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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각목 교회, 조각목 성도 (출애굽기 25장 10-22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공급처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후에 한 일은 그들이 이전의 애굽의 풍습과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고 율례와 규례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먼저 택하시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지껏 모든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을 때 만큼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말할 때, 일주일 동안 세상 속에서 힘들며 고생하다가 주일날 말씀으로 공급받는 날이라고 말을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전제가 빠진 말입니다. 예배는 일주일 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날이 먼저입니다.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사렙다 과부가 없는 중에서도 드리니까 하나님의 공급이 이어지는 것이고, 어린 소년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리니까 5천명이 양식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먼저 드리고 (왜?그가 먼저 우리에게 공급하셨으니까…?) 예배 순서- 성도가 드리고, 주님께서 주시고가 반복되게끔 예배 순서가 짜여져 있습니다. 오늘 날 예배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께 받으러 오는 날이라는 잘못된 의식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받는다고 할 적에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이 됩니다. 내가 공급받으려는 곳을 찾으니까 화려한 곳, 큰 곳, 풍족한 곳을 찾습니다. 내가 드리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 온전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출 25:3-9]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실까? 누구나가 헌신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헌신은 부한 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형편에 맞게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헌신의 모습이 있다. 

출애굽기 38장 24-31절을 근거로 보면 이 때에 모인 것이 금 29달란트 730세겔, 은 100달란트 1775세겔, 놋 70달란트 2400 세겔이었는데 이것을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금 1.5톤, 은 5톤, 놋 3.5톤 이었다고 하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과 은과 놋 외에는 그리 귀한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그리 귀해 보이지 않는 성막 재료들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6장에 보면 백성들이 아침마다 예물을 가져와서 너무 많아 지니까 모세가 명령을 내려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공포하게 됩니다.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 할 때도 스룹바벨에 의해 2차 성전을 재건 할 때도 힘든 중에 백성들이 예물을 가져왔는데 항상 넘쳐서 넉넉한 가운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헌신의 기적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헌신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우리는 넉넉함을 누립니다. 모든 인류가 살기에 넉넉한 자연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누구나 다 부족하다고 하는가?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탐심이 관계를 막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성막을 지을 모든 재료가 완비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성막의 설계를 맡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 대개는 먼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서 전체의 모양을 구상하고 세세한 부분으로 구상을 할텐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제시하신 것은 지성소에 있을 언약궤와 속죄소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와 속죄소가 바로 성막의 기초고, 설계이고,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공의이고, 능력이다. 속죄소는 인간의 죄의 가리움이고, 하나님의 은총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긍휼이다. 이 두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을 넣어둡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록한 돌 판이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이고,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넣어두었습니다. 

  1. 돌판 – 말씀   만나- 육적 말씀- 그리스도   싹난 지팡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성령-> 삼위일체
  2. 돌판- 말씀   만나- 생명의 떡   싹난 지팡이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 그리스도를 상징 
  3. 백성의 죄- 돌판-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어진 돌판    만나 항아리- 그날 먹을 것을 다 먹고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라는 말씀에 불순종,  싹난 지팡이 –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불망과 원망 
  • 우상숭배, 불순종, 원망과 불평에 대한 죄를 고백하고, 속죄소로 그 죄를 가리움으로 교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언약궤의 주요 재료이자 성전 모든 기구에 있어서 목재의 재료로서 사용되었던 조각목입니다. 조각목이라 번역된 이 나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아카시아 나무'(acacia wood)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성경과 KJV만은 이를 '싯딤나무'(shittim woo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는 잎이 길고 넙적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흰 꽃이 피는데 중동지방의 광야나 사막에서 자라는 싯딤나무는 종은 같지만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게 잎이 작고 꽃이 피지 않습니다. 

