

예수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예수의 십자가 안에 자기를 묻습니다. 

그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고후 4: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 그렇습니까? 예수 앞에 나오면 그 앞에 어떤 어려움도 핑계 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모든 핑계가 날 위해 지신 십자가 앞에서는 변명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질그릇은 또한 자기가 사랑해야 할 모든 형제들입니다. 

그들 또한 나 때문에 상처 입습니다. 

그들이 찌르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상처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름부터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버리고 할퀴고 아픔을 주었기 때문에 쓴 뿌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알면 불쌍해 집니다. 

긍휼함이 생깁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치료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습니다. 

주인잃은 고양이가 새 주인의 사랑으로 다시 야옹거리며 활동하듯이 상처 입은 영혼 우리 믿는 자들 안에서 치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교회의 목적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쓸모없고, 깨지고 깨지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만 우리 안에는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보배 때문에 우리는 존귀해 진 것입니다. 

이 보배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쓸모없어 집니다. 

보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처럼 광채도 없고, 쉽게 깨지기 쉬운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런 질그릇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우리 질그릇에게 보석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외모를 따집니다. 

(고후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그런데 그런 기준은 아무리 맞추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를 때도, 다윗을 부를 때도 그들이 준비가 되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시기에 연약한 자를 통해 실패없이 사용하십니다. 복음을 자격있는 자에게 맡겼다면 누가 그 복음을 맡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이 복음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질그릇같은 우리에게 임할 때에 질그릇도 쓰임받는, 하늘의 빛으로 빛나는 귀한 그릇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데에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교회를 자랑하는 데에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시다. 

 

Posted by 소리벼리

제목: 깨끗한 그릇

본문: 디모데후서 2 20-26

[딤후 2:20-26]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큰 집에 주인이 여러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비싼 금 그릇도 있고, 아주 이쁘게 생긴 은 그릇도 있고, 다듬질을 잘한 나무그릇도 있고, 그리고 반듯하게 생긴 흙으로 만든 질그릇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좋은 손님이 왔을 때에만 내어 놓는 좋은 고상한 목적을 위한 그릇도 있고, 어떤 것은 그저 종들이 마음대로 먹도록 바깥에다가 내어 놓는 하찮게 취급하는 그릇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당연히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금그릇이나 은그릇은 존귀한, 아주 고상한 목적을 위해,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나, 아주 특별한 날에만 쓸 테이고, 나무그릇이나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아무 때나 쓰는 그릇이 되겠구나…. 대다수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1)

è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 latter, he will be instrument for noble purposes, made holy, useful to the Master and prepared to do any good work.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 은 그릇은 귀한 용도로 고상하게 쓰여지고,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은 하찮은 용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금 그릇이나 은 그릇,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그 재료에 상관없이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내가 내 재료가, 내 달란트가, 내 능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능력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자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참으로 아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진리의 말씀이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할 때에도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에도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면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11:3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까지 바라고 행해왔던 교육은 언제나 큰 그릇이 되게 하는 교육” “금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만큼 1등을 좋아하고 최고를 좋아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올림픽 나가서도 금메달 아니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선 친구와도 경쟁해야 하고 늘 남을 넘어서도록 교육받아 왔습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조차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최고가 되는 것이 곧 쓰임 받는 것이며, 사회에 유익한 것이고, 결국은 남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라고,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에 올라서라는 그런 가치관, 그런 인생관이 어느덧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됩니다. 일단 성공을 하면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과정이 어땠든 성공만 하면 그 결과만 남는다는 그런 생각들 속에서 우리 세대는 교육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삼성과 LG같은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을 일구어냈고, 세계 20대 대형 교회 중 절반 이상을 가진 성공한 기독교 나라가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한국 기독교의 특징을 말할 때 기업의 특징과 많이 닮아있다고 말을 합니다. 물질 만능주의, 결과 중심주의, 성과주의, 시스템주의, 관료주의.

물론 기독교는 복의 종교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부자가 되며,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편에도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1:1-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8복을 이야기하실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 ( 5:1-10)이 복 있는 자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복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복을 하나님 말씀하신 복이라고 뚜렷이 증거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예수 믿었더니 병이 나았더라, 가난에서 해방되었더라. 큰 차를 몰게 되었더라. 그건 그냥 부스러기처럼 따라오는 부록이지 중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축복이라고 하면 복음을 질 나쁘게 하는 것입니다. 축복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죄로 물든 나의 심령,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이 씻고 하늘나라의 심령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축복입니다.

제가 큰 교회 보다는 바른 교회, 성도가 없어도 깨끗한 교회,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12명의 제자를 세우는 목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저보고 열정도 없고, 비전도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목사라고 말을 합니다. 야심이 없다고 말들을 합니다. 저의 됨됨이를 평가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다는 것이고, 좀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순진하다는 표현입니다. 그 속에는 좀 어리석고 모자란 것 같다는 인상도 좀 받습니다.

전 양 부모님 모두 3대째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3형제가 다 목회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유학오기 전 전도사로 6년을 섬기고, 선교잡지의 기자로, 편집주간으로 2년동안 한국의 유수한 교회를 방문하여 목사님들을 취재하고 그 중 몇 분의 존경 받는 목사님들로부터 한국교회는 지금 절대 절명의 위기가 올 것이다. 아니 지금 이미 그 위기 속에 살고 있다. 바른 영성, 바른 복음, 바른 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고민하며 영성을 공부하기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저희 학교는 개신교 다섯 교단, 가톨릭 네 교단이 각각 합쳐져서 만든 연합체 학교 입니다. 목사에서부터 감독, 사제, 신부, 수녀들이 함께 모여 수업을 하고 지금 시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필요하고 절박한 것이 무엇인지를 교단과 교파, 종파를 초월해서 고민들을 하고 격하게 논쟁합니다. 아주 보수적인 학교에서는 가톨릭과 함께 수업을 한다고 해서 자유주의니 위험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건 수녀건 목사건 우리가 함께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무엇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성경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파를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해서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 순위를 예수를 닮는 것이고 그의 삶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잘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간증할지는 몰라도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그 분을 닮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분을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 싶고 그렇기 위해서 내가 힘써야 하는 것은 내가 금그릇, 은그릇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함을 말씀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면 목동으로도 쓰임 받을 수 있고, 왕으로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깨끗하지 못하면 설사 내가 금그릇이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존귀함만 자랑하다가 끝이 나게 됩니다.