조각목은 가시가 많고 볼품이 없어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다윗 궁전을 지을 때 쓴 백향목에 비하면 조각목은 참으로 하찮은 건축 재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언약궤를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성전 때에도…? 어떤 목사님 한분이 성막을 연구하다가 그 중 이 조각목에 꽂혀서 여러가지를 살펴보다가 큰 은혜를 맏으셨습니다. 그가 밝힌 조각목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조각목은 서로 찔러댑니다: 조각목은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결이 심하게 꼬여서 모질어진 악마디가 많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험난한 인생 중에 모나고 거친 성품, 쓴 쭈리가 많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끼리 부딪히면서 서로 찔러대는 소리가 요란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각목은 모나고 찔러대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까지 말이나 행동으로 얼마나 모나게 찔러대며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남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찔러서 상처투성이를 만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필이면 왜 이런 부적합한 나무를 성막 재료로 쓰라고 하셨을까요? 볼품없는 조각목이지만 다듬어서 귀히 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각목처럼 남에게 계속 상처주고 시비하며 찔러대는 근성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교회의 기둥으로, 하나님의 지성소 안의 언약궤를 담은 그릇으로 쓰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각목이 성전 기둥으로 쓰임받는 것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1. 바짝 마른 가지 

조각목이 가진 둘째 특징은 늘 비틀어질 정도로 바짝 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 식물 중에 가시가 많은 것도 잎을 통한 수분 방출을 최대한 막고 조금이라도 수분을 더 보존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입니다. 사막 땅 한가운데서 일 년에 한두 번 내리는 비로 수분을 공급하고자 몸부림치며 허덕이는 조각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렇게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생명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모습과 닮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적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언제나 목마릅니다. 세상은 영적 갈증으로 목마른 곳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권력을 가져도, 지식을 가져도, 건강을 가져도 그것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더 목이 마른 곳이 세상입니다. 영적인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만족함을 느끼는 이유도 영적 갈증을 해소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목마른 이유는 여전히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그 깊은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비틀어진 조각목을 성막 건축 목재로 선택하신 것은, 사막의 조각목과 다름없는 우리 인간이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1.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

조각목은 사막에서 모래와 바람에 많이 얻어맞으며 자라는 나무라서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조각목은 아주 단단하고 억센 악마디가 많습니다. 이 악마디 때문에 뿌리에서 만들어진 진액을 원활하게 공급받는 일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 일도 조각목처럼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일 때가 잦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애매한 고난을 겪기도 하고, 은연 중에 고립 당하기도 합니다. 교인들 중에 뜻하지 않게 왕따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목사도 성도들로부터 왕따 당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봐도 기대고 의지할 곳이 없어 난감해질 때도 있습니다. 결국, 예수께 가는 것밖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조각목처럼 악마디가 너무 많아 스스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서 고립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의심이 많은 성품 때문에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남들이 무슨 권면을 해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주려 해도 세상에서 너무 많이 얻어맞고 속아서 그런지 교회에 와서도 ‘그것이 사실일까? 그럴 수가 있나?’ 하는 의심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라는 진액을 순수하게 공급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완악한지 모릅니다. 내 속에 있는 완악함이 악마디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고립해 성장을 방해합니다. 

인간이 당하는 이런 상황은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형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막의 조각목처럼 고립된 채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신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 내가 조각목임을 인정해야 은혜가 입합니다. 

조각목과 같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 예수를 간절히 찾게 됩니다. 나 자신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못나고 어리석어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 죽음의 위협과 공포를 느껴본 사람만이 살려는 본능으로 주님을 찾아옵니다. 탕자가 아비 집을 떠나서 온갖 무시, 멸시, 천대 다 받고 인간으로서는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온 것처럼, 자신이 조각목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내가 조각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이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하던 버릇대로 자기가 정한 행동의 기준, 믿음의 기준을 갖고 그 이상은 절대 행동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믿음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막12:30) 이 주님이 정하신? 믿음입니다. 스스로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신앙생활을 자기 수준에 맞추어 적당히 하려고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적당히 해도 신앙생활은 ‘적당히’가 아니라 ‘죽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한 믿음을 따르지 않고 임의대로 내가 정한 것만 믿는다면 그것이 타락입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 없는 조각목 같은 인생인가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쓰임 받을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이 조각목과 같은 존재라고 인정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 껍질을 벗겨내야 합니다. 

싯딤나무는 커다란 가시가 많고 심하게 뒤틀렸으며, 악마디도 많은 나무이기 때문에 그대로는 무엇에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각목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쓰임새에 맞도록 잘 잘라야 합니다. 조각목을 성전 기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여섯 자로 잘라야 하는데 나무가 “?나는 일곱 자니까 일곱 자 그대로 있겠소”?라고 자기주장을 한다면 그 나무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쓰시자고 할 때 자기의 모습을 꺾고 순종할 때에 비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도록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끌고 가면 망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믿음을 끌고 가는 기준이 되게 해야 합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저는 부족해서 못 해요”?라고 합니다.  사양하는 것을 겸손으로 잘못 알고 너무 자신을 잘라내서 쓰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만 하면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목사인 저도 기도하다가 본문을 받고 설교를 준비하면 언제나 두려움이 앞섭니다. 이 말씀을 하다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이 말씀 빼고 저 말씀 빼면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나?’ 설교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분만 배경 삼고 담대하게 나가면 내가 했던 모든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못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입니다. 

 

조각목을 성전 짓는 재목(材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잘 자른 후에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라는 껍질을 벗겨 내야 합니다.  외식과 위선, 주제를 모르고 잘난 척하는 것, 되지 못하고 된 체하는 것,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것, 가지지 못했으면서 가진 체하는 것 등 모든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을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성령의 지식과 지혜와 성령의 권능으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조각목을 소용에 맞게 치수대로 잘라 쓰듯, 우리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쓰임 받을 때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발가벗은 자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 주제에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가진 것처럼 껍질로 싸고 위선을 떨고 있으니 그 껍질을 속히 벗겨 내야 합니다. 

 

껍질을 벗긴 조각목은 재빨리 금으로 싸야 합니다. 그냥 놔두면 비가 오면 썩고 뙤약볕이 내리쬐면 비틀어져 갈라지고, 무엇에 부딪히면 금세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껍질을 벗긴 조각목처럼 연약하기만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조그마한 일을 당해도 금세 교회에 안 간다고 버팁니다. 제일 속상할 때 제가 욕먹는 것도 괜찮고, 헌금이 안나와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지만 무슨 일이던지 성도가 안나오면 죽을 만큼 속상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인간의 사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을 인생입니다. 예배에 나오셔서 그 관계의 끈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이 죽습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껍질 벗긴 조각목처럼 금세 부서지기 쉽습니다. 근심과 염려가 오면 쉽게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의해 비틀어지고 갈라집니다. 이런 나약한 근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근성 그대로 놔두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싸라는 것입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싼 것처럼 우리도 금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각목 같은 심령을 싸서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여전히 내 안에서 나만 보인다면 내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육신의 생각에 머무르는 나만 보이면 썩은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늘 비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쏙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 되시는 주님만 밖으로 나타나시면 달라집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그를 부드럽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고, 만족하게 만들고, 다시 보고 싶게 만듭니다. 금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뿐더러 언제 어디서나 제값을 지닙니다. 

 

조각목의 변형을 막고 성전 기둥으로 값지게 사용하기 위해서 금으로 싸는 것처럼, 나를 보호하고 나를 통해 예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근성과 나의 자아가 드러나거든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했구나. 주님과 떨어져 나 홀로 있구나’라고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깨닫고, 부러지기 전에, 비틀어지기 전에, 썩기 전에, 쓸모 없는 나무가 되기 전에 빨리 주님 안에 들어가서 금으로 조각목을 둘러싸는 것처럼 예수로 나를 둘러싸야 합니다. 

 

예수의 피 속에는 예수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받아 마시라는 것은 예수의 특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 않았을 때는 별의별 특성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능력도 나타나고 이적도 나타나고 악한 영도 몰아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도 합니다.

 

우리는 조각목이 금으로 싸여 쓰임 받는 것처럼 예수의 특성만 나타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 중에도 자기가 가진 못난 근성과 기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말인데, 안디옥 교인들은 그 당시 예수의 특성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성령이 충만해서 가는 곳마다 예수의 특성을 나타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예수쟁이’라는 말로 불린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원래 의미입니다.