평생 목회해서 좋은 교회를 세우고 존경 받다가 마지막에 교회 세습한다고 해서 본인의 사역도 다 금이 가게 하고 교회도 술렁이게 만들고, 한국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쓰임 받는 도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금그릇이라는 것을 애써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금그릇이던 질그릇이던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지 내가 재료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없듯이 우리가 우리 재료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은 깨끗한 그릇이 되라는 것입니다.

전 순진하지 않습니다. 목회하는 것에 있어서는 어리지만 나기 전부터 고민하며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지혜, 가장 큰 야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정하시는 그릇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 그릇은 금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두 번째의 반전은 20절의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의 이런 것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è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 latter, he will be instrument for noble purposes, made holy, useful to the Master and prepared to do any good work.” 

영어로 표현하면 “from the latter” 가 의미하는 것이 16절에서부터 19절에 나타나는 망령되고 헛된 것을 말하고, 경건하지 아니한 것에서부터 떠나라는 것인지, 아니면 바로 전 절에서 나타나는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을 말하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해석은 내용상으로 16절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문법상으로 보면 이런 것, 영어로 from the latter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시체를 받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네게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에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면 거룩하게 되고,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을 것이고, 어떤 선한 일에 대해서도 준비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성막에서도 다루었지만 우리 인간은 조각목 같은 존재입니다. 가시 많고 상처많고 쓸모없는 나무가 조각목입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에 침을 발라 안수하실 때에 소경의 첫 마디는 나무 같은 사람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조각목을 성막의 도구로 쓰실 때에는 나무를 깎아 거기에 금을 입히고 금 테를 둘러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입히워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케 하여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인간의 그릇은 나무그릇이고 질 그릇이지만 우리가 자신을 깨끗이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은그릇, 금그릇으로 만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초라한 나무그릇, 질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자신을 깨끗이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금으로, 은으로 덧입게 하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사울은 금그릇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자 그의 좋은 체격, 인물, 자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림받아 저주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를 바꾸실 수 있고, 그 분의 말씀만이 나를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평생 열정과 비전과 내 모든 꿈을 담고 추구하는 목회와 삶은 깨끗한 그릇이 되는 나, 깨끗한 그릇이 되는 가정, 그리고 깨끗한 그릇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망치는 것은 정욕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게 하는 데서 옵니다. 모든 죄의 근간이 정욕에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2)

의는 관계가 바른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바른 것이 곧 의로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정욕을 피하고 자신을 고귀하게 간직할 수 있습니다. 주위의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때에, 또는 자기가 관계 맺는 사람들의 자질이 좋을 때에 또한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에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힘들더라도 믿음 있는 자들만이 물질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두려움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새 계명이 서로사랑하라. 사랑 가운데 화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곧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이라는 말씀입니다.

2013년 제게 주신 목회의 꿈은 30명 교회에서 가장 깨끗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닦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 100, 200명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인원에서, 우리가 가진 위치에서 가장 깨끗한 교회,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20, 30명 교회 중에서 주인으로부터 깨끗한 그릇으로 인정된다면 우리의 모습이 연약해도 존귀한 목적,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교회는 쓰임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하심이 교회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딤후 2:20-22]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딤후 2:20-22]

 Now in a large house there are not only gold and silver vessels, but also vessels of wood and of earthenware, and some to honor and some to dishonor. Therefore,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se [things], he will be a vessel for honor, sanctified, useful to the Master, prepared for every good work. Now flee from youthful lusts, and pursue righteousness, faith, love [and] peace,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from a pure heart.

 

  1. 집은 하나님이 주인 되신 집이다. 하늘나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도 하고, 가장 가까이 우리가 느낄 있는 곳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신 교회이기도 하다.  세상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손에 넘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모든 주권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의 주인되신 곳에는 금과 은이 가득하다. 금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통치이고, 은은 우리의 대속주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곳에는 나무와 질그릇도 있다. 마치 성막을 지을 때에 조각목으로서 모든 기구와 기둥의 재료를 삼으신 것처럼 말이다. 질그릇은 흙으로 지은 그릇이다. 흙으로 지은 우리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와 질그릇은 우리 연약한 인간을 말한다.

 

  1. 세상의 모든 가치와 모든 욕망은 금을 향해 있고, 은을 향해 있다. 모두가 가장 높은 , 가장 존귀한 , 가장 화려하고 값진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꾸미고, 포장하고, 바꾸고, 변해버린다. 최고가 아니면 실패라 생각하고, 가장 비싼 존재가 아니면 실패자라 한다. 그런 가장 비싼 존재도 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질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고, 의식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1.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재료에 상관없이 깨꿋한 그릇을 쓰신다. 어차피 모든 재료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은 억지로 금이 되려고, 은이 되려고 하지 말고, 우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깨꿋한 그릇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질그릇이 그릇이 없지만 그릇 중에서 가장 깨끗한 그릇은 있다. 성결은 내가 금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무 중에, 질그릇 중에 가장 깨끗한 그릇으로 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