 

조각목은 정금으로 싸일 때 비로소 성전, 법궤, 기둥, 제단 등을 만드는 재료로 훌륭히 사용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날마다 예수의 피 공로로 씻음받고 예수의 특성을 나타낼 때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인 모든 성도도 똑같이 주님의 특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인 ‘나’를 조금이라도 나타내려?하면 주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굉장한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다가 10년, 20년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능력이 싹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하신 일을 전부 자기가 가로채서 자기가 했다고 자랑하고 영광 받으니까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교회 일도, 전도도 자기가 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난 순종만 한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만 앞세우고 나는 주님 뒤에 가려서 주님만 보이게 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능력을 나타내며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성경 읽다가 가장 포기하기 쉬운 장; 성막, 계명

그 곳에서 발견한 조각목의 진실-> 2012년 목회를 한지 1년이 지나서 직장있는 성도도 없고 서로 찌르는 말

표현은 못했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서 배운 사람, 직장 좋은 사람, 보내주세요. 부끄러웠던 기도

그렇게 기도할 때에 응답처럼 주신 말씀 – 조각목 

예수님께서도 오셔서 하필이면 그 많은 좋은 곳, 예루삶렘을 놔두고 가장 멀리 떨어진 북쪽 갈릴리 지방의 어부들을 제자 삼아, 세리, 창기, 문등병자, 사마리아여인, 그런사람들을 만나면서 교회를 이루신 분. 

구약의 교회- 제사장, 레위인, 구별돈 자들을 통한 예배 

신약의 교히- 성령 받은 자, 직업과 출신에 상관없이 그래서 탈도 많고 분쟁도 많고, 그런데 그렇게 성막의 뜰이 무너지면서 구원의 문이 이스라엘에게서 열방으로, 전 세계로, 그리고 한국으로. 그렇게 밀려오는 압도적인 은혜 

그래 난 조각목이다. 난 조각목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목사요, 조각목 성도들의 목사이다. 

그런데 이 모습을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예수 께서는 금테를 입혀 주실 것이다.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언약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부어주실 것이다. 

정말 나같은, 조각목과 같은 쓸모없는 인생을 택하사 하나님의 금테를 입혀서 성전의 법궤로, 기둥으로 삼으신 주님. 우리 성도와 함께 그 은혜를 나누고 싶다. 우리 모두 조각목인생이 아닙니까? 서로 잘났다고 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조각목인 것을 인정하면서 가시에 찔려도 우린 원래 그랬잖아, 나도 누군가를 찌르며 살아왔잖아 하며 감싸 안아주고 나 자신을 주님 앞에 고백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금테를 입혀서 정말 하나님 나라의 기둥으로 쓰임받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바벨론을 고발하라 (옘 51:33-37절) 


[렘 51:33-렘 51:37]

(렘 51: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렘 51: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 51:35)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렘 51: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렘 51:37)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 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오늘은 좀 주일설교에는 맞지 않는 내용일수도 있고 더군다나 오늘 찬양경연대회를 하는데 은혜롭다기 보다는 좀 심각하고 심판의 말씀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바벨론을 고발하라"입니다. 

오늘은 바벨론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좀 다루려고 합니다. 

그 계기 

- 새벽예배 - 요한계시록 강해 - 심판의 대상이 애굽도 아니고 로마도 아니고 바벨론으로 계속해서 등장.

- 금요일 히브리서 강해- 아브라함  

   아브라함 - 갈대아 우르 지방 - 바벨론 지방에서 끄집어 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 

- 목요일날 오이코스 대학에서 이번학기 강의를 구약개론 - 

첫째 강의는 구약성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 느혜미야를 중심으로 말씀을 모아 집대성하게 되는 때. 

그 이전 까지 구약의 말씀은 구전으로 전해지거나 조각조각 두루마기 형태로 산발적으로 돌아다니던 때 

왜 그들은 그 두루마기를  한데 모아 이른바 성서화 작업을 했을까? 


바벨론으로 인해 나라도 빼았기고 그들의 철떡같이 믿었던 성전이 불태워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다는 그 성전을 바벨론 제국이 불태우고 그안의 모든 거룩한 성전 기구들까지도 빼앗겼기 때문에....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바벨론으로부터 다시금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열망의 모델이 되는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흩어진 말씀들을 모아 "우리가 왜 실패했는가?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 믿는 백성으로 다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반성과 열망에서 성서화 작업 


그러면서 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삼은 아브라함 - 바로 갈대아, 바벨론 지방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아브라함의 사건이 본격적으로 12장에 걸쳐서 나오고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바로 전 사건 11장 - 바벨탑 사건, 물론 바벨탑과 바벨론 제국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별개의 사건이고 국호이지만 결국 바벨탑의 터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터전에 세워진 제국이 바벨론 제국, 그들의 터전과 그 정체가 동일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먼저 바벨탑 사건을 살펴 봅시다. 

[창 11:1-4]

(창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돌대신 벽돌을 역청으로 발라 탑을 쌓는 혁신적인 기술로서 하늘까지 쏫는 탑을 쌓을 계획을 실행해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계획을 막아섭니다. 

[창 11:6-8]

(창 1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창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왜 하나님께서 큰 탑 쌓는 것을 막으셨을까? 

바벨이라는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흩으심으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고 해서 "Kaos- 혼돈, 혼잡"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벨이라는 어원적인 의미는 bab+el (Gate to God) -"하나님께로 가는 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하나님이 다시 물로 세상을 심판해도 심판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힘, 문명을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최초의 역사가라고 할 수있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보면 이 바벨탑의 꼭대기층은 신전이었는데 그곳에는 황금으로 된 니므롯이 서 있었고 그 신전에서는 니므롯과 그 아내 세미라미스, 그리고 그 아들인 담무스를 예배하는 신전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 

유대인들의 전승과 기록을 보면 니므롯은 큰 용사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의 기록을 좀 찾아보면 

[창 10:8-9] 

(창 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창 10: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여기서 "여호와 앞에"라는 말을 유대인 성경- 즉, 토라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against"로 해석합니다. 

그는 홍수로 폐허가 된 땅에서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제공했고, 그의 용감함으로 사람들을 보호하여 그의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창 10:10-창 10:12]

(창 10: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 10: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창 10: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이 구절을 보면 그는 최초의 국가를 세운 왕이며 그 나라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라는 것이지요. 

그의 영토를 보면 바벨탑이 세워지고 바벨론 제국의 터전이 되는 바벨도 들어가 있지만 나중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 나라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을 주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어찌보면 성경 전체의 역사는 이 바벨론 제국과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전쟁의 결과인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제국들은 계속적으로 있어왔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로마.... 그런데 바벨론이 무서운 이유는 

애굽이나 앗수르,로마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핍박했다면 바벨론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나라로 데려가 바벨론의 교육과 문화와 신앙으로 그들을 물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에 취하고 넘어져 헤어나올 수 없는 영적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렘 51:6-렘 51:7]

(렘 51: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복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렘 51:7)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렘 51:45)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라


예레미야에게 하신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는 사도요한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 때는 이미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여 그 흔적만 남은 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 바벨론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계 17:3-계 17:5]

(계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 17: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8:1-계 18:4]

(계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계 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 18: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계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런데 언제 하나님께서 이 바벨론을 심판하시는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그 정한 때는 과연 언제인가? 


[렘 51:34-렘 51:35]

(렘 51: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 51:35)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겉으로는 그가 나를 먹이며 나를 좋은 음식으로 채워 준 것 같지만 그들의 악날함과 음모를 깨달은 자들이 그 왕의 세상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했고, 나를 빈 그릇되게 만들었고 나를 삼켰다. 

나는 그에게 폭행당했다. 난 바벨론에게 학대당했다. 그래서 난 이제 그들을 미워할 것이요, 내가 받은 그 고통이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한다....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할 때.... 부르짖을 때 


[렘 29:10-렘 29:14]

(렘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시 계시록으로 가면 

[계 6:9-10] 

(계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계 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계 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


언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가? 

믿는자들이 바벨론의 정체를 알아 이제 저들을 제발 심판해 달라고... 내가 저들에게 폭행당했다고.... 


그런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울릴 때.... 


바벨론은 어느 나라인가? 

돈으로 소망을 대신하고 

그들의 문화로 천국의 즐거움을 대신하고

그들의 과학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세상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의 신앙까지 무너뜨리는... 


어떻게 그 세상을 이기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하는가? 적당히 살아야 하는가?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그런데 그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된다. 

감옥 속에서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다.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했던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비가 된다. 


세상은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히 11:17-19) 


히브리서 -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주는 말씀. 

당시의 상황- 그들이 당한 처지- 로마의 극심한 핍박과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의 조롱과 핍박, 회유로 인해 모이기를 폐하는 무리가 생겨나는 등 기독교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생겨난 때에. 

히브리 기자의 요지- 지금 공동체 위기의 원인은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상황 때문에 신앙의 어려움이 생긴 것이 아니라 결국 믿음이 없어서다. 


그리고 그 믿음의 정체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의 믿음에서 부터 시작해서 에녹의 믿음, 노아의 믿음을 거쳐 아브라함에게로 이어집니다. 


금요일날 살펴 보았듯이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제사, 삶의 제사를 드립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그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증거합니다. 에녹의 믿음을 나누면서 우리는 므두셀라의 이름의 의미가 "그가 죽는 날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나누고 에녹은 그 이름의 게시를 통해 그 이전의 삶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은 정확히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세상을 심판하셨음을 창세기의 족보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 때에는 아직 이스라엘 공동체가 세워지기 이 전의 시대입니다. 세상은 타락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 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순종했고, 그 열매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히 11:6)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 하면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떠올리며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대인들조차도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의 조상으로 노아도 아니고 실질적인 민족의 조상 야곱도 아니고 아브라함을 그 민족의 시조로 삼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에녹보다, 노아보다 훌륭하기때문에 그러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쪽의 확신이나 신념,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때론 연약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온전한 하나님의 증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는가 하는 믿음의 대 전환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굳센 마음, 확신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의가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지 못했던 자가,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분을 믿지 않을 수 없도록 그를 만들어가실 때에 믿음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믿음은 어떤 자가 믿음을 가져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택하시고 지으셔서 그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아브라함의 형제,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어디서 거주하던 자인가- 갈데아 땅의 우르지방- 바벨론 땅.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우르 지방에 있을 때에 주신 말씀- 그래서 데라와 조카 롯과 사래와 아브라함이 같이 출발. 

그런데 아버지 데라가 죽을 때가지 하란에 머물다가 데라가 죽자 그제서야 비로서 가나안 땅으로 출발. 


오히려 아브라함을 택하사 그가 가나안에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믿음과 인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 까지 모든 상황을 정리하신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데라를 먼저 데려가심으로 아비집을 떠나게 하셨고, 롯의 종과 다툼을 일으켜 그와 헤어지게 하셨다. 


  • (히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약속의 땅에 갔지만 그들의 신분은 외국인, 나그네, 땅을 소유할 수 없다. 그저 빌려서 살 뿐이다. 

아브라함이 소유한 땅은 오직 막벨라 굴- 굉장히 비싼 값을 치루고 그 무덤을 소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런데 그가, 이삭이, 야곱이 믿음을 갖고 그 땅을 떠나지 않고 거했는가? 

무슨 사정만 생기면 그들은 언제든지 떠나려고 했다. 도착하자 마자 기근이 생기자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은 아식과 형 에서를 피해 라반이 거하고 있는 땅으로.... 


그런데 그것을 돌이켜 다시금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이- 하나님- 출애굽을 통해 그것을 완성하신 하나님 . 

누구의 믿음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이 아니라 그곳에 거하도록 참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인내와 경륜. 

어떻게 아브라함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는가? 그들이 의지하는 애굽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믿음으로 사래는 이삭을 낳았는가? 


[창 17:15-19]

(창 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창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창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8:10-15]

(창 18: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 18: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 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온전히 믿었는? 사라가 온전히 믿었는가? 

그들은 웃엇다. 그런데 그 비웃음을 참 웃음으로 바꾸신 이는 하나님 이시다. 

이것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능치 못한 것이 없으신 분- 전능하신 하나님, 내 이성으로, 과학으로, 상식으로, 도저히 안 될 것을 이루신 분. 


[창 21:1-7]

(창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 

(창 21: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 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비로서 순종하는 아브라함) - 아브라함의 순종을 의로 여길 수 있을까?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창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누가 믿곗냐만은 그것이 내게 일어났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다. 경험했다. 하나님은 애굽보다 크고 강하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 분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러면 끝인가? 


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신다. 

왜 시험하실까? 시험은 왜 치나? (그냥 공부하면 좋지 시험은 왜 치나? 공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약 1:2-4]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가 없어서 생긴 결과 - 이스마엘, 사울- 불순종의 예배)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완성시킨다. 끝마치신다. 

무엇을 통해서? 시험을 통해서 


시험이 없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기근이 오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방법대로 이루려 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으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매 번복되는 실패... 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기에... 


  • [히 11:17-19]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 11: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은 아삭이 안 죽을 줄 알고 드렸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다? 

이 시험의 중심은 두가지

 - 외아들을 드리는 것 (가장 귀한 것, 보물 같은...) -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기는 자였고, 이스라엘의 힌놈의 골짜기에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치루어졌던 제사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시험) 

 -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갈등, 충돌.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창 22장 1-2절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 지금까지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그 분의 음성을 들음.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3일길을 가고 

5절 - 종들에게 이르되 여기서 기다리라. 


3절에서 먼저 이삭을 누구에게서 분리 - 사라에게서, 이것을 상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솔로몬의 재판 - 너의 믿음을 위해 네 아들을 죽일 수 있는가? 

                      - 엄마는 못한다. 절대 못 가게 하지... 

                      

 그리고 종들에게서 이삭을 분리 - 왜 데리고 가는가? 제사 할 때 필요한 나무 및 제사 기구들을 위해서 

 그런데 이삭을 바칠 때 그들과 분리 - 갈등을 미연에 방지 

-> 외아들을 바치는 시험 


두 번째 -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의 갈등 - 이삭이 죽기까지 풀 수 없는 문제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절)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절)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왜? 이삭을 통하여 자손을, 민족을 이룬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이건 죽이는 척 한 것일까, 정말 죽이려 한 것일까? 


이 납득이 안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99세 때 나타나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막혔을 때에 그 분의 전능하심으로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 

그 분의 방법을 믿지 못하고 조롱헀던 나를 이삭을 통해 믿게 하시고 진짜 웃음을 주셨던 하나님.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내 모든 이성과 생각과 방법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비로서, 마침내 믿은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십자가의 신앙을 넘어 부활의 신앙을 본 것이다. 


지금까지 우상숭배하며, 늘 머뭇거리고, 비겁하고, 하나님을 비웃으며, 인간적이 방법을 앞세웠던 아브라함이 온전히, 부족함 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그 결과가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창 22:12) ...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곳이 모리아산 - 다윗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 


모든 우상의 제사가 사람으로서, 자식을 바침으로서 드려졌던 그 시대에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믿음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어떤 예배에서도 사람의 제사가 아닌 반대로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이 일어나게 되는 

오직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 이성과 믿음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믿음 - 임마누엘 칸트, 

스피노자 - 성경 안에서의 모든 이적과 신비를 제거

내 한계에서 못 벗어나는 것 

그런데 신앙은 끊임없이 나를 벗어나는 것 


  • 맹신과 신앙 

맹신은 말씀이 기초가 아니고, 자기의 신념에 근거한 맹목적 믿음- 시작이 나에서 시작하고 말씀이 아닌 다른 권위에의 복종 

신앙은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시작 - 영적 분별이 반드시 필요. 


그는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인내와 믿음과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분량에까지 자란 우리 모두의 신앙의 여정의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기      도

 

당신과 만나기 위해 난 꼬불꼬불 꼬여 있는

내 마음의 복잡한 길들을 헤매어야 합니다.

 

가시덤불을 치우고

돌멩이를 거두면서

가장 은밀한 곳, 당신이 앉아 있는 그 방문의 큰 돌 문을

치워야 합니다.

 

내 안의 깊은 돌을 제하지 않으면 난 당신께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한 마디 말도 당신이 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내가 보기 싫어서 내팽개쳤던 그 쓰레기장 같은 찌꺼기들을

난 하나하나 주워 담아야 하고

벌거벗은 내 모습 그대로를

당신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더러웠던

내 마음 가장 깊은 내 모습을

당신은 비로소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냥 사랑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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